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러시아워의 스피드 메이커, 여차장

 

 


7전짜리 부영버스와 5전짜리 전차의 경쟁   

  

 

1928년 4월 22일, 30년 동안 대중교통의 왕자로 군림했던 ‘전차’에게 강력한 적수가 생겼다. 버스가 등장한 것이었다. 경성부는 일본에서 만든 ‘우즈레(ウーズレー)’라 불리는 12인승 상자형 버스를 도입했다. 정원은 22명이었으며, 차비는 구역별 7전으로 책정했다. 경성부에서 버스 사업을 했기에 때문에 ‘부영버스’라 이름 지었다. 버스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난생처음 보는 이 거대한 ‘구루마’를 타보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4월 22일부터 5월 20일까지 약 한 달간 부영버스는 순이익만 1,662원을 남기며 성공을 거두었다. 시민들의 호응에 부영버스 사업은 탄력을 받았고, 4개월 만인 1928년 8월에 들어서는 버스를 20대로 증차했다. 1929년 8월 말, 경성 시내에서 운행되던 전차는 120대였고, 버스는 40대 정도였다. 전차를 이용하는 승객은 11만여 명이었고, 버스는 1만여 명이 이용했다. 당시 경성 인구가 39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해본다면 1만여 명이라는 수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부영버스는 날로 번창해갔다. 버스도 더 늘고 노선도 신설됐다. 그러나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결과, 사업은 영업 부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전차 운행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경성전기주식회사는 이 틈을 노렸고, 결국 1933년 3월 ‘경전(京電)’이 부영버스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같은 해 4월부터는 버스의 색도 은색으로 바뀌었다. 이제 부영버스는 사라지고 ‘경전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부영버스의 영업 부진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버스 운행 노선이 큰 문제 중의 하나였다. 당시 부영버스의 운행 노선은 전차의 노선과 많은 부분 겹쳤다. 비록 전차의 요금과 동일한 5전으로 버스 요금을 인하하기는 했지만, 전차가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을 버스가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경전버스는 부영버스를 인수하고 난 뒤 가장 먼저 버스 노선을 개편했다. 전차의 노선과 겹치지 않게 버스 노선을 바꾼 것이었다. 초기 부영버스의 운행 노선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워’ 선
제1구: 경성역―남대문 통 5정목―태평 통 2정목―경성부청 앞―광화문 통―체신국 앞―총독부 앞
제2구: 총독부 앞―안국동―견지동(종로소학교 앞)―종로 1정목―종로 2정목―파고다 공원 앞―종로 3정목-관수교(觀水橋)―황금정 3정목―본정 4정목―대화정 1정목(헌병대 사령부 앞)

 
   



새로운 ‘탈 것’에 대한 호기심과 5전이라는 저렴한 가격 때문에 버스는 경성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경성 사람들의 이러한 애정은 신식 교통 기관에 대한 호기심, 저렴한 가격 때문만은 아니었고, ‘여차장’이라는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새로 나온 뻐스 걸은 조선에서도 첫 시험인 것만큼 그들은 모든 것이 생소하고 또한 일반 시민도 여기에 대해서는 일종의 호기심을 갖고 대한다. (……) 아직도 본 일이 없는 커다란 자동차에 꽃같이 젊은 여성이 괴상한 복색을 하고 한길로 내달리는 것을 구경하려고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또 7전짜리 자동차라는 바람에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함부로 타는 바람에 별별 희극이 버스 안에서 일어나서 버스 걸을 울린다 한다. (……) 버스가 개통한지 사흘이 못 되어 벌써 승객 중에 별별 잡것들이 있어서 1전이 모자라니 6전만 하라고 하고, 두 구역을 타고 한 구역만 내겠다 하며, 술이 취해서 버스 안에다 미역전을 벌이기도 한다고 한다. 이런 짓을 당할 때마다 눈에서 눈물이 부지불식간에 쏟아져 나온다 한다.
― “조선여성의 새 직업- 가두에서 분투하게 된 뻐스 걸의 설움”, 〈동아일보〉, 1928년. 4월. 25일.

 
   



1928년 4월 버스의 개통에 맞춰 경성부영버스회사에서는 여차장을 모집했다. 굳이 버스의 차장을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채용한 이유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친절하다는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차에도 차장이 있었는데, 차장은 남성이었다. 전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거칠고 투박한’ 남자 차장에 대해서 가끔씩 불만을 표출했었고 이런 이유에서 버스 차장은 애초부터 여성이 고용된 것이었다.


경성부영버스에서는 여차장 모집 광고를 냈는데, 응모 자격 요건을 15세에서 20세 미만의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미혼 여성으로 국한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최초로 뽑힌 여차장은 모두 12명이었으며, 경쟁률을 ‘6.2:1’이었다. 1930년에는 7명의 여차장을 뽑는데 99명이 지원해서 ‘14.1:1’의 경쟁률을 보였다. 여성들이 일급 80전 내외의 여차장이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는 당시만 해도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직업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1928년부터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에 따른 실업률 증가도 한몫을 했다. 1931년 경성부영버스에 근무하는 여차장은 65명이었으며, 경인버스에는 17명, 경인유람버스에 수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1934년 4월부터는 평양에도 버스가 운행되었고, 이와 함께 여차장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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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루쿠루 2010-12-16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두에서 분투하게 된 여성 '버스 걸'의 설움. 기사 제목도 마음을 울립니다.

자음과모음 2010-12-27 17:21   좋아요 0 | URL
글 중에 '승객 중에 별별 잡것들이 있어' 부분이 웃기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요 ㅎ

비로그인 2011-04-0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료만 높다면야 여자라고 어딘들 지원안하겠습니까!
 

 

6. 러시아워의 스피드 메이커, 여차장

 

 

 

 

   

약 1년 반 만에 세계의 도시행진 행렬의 맨 꽁무니를 비청거리면서 쫓아가는 가련한 경성의 한복판
―김기림, "에트란제의 第一課" (1), <중앙일보>, 1933. 1. 1.

 
   

 


신경증을 앓는 대경성 

 

   
 

나의 ‘아이보리’ ×××차고(車庫) 구루마 No. 3! 구루마는 멈추지 않고 페이브먼트(pavement) 위를 달리고 있다. 서대문에서 광화문! 그리고 종로! 스톱! 오라이! 구루마가 정거장에 머물 때마다 나는 앵무새와 같이 꼭 같은 말 구절을 몇천 번이고 반복한다. (……) 밀려 내리는 사람들! 그리고 밀려 욱 하고 떠밀고 오르는 군중! 만원이 된 구루마 안은 잔뜩 달은 한증막과 같이 확확 증기가 가슴에 안겨온다!
―×××차고(車庫) 박순자(朴順子), “뻐스껄의 생활기”, <제1선>, 1932. 8.

 
   

 

식민지 경성은 이미 대도시였다. 1920년대 ‘경성’은 1900년대 ‘한성’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한성’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경성’은 별천지였다. 식민지 근대화의 깃발이 거세게 휘날릴수록 한성의 옛 자취는 사라져갔다. 경성의 도시 계획은 식민지 조선 총독이라는 ‘절대권력’의 독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고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역사적 유산은 무시되거나, 방치되거나, 말살되었다. 한성의 모습을 지우고 ‘식민 수도’ 경성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식민지 조선 총독의 야망. 서구의 대도시와 같은 휘황찬란한 제국의 도시를 만들고 싶은 ‘절대 권력’의 야망은 경성을 기형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조선총독부가 경성 도시 계획을 통해 디자인한 경성의 공간 구조는 식민지 통치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식민지 조선의 권력들, 즉 일본인들의 상업 활동과 생활의 편의성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간선 도로망을 중심으로 한 도시 경관 정비 사업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시민들의 자율성을 담보해줄 만한 공공 공간이 설 자리는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도로를 갈아엎고, 가로수를 심고, 랜드마크로 삼을 만한 건물을 지었다. 자동차, 전차, 버스가 정신없이 오가며, 백화점이 생기고, 극장이 문을 열고, 카페가 화려한 네온을 켜고, 놀이공원이 들어서고, 시내의 상가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변화해가는 경성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근대적 ‘진보’이자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김기림처럼 ‘세계 도시 행렬의 맨 꽁무니를 쫓아가는 가련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으며, “조선의 서울도 요즘 와서 어지간히 모던 외입쟁이가 되어간다”라는 조롱 섞인 기사가 1931년 12월 15일자 <중앙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호불호를 떠나 경성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1900년대 경성, 아니 ‘한성’의 모습은 어땠을까. 당시의 유명한 언론인이었던 유광렬은 1900년대 한성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한다.   

 

   
 

낮에 길거리에 나가면 좁은 골목 음식집에서 국 끓이는 냄새 안주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 약방에서는 갓을 쓴 양반들이 한가로이 장기를 둔다. (……) 낮이면 길거리에는 지금 많이 다니는 자동차는 한 대도 더 볼 수가 없고 간간히 자전거가 다니어도 그리 흔하지 못하였다. (……) 밤이 되면 한없이 길게 뚫린 좁은 골목은 캄캄해진다. 가끔 한데로 뚫린 아궁이에 장작 집어놓고 불 때는 것이 장인의 눈동자 같이 뚜렷뚜렷하게 보였다. 남폿불을 켜고 방에 앉으면 어디서 불어오는 지 멀리서 부는 호적 소리가 장안만호천문(長安萬戶千門) 근심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린다.
―유광렬(柳光烈), “대경성 회상곡”, <별건곤>, 1929. 1.

 
   

 

유광렬이 회상하는 한성은 느리지만 여유롭고 인간의 온기가 아궁이의 연기처럼 온 동네를 휘감고 있는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은 풍경이다. 물론 유광렬이 묘사한 한성의 풍경은 1920년대 대도시 경성의 풍경을 거울로 삼았을 때 도드라진 풍경이며, 이제는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가 동원되어 재구성된 그만의 내면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좁은 골목, 캄캄한 골목, 아궁이불, 남폿불, 한가롭게 장기 두는 일 등은 사실 190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들이었다. 1900년대 지식인들은 유광렬이 묘사한 한성의 모습을 서구의 근대적 문명에 뒤처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0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이 비판했던, 개화의 ‘은택’을 받지 못했던 풍경들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유광렬에게는 한없이 정감 있고 향수 어린 풍경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만큼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성은 초스피드로 ‘개발’되고 있었으며, 그 개발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고, 이로 인해 삶의 여유로움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뿌-웅 뿌-웅 까르르르- 뿌-웅
먼지를 연기같이 일으키면서 진흙 뭍은 자동차와 기생 태운 서울 자동차가 엇바뀌어 지나가는가 하면 탁 탁 탁 탁 탁. 큰일이나 난 것처럼 자동자전거가 눈이 뒤집혀 닿는다.
와지직 와지직 낄 낄 와- 와- ‘집마차’
덜거덕 덜거덕 어라 이놈의 소야 ‘소구루마’
뽕- 뽕- 기생 탄 인력거 텁석부리 ‘인력거’
따르릉 따르릉 아차차 자전거가 어린애를 치고 쓰러졌다.
땡 땡 웅- ‘아이고 나 좀 내려주셔요’
쩔-렁 쩔-렁 어서 가- 이놈의 소야 ‘나뭇바리’
저벅 저벅 저벅 ‘중학생’
짜박 짜박 짜박 ‘송곳 굽 구두’
깨육 깨육 깨육 딱- 딱 ‘모던보이 지팡이 소리’
날마다 아침부터 밤중까지 이 요란한 속에서 눈을 핑핑 돌리면서도 그래도 신경쇠약을 부르지 못하는 교통 순사야말로 건강하다면 굉장히 건강한 몸이요 불쌍하다면 굉장히 불쌍한 신세지.
―쌍에스생(双S生), “대경성 광무곡(大京城 狂舞曲)”, <별건곤>, 1929. 1.

 
   

 

‘쌍에스생’이라는 도무지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필명의 기자가 쓴 “대경성 광무곡”은 유광렬의 “대경성 회상곡”과 같은 잡지의 목차에 나란히 표기된 글이다. 유광렬이 20여 년 전 한성의 풍경을 묘사했다면, 쌍에스생은 당대의 경성 풍경을 스케치했다. 1920년대 경성의 풍경은 역동적이다 못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고 어수선하며 자극적이다. 이처럼 요란한 대도시 경성에서 교통 순사만 신경쇠약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바삐 돌아가는 세상, 정적이고 느린 것은 퇴보로 비난받았던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 산다는 것은 식민지 근대화의 산물인 속도와의 전쟁을 치러야만 함을 뜻했으며, 이러한 경성 사람들의 러시아워를 책임졌던 버스 여차장 역시 신경쇠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근대의 직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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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야기의 메신저, 전기수

 

이야기를 소비하는 인간 


 
 

   
 

정조 때에 김중진(金仲眞)이란 사람이 나이 늙기도 전에 이가 모두 빠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롱하여 ‘과농(瓜濃-오이무름)’이라 불렀다. 그는 익살스런 농담과 상말을 잘하였는데, 세태와 인정을 곡진하고 섬세하게 담아내어 종종 들을 만하였다.
―유재건 지음, “김중진”, 〈이향견문록〉,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글항아리, 2008

 
   

  

   
 

이야기 주머니 김옹(金翁)은 야담이나 패설을 잘하여 듣는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배꼽을 잡는다. 그는 한 대목 한 대목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면 핵심을 꼭꼭 찌르며, 이야기에 살을 붙이면서 이러쿵저러쿵 잘도 말한다. 말하는 재간이 뛰어나 귀신이 도와주듯 민첩하다. 그래서 우스개 이야기[滑稽]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두머리라 할 만하다. 더구나 그 내용을 따져보면 모두가 세상을 풍자하고 풍속을 경계하는 말들이었다.
―조수삼 지음, “말 주머니[說囊]”, 〈이야기책 읽어주는 노인〉,  박윤원·박세영 옮김, 보리, 2005; 안대회,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한겨레출판사, 2010

 
   



재담에 능했던 김옹, 즉 김중진은 직업적인 전기수는 아니었지만 옛 이야기의 달인이었다. 소설도 일종의 이야기이고, 역사도 크게는 이야기이다. 아직도 사람들은 이야기에 몰입한다. 김중진의 구성진 재담과 전기수의 낭랑한 낭독은 이미 세월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야기란 곧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를 보라.

〈아라비안나이트〉는 세헤라자데가 죽음을 담보로 왕과 펼치는 일종의 이야기 게임이다. 1,001일 동안 펼쳐지는 세헤라자데의 요설 앞에 결국 왕도 무릎을 꿇고야 만다.   

 

 

세헤라자데는 1,001일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감으로써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해갔다. 세헤라자데에게 이야기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다르게 말하면 죽음을 지속적으로 유예시키는 무기였다. 이야기는 인간의 가장 두려운 공포인 죽음을 망각하게 하고, 죽음을 유예시키고, 죽음과 대항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죽지 않는 한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했던 삶을 살아보고, 상상조차 못해본 꿈을 꿀 수도 있을 터이다.

자신의 몸을 태워 마지막 불씨가 사그라질 때까지 형형하게 빛나는 촛불처럼, 전기수는 이야기라는 마음의 횃불로 다른 이들의 어둡고 외로운 삶을 밝혀주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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꿍얼꿍얼 2010-12-1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촛불의 운명을 닮은 이야기꾼의 따스한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

비로그인 2011-04-07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 사는 것 같아요. 어르신들이 보시지도 않으면서 TV를 켜놓고 사시는 것을 젊어서는 이해 못했었는데 요즘은 나도...
 

 

5. 이야기의 메신저, 전기수

 

낭독의 공동체


 
 
근대 이전만 해도 이야기책을 혼자 읽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책을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만 읽는 ‘묵독(黙讀)’의 관행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책 읽기는 대부분 소리 내어 읽는 ‘낭독’의 방식을 취했다. 전기수는 직업적인 낭독자였고 이들의 활동은 근대 사회에 접어들어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이전 시대보다 증가했고, 신문과 잡지의 등장으로 읽을거리 또한 증가하면서 전기수는 점점 사라져갔다. 그러나 전기수가 하던 일, 즉 이야기 혹은 책을 낭독하고 구연하는 전통은 지속되었다.

근대 초기 신문과 잡지를 비롯한 다양한 서적은 지금처럼 전적으로 개인이 구독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18세기 중반에 세책방이 있었다면 20세기 초에는 책 대여점에 해당하는 신문종람소나 서적종람소가 등장했다. 민중들은 이곳에서 책이나 신문을 대여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앞선 시대의 전기수처럼 여러 사람들 앞에서 글을 낭독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낭독은 전기수와 같은 직업적 개념이 아니었고, 돈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근대 초기 신문 한 장은 약 60여 명의 공동 독자를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신문과 잡지 읽기 방식의 일상화로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함께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각 동마다 넓은 집으로 신문종람소(新聞縱覽所)를 정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 동네의 남녀노소가 신문종람소에 모여 각각 한 자리씩 차지하고 쭉 둘러앉아 혹 담배를 피우고 혹 아이를 안고 혹 짚신을 삼고 자리를 짜기도 하며 혹 옷을 짓고 물레질을 하기도 하는데, 유식한 사람이 높은 의자에 앉아 신문을 낭독한 후에 의미를 설명하면 내외국 사정과 고금의 형편을 모를 것 없이 다 알게 되었다.
―김유탁, “신문 광포(廣布) 의견서”, 〈서우〉, 1907년, 8월

 
   



낭독의 특징은 파편화되어 있는 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묵독이 고립된 개인을 양산한다면 낭독은 공동체적 개인을 길러낸다. 근대에 들어서 전기수와 같은 낭독의 문화가 사라지고 묵독이라는 독서 방식이 등장한 것은 근대적인 ‘공적 영역’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학교, 도서관, 기차, 버스 등과 같은 공적 장소에서 책을 읽을 경우 묵독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근대적인 ‘매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근대적인 공적 영역의 탄생과 함께 낭독의 문화가 점점 사라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낭독의 문화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의 소설가였던 한설야의 회고에 의하면 식민지 조선에서도 옛날의 전기수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이야기꾼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이들은 ‘신소설’ 혹은 옛날 소설을 파는 장사치들이었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책을 팔았던 책장사들은 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팔 책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구연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허줄한 사나이가 가스등을 앞에 놓고 앉아 있으며, 그 사나이는 무슨 책을 펴 들고 고래고래 소리 높여 읽고 있었다. 울긋불긋 악물스러운 빛깔로 그려진 서툰 그림을 그린 표지 위에 ‘신소설’이라 박혀 있고 그 아래에 소설 제명이 보다 큰 글자로 박혀 있었다. 그 사나이는 이 소설을 팔러 나온 것이며 그리하여 밤마다 목청을 뽑아가며 신소설을 낭송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나이의 주위에는 허줄하게 차린 사람들이 언제나 삥 둘러서 있었다.
얼른 보아 내 눈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인력거꾼, 행랑어멈 같은 뒷골목 사람들이었다. 거기에는 젊은 여인의 얼굴도 띄엄띄엄 섞여 있었다. 가운데 앉은 사나이가 신이 나서 점점 목청을 뽑을수록 사람들은 귀담아 듣느라고 숨소리를 죽였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가만히 들으려니까 그 사나이가 읽는 신소설에는 지금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의 설움과 비슷한 것들이 적지 않게 적혀 있는 것이다. (……) 그들은 소설에 그려져 있는 것보다 더한 비극이 앞날에 자기들에게로 달려들 것을 방불히 내다보는 듯이 마침내 어떤 아낙네는 흑흑 느껴 울기 시작했다. (……) 나는 그 뒤부터 매일같이 이 다리 밑 풍경을 찾아 다녔다. 신소설 장사치들은 동대문께 다리 밑에서 시작하여 종로 쪽 다리 밑으로 이동하면서 밤마다 소설 낭송을 했다.
구차한 사람들이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그 소설들을 샀다. 그 소설 내용은 거지반 다 가정 비극이지만 이 비극은 이미 가정 범위를 벗어나서 커다란 사회 문제로 되고 있었다.
―한설야, “나의 인간수업, 작가수업”, 〈우리시대의 작가수업〉, 역락, 2001

 
   



책장사들의 구성진 낭독 솜씨 여하에 따라 책의 판매가 결정되었으니 어떤 면에서 식민지 시대의 책장사들은 전기수의 후예였다. 전기수가 전문적으로 책을 읽어주고 대가를 받았다면, 신소설이나 옛날 소설을 판매했던 책장사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책을 판매하기 위하여 책을 읽어주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기까지 이야기책에 매료되었던 독자들은 ‘보는 책’보다 ‘듣는 책’에 더 예민하고 풍부한 감각의 촉수를 뻗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책 읽기 문화는 1960년대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했다. ‘글패’라고 불렸던 이들은 식민지 시대 책상사가 그랬던 것처럼 책을 팔기 위해 장터를 돌아다니며 민중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그들의 책 읽기는 책을 팔기 위한 일종의 공연이었던 셈이다. 전기수가 혼자 활동을 했다면, 글패는 말 그대로 여럿이 함께 돌아다니며 책을 팔고 이야기책을 구연하던 무리들이었다. 이제 낭독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는 향수어린 풍경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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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7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로당에서 화투만치는 어르신들을 보면 책이라도 읽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5. 이야기의 메신저, 전기수

 

전기수와 세책방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직업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문자가 탄생하고 책이 탄생하면서부터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사람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즉,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의 문화적 변동이 일어나면서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이야기책 읽어주는 사람인 전기수의 실체가 문헌상에 알려진 것은 18세기 중반이었다.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노인은 동대문 밖에 살았다. 그는 언문(諺文)으로 쓴 이야기책을 입으로 줄줄 외웠는데, 〈숙향전(淑香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심청전(沈淸傳)〉, 〈설인귀전(薛仁貴傳)〉 따위의 전기 소설들이었다.

매달 초하루에는 청계천 제일교(第一橋) 아래 앉아서 읽고, 초이틀에는 제이교(第二橋) 아래 앉아서 읽으며, 초사흘에는 이현(梨峴)에 앉아서 읽고, 초나흘에는 교동(校洞) 입구, 초닷새에는 대사동(大寺洞) 입구, 초엿새에는 종루(鐘樓) 앞에 앉아서 읽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기를 마치면 초이레부터는 거꾸로 내려온다.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가고, 올라갔다가 또 내려오면 한 달을 마친다. 달이 바뀌면 또 전과 같이 한다.
노인이 전기 소설을 잘 읽었기 때문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노인 주변을 빙 둘러 에워쌌다. 노인은 소설을 읽어가다 가장 재미나고 긴장되고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앞다투어 돈을 던진다. 이를 ‘요전법(邀錢法)’이라 한다.
―조수삼, “전기수(傳奇叟)”, 〈추재기이〉,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2010; 안대회,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한겨레출판사, 2010

 
   

 

전기수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활동했다. ‘낭독의 달인들’이었던 전기수는 조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 점령하의 쿠바에서도 있었고, 중세 유럽에도 있었으며, 미국에도 있었고, 중국과 일본에도 존재하는 직업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입담과 재치와 연기를 십분 활용하여 독자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전기수가 책을 낭독하는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담뱃가게, 약국, 활터, 주막 등이 전기수의 주 공연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무대가 펼쳐지면 전기수는 부채를 쳐서 분위기를 맞추며 구연을 시작했다. 전기수는 ‘요전법’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고, 부잣집에 불려가 책을 대신 읽어주고 얼마간의 돈을 받기도 했다.  





전기수는 이야기책을 단순히 읽어주는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변사의 목소리 연기에 따라 영화의 흥행이 좌지우지되었던 무성 영화 시대의 변사들처럼, 전기수 역시 자신이 낭독할 책의 내용을 줄줄이 외운 다음 낭독 연기를 했던 것이다.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동화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어주듯, 전기수도 이야기를 듣는 청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구연 역량을 총동원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청자들로부터 단돈 몇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책을 읽고 싶은 욕구는 강했지만 글을 읽지는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에 등장한 것이 전기수라는 직업이었다. 민중들은 전기수가 낭독하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지친 일상을 잠시나마 위무할 수 있었다. 글을 쓰고 읽을 줄 몰랐던 민중들이 많았고, 책값이 워낙 비싸서 개인적으로 책을 소유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이야기와 민중 사이를 매개했던 직업이 바로 전기수였다.  

 

   
 

이자상(李子常)은 그 이름을 알 수 없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여러 종류의 술서(術書)를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패관제서(稗官諸書)에 익숙하여 어록문자(語錄文字)에 관계된 것을 다 통달하였다.
가난하여 능히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어 혹 재상의 집에 출입하였는데, 소설을 잘 읽는다고 이름이 났다. 만년에는 군문(軍門)의 적은 봉급을 받았고, 친구 집에서 기식하는 일이 많았다.
―유재건, “이자상”, 〈이향견문록〉,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글항아리, 2008

 
   

 

   
 

이업복(李業福)은 겸인[傔人-청지기]의 부류다. 아이 적부터 언문 소설책들을 맵시 있게 읽어서 그 소리가 노래하듯이 원망하듯이 웃는 듯이 슬픈 듯이 가다가는 웅장하여 영걸의 형상을 나타내기도 하고, 가다가는 곱고 살살 녹아서 예쁜 계집의 자태를 짓기도 하는데, 대개 그 소설 내용에 따라 백태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자로 잘사는 사람들이 그를 서로 불러다 소설을 읽히곤 했다.
―이우성·임형택 역편, “동원삽화”, 〈이조한문단편집〉 상, 일조각, 1990

 
   



능력이 뛰어난 전기수들은 부잣집의 초청을 받아 이야기를 구연하기도 했다. 중인 계층의 부잣집에서 전기수를 초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초청한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이 때문에 전기수는 가끔씩 가벼운 위장을 하기도 했다. 여자처럼 화장을 하고 쓰개치마를 쓰는 경우도 있었으며, 의원이나 방물장수 행세를 하며 규방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전기수들은 〈심청전〉, 〈춘향전〉, 〈서유기〉, 〈조웅전〉, 〈장화홍련전〉 등을 낭독했는데, 한 권을 낭독하는 데 보통 4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이들은 낭독의 달인일 뿐만 아니라 암기의 달인들이었다. 전기수들은 이야기를 읊을 때 이야기책을 보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책을 통째로 외우고 나서 자신이 해석한 방식에 따라 이야기를 구연했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책을 구입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가난한 민중들에게 책을 산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다. 제 아무리 뛰어난 전기수라 해도 그들은 이야기를 풀어내며 푼돈을 벌던 가난한 민중이었고, 책을 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18세기에 세책방(貰冊房), 즉 책을 빌려주는 일종의 서점이 등장한 것은 이야기책에 매료되어 이를 읽고자 하는 독자들이 증가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세책방이라는 상업 공간의 등장은 이야기가 상업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상품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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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7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하게도 이국땅에 세책방이 있어서 신간을 읽을 수 있답니다. 워낙 책값이 비싸서 사기도 소장하기도 어렵답니다. 한권에 3불. 그래도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