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행복을 주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숭배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행복을 선사한다.


Written by Hermann Hesse


어제 봄비가 내렸다.


하지만 강한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내리는 비는 보기에도 참 청승맞아 보였다. 빗소리 들으며 침대 속에 푹 파묻혀, 청승을 떨고 있노라 매,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의 나른하면서도 왠지 블루지(bluesy)한 목소리는 권태 2, 습관성/체질적 우울 1, 비로 인한 짜증 1을 믹싱 글라스에 넣고, 스터링(Stirring) 해 놓은 멋진 칵테일 같았다.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뜬금없이 시작해서 뜬금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어제도 그랬다.

비도 오고, 꿀꿀해 보여서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이란 노래를 불러주었다.

난 가사를 외우는데 영 젬병이라 언제나 그녀에게 첫 음을 물어보아야 한다.


“처음에 어떻게 시작해? 가사가 기억이 안 나네.”


“늙어서 그래. 푸후훗!”


잠시 후 그녀가 먼저 선창을 시작하면, 곧 내가 따라 부른다. 그래서 우리의 노래는 언제나 그녀의 선창으로 시작해 합창으로 끝을 맺는다. 갑자기 텐션이 오르고 기세가 붙어서 윤상의 ‘이별의 그늘’도 부르고, 이은미의 ‘기억 속으로’도 불렀다. 그리고 이것저것 찝쩍이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 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이 노래 이영훈이 작사, 작곡한 거 맞지? 가사가 심상치 않어.

이 노래 분명 자기 얘기일 거야. 그치 않냐?”


“당연하지. 이런 가사 상상만으론 절대 못쓰지. 이거 체험이야. 생생한…….”


“라일락 꽃향기 어쩌고 저쩌고로 시작되는 거 있잖아. 곡명이...?”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아! 맞다. 라일락도 봄에 피잖아. 한 오월 정도 되어서, 이 가사 보면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이 부분 있잖아. 분명히 사랑하는 연인이랑 5월에 헤어진 거야. 분명하다니까.”


“글치. 옛날 노랜 참 가사가 좋았어. 옛날 노래의 가사는 다 시였지. 한 편의 아름다운 시. 현진영이나 박남정의 댄스 가요도 가사 한 번 훑어봐.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였다니까.”


어쩌구저쩌구... 


“우리의 사랑도 언젠가 퇴색되거나 싸늘하게 식어버릴지도 몰라.

그걸 생각하면 참 서글퍼. 그렇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지.

내가 죽는 것이 가슴 아픈 유일한 까닭은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고 말이야.”


잠시 침묵...

 



“갑자기 나스타샤 킨스키가 생각나네. 참 예뻤는데... 테스에서 정말 죽였지 않냐?

앞으로 테스가 다시 리메이크 되어서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나스타샤 킨스키만큼 해내지는 못할 꺼야. 완벽했어. 테스 그 자체였지.”

 


“응! 정말 예뻤어. 모니카 벨루치와 더불어 여자인 내가 감탄해 마지않는 황홀한 외모를 가졌지.

모니카도 말레나와 라빠르망에 나올 때엔 눈을 뗄 수가 없었어. 너무 아름다워서.”


“모니카도 최근에 보니까 많이 늙었더라. 서글퍼. 시간이라는 것만큼 냉혹한 것은 없지 않나 싶어. 나는 시간 속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라는 에밀 시오랑의 절규가 생각나는군.”


“시간은 모든 걸 앗아가 버리지만, 추억만은 앗아가지 못해!

름다움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행복을 주지 못하지만,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을 주지. 모니카 벨루치도 나스타샤 킨스키도 지금은 그 미모가 퇴색되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들이 출연했었던 오래된 영화에, 그리고 그 시간에 함께 했었던, 자네의 빛났던 청춘의 뒷그림자에 여전히 여신의 모습으로 살아있을꺼얌.”


“호! 그 말인즉슨...”


“덕수궁 돌담길에, 그리고 언덕 밑 정동길에 여전히 오월의 꽃향기가 남아 있다는 소리야.”


“그래서 결론은?”


“결론? 결론은 있을 때 잘해 라는 소리야. 나 있을 때 나한테 충실하란 말이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알아들었어?”


“응. 알겠어”


그녀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