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String Quartet No. 15 OP. 132


이 곡을 처음 듣게 된 건 영국의 소도시 Cambridge였다. 캠브리지는 매우 작은 도시인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서울 면적의 1/20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느끼기엔 서초구보다도 적을 듯 싶었다. 캠브리지의 City Center에는 가끔 거리에서 마임을 보여주거나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거나 현악 4중주를 들려주곤 하는 무명 음악가들의 공연이 있었는데, 자신의 테이프나 CD를 자작해서 사람들에게 팔곤 했다. 대부분 Complication 음반이었고 가격은 5-10파운드(10000-20000내외) 정도였는데, 단순히 그들의 생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불우 이웃을 돕는 자선 기금같은 의미도 있어서인지 그리 비싸다고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느 날 장을 보기위해 우연히 City Center를 지나치다 아련한 현악기의 음색이 들려왔고, 소리를 쫓아가다 보니 남자 3 여자 1로 구성되어 있는 4중주단을 만나게 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을 조용히 경청하던 터라, 나도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기위해 용을 써야만 했다.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울리는 베토벤! 그것이 내가 처음 듣게 된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이었다.


순간적인 감흥에서였던가, 아님 뭔가 좋은 일에 나도 한 몫 끼어보고자 하는 저열함에서였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도 그들의 테이프를 하나 구입하게 되었고(그 땐 CD를 사기엔 웬지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음반 중 하나가 되었다.


친숙하게만 느꼈던 베토벤의 String Quartet에 대한 나의 인식은 이른바 “高手”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글을 읽게 되면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특히나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에 대한 여러 비평가들의 극찬이 실린 평론이나 저서들을 접하게 되면서부터는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그건 <나의 무지에 대한 수치감> 때문이었다. 제대로 발음조차 할 수도 없었던 무수한 음악용어들과 생소하게만 들리는 연주자들의 이름, 수많은 음반에 대한 비교 비평은 나의 기를 확실히 죽여 놓는데는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고수들이 추천하는 여러 음악이론서, 평론서, 잡지, 음반 가이드를 섭렵하고 난 후 다시 베토벤의 현악 4중주를 접했을 때, 난 정말 그들이 말한 것처럼 클래식은 아는 것만큼 들린다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닌 그들이 아는 것, 내가 지식으로 알고 있던 것만을 들을 수 있었다. 음악적 지식에 대해 전무했던 시절,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좋아서 들었을 때 내가 느꼈던 감동! 나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을 그동안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난 그저 그들이 나에게 말해주었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읊조리는 전달자에 지나지 않았다.(나중에서야 그들도 서로서로 배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나 국내에서 출판되는 음반 평론서나 음악해설서는 일본 서적을 그대로 표절해놓고서는 자신의 것처럼 포장하는 걸 자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Snob라고 불렀다.


음악이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음악을 듣는 걸까?

즐기기 위해서 듣고, 기분이 좋아지거나 위로 받기 위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타인의 취향을 단지 이해하기 위해 음악을 접하게 되면 그 순간 음악은 고통이 되고, 그 곳은 지옥이 된다.

 

음악은 강요해서 들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접어 두면 된다. 그것 말고도 좋은 건 너무나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작품들을 어렵다고 말한다.

듣기 위해선 뭔가를 준비해야 할 것 같고, 체계적으로 공부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리라.

 

음악은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심오한 철학이나 음악 이론을 알지 못하면 느낄 수 없는 음악이 있다면 그건 음악이라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해도 좋다. 음악을 듣는데는 두 귀만 있으면 충분하다.

명곡 라이브러리나 명곡 해설서 따윈 던져버리고 가만히 들려오는 현의 울림에 귀 기울여보자. 이제 베토벤의 현악 4중주가 더 이상 케르베로스의 포효처럼 괴롭게 들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체를 찾기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내려간 오르페우스의 하프가 지옥의 군주 하데스를 감동시킨 것처럼, 만약 당신이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만 있다면, 베토벤의 현악 4중주 제 15번 OP.132는 당신을 충분히 감동에 떨게 만들어 주리라.


이런 의미에서 부제를 랭보의 시선집 <지옥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붙여보기로 했다.

그리고 베토벤 현악 4중주 제 15번을 이토록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작곡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1825년)는 그에게 있어서 지옥 그 자체였다. 동생의 죽음으로 후견인을 맡게 된 조카 Karl은 베토벤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방황과 타락으로 그를 괴롭혔으며, 지속적인 장의 염증과 여러 질병으로 인해 육체적으로도 그는 이미 죽음을 앞둔 초로의 노인에 불과했다. 지옥과도 같았던 현실,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짙은 그림자와 회한. 그것이 이 곡에 너무 잘 나타나 있으며, 단적으로 난 이 곡을 한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그려내는 슬픈 서정시! 라고 부르고 싶다.


E. Kbler Ross 박사는 죽음을 앞둔 수많은 환자들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 다음과 같은 임상학적 결론을 도출해 내었는데,

이를 The Stages of Kbler Ross라고 부른다.


 제1 단계는 부정(Denial)의 단계이다. 대부분의 모든 사람이 암과 같은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되면 처음에는 강하게 부정한다. '아니야, 난 믿을 수 없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 하면서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했음을 부인한다.


제 2단계는 분노(Anger)이다. '하필 그 많은 사람 중에 내가'하며 자신이나, 가족, 병원 직원에게 분노를 나타낸다. 신을 저주하거나 주위에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죽음의 단계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이다.


제 3단계는 타협(Bargaining)의 단계이다. 첫 단계에서는 슬픈 현실을 대면할 수가 없고, 둘째 단계에서는 사람들과 신에게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나면, 사람은 타협을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불가피한 사실을 어떻게든 연기하려는 의도를 내보인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착실한 행동을 보이고 특별한 헌신을 하기로 맹세함으로써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소망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 며칠이라도 좋으니 통증이나 신체적 불편 없이 보냈으면 하는 것이다. 이때의 타협은 보통 절대자와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제 4단계는 깊은 우울증(Depression)의 단계이다. '이젠 도저히 희망이 없구나'라면서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자신의 무력감에 대해 울기도 하고 조용히 있기도 한다.


제 5단계는 수용의(acceptance) 단계이다. 죽음을 받아들인다. 죽음을 수용한 후에는 마지막까지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고 분노하거나 우울해 하지도 않는다. 극도로 지치고 쇠약해진 상태이다. 혼자 있고 싶어하기도 하고 언어보다 무언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머나먼 여정을 향해 떠나기 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의 시간인 것이다.


분명히 모든 사람이 동일한 과정을 거쳐 죽음을 수용하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단계를 밟아나가며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고 본다.


베토벤의 현악 4중주 제 15번 OP. 132는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는 4악장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병으로 작곡을 중단했다가 나중에 3악장의 계획을 바꾸기로 결심하면서 악장이 하나 늘어나, 5악장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론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겠지만, Kbler 박사의 죽음의 5단계와 5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의 구조가 웬지 모르게 닮았다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고, 난 이를 내 감상의 주된 Point로 삼았다.

 

일단 베토벤의 현악 4중주 제 15번의 개관을 살펴보자


제 1악장:Assai Sostenuto-Allegro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 1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제 1주제는 매우 어두운 반면 제 2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제 2 주제는 조금 밝은 음색을 띄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서주의 동기가 악장 전체를 누르고 있어 음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느새 병든 초로의 노인이 되어버린 베토벤이 자신에게 짙게 드리워진 죽음에 대한 그림자를 애써 털어버리려는 듯 제 1 바이올린은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여리게 자신의 고통과 회한을 나지막하게 고백한다. 이에 비해 제 2 바이올린은 부드럽게 그의 슬픈 영혼을 어루만지듯이 유연하게 펼쳐진다.


제 2악장:Allegro Ma Non Tanto

A-B-A의 3부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 바이올린은 지속적으로 같은 주제를 반복하고, 제 1바이올린을 제외한 비올라와 첼로가 제 1 바이올린의 선율을 이어 받아 주제를 다시금 강조하는 방식이다. 지속적인 질병과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베토벤이 절대자를 향해 <정말 그래야만 하는가?>라며 자신의 분노를 은은하게 표출하는 듯이 느껴진다.


제 3악장: Molto Adagio

베토벤 자신이 제 3악장의 서두에 “리디아 선법에 따른 병이 회복된 자의 신에 대한 성스러운 감사의 노래”라고 표기해 놓은 것처럼 베토벤 현악 4중주 전곡 중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선율을 가지고 있는 악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리디아 선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ETHOS이론(인간의 지성적인 면이 아닌 비지성적인 면(감성)을 습관을 통해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론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음악은 인간의 성격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그것이 윤리적 가치를 가졌을 때만 허락되어야 한다라는 것)에 의하면 음악에 사용해서는 안되는 선율이다.

인간의 나약한 심정을 드러내고 슬프고 억압된 감정을 창출해내기 때문에 음악은 마땅히 즐거워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폴론적 음악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선법으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인간의 내면을 투영하고 사색하기에 가장 적합한 감정상태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이유에서였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가장 평온해지며 타인을 향한 무한한 배려심과 사랑이 흘러넘칠 때가 바로 타협의 단계이다. 자신이 일생을 통해 저질렀던 죄악에 대한 두려움과 내세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인해 어떤 방식으로든 선한 행위를 하려고 하며, 그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병원에서는 이 단계를 겪고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죽고난 후 신체를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가장 빈번하게 한다고 한다.


제 4악장: Alla Marcia, Assai Vivace


짧은 2부 형식의 행진곡 풍이다. Kbler 박사에 의하면 깊은 우울증으로 울기도 하며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가질 때이지만 베토벤은 아마 독방에서 조용히 흐느끼고 싶진 않았나보다. 울기보단 차라리 활짝 웃어보이기로 마음 먹었을지도,,,,

자신의 그런 마음을 애써 숨기고 싶었는지 구성면에 있어서도 가장 짧다.


제 5악장:Allegro Appassionato


론도 형식으로 경쾌한 리듬과 빠른 속도로 환희에 찬 열정을 노래한다.

베토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양식은 그가 삶을 바라보는 양식과 다를바 없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그는 언제나 <그래야만 했다> 굴종하기 보단 반항했고, 패배하기 보단 승리하기를 원했다.

그가 평생 바랬던 이상적인 영웅 <프로메테우스>처럼 극한의 상황에서도 포기보다는 투쟁을 원했던 것이 베토벤이었다.

난 그런 그가 살고자 했던 진정한 삶은 화려한 영웅이 아닌 처절한 戰士의 삶이었다라고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루쉰의 짧은 산문을 실으며 글을 맺고자 한다.


사실 戰士의 일상생활이란, 결코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노래하고 울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노래하고 울어야 할 것과 무관한 일도 없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전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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