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전짜리 부영버스와 5전짜리 전차의 경쟁
1928년 4월 22일, 30년 동안 대중교통의 왕자로 군림했던 ‘전차’에게 강력한 적수가 생겼다. 버스가 등장한 것이었다. 경성부는 일본에서 만든 ‘우즈레(ウーズレー)’라 불리는 12인승 상자형 버스를 도입했다. 정원은 22명이었으며, 차비는 구역별 7전으로 책정했다. 경성부에서 버스 사업을 했기에 때문에 ‘부영버스’라 이름 지었다. 버스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난생처음 보는 이 거대한 ‘구루마’를 타보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4월 22일부터 5월 20일까지 약 한 달간 부영버스는 순이익만 1,662원을 남기며 성공을 거두었다. 시민들의 호응에 부영버스 사업은 탄력을 받았고, 4개월 만인 1928년 8월에 들어서는 버스를 20대로 증차했다. 1929년 8월 말, 경성 시내에서 운행되던 전차는 120대였고, 버스는 40대 정도였다. 전차를 이용하는 승객은 11만여 명이었고, 버스는 1만여 명이 이용했다. 당시 경성 인구가 39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해본다면 1만여 명이라는 수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부영버스는 날로 번창해갔다. 버스도 더 늘고 노선도 신설됐다. 그러나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결과, 사업은 영업 부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전차 운행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경성전기주식회사는 이 틈을 노렸고, 결국 1933년 3월 ‘경전(京電)’이 부영버스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같은 해 4월부터는 버스의 색도 은색으로 바뀌었다. 이제 부영버스는 사라지고 ‘경전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부영버스의 영업 부진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버스 운행 노선이 큰 문제 중의 하나였다. 당시 부영버스의 운행 노선은 전차의 노선과 많은 부분 겹쳤다. 비록 전차의 요금과 동일한 5전으로 버스 요금을 인하하기는 했지만, 전차가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을 버스가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경전버스는 부영버스를 인수하고 난 뒤 가장 먼저 버스 노선을 개편했다. 전차의 노선과 겹치지 않게 버스 노선을 바꾼 것이었다. 초기 부영버스의 운행 노선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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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워’ 선
제1구: 경성역―남대문 통 5정목―태평 통 2정목―경성부청 앞―광화문 통―체신국 앞―총독부 앞
제2구: 총독부 앞―안국동―견지동(종로소학교 앞)―종로 1정목―종로 2정목―파고다 공원 앞―종로 3정목-관수교(觀水橋)―황금정 3정목―본정 4정목―대화정 1정목(헌병대 사령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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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탈 것’에 대한 호기심과 5전이라는 저렴한 가격 때문에 버스는 경성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경성 사람들의 이러한 애정은 신식 교통 기관에 대한 호기심, 저렴한 가격 때문만은 아니었고, ‘여차장’이라는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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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새로 나온 뻐스 걸은 조선에서도 첫 시험인 것만큼 그들은 모든 것이 생소하고 또한 일반 시민도 여기에 대해서는 일종의 호기심을 갖고 대한다. (……) 아직도 본 일이 없는 커다란 자동차에 꽃같이 젊은 여성이 괴상한 복색을 하고 한길로 내달리는 것을 구경하려고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또 7전짜리 자동차라는 바람에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함부로 타는 바람에 별별 희극이 버스 안에서 일어나서 버스 걸을 울린다 한다. (……) 버스가 개통한지 사흘이 못 되어 벌써 승객 중에 별별 잡것들이 있어서 1전이 모자라니 6전만 하라고 하고, 두 구역을 타고 한 구역만 내겠다 하며, 술이 취해서 버스 안에다 미역전을 벌이기도 한다고 한다. 이런 짓을 당할 때마다 눈에서 눈물이 부지불식간에 쏟아져 나온다 한다.
― “조선여성의 새 직업- 가두에서 분투하게 된 뻐스 걸의 설움”, 〈동아일보〉, 1928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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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4월 버스의 개통에 맞춰 경성부영버스회사에서는 여차장을 모집했다. 굳이 버스의 차장을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채용한 이유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친절하다는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차에도 차장이 있었는데, 차장은 남성이었다. 전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거칠고 투박한’ 남자 차장에 대해서 가끔씩 불만을 표출했었고 이런 이유에서 버스 차장은 애초부터 여성이 고용된 것이었다.
경성부영버스에서는 여차장 모집 광고를 냈는데, 응모 자격 요건을 15세에서 20세 미만의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미혼 여성으로 국한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최초로 뽑힌 여차장은 모두 12명이었으며, 경쟁률을 ‘6.2:1’이었다. 1930년에는 7명의 여차장을 뽑는데 99명이 지원해서 ‘14.1:1’의 경쟁률을 보였다. 여성들이 일급 80전 내외의 여차장이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는 당시만 해도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직업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1928년부터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에 따른 실업률 증가도 한몫을 했다. 1931년 경성부영버스에 근무하는 여차장은 65명이었으며, 경인버스에는 17명, 경인유람버스에 수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1934년 4월부터는 평양에도 버스가 운행되었고, 이와 함께 여차장도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