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무 숲속의 수도원/ 내가 상상하는 키에브의 거대한 성문 이미지


 

더 이상 술에 취할 수 없다면 자신의 영혼은 타락한 것이다

Joseph Rudyard Kipling/여인들의 연인 중에서

 

 


“알콜 9단위... 담배 30개비...오전 9시. 오, 맙소사! 기분은 떡에다가... 신물이 시도때도 없이 올라오는 이 끔찍한 숙취.” 브리짓 존스의 고백이 남달리 느껴지지 않는 지독한 아침이다. 오늘 하루는 철저히 몸을 사려야 겠다. 또 술마시자고 꼬시는 놈은 구석진 장소로 끌고가 입구녕에다 큼지막한 돌멩이를 쑤셔버려야지...

 


어젯밤, 디오니소스의 강렬한 유혹에 당당하게 응했던 자부심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크 트웨인이 말했던,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비겁함으로 <몸 사리기>에 들어가는 내가 비참하기 그지없는 아침이다.


예로부터 술은 신성시 되어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마시는 술, 넥타(Nectar)는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ambrosia)와 함께 영원한 젊음과 불멸의 생명을 상징했었다. 뭐 굳이 서양의 그리스/로마 신화를 들먹이지는 않더라도 술이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제물(祭物)로써 신성시 되었다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화현상이라 하겠다.


이처럼 술이 성스러운 음료였기에 술을 즐긴다는 건, 신을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했었다. 그러했기에 술은 전장에선 용기로써, 예술에선 위대한 영감으로써, 생활에선 동지애의 상징이었다.

인류가 가장 신을 사랑했던 시기... 중세라 불리웠던 그 세기에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술에 찌들어 있었다라는 것은-여러 문헌을 통해 볼작시면-잘 알려진 사실이다.(그 시기에 물을 그냥 마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였다. 왜냐하면 여러 질병의 감염원이 물이였으니까, 중세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암흑의 시대가 아닌, 갈증을 위험한 물대신 안전한 술로 대신하던 매우 지혜로운 사람들이 살던 시대였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분없이 1인당 평균 4ℓ의 맥주를 마셨더랬다.)


신을 사랑하는 자라면 어찌 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술잔을 앞에 두고 경외하는 자는 유다의 자식이요.

술잔에 물을 타는 자는 저주받을 자라.


오늘날 위대한 영감을 가진 예술가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은 “Fucking” Well-Being 때문일거라고 난 굳게 믿고 있다. 18세기 낭만파라 불리던 거리의 주정뱅이가 모두 사라진 지금 우리는 얼마나 각박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나?

문학은 바람난 이웃집 김씨 아저씨 얘기보다 더 재미없어졌고, 음악은 이효리의 'Get ya'가 인기가요 1위랜다. 젠장!

다시한번 Fuck이다.


20세기엔 그래도 멸종되었다고 믿었던 몇몇 주정뱅이가 아직은 남아있던 시기였다. “언제나 뜨겁게 끓어올랐던”레이먼드 챈들러, “죽어서 누워있고 싶다던” 윌리엄 포크너, “총질을 유난히 좋아하던”어니스트 훼밍웨이, “샴페인만 줄곧 마셔대던”스콧 피츠제랄드, 아! 위대한 유진 오닐, “항상 터프해지던”더쉴 해미트, “욕망이라는 전차안에서 잠에 곯아떨어진” 테네시 윌리엄스,“술쳐먹고 끄적인게 틀림없는” 레이먼드 카버, “수전증으로 물감을 떨어뜨린게 분명한” 잭슨 폴락, “나발을 멋지게 불어대던” 존 콜트레인 등등


Anyway...

지금은 Mussorgsky(1839-1881)라는 주정뱅이 얘기를 해볼까 한다. 그 역시 타고난 술꾼이었고, 또 위대한 영감의 소유자였다. 그의 황홀한 작품 <전람회의 그림>이 김동률의 “전람회”에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으나, Jazz Piano의 원조 “드뷔시(Debussy)”에게 영향을 준 것 만큼은 확실하다고 알고 있다. “전람회의 그림”을 얘기함에 있어서 빼놓아서는 안될 두 사람이 있는데. “짜르(Tsar)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와 “빅토르 하르트만(Victor Hartman)이다.


무소르그스키의 삶에 있어 이 두 사람의 존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인데, 알렉산드르 2세는 무소르그스키의 알콜중독과 빅토르 하르트만의 죽음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라 할 수 있다. 크림전쟁의 패배 후 러시아는 급격한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해방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기치아래 1861년 농노 해방령을 선포한다. 이 농노해방령은 소지주 출신의 무소르그스키에게는 치명적인 경제력 상실로 이어졌다. 귀족출신의 넉넉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별다른 걱정이 없었던 그는 생활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고, 뒤이은 어머니의 죽음은 그를 절망이란 술에 의지하게끔 만들었다. 근근히 빈곤한 관리생활을 하던 그에게 빅토르 하르트만이란 친구의 존재의 절망 속에 비치는 한줄기 서광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르트만은 부유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건축가, 화가로 활동하던 재능 넘치는 예술가였다. 하르트만은 가난했던 무소르그스키의 경제적 사정을 몇 번씩이나 살펴주면서 그에게 끊임없는 신뢰와 애정을 베풀어주었다.

 


1866년 운명은 절망처럼,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어깨위에 나란히 내려앉았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66년 4월 4일 키에브(kiev)에서 벌어진 암살 시도로부터 가까스로 생명을 구하게 된다. 이에 황제는 “1866년 4월 4일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성문을 건축하기로 마음먹고 러시아 전역의 건축가들을 대상으로한 “공모전”을개최한다. 치열한 경쟁 끝에 하르트만이 공모전에서 우승하게 되고, <전람회의 그림>의 마지막 곡의 모태가 되었던, ‘키에브의 거대한 성문(The Great Gate of Kiev)’은 이렇게 탄생했다. (옆의 그림이 실제 하르트만이 그렸던 키에브의 거대한 성문 조감도)

 

하지만 성문을 건축하기 위한 자금의 부족이어서인지, 아니면 그날의 사건이 일반 민중에게 알려지

 

기를 원하지 않았던 황제의 불편한 심사 때문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이는 하르트만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하르트만이 31살의 나이로 심장병으로 요절해 버리자, 절친한 친구를 잃은 무소르그스키는 슬픔의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더욱 더 술에 탐닉하게 된다. 그는 러시아 국민악파의 대부 라 일컫어 지는 “V. 스타소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여보게 친구,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말이나 개, 쥐 따위 동물도 살아 있는데 하르트만 같은 친애하는 사람이 죽다니! 이런 때 현명한 녀석은 우리처럼 어리석은 놈을 위로하는 말이랍시고, 이렇게 지껄일테지. “비록 하르트만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가 남긴 작품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야, 그러나 그렇게 머리 잘 돌아가는 녀석이나 죽어버리라지! 라고 하고 싶다네.


음악, 문예 비평가였던 스타소프는 하르트만을 추억하는 유작 전람회를 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하였고, 전람회에 참석한 무소르그스키 역시 친구의 마지막 유작들을 그리움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어릴 적 어머니에게 배웠던 그에게 가장 친숙했던 악기, 피아노로 그날의 감동과 인상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전람회의 그림”이다.

 


전람회의 그림은 10곡의 소품과 5곡의 프롬나드(promenade)로 구성되어 있는데, 프롬나드란 산책, 산책길을 뜻하는 것으로 본시 청중이 산책을 하면서 혹은 선채로 음악을 듣던 음악회를 일컫는 단어이다. 무소르그스키는 그날의 전람회에서 가장 큰 인상을 받았던 10개의 작품을 골라 피아노 조곡을 만들었고, 프롬나드는 그 각각의 그림이 걸려있는 회랑을 거닐면서 그가 느꼈던 감동과 인상, 생각의 단상들을 차분히 풀어내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곡의 중간 중간에 삽입된 프롬나드는 무소르그스키의 곡을 이해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형식이며, 그의 생각의 단상들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편린들이다.

 

무소르그스키가 전람회에서 느꼈던 자신의 인상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악기로 '강하게 혹은 약하게'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었던 “피아노포르테”를 선택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오늘날 “전람회의 그림”은 라벨의 관현악 편곡으로 더욱 더 알려져 있는데, 라벨은 임의로 프롬나드를 생략해버림으로써 원곡의 의미를 상당부분 훼손해 버린 것이 사실이다.

 

위대한 교주님이신 “Sviatoslav Richter" 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라벨을 무척 좋아하지만,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그가 오케스트라를 위헤 편곡한 것은 혐오스러운 일로 여긴다. 전람회의 그림은 러시아 피아노곡 가운데 가장 심오한 걸작이다. 라벨의 편곡은 허울만 근사하게 해서 이 걸작의 품격을 떨어뜨린 끔찍한 졸작이다.


1881년 2월 과도한 음주와 이로 인한 신경장애, 지속적인 발작으로 괴로워하던 무소르그스키는 42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같은 해 “무고한 학살자” 알렉산드르 2세 역시 나로드니키(Narodniki:인민주의자라는 뜻으로 급진적 혁명세력)의 계파 “인민의 의지파”에서 던진 폭탄테러로 인해 사망했다.

 

 


신은 어떤 의미에선 공평하다. 가해자건 피해자건 결국 그의 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다만 “위대한”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헬싱키의 알렉산테린 거리에서 쓸쓸히 비를 맞고 서 있지만, (밑의 사진은 헬싱키 원로원 광장 앞의 알렉산드르 2세 동상)

 

 

"비참했던”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항상 연주되고 감상되어진다는 것이다.


 

<전람회의 그림>의 피아노 연주반으로는 호로비츠와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나의 선택은 당연히 리히터다. 호로비츠는 글쎄.. 술로 따지자면 김빠진 샴페인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탁월한 기교와 영롱한 음색 모두 뛰어나지만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빠져있는 기분이다. 그에 비해 리히터는 “영웅의 술” 브랜디를 떠올리면 딱이다.

 

앰브로스 비어스는 <악마의 사전>에서 브랜디를 천둥번개 1, 리무버 1, 피 튀기는 살인 2, 죽음,지옥,무덤 1.정제된 사탄 4 로 이루어진 강장제로써 1회 복용량은 “항상 머리가 깨어지도록”  새뮤얼 존슨 박사는 영웅의 술이라고 말했다. 영웅만이 감히 이것을 마시는 모험을 할 것이다 라고 평했다. 그러면 이해가 쉽겠지?

 

사랑하는 그대여!

김빠진 샴페인을 마실 것인가 아니면 영웅의 술 브랜디를 마실 것인가?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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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6-03-13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음악파일 올리면 저작권법에 저촉되는지 모르겠네요. 아니면 리히터의 전람회의 그림 올리려고 하는데... 저작권법에 대해 잘 아시는 분 있으시면 알려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