전출처 : 하이드 > edward hopper

  • Image Summer Interior
    1909 (100 Kb); Oil on canvas, 24 x 29 inche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 Image Chop Suey
    1929 (130 Kb); Oil on canvas, 32 1/8 x 38 1/8 in; Collection Barney A. Ebsworth
  • Image Hotel Room
    1931 (150 Kb); Oil on canvas, 60 x 65 inches;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 Image New York Movie
    1939 (110 Kb); Oil on canvas, 32 1/4 x 40 1/8 in;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 Image Office at Night
    1940 (120 Kb); Oil on canvas, 22 1/8 x 25 inches; Walker Art Center, Minneapolis, Minnesota
  • Image Summer Evening
    1947 (130 Kb); Oil on canvas, 30 x 42 inches; Collection of Mr. and Mrs. Gilbert H. Kinney
  • Image Rooms by the Sea
    1951 (140 Kb); Oil on canvas, 29 x 40 inches; Yale University Art Gallery, New Haven, Connecticut
  • Image Morning Sun
    1952 (160 Kb); Oil on canvas, 28 1/8 x 40 1/8 inches; Columbus Museum of Art, Ohio
  • Image A Woman in the Sun
    1961 (140 Kb); Oil on canvas, 40 x 60 inche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 Image Sun in an Empty Room
    1963 (160 Kb); Oil on canvas, 28 3/4 x 39 1/2 inches; Private collection
  • Image Chair Car
    1965 (120 Kb); Oil on canvas, 40 x 50 inches; Private collection
  • Image Sunday
    1926 (150 Kb); Oil on canvas, 29 x 34 in; The Phillips Collection, Washington, D.C.
  • Image Drug Store
    1927 (210 Kb); Oil on canvas, 29 x 40 inches; The Museum of Fine Arts, Boston
  • Image Prospect Street, Gloucester
    1928 (180 Kb); Watercolor on paper, 14 x 20 inches; Private collection
  • Image Early Sunday Morning
    1930 (130 Kb); Oil on canvas, 35 x 60 i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 Image The Circle Theatre
    1936 (130 Kb); Oil on canvas, 27 x 36 inches; Private collection
  • Image Gas
    1940 (160 Kb); Oil on canvas, 26 1/4 x 40 1/4 in;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 Image Nighthawks
    1942 (120 Kb); Oil on canvas, 30 x 60 in;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 Image Rooms for Tourists
    1945 (220 Kb); Oil on canvas, 30 x 40 inches; Yale University Art Gallery, New Haven, Connecticut
  • Image El Palacio
    1946 (120 Kb); Watercolor on paper, 20 3/4 x 28 5/8 inche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 Image Pennsylvania Coal Town
    1947 (160 Kb); Oil on canvas, 28 x 40 inches; Butler Institute of American Art, Youngstown, Ohio
  • Image Road in Maine
    1914 (150 Kb); Oil on canvas, 24 x 29 inche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 Image Blackhead, Monhegan
    1916-19 (220 Kb); Oil on wood, 9 3/8 x 13 i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 Image The Mansard Roof
    1923 (240 Kb); Watercolor on paper, 13 3/4 x 19 inches; The Brooklyn Museum, New York
  • More details House by the Railroad
  • Image Light at Two Lights
    1927 (130 Kb); Watercolor on paper, 14 x 20 inches; Collection of Blount, Inc., Montgomery, Alabama
  • Image The Lighthouse at Two Lights
    1929 (130 Kb); Oil on canvas, 29 1/2 x 43 1/4 inche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 Image Corn Hill (Truro, Cape Cod)
    1930 (110 Kb); Oil on canvas, 72.4 x 108 cm (28 1/2 x 42 1/2 in); McNay Art Institute, San Antonio, TX
  • Image Cape Cod Afternoon
    1936 (130 Kb); Oil on canvas, 34 x 50 inches; Museum of Art, Carnegie Institute, Pittsburgh, Pennsylvania
  • http://www.whitney.org/

    Railroad Sunset Hopper to Mid-Century: Highlights from the Permanent Collection

    on continuous view
    Leonard & Evelyn Lauder Galleries, Floor 5
    An entire century of American art can be seen through the rich holdings of the Whitney’s permanent collection. The first half of the exhibition chronicles the development of American art from the exuberant expressions of early twentieth-century realists to later modernist experiments in abstraction. Highlights of the exhibition include a special concentration of Edward Hopper paintings, George Bellows’s boxing masterpiece Dempsey and Firpo (1924), Georgia O’Keeffe’s sexually suggestive abstraction Music—Pink and Blue II (1919), and Joseph Stella’s paean to mechanization, The Brooklyn Bridge: Variation on an Old Theme (1939).



    Edward Hopper, Railroad Sunset, 1929
    Oil on canvas, 29 1/4 x 48 in. (74.3 x 121.9 cm).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Josephine N. Hopper Bequest 70.1170. Photograph by Bill Jacobso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945 Madison Avenue at 75th Street
    New York, NY 10021
    General Information: 1 (800) WHITNEY

     http://www.artic.edu/aic/index.ph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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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y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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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n-stop American Air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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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y 28
    1:02 pm Depart Chicago (ORD)
    Arrive  Philadelphia (PHL) 4:00 pm
    흐으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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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vest Home




     

    우리는 꿈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Written by William Shakespeare


    “그녀”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별다른 얘긴 아니었다. 친구랑 간단히 술 한 잔 하기 위해 외출한다는 내용이었다.

    나 역시  그녀에게 간단한 “주의사항”을 숙지(?)시킨 후, 잘 갔다 오란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이른바 그 한 통의 전화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구속력을 확인하는 “연인들”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 중 하나였다.


    사랑의 본질이 아직도 고린도 전서 13장 9-12절 말씀(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아니 되며.....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에 있다고 믿는 순전한 분들께서는 생각을 좀 달리하시길 바란다.

    하느님 스스로도 자신은 질투하는 하느님이라 하셨으니(이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에 해당되는 모순 어법으로) 고린도 전서 말씀은 한 마디로 개구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라는 것이 솔직한 나의 생각이다.


    사랑은 오래 참을 수도 없고(특히 육체적으로 더욱 그러하다.) 사랑은 온유하지도 않으며, (때로는 매우 뜨겁고, 때로는 매우 차가울 때도 있다.) 사랑은 성내기가 다반사다.(평화기가 너무 오래 지속된다면, 권태기가 아닐까하고 한 번쯤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

    각설하고 즉 사랑에는 구속이 당연히 따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온전한 자유를 포기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이른바 자발적 노예상태에 자신을 기꺼이 놓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단 몇 분간의 그녀와의 짧은 대화로, 나는 그녀에게 아직까지는 확고한 구속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약간의 만족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 후에 커피 한 잔을 마셨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두 서넛 편을 읽었다. 마침 마음에 드는 구절이 몇 개 있는 터라 그녀에게 나중에 읽어주기 위해 갈피를 해 두었다.


    어느덧 권태가 서서히 밀려들어왔고, 난 Sir Roland Hanna의 Apres un reve (꿈꾼 후에)를 듣다 잠이 들고 말았다. “꿈꾼 후에”는  “Les Berceaux(요람)” 과 더불어 가브리엘 포레의 모든 가곡(Lied)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유려한 선율을 가지고 있는 후기 걸작중 하나로 첼로 곡으로도 많이 편곡되어 연주되는 편이다. (시간이 되신다면 미샤 마이스키나 다닐 샤프란의 첼로 독주곡을 반드시 들어보시길 바란다.)

    가곡의 매력이라면 어디까지나 시와 음악의 가장 이상적인 결합으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예술 양식이라는데 있다. 

    즉 가곡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를 띄고 있는 셈이다.

    비록 우리의 사랑이 실제로는 전혀 그러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권태를 수반한 잠에 취해 ‘꼬박꼬박’ 졸고 있던 나는 잠시 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생각엔 꽤나 “푹” 잔 것 같은데 오디오에선 포레의 “꿈꾼 후에”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내가 잠에 취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일종의 시간적 감각을 상실해버리는 이상야릇한 경험을 한 것 때문이었다.

    그녀와의 통화중 난 내가 잠 안자고 목 빠지게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는 주의사항을 남긴 터라 괜스레 미안한 맘이 들었다.

    사실 기다린 게 아니라 잠에 취해 있었다면, 분명 실망을 할 터여서 난 그녀에게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일종의 양심적 보호조치인 셈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친구들과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확인 되었고, 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참으로 유치한 놈이구나!”


    Sir Roland Hanna는 Tommy Flanagan과 더불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성기를 맞았던 디트로이트 재즈를 대표했던 거장으로 본 작에선 Classical하면서도 서정적인 피아니즘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Roland Hanna는 유난히 음주와 마약으로 얼룩진 Jazz계에서도 따뜻한 인간미를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는데, 그의 전작인 Milano, Paris, New York, Finding John Lewis는 위대한 비브라포니스트이자 MJQ의 일원이었던 밀트 잭슨과 존 루이스에게 헌정하는 음반으로써, 후배가 선배에게 경의의 의미로 앨범을 헌정하는 일은 흔히 있지만, 동시대의 연주자가 동료에게 아낌없는 경의와 감사를 표현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의 이름 앞에 붙은 Sir라는 기사작위는 라이베리아에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공연에 대한 보답으로 라이베리아 대통령이었던 William V.S. Tubman에 의해 수여된 것으로, 그 어떤 기사작위보다도 더욱 값진 것이라 하겠다.

     

     

     

     


     <죽여주게 섹시한 비너스 레이블의 앨범 자켓 "제발 가져줘 라는 느낌이랄까!">

     

    특히나 이번 작은 Bach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첼로 대신 베이스의 피치카토 주법으로 창의성 넘치는 표현력과 초절한 테크닉을 선보였던, 베이스의 거장 Ron Carter와 유연하고 리드미컬한 드러밍(Druming)을 들려주는 Grady Tate와 함께 아주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사운드를 창조해 내고 있다.

    게다가 더욱 애틋한 것은 2002년 11월 13일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타계한 Roland Hanna의 마지막 유작이란 점이다.


    난 또다시 Apres un reve(꿈꾼 후에)를 들었다.

     

     


    Dans un sommeil que charmait ton image

    너의 영상이 사로잡았던 꿈속에서


    Je revais le bonheur ardent mirage,

    나는 꿈꾸었네! 신기루 같은 열렬한 행복을,


    Tes yeux etaient plus doux, ta voix pure et sonore,

    너의 두 눈은 마치 극광으로 반짝이는 하늘처럼,


    Tu m'appelais, et je quittais la terre

    너는 나를 불렀지, 그래서 나는 땅을 떠났다


    Pour m'enfuir avec toi vers la lumiere,

    빛을 향하여 너와 함께 도망치기 위해,


    Les cieux pour nous entr'ouvraient leurs nues,

    하늘은 우리를 위해 살며시 열었지 그들의 구름을,


    Splendeurs inconnues, lueurs divines entrevues,

    미지의 찬란함, 살짝 보인 신성한 섬광,


    Helas! Helas! triste reveil des songes

    아아! 꿈에서 슬프게 깨어나다니


    Je t'appelle, o nuit, rends-moi tes mensonges,

    나는 너를 부른다. 오, 밤이여 돌려주렴. 내게 너의 환상을,


    Reviens, reviens radieuse,

    돌아오라 아름다운 이여,


    Reviens o nuit mysterieuse!

    돌아오라 오 신비로운 밤


    늦은 밤 그녀가 별 탈 없이 곱게,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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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쇼스타코비치의 두 얼굴

    언젠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인 올해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대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는 소개 기사를 옮겨온 적이 있는데, 며칠전 교수신문(06. 05. 04)에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에 부쳐'라는 부제를 단 음악비평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이 또한 옮겨온다. 그의 생일은 9월에 있으므로 가을에야 보다 성대한 기념행사들이 개최될 듯하지만, 미리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기사를 가끔씩 읽어보기로 한다. 클래식 음악에는 문외한에 가까운지라 대개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옮여오는 식이 될 것이다. 이번 기사는 허영한 한예종 교수가 기고한 것으로 '冷戰은 그의 음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가 그 타이틀이다.

    -레닌과 스탈린, 흐루시초프의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드미트리히(*'드미트리'가 맞다)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격변하는 20세기의 세계사와 소련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된 흥미로운 주인공이다. 조연급이면 피할 수 있었던 비난의 초점이 됐고 그를 사이에 둔 소련과 서방세계의 지속적인 갈등은 지금까지도 많은 음악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쇼스타코비치가 진정으로 소련 공산당의 충실한 당원이었는지 아니면 겉으로만 그렇게 행세를 한 것인지의 문제다. 절묘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작곡가 자신은 아무런 답을 남기지 않았다. 공식석상에서 자아비판을 하면서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애국지사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어쩌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듯한 수많은 암시를 흘리고 있었다.

    -교향곡 1번(1925)으로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소련이 최고로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긴 쇼스타코비치에게 위기가 오기 시작한 건 그의 오페라 <맥베스 부인> 때문이었다(*얼마전 이 오페라의 원작인 레스코프의 <므첸스크군의 멕베스 부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1934년에 초연됐던 이 오페라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 다시 무대에 오른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러 온 스탈린의 말 한마디에 그토록 사랑받던 오페라가 순식간에 비판의 초점이 됐다. 1936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위기를 넘기게 한 작품이 바로 지금도 가장 자주 연주되는 교향곡 제5번이다. 이 교향곡이 1937년에 초연된 그 날 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교향곡이 감격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소련 최고의 작곡가로 복권된 그는 1938년 신문과 인터뷰에서 “교향곡 5번이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응답이라고들 하니 매우 기쁘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잘못을 반성했다고 보기에는 충분치 못한 답변이었다.

     

     

     

    -교향곡 5번에 ‘정당한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 다닌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악장 피날레는 다소 급격하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급전되면서 활발하고 밝은 분위기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분위기의 급변과 체제 순응적인 쇼스타코비치를 연결지으려한다. 긍정주의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러한 피날레를 만들어 넣어 정부의 비난을 피하려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다소 인위적인 미학적 잣대를 내세워 서방세계의 음악계가 추구하던 모더니즘을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는 바로 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비판을 받았고 그보다 다소 쉬운 음악적 내용을 지닌 교향곡 5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현한 작품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음악은 소리라는 추상적 매체를 사용하는 장르여서 가사를 사용하지 않는 한 그 구체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사가 없는 순수 기악음악의 경우 아무리 구체적 내용이 명시된 표제음악이라 하더라도 그 제목과 달리 감상되고 해석되어질 여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작곡가의 직접 언급이 중요해진다. 다시 말해서 작곡가가 직접 이 곡은 강이다, 또는 이 선율은 나무다, 라고 말하지 않는 한 작곡가가 진정으로 담으려고 한 내용을 짐작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해석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5번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 곡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과 자신의 의견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말하자면 “당신들이 이 곡이 이러하다고 하니 나는 기쁘다” 정도에서 멈춘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내용으로만 이해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이러한 태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15번은 천박하기까지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의 선율이 등장하는가하면 엄숙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사용된 ‘운명’ 모티브까지 나온다. 사람들은 이 희한한 조합에서 의미를 찾느라 부산했지만 정작 작곡가는 이 곡의 특별한 내용의 존재를 부인했고 단순히 ‘장난감 가게’와 같은 분위기라는 설명만 제공했다. 또 한번 그의 알다가도 모를 작품 해설(?)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이번에는 다소 다른 예를 들어보자. 대표적인 전쟁 교향곡인 교향곡 7번은 흥미있는 일화와 함께 순수 기악음악으로도 일정한 구체적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나치군이 소련을 침략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곧바로 군에 지원하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지붕을 지키는 소방부대에 편입된다. 소방 모자를 쓰고 지붕을 지키는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소련의 거의 모든 신문에 실렸고 서방 언론에서도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변신한 작곡가의 모습을 흥미롭게 다뤘다. 같은 해 8월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피난을 떠났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남아서 그의 교향곡 7번의 일부를 완성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직접 이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사태가 위태로워지자 당 지도부는 레닌그라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이번에는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교향곡 7번에 대해서 작곡자는 긴 내용의 줄거리를 직접 밝히고 있어 그 내용의 해석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받는 레닌그라드 도시와 소련 동포를 묘사하는 1악장으로 시작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4악장으로 끝나는 교향곡이라는 것이 작곡자의 변이었다. 비록 가사는 없지만 작곡자의 설명이 수긍이 가는 음악적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생애 말년에 이 교향곡이 레닌그라드가 포위되기 전에 이미 구상됐고 성경의 94번 시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교향곡에서 전쟁 분위기를 피하기는 어렵다. 행진곡 풍의 리듬과 북소리는 전쟁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쇼스타코비치를 철저하게 체제 순응적인 작곡가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에 그처럼 극적으로 작곡된 교향곡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스탈린 사후, 쇼스타코비치가 선보인 첫 작품이 프로그램이 없는 교향곡 10번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곡을 작곡할 무렵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학생이었던 24살의 피아노연주자 엘미라 나지로바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녀의 이름 ‘엘미라’로부터 이끌어낸 선율 동기(미-라-미-레-라)와 작곡자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나온 선율 동기(D-Es-C-H/우리말 음이름으로 옮기면 레-미b-도-시)를 서로 얽혀 놓고 있다. 교향곡 10번은 다시 한번 비평가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정치적 상황이 변해가고 있음을 감지한 쇼스타코비치는 평소와는 달리 강력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폈다. 그러나 결국 1954년 4월 초에 열린 작곡가 연맹 대회에서 이 불필요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듯이 작곡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며 “이 작품에서 나는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끝맺는다. 이 교향곡은 어떤 정치적 해석도 어려워 보인다. 극히 사적인 쇼스타코비치만이 존재하며 이 점을 그는 반성해야만 했다.

    -그의 정치적 정체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의 교향곡을 해석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체제 순응 작곡가였다면 그의 교향곡은 철저하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해석되고 그렇지 않다면 부당한 정부의 압력에 대항한 서구식으로 위대한 작곡가가 되기 때문이다. 20세기 서방세계의 음악관은 철저하게 미학적 자율성을 중시했기에 미학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의 배경은 쇼스타코비치의 진정성과는 다소 거리가 먼 당시로서는, 또 어쩌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냉전 시대적 대결 구조다. 쇼스타코비치를 소련의 작곡가로 보려는 세력과 그를 서방 세계의 작곡가로 보려는 세력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암투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다. 분명한 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 양면성 중 한 면을 강조하며 자기편으로 유도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그 양면을 모두 진정한 쇼스타코비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06. 05. 08.

     

     

     

     

    P.S.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게 쇼스타코비치의 평전인데, 국내에는 아직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이론과실천, 2001)밖에 나와 있는 책이 없다(진의성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받고 있는 책이다). 유력한 평전(들)이 조만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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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동지에게/체 게바라

     
      동지에게 (미래의 착취자가 될 지도 모르는)                    

    지금까지나는 나의 동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
    결코 적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늘 다시 이 총대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내가 동지들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것을 맹세했었다

    하지만그 맹세가

    나 둘씩 무너져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도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누군들 힘겹고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별빛 같은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그것을 우리 어찌

    세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대들이 떠나 어느 자리에 있든
    이 하나만은 꼭 약속해다오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한 줌도 안되는 독재와 제국주의의 착취자처럼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은 없게 해다오

    그대들 스스로를 비참하게는 하지 말아다오
    나는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슬픔만큼은 참을 수가 없구나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빈 산은 너무 넓구나
    밤하늘의 별들이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나무들도 여전히 저렇게 제 자리에 있는데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산은 너무 적막하구나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

    근래들어 가장 바쁜 어제였다.왔다 갔다 하면서 뉴스로 중계되는 대추리 만행을 보았다.저녘 뉴스시간에 TV를 보고.....코 끝이 찡하고 ...한숨이 나오고...답답했다.군인들 참 일도 잘하더군.주황색 체육복 입고 어찌나 빨리 철조망을 가설하는지..전경들도 참 열심히 쳐들어가고....

    얼마나 순진했는가? 자신들이 모시던 몇 몇 의장님과 선배들을 여의도에 보내주면 달라져도 뭐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던 나의 현실적(?)인 대학선배님들은....그들을 믿어보자던 마음 착한 선배님들은...지금 어디서 저 화면을 보고 있을까...

    어린이 날인데 회사에 나왔지만 그것 보다 하늘은 더 답답하다....

    나 정말 따뜻한 나라로 이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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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존 업다이크의 신작

     

     

     

     

     

     

    조선일보 미디어리뷰를 알라딘에서 찾아보다 발견.  [내 얼굴을 찾으라]

     

    버몬트 주에 은둔한 79세의 노화가 호프 샤페즈가 뉴욕에서 온 젊고 야심에 찬 잡지사 기자인 캐스린 디'안젤로와 하루 동안의 긴 인터뷰를 한다는 형식을 지닌 존 업다이크의 20번째 소설은 그 틀 안에 과거 미국이 세계의 미술계를 주도하던 때를 포획하겠다는 거대한 시도를 담고 있다. 추상 표현주의와 팝아트, 그리고 다른 예술의 '형식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 Publishers Weekly

     

    <내 얼굴을 찾으라>에서 호프의 첫 번째 남편 잭 맥코이의 모델은 미국 추상 표현주의의 대가인 잭슨 폴록리 밀러(?)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남편 가이 할로웨이는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클레스 올덴버그, 웨인 티보 등을 혼합해 놓은 인물이다. 작가는 느리면서도 화려한 문장으로 복잡하게 얽힌 인문들 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억지스러운 성격묘사에 치중하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주요한 미술계의 문제, 역사적 사실 등을 포개놓았다. - Regina Marler

     

    작가는 소설의 상당부분을 잭슨 폴록 연구서와 추상 표현주의 명화집에 기대고 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피카소는 별로다, 너무 쉽게 너무 많은 것을 해낸다. 마티스는 괜찮다, 모든 것에 외적인 절제가 있고 노력을 통해 달성하며, 검소한 부르주아다. 피카소는 집시고, 강도고, 볼셰비키다.’(50쪽)

    잭은 그림이 꾸며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해서 지저분하거나 깨진 유리잔을 물감이 아직 마르지도 않는 캔버스에 던지거나, 더러운 신발로 캔버스 위를 걸어다니기도 했다.’(76쪽)

    -조선일보 미디어 리뷰 중

    잭슨 폴록

    1912년 1월 28일 와이오밍 주()에서 출생하였다.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대 무렵부터 표현주의를 거쳐 추상화로 전향하였으며, 구겐하임 부인과 비평가 그린버그의 후원을 받아 격렬한 필치를 거듭하는 추상화를 창출하였다. 1947년 마룻바닥에 편 화포()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하여 하루아침에 명성을 떨쳤다. 그것은 떨어뜨린 도료()의 궤적()을 거듭하여 화면의 밀도를 높여 감과 동시에 작가의 다이내믹한 제작행위를 직접 화포에 기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액션페인팅이라 불리게 되었다. 세계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모나리자 스마일]에도 나온  Lavender  Mist

     


    액션 페인팅 중인 폴록.



    크리스 올덴버그 (Claes가 어찌하여 크리스인지..?)

    올덴버그 [Oldenburg, Claes Thure, 1929.1.28~]

     팝 아트의 대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외교관인 아버지의 권유로 도미하여 예일대학과 시카고미술연구소에서 수학하였다. 1959년 최초의 개인전을 뉴욕에서 갖고, 1950년 말부터 1960년대 초에 오브제(objet)가 관객과 일상적 환경 속에서 전개하는 일련의 충격적인 작품을 시도하였다.

    그의 조각 작품들은 석고로 형체를 본떠서 극채색()의 에나멜을 칠한 햄버거나 핫도그 등으로, 그는 식품 오브제를 모의 식품점에 전시하기도 하였다.

    일상의 오브제를 거대하게 확대하여 관객의 심리에 충격을 준다든지, 전기청소기나 선풍기 등의 경질기계제품을 부드러운 천이나 비닐로 모조한 해학적 작품을 전시하는 등의 발상은 그의 일관된 방법론이다.

    1960년대 말경부터는 오브제를 거대한 모뉴먼트로서 도시 공간에 설치하는 데생과 구상을 발표하였다.

     


    담배 꽁초

     

     

    Spoon Bridge

     

     

    웨인 티보 Wayne Thiebaud 

     


    woman in tub

     

     

     



    Around the Cake

     

     


    등을 보이고 앉은 남자

     

     

    로이 리히텐슈타인

    리히텐슈타인 [Lichtenstein, Roy, 1923.10.27~1997.9.29] 

     

    뉴욕 출생. 팝 아트의 대표자이다. 1960년대 초 미국의 대중적인 만화를 주제로 인쇄의 망점(:dot)까지 그려넣어 만화의 이미지를 확대한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를 매스미디어 방법에 준하여 묘사한 전형적인 팝 아티스트로 평가받았다.

    1970년대가 되자 주제가 확대되어 고대 그리스의 신전건축과 정물화 등으로부터 피카소와 레제, 그리고 미래주의 등 모던 아트의 명작에까지 미쳤고, 그 표현방법은 인쇄미디어를 의제()한 망점이나 사선이 전개되어 추상적인 구상에 접근하였다. 청동이나 철판에 에나멜로 채색한 조각도 다루었다.


     

     

     

     

     

    앤디 워홀
    워홀 [Warhol, Andy, 1928.8.6~1987.2.22]

    1928년 8월 6일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였다. 피츠버그의 카네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경부터 뉴욕에서 상업디자이너로 활약하다가 화가가 되었다. 1962년 시드니 재니스화랑에서 열린 ‘뉴리얼리스트전()’에 출품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고 그 후 만화의 한 컷, 신문보도 사진의 한 장면, 영화배우의 브로마이드 등 매스미디어의 매체를 실크스크린으로 캔버스에 전사() 확대하는 수법으로 현대의 대량소비문화를 찬미하는 동시에 비판하여 이름을 떨쳤다.

    1963년부터는 《슬립》 《엠파이어》 등 실험영화제작에 힘쓰고, 상업영화에 손대는가 하면 소설도 출판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여 1960년대 미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1994년 9월,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팝아트전이 개최되었다. 주요저서에 《1970년대의 조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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