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 여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어머니는 그 말을 싫어했다. 현모양처, 알뜰한 당신, 어머니 손맛 같은 말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와 노인이 합해진 의미에서의 할머니로만 대해지는 것 역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희생과 헌신, 고향의 이미지, 경제적 무능, 부지런함과 절약, 쇠약함과 퇴행, 그리고 지혜로움 같은 미덕까지. 어머니는 자신이 힘들게 살아온 것은 맞지만 누구에게도 그것을 동정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어릴 때 같은 반의 고아원 아이가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불쌍하다고 말했다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불쌍한 게 아니라 너보다 운이 나쁜 거다. 뭐 그런 식으로 혼났는데 누나는 어린애가 어떻게 알아듣느냐며 지금까지도 억울해해했다. 어머니는 관공서의 현수막에 적힌 어르신이라는 표현도 호들갑스럽다고 싫어했다. 귀여운 할머니라는 말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틀니를 아무데다 빼놓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것은 싫어하면 안 되는 물건이었으므로 귀엽게 여기려고 노력했고 결국 성공했는데, 귀여움은 그처럼 너그럽게 보아주거나 기특한 느낌인 경우에 쓰는 말이라는 거였다. 

   어머니는 '할머니 같다'라는 말 못지않게 '할머니 같지 않다'는 말에도 거부반응을 보였다. "내가 인자하게 대하면 할머니라서 그렇다고 하고 냉정하게 대하면 할머니인데도 그렇다고 하고, 결국 할머니가 인자하다는 생각은 안 바뀌지. 근데 내 성격이 냉정한 것하고 할머니인 것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 그럼 누가 잘못 생각한 거겠냐. 그 사람들이냐 나냐." "뭐가 그렇게 복잡하고 까탈스러워요."  형은 어머니가 보통의 어머니답지 않은 말을 할 때면 곧잘 짜증을 냈다. "그래봤자 할머니는 할머니잖아요." 어머니는 곧바로 대꾸했다. "내가 할머니지만, 그 사람들이 아는 그 할머니는 아니야. 그러니까 아는 척 좀 하지 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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