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토털 헬스케어? 물장수

 

 


물맛 감별의 달인

 

큰 기근이 들었다. 가뭄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하고 쌀값은 폭등했다. 조선 순조 24년인 1814년의 일이었다.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어 남에게 품을 파는 품팔이 생활을 해야만 했던 한 사내는 자신이 이제 죽을 운명임을 깨달았다. 일거리가 뚝 끊겼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깨끗한 귀신’이 되는 게 낫겠다 싶어 관악산 동쪽 기슭으로 찾아들었다. 그곳에는 ‘명품’ 샘물이 있었다.

사내는 매일 물만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난 뒤에는 상쾌한 햇볕을 쬐고 산에서 내려왔다. 가끔 사람들이 사내에게 밥을 주기도 했으나 사내는 정중히 그 밥을 거절했다. 이유는 남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밥을 굶은 그는 곧장 샘물로 뛰어가 또 물을 마셨다. 관악산을 오르내리며 그는 매일 샘물을 마셨고, 그 덕에 배고픔도 잊었다.

이듬해에는 대풍이 들었다. 사람들은 사내를 불러 다시 품팔이를 시켰다. 그런데 사내는 품팔이를 거절했다. 큰 기근 덕에 그는 곡식을 먹지 않고도 지내는 법, 즉 도가(道家)의 수행방법인 각곡방(却穀方)을 체득했던 것이다. 이후 사내는 몇 해 동안 물의 성질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나갔다. 물맛의 깊이를 터득한 그는 샘물, 우물물, 강물, 개울물을 정확히 판별해냈다. 사내의 신통한 능력은 시골 저잣거리의 입소문을 타고 기어이 한양의 고관대작 사랑에까지 스며들었다. 고관대작은 사내를 불러 도성 안의 유명한 샘물들의 등급을 매기게 했다. 사내는 삼청동의 성천(星泉)이 제일 좋고, 훈련원의 통정(通井)과 안현(鞍峴)의 옥폭(玉瀑)이 나란히 3등이며, 2등은 없다고 했다.

사내는 한술 더 떠서 물의 무겁고 가벼움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에 각각의 물을 저울에 달아보니 과연 사내의 말과 같았다. 그 후 그는 명산을 찾아 유람을 떠났고,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 사내를 ‘수선(水仙)’이라 불렀다. 이 이야기는 유재건(劉在建)이 편찬한 전기집(傳記集) 〈이향견문록〉(1862년)에 나온다.

유재건이 ‘수선’의 이야기를 〈이향견문록〉에 넣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글을 읽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 즉 더 좋은 음식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을 비롯한 모든 탐욕스런 욕망을 경계하라는 뜻에서였을 터이다. 나에게 ‘수선’의 이야기는 자연의 소유이자 생명의 젖줄인 ‘물’을 수탈하고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인간의 탐욕이 기승을 부리는 현실과 오버랩 된다. 이제 어디를 가나 흔해빠진 생수 페트병을 보면 아직도 나는 ‘봉이 김선달’이 떠오른다.

  

 
대동강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는 흔히 ‘희대의 사기꾼’을 가리킬 때 많이 인용된다. 태양 에너지를 개발한 연구자, 어처구니없이 태양과 달의 소유권을 주장한 사람들을 언론에서는 가끔씩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라 부른다. 이들이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아마도 이들이 인간의 소유가 아닌 태양이나 달의 소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19세기 조선에서는 대동강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를 매매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일까.

김선달은 대동강 주변의 나루터에서 만난 물장수들을 보며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대동강을 팔아먹겠다는 속셈이었다. 김선달은 물장수들에게 엽전 몇 닢씩을 나눠주며 물을 길어 갈 때마다 자신에게 한 닢씩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물장수들은 대동강 물을 길을 때마다 김선달에게 엽전 한 닢씩을 내었다. 엽전을 내지 못한 물장수는 김선달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한양 상인들은 필시 김선달이 대동강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에 한양 상인들은 대동강 물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김선달을 꾀기 시작했다. 김선달은 물려줄 자식이 없긴 하지만, 대동강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라 팔 수 없다며 한양 상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한양 상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김선달을 구워삶았다. 이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김선달은 대동강을 한양 상인들에게 팔기로 한다. 대동강은 결국 황소 60마리의 가격에 해당하는 4천 냥이라는 거금에 낙찰되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자신의 소유도 아닌 물건을 자신의 것처럼 팔아먹은 희대의 사기꾼 봉이 김선달의 재치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상인들에 대한 조롱이 섞여 있다. 대동강이 어찌 한 개인의 소유일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한양 상인들이 봉이 김선달을 대동강의 주인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도 ‘물’은 판매되는 ‘물건’이었으며, 그 판매에 대한 권리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이었다면 정말 ‘누군가는’ 대동강을 정식으로 매매했을 수도 있었을 터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물 시장’의 형성과 ‘물장수’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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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r 2011-01-05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토탈 헬스 케어의 선구자(?)^^격인 물장수의 이야기, 기대되는 걸요?ㅋㅋㅋ

자음과모음 2011-01-19 09:3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lunar님- 관심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가운 새벽길을 뚫고 찰박찰박 물소리를 내며 잰 걸음으로 걷던 이들의 모습. 지금은 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상상해보면 애잔하기도, 재밌기도, 신기하기도 해요- :-)

비로그인 2011-04-09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물장수가 더 늘었어요.
 

 

6. 러시아워의 스피드 메이커, 여차장

 

 


직장 내 성폭행, ‘옷을 벗은’ 여차장

 

승객들, 시민들, 군중들, 그 누구였든 간에 여차장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중적이고 가식적이었다. 그들의 일상을 이해하는 척 하면서도, 그들의 허영을 꼬집고, 관음증적 시선으로 그들을 엿보면서도, 그들의 ‘순결’을 강조했던 사람들.

여차장이 현장에서 겪는 성희롱도 성희롱이었지만 직장 내에서 당하는 성폭력은 상상하기조차 싫을 정도였다. 물론 모든 여차장들이, 모든 버스 회사 내에서 그랬던 것은 아닐 터이다. 여차장의 주된 업무 중에 하나는 버스표를 파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가죽으로 만든 돈 가방을 들고 다녔다. 버스 한 대의 하루 수입이 고스란히 여차장의 돈 가방에 들어 있는 셈이었다. 가끔 버스 요금을 잘못 계산한 경우 여차장은 자신의 돈으로 손실을 메워야만 했다. 여차장이 언제나 현금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게 되자 소매치기도 등장했다. 러시아워의 만원 버스에서 여차장의 돈 가방은 소매치기의 훌륭한 먹잇감이었다.

버스 한 대의 하루 수입을 여차장이 관리하다 보니, 회사 측에서도 여차장의 행동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돈을 못 믿어서였을 것이다. 간혹 실제로 횡령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마산의 어떤 버스 회사에 근무하던 여차장은 2년 동안 2천여 원을 횡령했으며, 운전수와 공모한 여차장이 돈을 횡령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사건 때문이었는지 회사에서는 여차장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당시에는 알몸 투시기가 없었으니 손으로 하는 ‘신체검사’가 시행되었다. 여차장들은 퇴근을 할 때 모두 회사 측의 감독관에게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혹시나 여차장의 몸속에 숨겨져 있을지 모를 회사의 돈을 찾겠다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신체검사를 빌미로 여차장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내용은 이렇다. 

 

   
 

평양부 부영버스의 여차장 ‘뻐스걸’은 평양에 처음 생긴 것인 만큼 그들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거니와 이번엔 듣기에 너무나 추악한 사실로 (……) 어린 직업여성에게 참지 못할 모욕과 수치를 준 에로 감독이 있다. 버스 감독 삼구(三口, 가명)라는 자는 지난 5일 밤 6시 경에 그날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뻐스걸들을 자기 혼자 있는 숙직실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불러서 ‘돈 감추지 않았는지 검사한다.’는 핑계로 나이든 처녀들을 옷을 벗게 한 후 유방은 물론 부끄러운 곳까지 손을 대어가며 감사를 하고 내보내어 졸지에 봉변을 당한 10여 명의 뻐스걸들은 분함과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울기까지 하고 어떤 뻐스걸은 기가 막혀 옷을 벗은 채 입으려 하지도 않으니까 동 감독은 창황히 손수 ‘호크’를 채워주는 등 추태를 연출하였고 여차장 자신들은 망측 망측하여 별로 이야기를 내어놓으려 하지 않으나 이 말을 들은 그들의 부형들은 분개하여 이 일을 크게 문제화 하려고 암암리에 대책을 협의 중 이라는데 장차 부(府)의 책임 문제까지 일어날 모양이라 한다.
― “돈 감추었나보다고-‘뻐스걸’ 나체검사”, 〈조선중앙일보〉, 1934년 12월 11일.

 
   



여차장을 가상의 범죄자, 미래의 범죄자로 규정하는 신체검사와 비슷한 제도는 어느 사회에나 만연한 일이다. 범죄의 예방이라는 목적으로 창안된 제도는 언제나 약자를 인권의 사각지대로 내몬다. 그런 제도는 우리 모두를 암묵적으로 미래의 범죄자로 몰아넣는다. 특히 감독이라는 중간 관리의 폭력은 토지의 주인보다 그 토지를 관리하는 중간 계급인 ‘마름’의 폭력처럼 지독하고 교활한 데가 있다. 주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자신이 권력의 핵심인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보다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의 피를 뽑게 마련인 것이다.

‘삼구’라는 버스 감독이 여차장에게 가한 성적 폭력은 중간 관리의 폭력이었고 외에도, 여차장의 생계 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버스 회사 사장의 성폭력이 또한 존재했다. 버스 회사 사장들의 성폭력은 더욱 극악무도했으며,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전후 맥락을 정확하게 연결하기는 어렵지만 이 사건 이후 여러 잡지에서 ‘직업여성’ 혹은 ‘직업 부인’의 ‘성 문제’를 다룬 것을 보면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직업여성의 직업을 미끼로 정조를 유린하고도 직업의 여탈을 손에 쥐고 있는 까닭에 안연히 사장의 의자에 앉아서 당당한 신사의 존엄을 가지고 있는 사실이 필경 그러한 수단으로 유린당한 처녀가 분연히 직업을 던지고 나와 부모와 동지에게 일장의 고백을 하는 동시에 색마 사장을 걸어 법의 재단(裁斷)을 구하게 되어 복마전인 사장실에 숨어 있든 이 색마의 거동이 청천백일 하에 전모를 나타내게 되었다. (……)

최정석이 검사국에 제출한 고소장의 내용은 지난해 2월 시내 미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세가 빈한하여 직업을 구하고자 경인버스회사에 직업을 구하였더니 지난해 4월 모일 밤 9식 30분 경 경인버스 사장 야전림(野田林)이 최정석(崔貞奭)을 취직에 관하여 의론할 말이 있다고 동 회사 3층 사장실로 불러 차장 견습으로 채용하겠다하고 사장실의 문을 열쇠로 잠그고 사장실 반침으로 끌고 들어가 강간을 하였다. 그 후 7월 모일 밤 역시 9시 30분 경 종업원이 돌아간 후에 사장실로 역시 호출을 받아 그 때는 본차장으로 승격시켜 준다고 강간을 하였으며 그 후 10월 모일 밤에는 당시 동 회사의 동맹 파업에 관하여 의론할 말이 있다고 시내 명치정(明治町) 죽내가(竹乃家) 여관으로 데라고 가서 ‘너만은 해고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정조를 유린하여버린 사실 등이다.
― “직업의 여탈을 호이(好餌)로 여차장의 정조를 유린”, 〈동아일보〉, 1933년 2월 2일.

 
   



최정석은 자신이 당한 성폭행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야전림’이란 회사 사장을 검찰에 고소했다. 야전림은 승진과 해고를 미끼로 최정석을 강간했으며, 최정석은 혹시 자신의 일로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장의 성폭행을 쉬쉬했던 것이다. 결국 검찰은 여전림과 최정석을 소환하여 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이때의 사법부도 남성의 성폭력에 대해서 너무나 관대한 판결을 내렸다. 야전림에게 내린 법정 판결은 겨우 벌금 ‘500원’이었다.

여차장은 회사의 안팎에서 ‘성희롱’과 ‘성폭력’에 자주 노출되어 있었지만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던 듯하다.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은 성폭력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회였고, 여차장을 비롯한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을 위한 나라’는 아니었던 셈이다. 오히려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전반적인 제도와 토양이 ‘직업여성들’도 지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에로 서비스’로 내몰고 있었다. 결국 여차장과 그들의 후예들은 여전히 ‘애로와 에로’ 사이에서 위험한 삶의 곡예를 연출해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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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8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가 돈을 받고 일을 한다면 어디에선들 애로와 에로 서비스를 무시하겠습니까.병원,방송국,회사,마트,요양사,....
 

 

6. 러시아워의 스피드 메이커, 여차장

 

 


구루마는 애로와 에로 사이를 달린다!


 

   
 

나: 연애편지 같은 것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여: 간혹 있지요. 신사 손님은 비교적 적지만 학생 따위가 저녁 늦게 돌아갈 때면 뒤를 쫓아서 우리 집 번지까지 알고 그냥 아무 번지 ‘뻐스걸 전(殿)’이라고 쓴 편지가 가끔 옵니다. (……) 슬쩍 발등을 밟는다든가 또는 떠민다든가 몸을 나에게 기대고 시치미 뚝 떼고 엉뚱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체하는 사람이 많아요. 웨들 그러는지 모르지요.
나: 아마, 그것이 속일 수 없는 인간의 본능 일지도 모르지요, 하고 한 번 건드렸다.
여: 글쎄올시다, 라는 말 뿐으로 더 긴 설명이 없었다.
― “고-, 스톱-하는 뻐스 여학교, 가로에 활약하는 104명의 여인군(女人軍), 거리의 여학교를 찾아서 3”, 〈삼천리〉, 1936년 1월.

 
   

 

여차장은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교통사고와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지만, 가장 큰 위험은 일상적인 ‘성희롱’과 ‘성폭력’이었다. 〈삼천리〉의 기자가 제목으로 뽑은 ‘거리의 여학교’란 말부터 성희롱의 소지가 다분하다. 기자가 지목한 ‘거리의 여학교’는 네 곳이었다. 종로에 있는 화신백화점(지금의 종로타워 자리), 동대문에 위치한 경성부영버스 사무소, 서대문에 있는 전매국, 지금의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었던 동양극장. 〈삼천리〉의 기자가 이 네 곳을 ‘거리의 여학교’라 명명한 것은 이곳에 다니는 여성들이 모두 짙은 화장을 하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제복(양장)을 입고 다니면서 돈을 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발상 자체가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성희롱’ 혹은 ‘성폭행’이 대부분 범죄로 인식되지 않았다. 물론 오늘날 성폭행은 명백한 범죄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주 ‘너그러운’ 면이 남아 있어, 술에 취해 성폭행을 저지른 사람에게 ‘심신 미약 상태 인정’으로 사법부에서 감형을 해주는 등의 일이 빈번하다. 어쩌면 식민지 조선은 ‘성폭행을 권하는 사회’였는지도 모른다. 고용주들이 서비스직에 여성을 고용하는 이유는 여성의 ‘성적 매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여차장들에게도 일종의 ‘외모 가꾸기’가 요구되었다. 회사에서는 여차장에게 외모 가꾸기를 강요하고 관리했다. 여차장들은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비싼 화장품에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최정희(부인 기자): 여자를 택하여 쓰는 자본주의의 심리를 생각하며 보면 모두가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여자라는 한 가지 조건으로 이용들이 되는 편인데. (……)
곽현모: 백화점 같은 데서도 손님이 남자 점원이 있을 때에는 살 물건도 안 사고 여자 점원이 와야 그때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을 많이 이용할 것이겠죠. (……)
채만식: 아하 그러면 노동 이외에 에로 서비스를 조건으로 붙입니다. 그려.
― “직업 부인 문제 특집-직업 부인 좌담회”, 〈신여성〉, 1933년 4월.

 
   



서비스업의 고용주들은 박봉에도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여성들을 원했다. 또한 고객들이 서비스직에 몸담고 있는 여성들로부터 원했던 것, 고용주가 서비스직 여성들에게 원했던 것은 ‘에로 서비스’였다. 사태가 이러하니 서비스직이었던 여차장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눈에는 ‘에로’라는 두 글자가 크게 부각되었을 터이다. 그러하니 남성들의 시선은 여차장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홅고 지나간다. 이상적인 여차장이란, 남성들이 원하는 여차장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여자는 얼굴도 얼굴이거니와 음성이 얀간해야 할 것이다. (……)

여자는 이 손도 그네들의 생명의 하나이다. 얼굴과 마찬가지로 손이 아주 밉고 얼굴만 예쁘다면 그 여자도 역시 처음 얼굴만 보는 사람에게는 존경을 받을는지 몰라도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그 여자의 매력은 감소돼 갈 것이다.

K라는 ‘뻐스걸’이 있다. 그 여자의 얼굴은 그리고 음성도 다른 아모 여자보다도 뛰어나게 예쁘고 곱다. 갸름한 듯하면서도 그다지 보기 싫게 말상 같지 않고 도리어 두 볼이 보기 좋게 퉁퉁 한 듯도 하고 그렇지 않은 듯도 하며 시꺼먼 눈 속에서 영롱히 구르는 맑은 눈동자 그리고 묘하게 도드라진 코 (……) 그 입술은 향상 붙은 듯 만 듯하니 정말 간간하게 빠개져 있다. 그리고 이 여자의 음성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다. 약간 감기에 걸린 듯한 그 음성이다. 두 훌 쯤 콧소리를 한다. 이것이 얼마나 매력 있는 소리냐? (……) 이러한 K양인데도 불구하고 미소를 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앉았다가 표 찍어줄 때 그 여자의 손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다. 툭툭 마디가 진 그 여자의 손, 게다가 빛깔까지 거무튀튀하다. 그리고 그 얼굴과는 아조 딴판으로 죽은 사람의 손 가죽 같이 가죽이 넉넉한 게 보기에도 흉측하다.
그 다음부터는 이 여자의 얼굴을 볼 적마다 그 손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그 여자가 만일 그 손까지 아름다웠다면……. (……)

그 여자들의 다리는 쇠망치보다 오히려 굳고 세질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5전만 내면 같이 ‘드라이브’ 할 수 있는 ‘뻐스걸’은 어떤 의미로 보아서 안가(安價)한[값싼] 처녀들이다. 그러나 그대들이여! 여자로서 가장 귀한 정조(貞操)는 고가(高價)로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여겨라.  

그리고 그대들이 하루에도 몇 백 사람씩 접촉하게 되는 가운데서 현실 사회를 똑바로 보고 그대들이 앞으로 나갈 길을 꾸준히 닦으라.  

― 김성마(金城馬), “정조와 직업여성, 서도수향(西都水鄕)의 가지가지”, 〈삼천리〉, 1934년 9월.

 
   



사람들은 여차장에게 도대체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그녀들은 5전만 내면 쉽게 ‘에로 서비스’를 즐길 수 있는 ‘값싼 처녀들’로만 보였던 것일까. 여차장의 자격 요건이었던 완벽한 바디 라인과 섬섬옥수 같은 손, 수밀도 같은 볼에 섹시한 입술, 맑은 눈동자는 모두 남성들에게 ‘에로 서비스’를 제공해주기 위해 요구되던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정조’의 소중함도 지키고, 세상의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안목까지 바랐던 이 철저한 이중성이 어쩌면 식민지 조선의 일부 남성들이 여차장을 비롯한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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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본 엘리베이터 걸이 생각나는군요. 여자들은 단지 엘리베이터 작동과 안전을 위한 사람으로 보았는데 남자들은 고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한 공간에서 에로를?...
 

 

6. 러시아워의 스피드 메이커, 여차장

 

 


고, 스톱, 오라이!


 

하루에도 수천 번 ‘오라이’와 ‘스톱’을 반복하는 여차장의 등장은 시민들에게는 일종의 ‘구경거리’였다. 여차장을 구경하기 위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한결같이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복장에 가 있었다. 여차장은 코발트 빛 정복을 입었다. 물론 바지가 아니라 스커트였다. 코발트 빛 복장에 정모(正帽)를 쓰고, 커다란 혁대로 허리를 졸라맸으며, 목에는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흰 양말을 신었다. 그들은 가죽 가방[돈 가방]을 어깨에 두르고 한 손에는 차표를 개찰하는 ‘펀치’를 들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여차장의 이런 복장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모던 걸’의 패션으로 인식했다.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난생처음 접하는 여차장의 복장을 일종의 구경거리로 생각했으며, 그들이 조선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하루 종일 반복하는 상용 어구를 들으며 키득거렸다. 

 

   
 

고-, 스톱-, 오라이! (……)
ツギハ アンコクトウで コザイマス オリルカタハ マヘカラオリテ くタサイが
다음은 안국동이올시다. 내리실 분은 앞으로 내려주세요.
ナカが、スヘテ イマスカラ スコシ マヘノ ホウヘ ツメテ クタサイ
가운데 비어 있으니 조금 앞으로 당겨 서주십시오!
ハナハだ スミマセンガキブヲ キラナイ カタハ キツブヲ キツテク タサイ
대단 미안합니다만 표 안 찍으신 분 표 찍어 주십시오!
― “고-스톱-하는 버스 여학교, 거리에 활약하는 104명의 여인군(女人軍)”, 〈삼천리〉, 1936년 1월.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 매일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상대하면서 고된 노동 조건을 감내해야만 했던 여차장. 여차장이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보아야만 했다. 시험 과목은 독본과 산술과 상식이었으며, 신체검사와 구술시험도 치러졌다. 이런 공식적인 시험 과목 이외에도 여차장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능력’을 겸비해야만 했다.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은 어느 정도 예뻐야 하며, 목소리도 고와야 했다. 게다가 손힘이 세야 했다. 매일 승차권을 펀치로 찍기 때문에 손아귀의 힘이 세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시험 과목과 신체검사 그리고 ‘주관적인’ 면접을 통과하고 채용된 여차장은 먼저 한 달에서 40여 일 정도의 수습 기간을 거쳤다. 수습 기간이 끝나면 정식 여차장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여차장은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 ‘용원(傭員)’이었으며, 월급이 아닌 시급 또는 일급으로 임금을 받았다. 근무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이거나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였으며, 오전 근무와 오후 근무가 있었고, 평균 10시간 정도 근무했다. 여차장의 근무 조건은 당시 경성에서 직장에 다니는 다른 여성들에 비해서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보통학교 여교원: 35원 ~ 6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유치원 보모: 10 ~ 50원,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정오에 끝나는 경우도 있다).
여기자: 25 ~ 6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여사무원: 30 ~ 5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여점원: 15 ~ 4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
여환수(전화교환수): 25 ~ 5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간호부: 3 ~ 7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여차장: 25 ~ 30원,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
연초 공장 여직공: 6 ~ 25원,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
정미 회사 여직공: 10 ~ 30원,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
― “서울 직업 부인의 보수”, 〈삼천리〉, 1931년 12월. (인용자 수정)

 
   


 
여차장이 하루 종일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받는 보수 치고는 엄청난 박봉이었다. 근무 조건이 별반 좋지 않은 여차장이었지만 그들의 직업을 부러워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그래도 여차장은 매일 ‘버스’를 공짜로 탄다는 것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모던한 최신의 직업이지만 정작 그녀들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차장에 응시한 대부분의 여성들 역시 그 직업이 좋아서라기보다는 호구지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일부의 남성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듯싶다. 

 

   
 

여학교를 졸업한 여성들로서 혹은 데파트의 여점원, 여교원, 여차장 등 직업 전선에 나오는 이가 많은데, 이 모든 여성의 직업을 보장하고, 취직에 있어 우선권을 주고, 급료 및 기타의 대우에 있어 좀 더 우대하고 그네의 정조를 옹호하여줄 역책(力策)을 말씀하여 주세요. (……)
김동인: 직업여성이 되는 데는 허영(虛榮)도 섞였어요. 여학교 교사는 모르겠지만 그 밖에 가령 데파트 여점원이라든지 뻐스걸(女車掌)이라든지, 모두 그 마음 가운데는 허영심에 잠기어 나오는 이도 많을 듯해요. 마치 무슨 ‘스바라시이[대단한]’ 한 기회나 행운을 만날 것 같아서요.
― “‘女性을 論評하는’ 男性座談會”, 〈삼천리〉, 1935년 7월.

 
   



사회자가 직업 전선에 뛰어든 여성들의 근무 조건이나 넓게는 그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더니, 김동인은 엉뚱하게도 여성들의 ‘허영심’을 꺼냈다. 게다가 직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발언도 덧붙였다. 물론 김동인의 어투를 보면 이는 다분히 ‘추측성’ 발언이다. 만약 김동인이 여차장의 일상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그녀들의 ‘허영심’을 비난할 수 있었을까. 

 

   
 

 작년 4월에 보통학교를 마치자 바로 여차장으로 들어왔는데 현재는 한 시간에 9전씩이니 월수입 27원이 된다. (……) 27원 중에 1할은 신원보증금으로 제하고 또 승차권을 잘못 팔아서 생기는 부족금으로 50전 가량이 달아난다고 한다. 남겨진 24원이라도 반가워서 도중에 스리나 당하지 않았나 몇 번이나 만져보며 집에만 가면 반찬 가게의 영감님과 싸전의 텁석부리가 붙들어 갈 듯이 덤벼든다고 한다. 그 당장에서 쌀값으로 10원, 반찬 값으로 4, 5원을 뺏기고 나면 바로 방세 5원을 내야 된다. (……) 동생의 교육비로 보통 2원은 들어가고 또 화장 같은 것을 게을리하면 회사에서 말이 있으니 자연 화장품 값도 상당히 든다. 더구나 크림이나 분이나 다 그전보다 5전씩이나 올랐는데 (……) 이 외에도 장작 값과 석탄 값이 들지요. 그리고 의복 값 하고.
― “여차장의 생활표”, 〈동아일보〉, 1937년 6월 10일.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기자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한 여차장 모 씨는 최저 생계비 정도를 벌며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당대의 하층민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신원보증금까지 뜯기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신원보증금은 일종의 노동자 억압 정책의 일환이었다. 일본인 기업체는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해서 신원보증금을 받았다. 신원보증금은 퇴사할 때 돌려주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작업 중 회사에 손해를 입히거나 과실로 인해 퇴사할 경우에는 몰수 되었다.

여차장들에게 허영심이 있다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들이 여교사와 다르다면 또 얼마나 달랐겠는가. 무슨 다른 ‘종족’이라도 된 듯이 취급 받는 데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박봉에도 불구하고 화장품에 돈을 써야 했던 그들의 노동 환경은 얼마나 열악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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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로로 2010-12-26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울 직업 부인의 보수를 보여주는 표를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힘든 육체 노동을 향한 보수는 너무 적은 것 같습니다. ㅜㅜ

자음과모음 2010-12-27 17:1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육체 노동과 여성 노동의 댓가는 예나 지금이나 충분치 못한 기분이 들어요. 임금은 비슷한 수준이지만 여성들이 일하는 데 있어서 '현실적'인 배려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곳이 지금도 많죠.

비로그인 2011-04-08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당한 보수, 높은 임금가로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의욕를 높이는 사회가 빨리 이루어지길
 

 

6. 러시아워의 스피드 메이커, 여차장

 

 


‘직업 부인’이 된 ‘노라’의 후예들 


 

여차장을 비롯해서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이 직업 전선에 뛰어들 경우 세상에서는 그들을 ‘신여성’, ‘모던 걸’이라 불렀지만, 이보다 더 일상적으로는 ‘직업여성’이나 ‘직업 부인’이라 불렀다. ‘버스 걸’, ‘데파트 걸’, ‘가솔린 걸’, ‘엘리베이터 걸’, ‘티켓 걸’, ‘할로 걸’, ‘오피스 걸’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은 그러나 문학사적으로 보면 모두 ‘노라’의 후예들이었다.   

 

 

‘노라’는 노르웨이 작가 헨릭 입센(Henrik Ibsen)의 작품 〈인형의 집〉의 주인공이다. 가부장의 폭력에 저항하며 ‘인간’의 자유를 찾아 집을 뛰쳐나온 노라는 유럽에서는 여성 해방의 상징적 존재였다. 입센의 〈인형의 집〉은 일찍이 일본과 중국과 조선에 번역되어 많은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입센 열풍, 나아가 ‘노라 신드롬’이 일 정도였다. 1921년 일본과 중국에 이어 조선에서도 입센의 〈인형의 집〉이 번역되었는데, 번역자는 당대 최고의 중문학자이자 한국 근대 문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양건식이었다. 1933년 채만식도 〈인형의 집〉 후일담 격인 〈인형의 집을 나와서〉란 작품을 쓰기도 했다.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며 여성이 아닌 인간의 자유를 갈망했던 ‘노라’의 외침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노라 신드롬’은 노라를 닮고자 하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 여성들로부터 일어났다. 남녀평등과 여성 해방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수많은 노라의 후예들이 식민지 조선에도 등장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작가인 루쉰의 ‘노라 신드롬’에 대한 냉정한 일갈은 귀 기울일 만한 것이었다.  

 



루쉰은 1923년 12월 26일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 문예회 강연회에서 입센의 ‘노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강연회에서 이야기한 내용의 제목은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였다. 루쉰이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주목한 것은 가부장적 권위에 맞서 집을 뛰쳐나간 한 여인의 선구자적인 행동이 아니라, ‘과연 집을 뛰쳐나가 사회에 ‘던져진’ 노라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였다.

루쉰은 노라가 집을 나가고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나는 타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 여기에 더해 혹시 또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는데, 그것은 아주 가혹한 결과로, 바로 굶어 죽는 것이었다. 루쉰은 왜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 학생들에게 이런 가혹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여성들이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학생들 스스로 고민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희망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감각을 예민하게 하여 더욱 절실하게 자신의 고통을 느끼도록 하고 영혼을 불러일으켜 자신의 썩은 시체를 목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허풍을 떨고 꿈을 꾸는 일은 오직 이러한 때에 위대해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령 길을 찾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꿈이며, 그러나 장래의 꿈은 필요하지 않고 다만 지금의 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루쉰 지음, 홍석표 옮김,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무덤-노신 잡문집〉, 선학사, 2001

 
   

 

 여성들이 ‘지금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냉혹할 만큼 철저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 도대체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여성이 처한 현실은 무엇일까. 집을 나간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인가. 루쉰은 노라가 가부장제의 최소 단위인 가정을 떠나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단지 가정이 아닌 자신이 처한 사회의 문제를 깊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냉혹한 사회의 현실이란 집을 박차고 나간다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었다. 가부장제의 모순을 각성한 ‘그 마음’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루쉰의 판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여기’에서 여성들이 가장 먼저 선취해야 할 것은 가부장제의 모순에 대한 단순한 각성도, 남녀평등의 외침도, 여성 참정권의 주장도 아닌 바로 ‘돈’이라고 말했다.

루쉰은 ‘돈’이야말로 여성의 참정권보다 거창한 여성 해방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루쉰이 말한 ‘돈’은 단순히 ‘돈’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바로 ‘경제권’의 문제였다. 여성이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진정한 남녀평등의 세상을 욕망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은 경제권의 획득이었으며, 경제적인 독립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참정권을 획득하는 것보다 더 지난한 투쟁이 될 것이라는 것이 루쉰의 판단이었다. 경제권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여성 해방은 먼 일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루쉰의 판단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적중한 셈이다. 루쉰의 판단처럼 식민지 조선의 ‘직업여성’들도 가정을 나와 자신의 삶을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경제적인 문제에 봉착하기에 이르렀다.  

 

   
 

행동하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과 의지의 작용을 상반하지 않는 행동이라든지 행위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집을 버리고 떠나는 여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수두룩하게 듣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곧 조선의 ‘노라’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 그들 젊은 직업여성들은 지금 밤 속을 걸어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면 가정에서는 봉건적 도덕의 무거운 사슬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나가면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상식이 범람하고 있으며 ‘울트라’ 동무들 사이에 가면 붉은 성사상이 그의 귀를 굳세게 이끈다. (……) 여성이 몇 천 년 동안 젖어온 부엌과 ‘하렘’을 떠나서 생활의 전사로서 대량적으로 가두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14~18년 세계대전 중이었다. (……) 이보다도 먼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속의 ‘노라’로써 대표된 일반 여성의 봉건적 가정 도독에 대한 반항의 소리와 여권 주장의 부르짖음이 전 ‘유럽’의 여성계의 사상을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 자본가들은 사나이보다도 임금은 싸고 노동 시간은 길고 순종 잘하는 다시 말하면 매우 저열한 노동 조건으로 고용할 수 있는 여자들을 더 요구하였다. 그래서 이 정세는 오늘까지도 계속해 나오며 도시에는 여공으로부터 ‘오피스 와이프’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종류의 직업여성이 범람하고 있고 또 날로 그대로 증가해가는 추세에 있다. (……) 사차불피(死且不避: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음-인용자)로 할 수 없이 생활 전선에 몰려나온 직업여성에게 맡겨지는 직업의 성질은 대부분은 여성의 독특한 성적 매력이라는 것을 무기로 삼는 것이다. (……) 그 위에 황금,지위의 폭력은 실직 앞에서는 참새와 같이 비겁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그들의 정조까지를 위협하고 있다.
―김기림, “직업여성의 성 문제”, 〈신여성〉, 1933년 4월.

 
   

 

여성을 고용하는 사회가 되었지만, 진정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는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성을 고용하는 이유는 저렴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전략이었으며, 어느 정도의 눈요깃거리를 위해서였다. 그것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었다.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수많은 노라의 후예들은 가정보다 더 크고 견고하고 촘촘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그물망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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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따뚜따 2010-12-26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집을 떠난 노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문제이지요....

자음과모음 2010-12-27 17:20   좋아요 0 | URL
오늘날의 노라들은 보다 명민하고 당당하지만, 이제는 '슈퍼 맘', '골드 미스'같은 또다른 이데올로기들이 등장해 괴롭힘당하고 있죠.

이승원 2010-12-27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토리온 채널의 <슈퍼맘 다이어리>를 볼 때마다, 참, 착찹.....

비로그인 2011-04-0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대를 살게 됨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