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written by 수키 김, 통역사 중에서
난 강요된 아침이 싫다.
더군다나 자신을 ‘아침형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은 더더욱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다. 아침형 인간이라니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예부터 잠자는 사람을 억지로 깨우는 짓은 터부시되어 왔다. 왜냐하면 잠을 자는 동안에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 자유로운 방랑을 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었다.
조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의 설명을 잠시 들어보자.
잠자는 사람을 깨우지 않는 것은 원시인들의 공통된 규칙이다. 영혼이 밖에 나가 있어서, 중간에 깨우면 영혼이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잠이 깨면 그 사람은 병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잠자는 사람을 꼭 깨워야 할 때에는 아주 천천히 깨워서 영혼이 돌아올 여유를 주어야 한다.
이보라! 우리 현대인들이 영혼의 병을 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동창이 미쳐 밝지도 않았는데, 노고지리가 아직 우지지지도 않았는데, 노동의 착취자들은 어서 일어나라고 아우성이다.
생존을 볼모삼아 노동을 강요당하는 아침이야말로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수치스러운 시간임을 자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침형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은 대체 무엇인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뛰어난 임금 노예라는 것을 주인에게 강조하고 싶은 건가?

고병권의 재치있는 책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노동에 대한 재미난 구절이 나온다.
고대인들이나 중세인들이 노동을 얼마나 경멸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은 많다. 우선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들 치고 좋은 어원을 갖는게 없다. 불어의 ‘Travail'는 고문 도구를 의미하는 ’tripalium'에서 왔고, 독일어 ‘arbeit' 역시 고통, 수고를 의미했다. 노동을 많이 하면 신체와 정신이 모두 망가지는데 그게 고문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크세노폰(Xenophon)은 노동에 오래 종사한 사람을 공직에 써서는 안된다고 했고, <성경>에서조차 신은 아담에게 노동을 형벌로서 부과했다.
이런 연유로 난 강요된 아침이 싫다. 고요한 방에서 실컷 자다가 자연스레 눈이 뜨이는 아침이 좋다. 여유 있게 커피 한잔 마신 후, 따뜻한 침대위에서 배 깔고 좋아하는 책 맘껏 읽구 말이지.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는 걸까?
바흐(Bach)는 평생을 바지런히 살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바흐는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었고,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로인해 평생을 궁핍하게 살아야 했고, 딸린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이었던 작센 선제후의 궁정 작곡가의 직위를 얻기 위해 3년 동안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했다. 게다가 차마 읽을 수 없을 만큼 비굴한 편지들도 몇 통이나 써야했다. 그 자신은 누구나 나만큼 노력하면 나만큼의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늘 말하곤 했지만, 그의 천재적인 재능이 생계와 노동으로 혹사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입에서 흰 서리가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겨울 아침, 난 Bach Cantata BMV 140 "wachet auf, ruft rus die stimme: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듣는다.
더할나이 좋아야 할 아침이 왜이리 애달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