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잠을 잤던 밤들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오로지 눈 한번 붙이지 못한 밤들 만이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다.
밤은 뜬 눈으로 지샌 밤만을 뜻한다.
written by Emile Cioran

<Giovanni Mirabassi: Avanti!>
“적과 흑”으로 대비되는 강렬한 색감의 앨범 재킷과 전 세계의 혁명, 투쟁, 반전가에 관련된 상세한 해설노트와 사진은 자칫 이 음반을 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만 오해하게끔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피아노 솔로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그는 오히려 강한 정치적 메시지보다는 상실해버린 열정에의 Nostalgia를 노래하고자 한 느낌이다. 이 음반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곡인 Hasta Siempre는 Carlos Puebla가 쿠바혁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제 2의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로 떠나는 체 게바라에게 헌정한 노래이다. 미라바씨의 편곡은 원곡에 비해 비장미가 철철 넘치는데, 이는 당시엔 알지 못했던 체 게바라의 운명을 우린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바로 가야할 길로 가고자했던 수많은 혁명과 변화에의 요구가 동지들의 배신으로 서서히 침식되어 어느새 전몰해버린 오늘날의 현실과도 같이 말이다. 별빛 가득한 타국에서의 밤! 동지와의 뜨거웠던 맹세가 하나 둘씩 무너져 버릴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는 가슴 저리는 슬픔을 얘기하던(체 게바라의 시 “동지에게” 중에서) 체게바라의 눈물처럼 미라바씨는 우리의 잃어버린 열정에 관해 노래한다.

<Sarah Vaughan: Crazy and Mixed up>
지속적인 흡연으로 더욱 성숙해진(?) 사라 본의 강렬한 흡입력을 느낄 수 있는 음반이다. 지옥의 업화처럼 저음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역시나 “지독한 골초군!”하며 탄성이 절로 나오게끔 만든다. 목소리의 장막 뒤로 간간히 이어지는 피아노의 영롱한 음색과 간결한 터치가 눈에 띄어 앨범 북클릿을 찾아보니 “헐! 역시 Sir Roland Hanna다!” 거기다 기타엔 virtuoso “Joe Pass" 이 정도였던가. Line-up이! 역시나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경이적인 음반이다.

<Night Light: Gerry Mulligan>
전혜린의 “회색빛 鋪道와 레몬빛 가스등”이란 에세이가 떠오르는 Westcoast Jazz의 진수이다.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족 사이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등 긴 막대기를 사용하면서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전혜린의 회색빛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 중에서
특히 Prelude in E minor는 쇼팽의 Prelude OP.28 No4. IN E Minor를 보사노바 풍으로 멋지게 편곡해 낸 곡으로 이 음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달리 고향이라고 말할 것이 없는 아스팔트 킨트(Asphalt-Kind: 아스팔트만 보고 자란 도회의 고향 없는 아이들)에게 고향이란 한없이 펼쳐진 회색빛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 사이 저 너머에 있지 않을까?

<Nina Simone: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그녀만의 콘트랄토 보이스(Contralto Voice)는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남자로 착각하게 된다. 저음의 끈끈하면서도 토속적인 음색과 마치 잔뜩 취한 술주정뱅이의 읊조리는듯한 음성은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의 음성만큼이나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재즈사에서 그녀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 또한 그럴 것이다. 재즈 보컬로서 그녀의 위치는 다소 어정쩡한 것도 사실인데, 그것은 그녀가 단지 Jazz에만 국한된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Jazz 뿐 아니라 블루스, 가스펠, 프렌치 포크에 이르기까지 아니 어떻게 보면 그녀는 Jazz 보컬이라기보다는 블루스 가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 음반에 실린 첫 곡 “Don't Let Me Be Misunderstood”는 그런 의미에서 니나 시몬의 솔직한 고백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니나 시몬 그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여주길 바라는 그녀의 당당한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반드시 들어봐야 할 곡으로 Ne Me Quitte Pas(If you go away)를 들 수 있는데, 정말 처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곡으로 “늙은 창녀의 간절한 고백”과 같은 느낌이라 하겠다.

<Heartbreak: Chet Baker>
My Funny Valentine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쳇 베이커의 수많은 “마약 구입 자금마련”으로 기획된 음반 중 하나이다. 여성의 모성을 자극하는듯한 가련한 보컬과 차갑고도 절제된 트럼펫 음색은 그를 가히 Cool Jazz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 주었지만, 평생에 걸친 마약에의 끊을 수 없는 유혹은 그의 불타는 예술혼마저 잠식시켜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1968년 샌프란시코의 거리 불량배에게 당한 린치로 인해 치아를 상실함으로써 그의 연주일생에 크나큰 타격을 받고 말았는데, 트럼펫은 입술의 진동으로 인한 진동음이 관을 통해 벨로 흘러나오게 되는 악기로 진동수를 조절하는 치아의 상실은 연주자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mo 'better blues에서 쳇 베이커의 이런 불운이 잘 묘사되어 있다.
Heartbreak는 그가 한 번에 가장 많은 돈을 긁어모아 마약을 사는 데 크게 일조한 음반으로 말 그대로 심장을 한올 한올씩 깨부셔 버린다. 멜랑콜리의 극치라면 이해가 빠를까? 비록 그 목적은 좋지 못했지만, 예술이란 그런 진탕 속에서 피는 연꽃과도 같은 것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