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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스톱, 오라이!
하루에도 수천 번 ‘오라이’와 ‘스톱’을 반복하는 여차장의 등장은 시민들에게는 일종의 ‘구경거리’였다. 여차장을 구경하기 위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한결같이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복장에 가 있었다. 여차장은 코발트 빛 정복을 입었다. 물론 바지가 아니라 스커트였다. 코발트 빛 복장에 정모(正帽)를 쓰고, 커다란 혁대로 허리를 졸라맸으며, 목에는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흰 양말을 신었다. 그들은 가죽 가방[돈 가방]을 어깨에 두르고 한 손에는 차표를 개찰하는 ‘펀치’를 들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여차장의 이런 복장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모던 걸’의 패션으로 인식했다.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난생처음 접하는 여차장의 복장을 일종의 구경거리로 생각했으며, 그들이 조선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하루 종일 반복하는 상용 어구를 들으며 키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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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스톱-, 오라이! (……)
ツギハ アンコクトウで コザイマス オリルカタハ マヘカラオリテ くタサイが
다음은 안국동이올시다. 내리실 분은 앞으로 내려주세요.
ナカが、スヘテ イマスカラ スコシ マヘノ ホウヘ ツメテ クタサイ
가운데 비어 있으니 조금 앞으로 당겨 서주십시오!
ハナハだ スミマセンガキブヲ キラナイ カタハ キツブヲ キツテク タサイ
대단 미안합니다만 표 안 찍으신 분 표 찍어 주십시오!
― “고-스톱-하는 버스 여학교, 거리에 활약하는 104명의 여인군(女人軍)”, 〈삼천리〉, 193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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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 매일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상대하면서 고된 노동 조건을 감내해야만 했던 여차장. 여차장이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보아야만 했다. 시험 과목은 독본과 산술과 상식이었으며, 신체검사와 구술시험도 치러졌다. 이런 공식적인 시험 과목 이외에도 여차장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능력’을 겸비해야만 했다.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은 어느 정도 예뻐야 하며, 목소리도 고와야 했다. 게다가 손힘이 세야 했다. 매일 승차권을 펀치로 찍기 때문에 손아귀의 힘이 세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시험 과목과 신체검사 그리고 ‘주관적인’ 면접을 통과하고 채용된 여차장은 먼저 한 달에서 40여 일 정도의 수습 기간을 거쳤다. 수습 기간이 끝나면 정식 여차장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여차장은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 ‘용원(傭員)’이었으며, 월급이 아닌 시급 또는 일급으로 임금을 받았다. 근무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이거나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였으며, 오전 근무와 오후 근무가 있었고, 평균 10시간 정도 근무했다. 여차장의 근무 조건은 당시 경성에서 직장에 다니는 다른 여성들에 비해서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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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 여교원: 35원 ~ 6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유치원 보모: 10 ~ 50원,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정오에 끝나는 경우도 있다).
여기자: 25 ~ 6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여사무원: 30 ~ 5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여점원: 15 ~ 4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
여환수(전화교환수): 25 ~ 5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간호부: 3 ~ 7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여차장: 25 ~ 30원,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
연초 공장 여직공: 6 ~ 25원,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
정미 회사 여직공: 10 ~ 30원,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
― “서울 직업 부인의 보수”, 〈삼천리〉, 1931년 12월. (인용자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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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장이 하루 종일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받는 보수 치고는 엄청난 박봉이었다. 근무 조건이 별반 좋지 않은 여차장이었지만 그들의 직업을 부러워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그래도 여차장은 매일 ‘버스’를 공짜로 탄다는 것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모던한 최신의 직업이지만 정작 그녀들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차장에 응시한 대부분의 여성들 역시 그 직업이 좋아서라기보다는 호구지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일부의 남성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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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를 졸업한 여성들로서 혹은 데파트의 여점원, 여교원, 여차장 등 직업 전선에 나오는 이가 많은데, 이 모든 여성의 직업을 보장하고, 취직에 있어 우선권을 주고, 급료 및 기타의 대우에 있어 좀 더 우대하고 그네의 정조를 옹호하여줄 역책(力策)을 말씀하여 주세요. (……)
김동인: 직업여성이 되는 데는 허영(虛榮)도 섞였어요. 여학교 교사는 모르겠지만 그 밖에 가령 데파트 여점원이라든지 뻐스걸(女車掌)이라든지, 모두 그 마음 가운데는 허영심에 잠기어 나오는 이도 많을 듯해요. 마치 무슨 ‘스바라시이[대단한]’ 한 기회나 행운을 만날 것 같아서요.
― “‘女性을 論評하는’ 男性座談會”, 〈삼천리〉, 193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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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직업 전선에 뛰어든 여성들의 근무 조건이나 넓게는 그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더니, 김동인은 엉뚱하게도 여성들의 ‘허영심’을 꺼냈다. 게다가 직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발언도 덧붙였다. 물론 김동인의 어투를 보면 이는 다분히 ‘추측성’ 발언이다. 만약 김동인이 여차장의 일상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그녀들의 ‘허영심’을 비난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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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월에 보통학교를 마치자 바로 여차장으로 들어왔는데 현재는 한 시간에 9전씩이니 월수입 27원이 된다. (……) 27원 중에 1할은 신원보증금으로 제하고 또 승차권을 잘못 팔아서 생기는 부족금으로 50전 가량이 달아난다고 한다. 남겨진 24원이라도 반가워서 도중에 스리나 당하지 않았나 몇 번이나 만져보며 집에만 가면 반찬 가게의 영감님과 싸전의 텁석부리가 붙들어 갈 듯이 덤벼든다고 한다. 그 당장에서 쌀값으로 10원, 반찬 값으로 4, 5원을 뺏기고 나면 바로 방세 5원을 내야 된다. (……) 동생의 교육비로 보통 2원은 들어가고 또 화장 같은 것을 게을리하면 회사에서 말이 있으니 자연 화장품 값도 상당히 든다. 더구나 크림이나 분이나 다 그전보다 5전씩이나 올랐는데 (……) 이 외에도 장작 값과 석탄 값이 들지요. 그리고 의복 값 하고.
― “여차장의 생활표”, 〈동아일보〉, 1937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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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기자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한 여차장 모 씨는 최저 생계비 정도를 벌며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당대의 하층민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신원보증금까지 뜯기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신원보증금은 일종의 노동자 억압 정책의 일환이었다. 일본인 기업체는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해서 신원보증금을 받았다. 신원보증금은 퇴사할 때 돌려주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작업 중 회사에 손해를 입히거나 과실로 인해 퇴사할 경우에는 몰수 되었다.
여차장들에게 허영심이 있다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들이 여교사와 다르다면 또 얼마나 달랐겠는가. 무슨 다른 ‘종족’이라도 된 듯이 취급 받는 데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박봉에도 불구하고 화장품에 돈을 써야 했던 그들의 노동 환경은 얼마나 열악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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