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개 투표를 정책에 대한 내 평가와 가치를 반영하는 의도적 행위로 보고, 정책과 무관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투표소의 위치 따위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2000년에 애리조나 선거구에서 투표 유형을 분석한 결과, 학교 재정 지원 증가안에 찬성한 비율은 투표소가 학교 안에 설치된 경우가 근처 다른 곳에 설치된 경우보다 훨씬 높았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에게 교실과 사물함 사진만 보여줘도 학교 지원안에 찬성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결과가 나온 실험도 있다. 이 사진 효과로 나타난 차이는 학부모와 학부모가 아닌 사람 사이의 차이보다도 컸다. (...)


한 예로, 돈을 상기시키면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어느 실험에서는 참가자들에게 다섯 개 단어 묶음을 여러 개 주고, 단어 네 개를 골라 돈을 주제로 문구를 만들라고 했다(high, a, salary, desk, paying으로 a high paying salary를 만드는 식이다). 이때 주변에 문구 만들기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은연중에 돈을 연상케 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이를테면 탁자 위에 모노폴리 보드게임에 쓰는 지폐가 놓여 있기도 하고, 컴퓨터 화면에 달러가 둥둥 떠다니는 그림이 화면보호기로 작동되기도 했다. 


돈을 연상케 하는 환경에 노출된 사람들은 더 독립적으로 행동한다. 이들은 어려운 문제를 풀 때 실험 진행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거의 두 배의 시간을 들여가며 문제를 스스로 풀려고 애썼다. 자립심이 높아졌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들은 더 이기적인 성향도 보여서, 실험 과제를 두고 쩔쩔매는(실제로는 쩔쩔매는 척하던) 학생을 돕는 데 인색했다. 실험 진행자가 바닥에 연필 한 묶음을 떨어뜨렸을 때도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돈을 생각한 참가자들은 더 적은 개수의 연필을 주워주었다. 비슷한 다른 실험에서는 참가자들에게 곧 어떤 사람과 안면을 트는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말한 뒤, 그 사람을 데려올 동안 의자 두 개를 배치해 두라고 했다. 그러자 역시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돈을 생각한 참가자들은 그렇지 않은 참가자들보다 의자를 더 멀리 떨어뜨려 배치했다(118 cm 대 80 cm). 이들은 혼자 있는 것도 훨씬 더 좋아했다. 


이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돈을 생각하면 개인주의가 촉발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엮이거나 남에게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꺼리는 성향이다. 

철자가 빠진 두 단어 W _ _ H와 S _ _ P를 생각해보자. 창피했던 행동을 떠올려보라는 말을 최근에 들었던 사람이라면 두 단어를 WISH와 SOUP보다는 WASH와 SOAP으로 볼 공산이 크다. 그런가 하면 동료의 등에 칼을 꽂는 상상만으로도 건전지, 주스, 초코바보다는 비누, 살균제, 세제를 살 확률이 높아진다. 영혼이 더러워졌다는 느낌은 몸을 씻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데, 흔히 '맥베스 부인 효과'라 부르는 현상이다. 


씻는 부위는 관련 죄와 연관성이 높다. 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가상의 인물을 상대로 전화나 이메일로 거짓말을 하라고 했다. 그런 다음, 여러 물건을 놓고 어떤 것이 좋은지 물었다. 그러자 전화로 거짓말을 한 사람은 비누보다 구강청결제를 골랐고, 이메일로 거짓말을 한 사람은 구강청결제보다 비누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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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22-04-0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도움이 되는 문장들이네요. 이 책 갖고 있는데, 저도 읽어 봐야겠습니다.
저는 이번 대선에서 처음으로 투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지당의 대선후보로 나온 인물을 오래 전부터 너무너무 싫어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선거가 끝난 이후로 저는 모종의 착잡함을 시시각각 느끼는데 1) 내가 싫어하는 후보가 당선이 되는 게 싫어 반대쪽 후보에게 차라리 투표를 해 줄까 꽤 오랜 시간 고민했던 점과 2) 당선자가 바로 그날부터 능숙한 독불장군처럼 구는 작태가 너무나도 얼척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이런 저에게 필요한 건 어떤 물건일까요, Joule 님? ;)

Joule 2022-04-06 16:22   좋아요 0 | URL
<생각에 관한 생각>에 그런 내용이 나와요.

「미국인이 워런 하딩을 대통령으로 뽑았을 때 대통령으로서 그의 유일한 자질은 그 역할의 적임자처럼 생겼다는 것이었다. (...)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도 없이 강인하고 결단력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표를 던졌다.」

저에게도 여러 모로 심란한 선거였어요. 내 자신이 절대 용납 못할 인간에게 표를 던진 최초의 투표였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이런 쓰레기가 뽑힐 수도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지켜지는 것이 좋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을 보아도 좋은지 모르고 나쁜 것을 보아도 나쁜지 모른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라 저는 그냥 이것이 어쩌면 감내해야 할 민주주의의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투표 결과가 나오면 저는 한동안 사람들이 너무너무 꼴뵈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 당선자를 뽑았을 사람들하고는 당분간 상종을 안 합니다. 그전까지 원만하게 자주 보던 사이라고 해도. 분이 풀릴 때까지. 그런데 대개는 분이 꽤 오래 안 풀리고, 그 인간관계를 끊어버리더라고요 제가 ㅋㅋㅋ)

한수철 님에게 필요한 물건은, 음... 모르겠어요. 나중에 혹시 생각나면 불현듯 알려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