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자꾸만 우울해진다.

마치 침몰해가는 범선처럼 나의 정신도 육체도 한없이 나약해진다는 것을 느낀다.

규격화되고 잘 정돈된 삶, 투쟁할 것도 도전할 것도 없는, 그저 끌려가기만 할 뿐인 이 삶이 나를 더할 것 없이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호사스럽다! 그렇다! 이런 깡통소리를 지껄여댈수 있는 것도 호사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호사스러움이 나를 질식케 한다.

건조하고 지루한 일상의 호사스러움이 나를 파괴하고 있다는 걸 요즘처럼 많이 느낀 적이 없다. 난 전장을 갈구한다. 숨 쉴 수조차 없는 치열한 전투의 참호 속을!

그곳이라면 난 자유를 느낄지도 모른다.


가끔 난 시계태엽인형 같다. 사실 내 삶은 매우 단조롭다. 항상 일어나는 시간도 같고, 취침시간도 거의 일정하다. 식사시간도 일정하고, 식사 메뉴 또한 그러하다. 난 뭐든 만들어 먹는걸 귀찮아한다. 사먹거나 아님 인스턴트로 때운다. 뭔가를 준비하고 씻고 다듬는 과정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에게 식사란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하는 일련의 과정에 불과하다.


가끔 여자 친구는 밥 먹는 걸 지켜보다가 박수를 딱 쳐서 내 주의를 환기시킨다. “정신 차려! 뭐해?” 내가 밥 먹는 도중 또 시선을 멍하니 두고 그저 되새김질에만 열중하는걸 몰래 본 모양이다. 난 자주 이런 핀잔을 듣는다.


나라는 시계태엽인형은 건조한 아스팔트 위를 태엽이 다 풀려버릴 때까지 마냥 걷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고 싶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바동거릴망정 태엽이 멈쳐버릴때까지, 그 태엽이 언제 멈쳐버릴지도 모르는 알 수 없는 곳에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힘없이 주저앉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전혜린은 그의 글에서 스스로를 아스팔트 킨트(Asphalt-Kind: 아스팔트만 보고 자란 도회의 고향 없는 아이들)라 고백했다. 나또한 그러하다. 그녀처럼 나에게도 고향이 없다. 난 도시에서 태어나 지금도 도시에서 살고 있다. 나에게 딱히 고향이라 부를만한 안식처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 없는 나는 그저 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 사이를 정처없이 부유할 수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쉽게 잠들 수 없는 이 밤! 난 아파트 베란다로 나갔다. 그 곳만이 그나마 나에게 숨 쉴 만한 작은 공간을 내어줄 것이라 믿었기에 그러했다. 3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나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파트위에서 드문드문 비치는 작은 불빛들...

저 너머에 동지가 있는 것이다. 난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세상에는 나 혼자만이 아니구나하는 안도감!

도시는 밤의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앉는 그 때, 차갑고 청량한 공기와 코발트 빛 안개가 도시의 추악함과 메마름을 삼켜버린 후에야 비로소 아스팔트 킨트들에게 고향을 안겨주는 것이다.


갑자기 Bruckner가 듣고 싶어졌다. 여지없이 피아니시모와 현의 트레몰로로 시작되는 브루크너만의 심연 속으로 젖어 들고 싶은 것이다. 그 곳만이 안식을 줄 거라 믿기에...


브루크너 7번의 Adagio!

브루크너의 매력은 멜로디나 선율에 있는 것이 아니다.

<共鳴>!

바로 함께 울리는 것! 공간을 홀로 점유한 채 울리는 소리의 파장에 몸을 맡기는 것, 부유하는 것! 그것이 극도의 쾌감을 준다. 그래서 브루크너의 음악은 혼자 듣는 것이다. 낯선 타인과 함께라면 공명할 수 없다!


영혼의 소박함을 송두리째 강탈당해 버린 현대인은 자신만의 자아의 망집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타인과의 교감은 어쩌다 이루어지는 환상과도 같은 것. 달콤했던 환상이 깨어지면 남는 건, 처절하리만치 잔인한 고독 밖에 없다.

찢겨져 버린 영혼을 웅켜잡은 채 우리는 다시 무표정하고 어두운 일상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부르크너를 듣노라면, 심연 속으로 젖어들어 갈 수 있다. 한줄기 빛조차 다다를 수 없는 절대의 공간, 그 장엄한 침묵의 심연 속에서 무한히 부유하고 있노라면,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

그 어두운 침묵의 심연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태어난 고향이므로...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ldn't believe.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auser gate.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난 너희 인간들이 믿지도 못할 것들을 보아왔지. 오리온 좌에서 불타오르는 전함들. 난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에서 어둠을 가로지르는 C 빔의 불빛도 보았어. 그 모든 순간들이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마치 내리는 빗속의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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