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그리는 행복한 교실 - 선생님과 아이들의 삶을 담는 교육 이야기 교실 속 살아 있는 문화예술교육 1
이호재 지음 / 푸른칠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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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그리는 행복한 교실](이호재, 푸른칠판) 279쪽(누적 1198쪽)

푸른칠판에서 하는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책이다.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다.
이호재 선생님은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알게 되었다. 실습 갔을 때 담당(?)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호재 선생님이 쓰신 ‘새로운 마음으로‘, ‘오늘도 또‘ 등의 노래를 불러주시는 것을 봤다. 교직에 들어선 후 나도 아이들에게 그 곡들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는데(고학년을 맡을 때 가르쳐줬다.) 선생님이 쓰신 노래를 잘 모르고, 아는 노래가 다양하지 않으니 교과서 외의 노래를 부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네모의 꿈‘, ‘혼자가 아닌 나‘ 등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박자가 어렵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안 맞는 느낌이 드는 곡도 있었고, 음역대가 넓어서 힘든 곡도 있었다(대표적인 곡이 ‘마법의 성‘.). 이 책을 통해서 선생님이 쓰신 다른 노래를 알고 싶었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악보가 실려 있는 게 가장 좋았다. 악보를 보면서 시창으로 노래를 불러봤다. 나는 작곡과는 거리가 멀어서(매우 창의적이지 않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대단하다는 생각부터 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악보 표기가 읽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한 박 단위로 안 그리실 때가 많다..ㅠㅠ) 박자를 생각해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는 것.
그리고 선생님이 쓰신 곡이 만들어진 배경이 함께 실려 있는 것이 좋았다. 아이들 글을 소재로 한 곡들이라 아이들의 글을 보물로 여기지 않으면 절대 만들 수 없는 곡이다(아이들 글을 보물로 여기는 또다른 선생님이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이런 뒷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찬송가가 쓰인 배경을 읽는 것을 즐거워했던 때가 떠올랐다. 거기에, 중간 중간 노래를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도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또, 내가 노래를 가르치는 방법을 떠올리면서 혼자 키득거렸다. 개인적으로 CD나 아이스크림으로 노래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범창을 하고 아이들이 따라부르는 식으로 노래를 가르친다. 나는 ‘고음불가‘라 고음은 가성밖에 쓸 줄 모른다(내 소원이 진성으로 고음을 내 보는 것이다.). 높은 곡을 만날 때면 덜컥 겁부터 난다. 그래서 나는 노래를 가르칠 때 꼼수를 쓴다. 바로 ‘조옮김‘이다. 변태(?) 같지만, 나는 ‘조옮김‘을 좋아한다. 악보를 보고 조 옮겨서 치는 게 재미있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단련한 ‘조옮김‘ 연습으로 웬만한 곡들은 보고 바로 조옮김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교과서 곡 조옮김은 어렵지 않다. 아이들에게는 조옮김을 해서(키를 낮춰서) 따라부르기를 하라고 하고, 노래를 다 익히면 원래 키로 올린다. 가끔 부르던 키로 부르다가 중간에 키를 높이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고학년은 키가 높으면 안 부를 때가 많아서 일부러 키를 낮추는 경우도 있다. ‘조옮김‘은 여러 모로 유용하다. 학년 말 학급앨범에 아이들이 단체로 부르는 노래를 녹음해서 넣어주곤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노래를 다시 찾아보았다.

1월에 읽은 책인데, 동굴에 들어갔다 나오느라 2월 말에야 서평을 쓴다. 올해는 4학년을 맡게 되어 음악 전담이 없다. 올해는 내가 우리 반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칠 수 있겠다. 이 책에 나오는 노래들로 올해를 채워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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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호텔 대신 집에 체크인합니다 - 일상에 집중하는 공간 탐험 비법
해리어트 쾰러 지음, 이덕임 옮김 / 애플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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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대신 집에 체크인합니다](해리어트 쾰러/이덕임 옮김, 애플북스) 전자책/종이책 216쪽(누적 919쪽)

나에게 여행은 일탈의 하나이다. 코로나19로 여행을 못 가게 되었으니 집에서 여행을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나 하고 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전개가 아니었다. ‘답정너‘를 바라고 이 책을 읽었던 걸까?

이 책은 여행의 해악성을 말한다. 여러 가지 통계 자료를 가져와서 여행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 ‘얼마전, 유럽에서 가장 큰 온실가스 배출기 순위에서 저가 항공사인 라이언에어가 10위 자리에 올랐는데, 9위까지는 모두 석탄 화력 발전소가 차지했다. (그 중 7개가 독일에 있다.)‘(41쪽)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독일이 원전 대신 선택한 것이 화력 발전소인 줄 몰랐다는 데서, 언제 해결될지 알 수 없는 원전과 온실가스의 주범이 되는 화력 발전소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곤란하다는 데서 당황스러웠다. 우리 아기가 살게 될 머지 않은 미래는 과연 어떤 형국이 될까.
‘가장 환경 친화적인 교통수단은 많은 사람이 가장 심각한 대기 오염원이라고 본능적으로 믿는 이동 수단이며, 가장 친환경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대도시 속물인 우리가 경멸하는, 할인점에서 쇼핑하면서 죄책감 없이 비닐봉지를 가져가는 사람일 수 있다.‘(43쪽) 텀블러와 종이컵 중 어느 것이 더 환경적인지 모르겠다고 했던 내 글이 떠오른다. ‘결국 각국의 정부는 지구를 멸망시키는 광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의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관광 산업이 오래전부터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로 꼽혔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10분의 1의 일자리가 관광 산업에 의존하며, 독일에서도 기계공학이나 소매업보다 국민 총생산 GDP에 더 크게 기여하고 있다. 관광 산업이 없으면 많은 지역과 나라가 빈곤 상태로 전락할 것이다.‘(53쪽)
‘호텔 대신 집에 체크인‘해야 하는 까닭으로 환경적 이유 외에도 다른 이유를 여러 가지 말하지만(개인적으로 나는 글쓴이가 환경적 이유를 많이 강조하는 거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글쓴이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쓴이가 여행을 즐겨 다니다가 이제 와서 환경을 생각한다는 명목으로 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게 앞뒤가 안 맞다고 생각했다. 물론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최근의 일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리고 여행의 여러 가지 목적 중 관광에만 너무 초점을 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을 간과할 수 없고, 또, 나에게 있어 여행은 관광의 이유보다는 ‘일탈‘의 표현이라서 글쓴이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하기도 했다. 어쨌든, 환경오염 방지를 목적으로 여행을 안 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위의 통계를 쓰려면, 화력발전소를 규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먼저여야 할 거 같고, 저가 비행사들을 규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두 번째여야 할 거 같다(고가 비행사들의 순위는 몇 위쯤 되는지 궁금하다.).
책의 뒷부분은 여행을 가지 않으면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14일 일정으로 소개한다. 교사로서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 있어 아쉬웠다. 언젠가는 그 방법을 써야만 하는 날이 오기도 하겠지만. 다음에 읽으면 다르게 읽힐 날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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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비룡소 걸작선 29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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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미하엘 엔데/허수경 옮김, 비룡소) 703쪽

동화, 소설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잘 드러나는 저자를 만날 때면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그렇게 쓸 수 있지? 나도 그렇게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소설 쓰기-지어내어 쓰기-는 나랑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하엘 엔데는 1995년, 예순다섯에 위암으로 눈을 감았다.(703쪽) 여기서 왠지 [스토너]가 생각났다.

이 책은 크게 보면 2부로 나눌 수 있는데(지극히 개인적 기준), 1부는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가 책 속의 환상 세계 여왕에게 ‘달아이‘라는 이름을 불러주기까지의 기나긴 여정, 그리고 2부는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가 책 속에서 현실 속으로 나오기 위한 기나긴 여정-‘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이 나와 있다. 1부-책에서는 1부라고 되어 있지 않다.-도 인상적이었지만(특히 끝없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1부 끝부분, 끝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 과정도, 펼쳐진 이후의 장면도 재미있었다.), 2부가 더 인상적이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하‘면 점점 현실의 기억을 잃어간다는 설정이 흥미로웠고, ‘너만(?!)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사람을 수렁으로 이끌어간다고 표현한 부분도 놀라웠다.
이 외에도 미하엘 엔데가 천재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여러 장면이 있다. 알파벳 개수에 맞춰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점, 1부와 2부의 끝부분이 거의 동일한 점(물론 1부와 2부라고 언급하는 부분은 없지만), 완벽한 액자 구성,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가 어떤 의미인지 인물의 말과 행동, 배경을 통해 세심하게 표현하는 부분 등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을 했다.

˝.... 너는 지금 생명의 물을 찾고 있다. 넌 네가 속한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바라지. 사랑한다...... 말은 쉽지! 생명의 물은 네게 물을 것이다. 누구를 사랑하냐고? 사랑은 그렇게 간단하게 어떻게든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넌 네 이름말고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네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으면 그 물을 마시지 못할 거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잊어버린 꿈을 다시 찾는 것만이 너를 도와줄 수 있는 거야. 너를 그 샘으로 인도해 줄 그림만이. 하지만 그 대신 넌 네가 아직 가지고 있는 마지막 것을 잊어버려야만 할 거다. 바로 네 자신 말이다. 그건 힘들고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란다. ...˝(642쪽)

자아를 찾으려면 자아를 잊어버려야 한다. 왠지 성경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4~25) 그리고 나는, 후에 읽은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 비슷한 맥락의 구절을 발견했다. ‘진정한 자아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을 부수어야 한다.‘(70쪽)

20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계속해서 ‘나를 찾는 여행‘을 했다. 나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생각했고, 누구도 가까이 오는 걸 싫어했다. 인격을 부수지 않으면서 자아감을 찾고 싶어 했다. 발타자르 바스티안 북스는 자신의 꿈이었던 아버지의 사진을 통해 ‘생명의 물‘로 갈 수 있었다. 자아를 잊는 것이 자아를 찾는 것이다. 가슴으로 깨닫게 되는 날이, 얼른 오기를.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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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비록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신다14)고 말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구별이다. 죄인 안에 죄말고 무엇이 있는가? 그의 "머리 전체가 병들었고 그의 "마음 전체가 쇠약해"졌으며, 발바닥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사실이 아닌가? 하나님은 성자를 경멸하고 거부하고 있는 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맞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빛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그의 양심을 마비시키는 것이며 죄 중에 머물러도 안전하다는 생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진리인 것이다.  - P302

오늘날 (건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죄인들에게그리스도를 너무나 지나치게 제시하고 있으며 죄인들에게 그리스도가필요하다는 사실을 즉, 죄인들이 절대적으로 파탄된 상태에 있으며 죄인들은 다가올 진노를 겪게될 무서운 위험이 임박하며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죄책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적게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적도 없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한다는 것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는 죄를 짓는 것과 같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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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의 허구성
정태홍 지음 / RPTMINISTRIES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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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의 허구성](정태홍, RPTMINISTRIES]

12월 마지막에 읽을 종이책으로 어떤 책이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낙찰한 책이었다. 왜 골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원래 신랑 책이다. 내가 산 책 중에도 안 읽은 책이 많아서 신랑 책까지 넘볼 생각을 못했는데, 요즘 교회들이 워낙 심리상담과 교리를 섞어 가르치는 게(교리를 가르친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꼴보기 싫은 단계까지 도달해서 집어들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표지가 아무런 디자인 없이 새빨갛기만 한 게 좀 부담스럽긴 한데 의도적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용적 편집이나 맞춤법 부분에 있어서도 조금은 아쉬웠다. 또, 굳이 주서택목사의 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분석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주서택목사의 교재를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한 책이다.
이 책의 시작은 제이 아담스였다. 대학원에서 ‘기독교 상담의 이론과 실제‘ 강의를 들을 때 심리학 위에 신학을 쌓은 사람이 게리 콜린스, 심리학과 신학을 섞은 사람이 로렌스 크랩, 신학 위에 심리학-신학이 심리학에 우선한다-을 쌓은 사람이 제이 아담스라고 했었다. 게리 콜린스는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워낙 비판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참고 문헌에 로렌스 크랩과 제이 아담스는 등장조차 하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했다.). 또, 처음에 내가 좋아했던 로렌스 크랩은 상담을 배울수록 성경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제이 아담스로 옮겨 가게 되었던 건데, 이 책에서는 제이 아담스도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1차 충격을 받았다(내가 서평 쓰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지점이다.).-(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제이 아담스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제이 아담스의 상담 이론은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본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인본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것은 잘 몰랐다. 내가 힘들었던 상처에만 집중하고 상담을 배울 생각을 했지, 내 문제의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물론 성경은 심리학 책이 아니고, 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상담을 공부하려 했다는 것도 한참 뒤에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았던 게 2012년 1월 말씀묵상캠프였는데, 말씀묵상캠프를 담당하신 목사님의 성경 묵상을 통한 질문과 통찰력이 상담을 통한 질문, 통찰력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상담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내 속의 어리석음을 발견했다. ‘아, 나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담을 공부해서 채우려고 했던 거구나!‘ 그런데 이 책에서 똑같이 말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성경만으로 부족한 목사와 성도‘(24쪽)).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에서조차) 심리학을 외치는 교회들이 많다. ‘아무리 개혁주의 신앙을 외치는 분이라 할지라도, 심리학에서만큼은 너무나 관대하고 자상하고 포용력이 한이 없습니다. 심리학을 비판하는 사람을 광신자로 몰아세웁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가장 개혁주의적인 목사라고 자부하며 개혁주의 모임을 주도합니다.‘(27쪽) ‘결국 설교는 성경으로 하고, 가정사역은 심리학으로 하겠다는 생각입니다.‘(36쪽) 내가 제일 싫은 부분이 이런 부분이다. 개혁주의라고 한다면 칼빈의 5대 강령(칼빈이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에 따라 ‘오직 성경으로‘여야 하는 건데, 도대체 왜 심리학적 기술과 방법들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심리학적 기술과 방법을 동원하면서 개혁주의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는 대학교 4학년 때 읽었던 책이다. 그 책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그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통곡(?)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성령님의 인도라고 볼 수 있을까?(주서택목사는 그것을 성령님의 인도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건, 주서택목사가 하는 이 방법 ‘시간여행‘은 브래드쇼의 명상 방법과 똑같았다(167~183쪽). 그렇다면 명상은 성령님의 인도인가?
또 다른 문제점은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과 주서택목사가 말하는 ‘속사람‘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속사람‘이 두 번 나오는데, 두 번의 내용 다 주서택목사의 ‘속사람‘(내면아이)과는 다른 의미이다(78쪽 참조). 비단 ‘속사람‘뿐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 의미의 낱말과 성경에 나오는 낱말이 같은 뜻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잘못된 용어 사용은 ‘속사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한 가지는 구상화(Visualization)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꿈은 이루어진다‘를 뜻한다. 내가 지난 여름에 [미라클모닝]을 읽으면서 찝찝했던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바를 상상하고 소리내어 말해보라는 단계가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적이지는 않아서 그 단계를 뺐더랬다. 그게 아마 ‘구상화‘를 말하는 것 같다. 대학원에서 심리검사 수업을 들을 때도 이상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 그림이 답(미래)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비 오는 날의 사람‘ 그림을 공부할 때 교수님이 했던 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구상화‘인 것 같다. 그 교수님이 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융이 영지주의를 끌어왔다고 하니 당연한 결과인가 싶기도 하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관상기도도 구상화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방언도 그렇지 않을까?(방언 유경험자임을 밝힘)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방언‘으로 보여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언의 유익은 거기서 끝이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방언은 아무 유익이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뜻도 모르는 소리를 계속 기도로 하면,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방언을 하나의 이적으로 본다면, 이적은 신내림을 받은 무당에게서도 가능한 것이다.
‘구상화‘에서의 핵심은 ‘영적인 안내자‘이다(93쪽 참고). 나는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영적인 안내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가 제일 중요하다. 상상을 해서 떠오르는 대상, 그게 바로 ‘영적인 안내자‘이다. 기독교와 혼합이 되는 순간 그 ‘영적인 안내자‘는 예수님, 하나님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주서택목사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또, 기독교상담에서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을 성령님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봤는데, 기독교상담을 하면서 마음이 변하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일까? 일반 상담을 하면서도 충분히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상담 아닌 것으로도 가능하다. 생각, 습관, 행동이 바뀌는 것을 전부 성령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일반은총의 영역이 아닐까? ‘영적인 안내자‘는 예수님일까?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범신론을 인정하는 셈일 거다. 그렇다고 일반은총으로 보기에도 살짝 찝찝하다. 사실 나는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7권에서 이런 냄새(?)가 조금 났더랬다. 8년 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하지만.
‘내 과거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라는 결정론적 생각이 과연 성경적일까? ‘자아실현‘이 과연 성경적일까? 오늘날 사람들이 최고로 꼽는 ‘행복‘은 ‘자아실현‘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아실현‘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자기부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에 집착하는 것은 나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내 문제를 알아보겠다고 계속 과거를 파지만, 결과적으로 나에게 더 집중할 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더 멀어진다. 나의 이해와 다른 사람의 이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해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아도 사랑해야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해되어서 사랑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일 테니.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면아이‘로 돌아가서 지금의 나를 바꾸어 보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보겠다는 죄악된 생각이 그 배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속에 울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죄인‘으로서 나의 죄악을 회개하며 돌이키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83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며 과거가 우리를 이끌어 가지도 않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은혜가 왕노릇하는 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과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노예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136쪽)

심리학이 기독교와 대치되는 이유 중 하나는 문제를 죄로 바라보느냐, 병리현상으로 바라보느냐의 관점 차이 때문인 것 같다.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다루고 있기에 ‘인간은 죄인이다‘로 시작하는 기독교와 대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민이 생긴다. 나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으려 할 테지만, 학교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또, 구상화의 ‘영적인 안내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눈에 직접 보이는 대상만 ‘영적인 안내자‘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릭 워렌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 여러 모로 아직 정리는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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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hoo 2022-04-10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님의 글을 더 자주 접하고 싶네요.

Mulan 2023-04-17 01:03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