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
프란츠 베르펠 지음, 윤선아 옮김 / 강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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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사 크리스티가 필명을 사용하여 쓴 <봄에 나는 없었다>라는 소설이 있다. 재작년쯤 출간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추리소설이 아닌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에 빌려 읽었다가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쩜 그리 심리묘사를 잘해 놓았는지..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딸과 엄마의 갈등과 그에 따른 각자의 심리묘사가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분이 나타나셨다. 프란츠 베르펠씨.. 앞으로 기억해야할 이름이다.

 

가난한 집에서 별볼것 없이 자랐으나 유대인 친구가 자살하며 남겨준 연미복으로 파티에 참석하면서 부자에 권력자 집안의 딸과 결혼하고 승승장구하게 되는 레오니다스는 결혼생활중 한때 오스트리아에 파견나갔다가 만나 미친듯 사랑을 나누었던 베라 보름서의 편지를 받는다. '옅푸른 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가 겉봉에 자리잡은 편지 한통을. 그 편지를 뜯어보아야 할지 말지를 고민고민하던 그는 번뇌를 거듭하다가 결국 편지를 뜯어보게 되나, 편지에는 베라가 유대인인 한 청년의 취직을 부탁하는 평범한 내용이 담겨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청년이 두 사람의 아들이라 확신하는 레오니다스는 또 한번의 깊은 괴로운 상념 속에 빠져들어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하게 되고.. 그리고..  (서평은 기본적으로 나를 위해 쓰는 거긴 하지만 또 한켠으로는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되고 마는 이후의 이야기는 적지 않기로 한다.)

 

그 이후에 아내 아멜리의 오해와 사과(?)가 있고, 또 베라를 찾아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데까지, (과거 회상을 빼면) 이야기가 전개되는 기간은 단 하루일 뿐이다. 그 하루동안 레오니다스가 하게되는 여러가지 생각과 회상외에도 번뇌, 고통, (잘 드러낼 수 없는) 기쁨, 실망까지 모든 심리묘사가 재미있게 펼쳐진다. 특히나 자신의 불륜 사실이 재판에 붙여졌다고 가정하고 혼자서 재판장에게 그간의 자신의 인생과 진실어린 감정들을 털어놓는 (것을 상상하는) 장면, 초라하게 늙어 벤치위에서 잠을 자는 자신과 동년배인 노인을 보면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의 묘사, 레오니다스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자신의 질투어린 행동을 반성하는 아멜리의 독백, 자신을 희생하여 지키기로 한 아들을 잃은 상황에서의 괴로운 심정과 후회의 묘사 등이 돋보였다.

 

그런데 무엇보다 인상깊었던 것은 이것이 유대인을 향한 핍박이 시작되었던 시기, 유대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이것은 독일에서 스멀스멀 어두운 기운이 유대인들을 덮쳐가고 있는 시기에 그 기운을 곧 이어받게 되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과거 사랑했던 이스라엘 여자와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반쪽) 이스라엘인 즉 유대인 아들의 구출 임무를 맡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가난했던 시절 유대인 의사의 집에서 가정교사를 했으며 그곳에서 유대인 여성인 베라를 만났고, 그후 그녀를 다시 만나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유대인 핍박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반대해선 안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잠시나마 유대인 아들을 구해내기 위한 느닷없는 도전을 시작하였을 때, 그에 대한 다른 이들의 반응, 그로인해 자신이 겪을 어떤 상황들에 대한 인식 등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게다가 작가인 베르펠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무언가 뜨끔한 기분이었다. 유대인으로서 이렇게 쿨하게 이 시기를 표현할 수도 있구나. 멋지지만 아프다. 라는..

 

아무튼 이 소설은 참으로 멋지다.그리고 재미있다. 처음부터 소리내어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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