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을 읽으니 예수전도단에서 나온 [조이 도우슨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책이 생각난다. 예수전도단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하는 증거(이를 테면 갑자기 떠오르는 성경 말씀)를, 에드워즈는 참된 감정으로 믿을 만한 증거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두 부분이 모순적인지, 아니면 둘 다 수용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지 궁금하다. 지금 생각으로는 ‘둘 다 수용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신앙이 어릴 때는 갑자기 떠오르는 말씀이나 내가 요구하는 기도에 대해 ‘yes‘라는 응답하심으로 신앙을 공고히 하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앙이 자라갈수록, [하나님의 임재하심]에서 로렌스 수사가 말한 것처럼, ‘10년 동안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곤 할 때가 있는 것이 아닌지. 물론 이것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영역일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신앙감정론]에서는 ‘성령이 거룩한 사람들의 본성에 맞게 그들 가운데 내주하신다‘(49쪽)이라고 말하는데, 그 지점과 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의 주된 주장은 생생한 상상,개인적으로 자아에게 말하는 듯한 목소리,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설명할수 없게 떠오르는 성경 말씀, 은밀한 일의 계시 등과 같은 특이하고 ‘기적적인‘ 현상들이 참된 감정이라고 믿을 만한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현상들은 새로운 본성이나 새로운 창조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또한 그것들을 나타내지도 않기 때문이다. 놀라운 현상이나 예기치않은 현상에는 특별한 종교적 의미가 없다. 참으로 신적인 것들은 우리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은혜는 마술이 아니라 중생과 관계된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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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듯이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어떤가르침이 진리일 것이라고 ‘승인‘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영혼이 ‘감화‘ 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세상에서 의로운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야 하는 것이다. - 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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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또는직접적 인식의 체험은 에드워즈가 수용했던 경험 철학의 언어로서 마음의 감각(the sense of the heart)‘ 이라는 에드워즈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이 새로운 감각의 의미를 해석하는 확신 교리(the doctrine of conviction)가『감정론』의 주요 사상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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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무능력
아더 핑크 지음, 임원주 옮김 / 가나다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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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무능력](아더 핑크/임원주 옮김, 가나다) 304쪽(누적 4869쪽)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은 책이다. 올해 아더핑크의 책을 세 권 읽어야 했는데, 처음 읽었던 [전적 부패]는 다 못 읽고 책꽂이에 고이 꽂혀 있고, [전적 무능력]을 먼저 다 읽었다. 그리고 후에 읽은 책이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 책들을 읽기 전에는 아더 핑크가 누군지도 몰랐다. 개혁주의에 심취(?)하거나 책에 심취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더 핑크가 누군지 모를 것 같다. 이 책을 다 읽은지 다섯 달이 지나서 그때의 생각은 떠올리기 어렵겠지만, 띠지와 조금씩 적어둔 기록을 살펴보면서 서평을 적겠다.
최근 교리에 대해 드는 생각은, 앎에서 그치는 것의 위험성이다. [이것이 개혁신앙이다]에서 보았듯, 앎에서 그치는 교리는 교리를 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알지만 행하지 않는 내 삶을 보며 회의감이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바른‘ 삶,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탓한다. ‘어떻게 믿어도 삶만 바르게 살면 되지 않을까?‘라는 유혹도 생긴다. 예수님이 필요함에도, 예수님을 찾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교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믿음의 선조들이 성경을 이해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교리도 완전하지 않겠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교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 교리를 대체할 만한 교리가 나오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개인적으로 읽어야 하지만, 공동체적으로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교리가 바로 ‘공동체적 성경 읽기‘라는 생각이 든다. 교리를 놓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아더 핑크의 책을 읽다 보면, 다른 교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교파들이 주장하는 바가 어째서 잘못되었는지 바로잡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앞서 읽은 책에서 여러 번 적었지만, ‘어째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의 총회에서는 개교회에 퍼져 있는 아르미니우스주의(반펠라기우스주의)를 그대로 두는가?‘가 제일 궁금하다. 아더 핑크의 책을 비롯한 개혁주의 책을 읽다보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개혁주의와 결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데도 그대로 둔다. 교회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개혁주의가 혼재해 있고, 그대로 가르친다. 내가 예민한 건가?(펠라기우스주의자와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대한 설명은 36-40쪽에 잘 나와 있다.)
아더 핑크의 책을 비롯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책에서 계속 보이는 낱말은 ‘사법적‘이라는 말이다. 아담의 죄에 대한 죄책은 사법적으로 부과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법이다. 그 법을 어긴 대가로 사법적인 판단이 내려졌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설교와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은 롯의 사위들처럼 ‘농담‘으로 여기지 꼭 지켜야 할 ‘법‘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늘날에는 법의 권위마저 무너져서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성경을 법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해도, 그 의미가 퇴색된 느낌이다. 꼭 지켜야 할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내 삶을 옥죄었던 ‘-해야 한다‘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해도 된다‘가 너무 많아졌다. 아니, 다른 사람은 말씀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 그냥 내 삶이 흔들리고 변한 걸까? 이렇게 사람이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마지막날 사법적으로 판결하실 것이다.
흔히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죄인이 되었다고 하면, 단순히 도덕성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고. 하지만 이 책에서는 더 풀어서 설명한다. ‘타락했을 때 인간에게 가해진 형벌 부과에 관련해서 인간은 어떤 도덕적 혹은 영적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그 능력들을 바르게 사용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주의해서 명심할 필요가 있다.‘(41쪽) ‘비록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모든 능력을 타락사건에 의해 상실했지만 사람을 창조한 조물주는 인간을 관할할 권한을 상실하지 않았으며 합당한 것을 요구할 권리를 몰수당하지 않았다는 것도 명확하게 이해하자. 피조물로서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든지 행할 의무가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힘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로 인해 내팽개쳤다는 사실이 우리의 책무를 면제하거나 면제해줄 수도 없다.‘(43쪽) 즉, 우리는 도덕성을 지니고 있지만, 도덕성을 사용하는 능력(?)을 지혜롭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실제로 책에서 ‘우리 본성의 피폐는 지성의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을 지혜롭고 적절하게 사용할 능력에 있다. 사람이 타락하여 상실한 것은 기능이 아니라 원리이다.‘(56쪽)고 말한다.).
사람이 연약해서 죄에 넘어진다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인간의 연약함‘에 앞서 ‘인간의 악함‘은 왜 다루지 않는지 생각한다.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인간이 연약하니까 죄에 넘어지는 것으로, 면죄부로 사용하며 하나님께 화살을 돌리는 것 같아 마음이 늘 좋지 않았다. 그러면, ‘인간은 타락 때문에 도덕적으로 무기력해지고 힘이 없는 지경에 처해졌다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요구는 어떻게 적절할 수 있단 말인가?‘(122쪽) 여기에 대한 답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도덕적으로 무능력하다. 하지만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죄 아래에 팔린 자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정당한 요구를 받는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자신들의 주권자의 의로운 요구사항들에 부응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영원한 죽음의 고통을 짊어진 채 주권자의 의로운 요구에 부응하라는 권면을 받는다.‘(132쪽) 즉,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 뿌리까지 부패한 상태일지라도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책무가 면제되지 않는다.‘(158쪽) 계속해서 말한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의 정당한 주님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합법적인 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명령할 권리를 여전히 소유하고 있고 우리는 순종할 책무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이 관계에 따라 취급하고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능력이 없더라도 순종할 것을 실제로 요구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렇다. 타락은 책임성을 무효화하지도 않았고 손상시키지도 않았다는 것은 매우 확실하다.‘(220쪽) 사람이 연약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님을 이 책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을,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부패한 본성에 의해 가로막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존재로 그리는 것은 사실을 완벽하게 잘못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하지만 내주하는 죄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고 추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247쪽)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씀은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위로가 되는 구절이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 자신이 믿는 것과 실천하는것 사이에, 자신의 목표와 실편 사이에 폭넓은 불일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갈등 속에서 자주 패배한다. 그래서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리고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빈번하게 약해지고 지친다. 자신의 신앙고백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이 싸움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기도 한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청중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그리고 근면하게 검토하여, 내적 반대가 어디에서 일어나며 내적 반대에 대해 자신들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찾아내도록 하라고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269쪽)
사실상 소화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여러 번 읽어봐야 이해가 될까 말까한 책일 것이다. 교리에 관한 책이 이토록 어렵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교리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렵다고 밀어두면 결국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이루기 원한다면, 어려워도 읽는 게 맞는 것 같다. 물론,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는 이런 부분에 한정적인 것은 아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그 행함이 ‘거룩‘(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기반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무엇을 믿든지 ‘선한‘ 삶을 살면 그만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전적 은혜는 전적 무능력을 요구하고, 전적 무능력은 전적 은혜에 매달립니다.(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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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동물들은 양쪽으로 갈라졌고, 한쪽은 "스노볼에 투표하면 주 삼일 노동을!" 이라는 슬로건을, 다른 한쪽은 ‘나폴레옹에 투표하면 가득 찬 여물통을!"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오직 벤저민만이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식량이 풍족해질 것이라는 주장도, 풍차가 노동을 덜어 줄 것이라는 주장도 믿지 않았다. 단지 풍차가 있든 없든 삶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흘러갈 것이며, 언제나처럼 고생스러울 것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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