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지다/ Malo 3집"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결국 세계는 한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처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계는 한 장의 아름다운 음반에 이르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라는 말도 그리 지나친 언사는 아니라고 본다.


비록 첼리비다케의 말(레코드를 듣는 것은 브리지트 바르도의 그림을 들고 잠자리에 드는 것과 같다.)을 빌리지 않더라도 음악을 듣는데 있어서 직접 연주회장이나 공연장을 찾는 것 이상의 것은 없지만, 감상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듣고 싶을 때 언제든지 들을 수 있고 혹은 각자의 경험과 결합되어 멋진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음반의 매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주 급할땐 바로 현금화 할 수 있다는 매력도 무시 못한다. ) 또한 창작자의 입장에서 음반은 자신의 음악적 창조물의 기록일 뿐 아니라 존재의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는 보물과도 같다.


근래에 소규모 재즈클럽이나 대학로, 혹은 여러 Jazz Festival을 통해 국내 재즈 연주자의 공연은 그리 적지 않은 편이지만, 국내 재즈 연주자의 음반은 정말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희귀한 편이다. 음반 매장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인터넷 음반 사이트에서도 Korean Jazz는 검색목록에 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국내 연주자의 음반이 매우 희귀한 현상에는 국내 재즈계의 일천한 역사와 문화저변으로 인한 것이 크지만, 재즈 아티스트들과 비평과 평론을 담당하는 이른바 “업계”의 게으름도 크게 한 몫 한 결과라 하겠다. 국내 서점 그 어디에도 한국 재즈에 관한 단 한권의 책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들이 단지 국내의 일천한 재즈 저변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는 현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문화적 상품이 지속적으로 소비되기 위해서는 그 선호를 계속 유지하고, 확대되어 질 수 있는 깊이 있는 정보와 이론이 뒷받침 되어야만 하지만 국내의 재즈 “업계”는 이를 매우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한국의 재즈 저변이 동호회나 클럽을 통해서 조금씩 확대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국내 재즈의 관심으로 이어질지 의문시 되는 점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장에서 소비자의 구매의사결정에는 그 제품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와 평가가 필수적인데 반해 국내 재즈업계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탐색 정보마저 제공하고 있지 않으니, 음반이 팔리려야 팔릴 수가 없는 것이다.


더 말해봐야 갑갑하기 때문에... 각설하고

 




<피아노가 된 나무/ 임인건>


1988년 재즈 클럽 야누스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본격적인 재즈 연주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임인건이 무려 12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솔로 음반을 하나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현실은 갑갑한 우리 재즈의 현주소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존 듀이는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작가는 자아와 대상사이의 온전하고 생생한 경험을 통해 예술을 표현하며, 관객은 작가의 창조물을 통해 예술적 열정, 에너지를 함께 교감함으로써 예술을 비로소 구현해 낸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작가와 관객이 동일한 문화권에 동일한 언어, 동일한 체험을 공유하고 있다면 보다 깊이 있는 이해가 더욱 쉽지 않을까?


임인건 자신이 우리의 국토를 여행하면서 얻은 악상으로 작곡된 곡으로 가득한 이번 음반은 아름다운 선율과 맑고 순수한 서정성을 무기로 일단 대중과의 교감의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 성공한 듯싶다. 하지만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강요된(?)선택으로 인해 Jazz 도 New Age도 아닌 다소 어정쩡한 위치에 이 음반을 놓이게 하고 말았다.


난 그의 이번 음반 중 “별 보는 밤”을 유난히 좋아하는 데, 한 밤 가만히 누워 그가 짚어내는 음들을 따라가다 보면, 알퐁스 도데의 “별”의 마지막 구절이 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따금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곤 했다. 저 수 많은 별들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지친 나머지, 내 어깨에 고이 잠들어 있노라고...”

 





Afterhours에서 500매 한정으로 판매되어 어렵게 구한 앨범에는


이사야 서 6장 9절 말씀이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볼 테면 보란 듯이  버젓이 이런 구절을 써놓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어야 할까?

난 순간 이렇게 느꼈다.


“이런 XXX할 발칙한 년, 놈들을 봤나!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이거냐? 아예 입 쳐 닫고 듣기만 하라는 거야? 뭐야!”


내 경험상 Free Jazz라는 것은 많이 안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저 딱 듣는 순간에 Feel이 딱 꽂히면 그걸로 된 것이지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이 음반 자체도 그렇게 복잡한 형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괜히 형이상학적인 뭔가가 있으려니 하고 집중해서 듣다보면 결국엔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쑤이다.


강태환(alto saxophone), 미연(piano), 박재천(percussion) 이 세 사람의 트리오는 무악보에 아무런 사전 약속 없이 즉흥연주만으로 50분이라는 길다면 상당히 길 수 있는 시간을 때워(?)나가고 있는데, 오랜 시간동안 서로 호흡을 맞추어가며 갈고 닦은 유기적인 인터플레이와 다양한 연주기법을 갖추지 못했다면 시도조차 힘든 일임은 분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무악보, 무약속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즉흥연주는 공연장이나 당시 관객의 몰입도와 분위기, 연주자의 감성에 따라 직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측 불가능한 것이기에 당시의 연주가 어떠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연주자 자신도 확언하기 힘든 일이다. 바로 거기에 프리재즈의 매력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굳이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굳이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노자의 도덕경의 한 구절을 살며시 읊어주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 사실 나도 뭔 소린지 몰러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당신에게 설명을 바라며 귀찮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헤라클리토스의 유명한 명제를 다시한번 읊어주는 거다.  (너무나 사악한 나 흐흐)


“우리는 동일한 강물에 몸을 두 번 적실 수 없다.”

프리재즈를 듣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보다도 실험성이니 전위성이니 하는 프리재즈에 붙여진 기괴한 선입견을 과감히 떼고서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들어보는 거다. 그럼 그 안에 담겨진 무한한 소리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音樂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음을 즐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한국일보 신문에 그녀의 기사를 보았다. 기사의 전문을 잠시 실어보자면...


왜 딴따라 음악을 하느냐?” 피아니스트 송영주(32)가 재즈에 안착하기까지는 녹록하지 않았다.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으니 거기 안착할 것이라는 부모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 대가라면 대가다.


숙명여대 음대를 졸업한 뒤 본격 재즈 공부를 위해 유학 가는 데 골몰해 있던 딸을 보다 못 한 어머니는 그렇게 쏘아 붙였다. 2003년 맨해튼음대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까지 온 어머니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당시 출연 중이던 클럽 포스터스(Poster’s)에까지 모친을 데려 갔던 게 실수였다.


“네 음악이 술집 음악이냐? 이럴 줄 알았으면 유학 안 보냈을 거다.” 지청구를 듣다 못 한 그는 “재즈도 클래식처럼 자기 문화가 있다”며 버텼다.


이것이 한국 재즈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가장 서글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Turning Point라는 타이틀 곡명이 더욱 비장하게 와 닿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음반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곡을 하나 찾아보라면,

Prayer In the Day's End를 들 수 있는데 오랫동안 CCM계의 반주자로서 유명했던 그녀의 진가가 잘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 가스펠적 요소가 잘 담겨있는 곡으로 평온하면서도 아늑한 멜로디의 진행과, 조용하면서도 섬세한 피아노 터치가 더할 나이 없이 감미롭다. 하루의 끝을 마감하며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는 그녀의 기도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끔 해준다.


근래에 발매된 한국 재즈의 경향을 가만히 살펴보면, 곽윤찬, 임인건, 송영주, 여진, Malo에 이르기까지 자작곡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데, 그건 한국 재즈가 나름대로의 자생력을 서서히 갖추어 나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변화로 보고 싶다. 어차피 흑인 특유의 리듬감, 스윙감, 임프로바이제이션을 따라갈 수 없다면, 우리만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음악적 언어인 작곡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유러피언 재즈가 그들이 쌓아온 광대한 클래식적 전통에서 그들이 나아가야할 바른 방향성을 정립했다면, 우리의 올바른 방향성은 바로 우리만의 정서에 충실한 작곡에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벚꽃지다/ Malo>


순수한 Jazz 음반으로 평가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것도 사실이지만, Jazz 다, Jazz가 아니다를 떠나 이번 음반은 “정말로” 많은 매력이 담겨져 있다. 한국의 토속적 정서를 잘 표현한 선율과 멜로디, 정말 깊게 생각하고 쓴 시적인 가사들(요즘 가요를 보면 마치 “발”로 쓴 듯 한 가사가 너무 넘치는데 제발 좀 생각 좀 하고 가사 쓰자 응? 특히 월드컵 가수 미나랑 동방신기들아)


‘벚꽃지다’의 가사를 실어본다.

 

꽃잎 떨어지네 햇살 속으로

한세상 음 지네 슬픔 날리네

눈부신 날들 가네 잠시 머물다 가네

꽃그늘 아래 맑은 웃음들 모두 어디로 갔나


바람 손잡고 꽃잎 날리네

오지 못할 날들이 가네

바람길 따라 꽃잎 날리네

눈부신 슬픔들이 지네

언제였던가. 꽃피던 날이

한나절 음 웃다 고개 들어 보니

눈부신 꽃잎 날려 잠시 빛나다 지네

꽃보다 아름다운 얼굴들 모두 어디로 갔나



바람 손잡고 꽃잎 날리네

오지 못할 날들이 가네

바람길따가 꽃잎 날리네

눈부신 슬픔들이 지네

 

그녀의 2집 앨범 Time For Truth가 발매되지도 못하고 사장되었다는 점에서 그녀가 이른 바 “대중성”이란 요소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겠지만, 그녀의 이런 “대중성” 시도는 최소한 나에게만은 매우 성공적인 듯싶다.

 




우리나라의 악기교육이 몇몇 소수의 악기(피아노, 현악기)에 편중되어 있는 터라 고전음악부문에 있어서도 바그너, 브루크너, 말러 등 Brass band의 역할이 두드러져야 하는 후기 낭만파 음악의 연주에는 다소 쥐약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Jazz에 있어서도 Piano Trio음반이 유난히 많이 발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화끈하면서도 광폭한 열정이 느껴지는 브라스 밴드만으로 이루어진 한국 JAZZ 음반을 과연 언제쯤 들을 수 있을 것인지...


그런 의미에서 임달균 퀸텟의 이번 음반은 무지 반갑다.

Trumpet과 Saxophone을 전면에 앞세운 이번 편성은 금관악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쌍수 들고 반길 일임에는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임달균 퀸텟의 이번 음반도 자작곡 비율이 상당히 높은데, 그 중에서 Letter From Busan 이란 곡은 임달균이 연주차 부산에 내려갔을 때 얻은 영감으로 쓰인 곡으로 아마도 그가 느낀 부산은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고 활달한 젊은이의 모습이었나 보다. 내가 느낀 부산은 그가 느낀 부산과는 조금 달랐는데 말이다.


임달균과 데런 베넷의 2관의 멜로디 라인과 베이스, 드럼, 피아노의 리듬 섹션이 멋들어지게 맞물려 들어가면서 화끈하고도 열정적인 비밥 특유의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한국 재즈음반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정통 재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만족할 만한 음반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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