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vest Home
우리는 꿈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Written by William Shakespeare
“그녀”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별다른 얘긴 아니었다. 친구랑 간단히 술 한 잔 하기 위해 외출한다는 내용이었다.
나 역시 그녀에게 간단한 “주의사항”을 숙지(?)시킨 후, 잘 갔다 오란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이른바 그 한 통의 전화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구속력을 확인하는 “연인들”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 중 하나였다.
사랑의 본질이 아직도 고린도 전서 13장 9-12절 말씀(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아니 되며.....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에 있다고 믿는 순전한 분들께서는 생각을 좀 달리하시길 바란다.
하느님 스스로도 자신은 질투하는 하느님이라 하셨으니(이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에 해당되는 모순 어법으로) 고린도 전서 말씀은 한 마디로 개구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라는 것이 솔직한 나의 생각이다.
사랑은 오래 참을 수도 없고(특히 육체적으로 더욱 그러하다.) 사랑은 온유하지도 않으며, (때로는 매우 뜨겁고, 때로는 매우 차가울 때도 있다.) 사랑은 성내기가 다반사다.(평화기가 너무 오래 지속된다면, 권태기가 아닐까하고 한 번쯤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
각설하고 즉 사랑에는 구속이 당연히 따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온전한 자유를 포기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이른바 자발적 노예상태에 자신을 기꺼이 놓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단 몇 분간의 그녀와의 짧은 대화로, 나는 그녀에게 아직까지는 확고한 구속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약간의 만족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 후에 커피 한 잔을 마셨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두 서넛 편을 읽었다. 마침 마음에 드는 구절이 몇 개 있는 터라 그녀에게 나중에 읽어주기 위해 갈피를 해 두었다.
어느덧 권태가 서서히 밀려들어왔고, 난 Sir Roland Hanna의 Apres un reve (꿈꾼 후에)를 듣다 잠이 들고 말았다. “꿈꾼 후에”는 “Les Berceaux(요람)” 과 더불어 가브리엘 포레의 모든 가곡(Lied)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유려한 선율을 가지고 있는 후기 걸작중 하나로 첼로 곡으로도 많이 편곡되어 연주되는 편이다. (시간이 되신다면 미샤 마이스키나 다닐 샤프란의 첼로 독주곡을 반드시 들어보시길 바란다.)
가곡의 매력이라면 어디까지나 시와 음악의 가장 이상적인 결합으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예술 양식이라는데 있다.
즉 가곡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를 띄고 있는 셈이다.
비록 우리의 사랑이 실제로는 전혀 그러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권태를 수반한 잠에 취해 ‘꼬박꼬박’ 졸고 있던 나는 잠시 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생각엔 꽤나 “푹” 잔 것 같은데 오디오에선 포레의 “꿈꾼 후에”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내가 잠에 취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일종의 시간적 감각을 상실해버리는 이상야릇한 경험을 한 것 때문이었다.
그녀와의 통화중 난 내가 잠 안자고 목 빠지게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는 주의사항을 남긴 터라 괜스레 미안한 맘이 들었다.
사실 기다린 게 아니라 잠에 취해 있었다면, 분명 실망을 할 터여서 난 그녀에게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일종의 양심적 보호조치인 셈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친구들과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확인 되었고, 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참으로 유치한 놈이구나!”
Sir Roland Hanna는 Tommy Flanagan과 더불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성기를 맞았던 디트로이트 재즈를 대표했던 거장으로 본 작에선 Classical하면서도 서정적인 피아니즘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Roland Hanna는 유난히 음주와 마약으로 얼룩진 Jazz계에서도 따뜻한 인간미를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는데, 그의 전작인 Milano, Paris, New York, Finding John Lewis는 위대한 비브라포니스트이자 MJQ의 일원이었던 밀트 잭슨과 존 루이스에게 헌정하는 음반으로써, 후배가 선배에게 경의의 의미로 앨범을 헌정하는 일은 흔히 있지만, 동시대의 연주자가 동료에게 아낌없는 경의와 감사를 표현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의 이름 앞에 붙은 Sir라는 기사작위는 라이베리아에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공연에 대한 보답으로 라이베리아 대통령이었던 William V.S. Tubman에 의해 수여된 것으로, 그 어떤 기사작위보다도 더욱 값진 것이라 하겠다.

<죽여주게 섹시한 비너스 레이블의 앨범 자켓 "제발 가져줘 라는 느낌이랄까!">
특히나 이번 작은 Bach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첼로 대신 베이스의 피치카토 주법으로 창의성 넘치는 표현력과 초절한 테크닉을 선보였던, 베이스의 거장 Ron Carter와 유연하고 리드미컬한 드러밍(Druming)을 들려주는 Grady Tate와 함께 아주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사운드를 창조해 내고 있다.
게다가 더욱 애틋한 것은 2002년 11월 13일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타계한 Roland Hanna의 마지막 유작이란 점이다.
난 또다시 Apres un reve(꿈꾼 후에)를 들었다.
Dans un sommeil que charmait ton image
너의 영상이 사로잡았던 꿈속에서
Je revais le bonheur ardent mirage,
나는 꿈꾸었네! 신기루 같은 열렬한 행복을,
Tes yeux etaient plus doux, ta voix pure et sonore,
너의 두 눈은 마치 극광으로 반짝이는 하늘처럼,
Tu m'appelais, et je quittais la terre
너는 나를 불렀지, 그래서 나는 땅을 떠났다
Pour m'enfuir avec toi vers la lumiere,
빛을 향하여 너와 함께 도망치기 위해,
Les cieux pour nous entr'ouvraient leurs nues,
하늘은 우리를 위해 살며시 열었지 그들의 구름을,
Splendeurs inconnues, lueurs divines entrevues,
미지의 찬란함, 살짝 보인 신성한 섬광,
Helas! Helas! triste reveil des songes
아아! 꿈에서 슬프게 깨어나다니
Je t'appelle, o nuit, rends-moi tes mensonges,
나는 너를 부른다. 오, 밤이여 돌려주렴. 내게 너의 환상을,
Reviens, reviens radieuse,
돌아오라 아름다운 이여,
Reviens o nuit mysterieuse!
돌아오라 오 신비로운 밤
늦은 밤 그녀가 별 탈 없이 곱게,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