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러시아워의 스피드 메이커, 여차장

 

 

 

 

   

약 1년 반 만에 세계의 도시행진 행렬의 맨 꽁무니를 비청거리면서 쫓아가는 가련한 경성의 한복판
―김기림, "에트란제의 第一課" (1), <중앙일보>, 1933. 1. 1.

 
   

 


신경증을 앓는 대경성 

 

   
 

나의 ‘아이보리’ ×××차고(車庫) 구루마 No. 3! 구루마는 멈추지 않고 페이브먼트(pavement) 위를 달리고 있다. 서대문에서 광화문! 그리고 종로! 스톱! 오라이! 구루마가 정거장에 머물 때마다 나는 앵무새와 같이 꼭 같은 말 구절을 몇천 번이고 반복한다. (……) 밀려 내리는 사람들! 그리고 밀려 욱 하고 떠밀고 오르는 군중! 만원이 된 구루마 안은 잔뜩 달은 한증막과 같이 확확 증기가 가슴에 안겨온다!
―×××차고(車庫) 박순자(朴順子), “뻐스껄의 생활기”, <제1선>, 1932. 8.

 
   

 

식민지 경성은 이미 대도시였다. 1920년대 ‘경성’은 1900년대 ‘한성’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한성’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경성’은 별천지였다. 식민지 근대화의 깃발이 거세게 휘날릴수록 한성의 옛 자취는 사라져갔다. 경성의 도시 계획은 식민지 조선 총독이라는 ‘절대권력’의 독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고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역사적 유산은 무시되거나, 방치되거나, 말살되었다. 한성의 모습을 지우고 ‘식민 수도’ 경성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식민지 조선 총독의 야망. 서구의 대도시와 같은 휘황찬란한 제국의 도시를 만들고 싶은 ‘절대 권력’의 야망은 경성을 기형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조선총독부가 경성 도시 계획을 통해 디자인한 경성의 공간 구조는 식민지 통치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식민지 조선의 권력들, 즉 일본인들의 상업 활동과 생활의 편의성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간선 도로망을 중심으로 한 도시 경관 정비 사업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시민들의 자율성을 담보해줄 만한 공공 공간이 설 자리는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도로를 갈아엎고, 가로수를 심고, 랜드마크로 삼을 만한 건물을 지었다. 자동차, 전차, 버스가 정신없이 오가며, 백화점이 생기고, 극장이 문을 열고, 카페가 화려한 네온을 켜고, 놀이공원이 들어서고, 시내의 상가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변화해가는 경성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근대적 ‘진보’이자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김기림처럼 ‘세계 도시 행렬의 맨 꽁무니를 쫓아가는 가련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으며, “조선의 서울도 요즘 와서 어지간히 모던 외입쟁이가 되어간다”라는 조롱 섞인 기사가 1931년 12월 15일자 <중앙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호불호를 떠나 경성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1900년대 경성, 아니 ‘한성’의 모습은 어땠을까. 당시의 유명한 언론인이었던 유광렬은 1900년대 한성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한다.   

 

   
 

낮에 길거리에 나가면 좁은 골목 음식집에서 국 끓이는 냄새 안주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 약방에서는 갓을 쓴 양반들이 한가로이 장기를 둔다. (……) 낮이면 길거리에는 지금 많이 다니는 자동차는 한 대도 더 볼 수가 없고 간간히 자전거가 다니어도 그리 흔하지 못하였다. (……) 밤이 되면 한없이 길게 뚫린 좁은 골목은 캄캄해진다. 가끔 한데로 뚫린 아궁이에 장작 집어놓고 불 때는 것이 장인의 눈동자 같이 뚜렷뚜렷하게 보였다. 남폿불을 켜고 방에 앉으면 어디서 불어오는 지 멀리서 부는 호적 소리가 장안만호천문(長安萬戶千門) 근심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린다.
―유광렬(柳光烈), “대경성 회상곡”, <별건곤>, 1929. 1.

 
   

 

유광렬이 회상하는 한성은 느리지만 여유롭고 인간의 온기가 아궁이의 연기처럼 온 동네를 휘감고 있는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은 풍경이다. 물론 유광렬이 묘사한 한성의 풍경은 1920년대 대도시 경성의 풍경을 거울로 삼았을 때 도드라진 풍경이며, 이제는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가 동원되어 재구성된 그만의 내면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좁은 골목, 캄캄한 골목, 아궁이불, 남폿불, 한가롭게 장기 두는 일 등은 사실 190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들이었다. 1900년대 지식인들은 유광렬이 묘사한 한성의 모습을 서구의 근대적 문명에 뒤처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0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이 비판했던, 개화의 ‘은택’을 받지 못했던 풍경들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유광렬에게는 한없이 정감 있고 향수 어린 풍경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만큼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성은 초스피드로 ‘개발’되고 있었으며, 그 개발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고, 이로 인해 삶의 여유로움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뿌-웅 뿌-웅 까르르르- 뿌-웅
먼지를 연기같이 일으키면서 진흙 뭍은 자동차와 기생 태운 서울 자동차가 엇바뀌어 지나가는가 하면 탁 탁 탁 탁 탁. 큰일이나 난 것처럼 자동자전거가 눈이 뒤집혀 닿는다.
와지직 와지직 낄 낄 와- 와- ‘집마차’
덜거덕 덜거덕 어라 이놈의 소야 ‘소구루마’
뽕- 뽕- 기생 탄 인력거 텁석부리 ‘인력거’
따르릉 따르릉 아차차 자전거가 어린애를 치고 쓰러졌다.
땡 땡 웅- ‘아이고 나 좀 내려주셔요’
쩔-렁 쩔-렁 어서 가- 이놈의 소야 ‘나뭇바리’
저벅 저벅 저벅 ‘중학생’
짜박 짜박 짜박 ‘송곳 굽 구두’
깨육 깨육 깨육 딱- 딱 ‘모던보이 지팡이 소리’
날마다 아침부터 밤중까지 이 요란한 속에서 눈을 핑핑 돌리면서도 그래도 신경쇠약을 부르지 못하는 교통 순사야말로 건강하다면 굉장히 건강한 몸이요 불쌍하다면 굉장히 불쌍한 신세지.
―쌍에스생(双S生), “대경성 광무곡(大京城 狂舞曲)”, <별건곤>, 1929. 1.

 
   

 

‘쌍에스생’이라는 도무지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필명의 기자가 쓴 “대경성 광무곡”은 유광렬의 “대경성 회상곡”과 같은 잡지의 목차에 나란히 표기된 글이다. 유광렬이 20여 년 전 한성의 풍경을 묘사했다면, 쌍에스생은 당대의 경성 풍경을 스케치했다. 1920년대 경성의 풍경은 역동적이다 못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고 어수선하며 자극적이다. 이처럼 요란한 대도시 경성에서 교통 순사만 신경쇠약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바삐 돌아가는 세상, 정적이고 느린 것은 퇴보로 비난받았던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 산다는 것은 식민지 근대화의 산물인 속도와의 전쟁을 치러야만 함을 뜻했으며, 이러한 경성 사람들의 러시아워를 책임졌던 버스 여차장 역시 신경쇠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근대의 직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