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토털 헬스케어? 물장수

 

 


물장수가 사라져가고 물 도둑이 생겨나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게 되자 대한수도회사의 경영도 바뀌게 되었다. 대한수도회사는 일본 정부에 매도되었으며 경기도 관할이 되었다. 대한수도회사의 관영화 이후 한성수상조합은 명칭을 변경하여 ‘경성수상조합’으로 탈바꿈하였다. 또한 한성수상조합이 경성수상조합으로 바뀌기 이전인 1910년 3월에는 그동안 여러 단체에 난립해 있던 물자리 권리를 하나로 통합하여 ‘수좌인준증권(水座認准證券)’을 발행하였다.

대한수도회사가 관영화 되면서 요금의 징수 체계도 변화를 맞이했다. 1912년 3월 경기도는 경성수상조합이 직접 수도 요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했다. 경성수상조합은 월급제로 물장수를 고용하였으며, 이에 조합의 직원이 수도 요금을 직접 징수하게 된다. 물장수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수상조합은 오히려 물지게꾼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물장수들의 반발에 맞불을 놓았다. 결국 영세 물장수들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하는 거대한 조합의 이익에 밀려 고용 노동자의 위치로 점점 몰락해가고 있었다.

경성수상조합은 자신들이 직접 수도 요금을 징수하는 한편, 물지게꾼을 고용하여 각 가정에 물을 판매했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들의 원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물값으로 인한 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조합과 물장수 그리고 물지게꾼들 간의 반목도 그치지 않았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의 몫이었다.  

 

   
 

연전에 어떤 재산가가 수상조합을 조직할 때는 각 실업가가 연합하여 조직한 줄로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한두 명 개인의 경영에 지나지 못하고 각 실업가의 명의만 빌어 고주(雇主)라 칭하였다. 그 수상조합에서 각 인민들의 집에 물을 나눠주고 물값을 받는 것은 한두 달에 대략 6천 원 가량이다. 그 중 2천원은 수도국에 납세하고 그 나머지 4천 원 가량은 조합의 경비에 쓴다고 한다. (……) 근래 수상조합에서 각 민가에 물값을 받는 것을 보면 대단히 불규칙하여 남부와 북부가 같지 않고 이 동리와 저 동리가 같지 아니하고 이 집과 저 집이 같지 아니하여 하루를 한 지게 한 달에 서른 지게에 혹은 30전 혹은 35전 혹은 40전 혹은 45전이라 하니, 같은 물 같은 날 같은 수효에 어찌하여 이같이 불규칙한가. (……) 수상조합이 엄연하게 일개 관청으로 자처함인지 물값은 조합의 임의대로 가감하며 또 물값을 받을 때에 빈한한 인민이 미처 지급치 못하는 경우가 있으면 물을 주지 아니하고 혹은 완패한[성질이 고약하고 막돼먹은] 내지인을 시켜 민가에 돌입하여 물값에 물건을 압수하겠다 하며 혹은 유약한 부인 여자를 공갈하여 야료가 비상하다는 소문이 여러 곳에서 낭자하니 실로 가통 가증한 일이로다.
―“수상조합은 인민의 원굴(怨窟)”, 〈매일신보〉, 1912년 12월 14일.

 
   



1914년 6월 31일 식민지 통치 당국은 마침내 경성수상조합을 해산시킨다. 경성수상조합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식민지 통치 당국은 경성수상조합의 수좌인준증권에 대한 보상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수좌인준증권의 보유자가 약 55명 정도였고, 그 액면가는 17만 6천 800원의 거액에 달했다. 조선총독부가 경성수상조합을 해산시킨 것은 식민지 조선 인민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수상조합은 일본에도 없는 제도였을 뿐 아니라 수상조합으로 인한 갖가지 골칫거리를 일거에 척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경성수상조합을 해산시킨 것이었다. 식민지 당국이 경성수상조합을 해산시킴으로써 피해를 본 것은 어찌 보면 ‘순수하게’ 물을 배달했던 급수부, 혹은 물지게꾼들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당시의 거대한 규모의 ‘물 시장’에서 배를 채웠던 것은 물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급수노동을 하지 않았던 일부 거대 물장수들이었다. 그들은 직접 급수노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수좌인준증권을 현물처럼 매매하여 이익을 보기도 했다.

경성수상조합이 해산되면서 식민지 통치 당국은 공용전, 즉 공용수도를 기존의 228개에서 419개로 크게 증설했다. 이제 각 가정에서는 당국이 지급한 ‘물표’를 받아 공용수도에 가서 물표를 내고 물을 공급받게 되었다. 식민지 당국은 공용수도를 관리 및 감독하기 위해 수도국에 순사를 배치하였으며, 순사는 인민들이 수도 규칙을 지키며 공용수도를 이용하는 지를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요사이 경성시내에는 수통물에 대하여 날마다 경기도 수도국 순사의 발견으로 관영 수도 규칙에 의하여 종로 경찰서에 고발하는 건수가 하루에도 여러 건인데 최근에 고발된 자는
◀ 익선동 60번지 송원준(46)은 감찰도 맡지 않은 열쇠를 가지고 근처 수통물을 뜨다가 발견되었고
◀ 수송동 104번지 조진철(20)은 적선동 51번지 나카무라[中村]에게 부탁을 받아 수통물을 떠다주는 것을 기화로 여겨 적선동 김한태에게 하루 두 지게씩 물 내주고 한 달에 30전씩 받아먹던 일이 탄로되었고
◀ 경성 화동 사는 김성녀(39, 김씨 성을 가진 여자라는 뜻-필자)는 안사일이란 자의 부탁으로 물을 떠다 줄때에 가회동 이근영의 집에 떠다 준 일이 발각되었고
◀ 수은동 사는 김성녀(40)는 수통물을 떠서 남에게 많이 나누어 주다가 순사에게 들키어 고발되었고
◀ 봉익동 170번지 송인섭은 연지동 6번지 구득손의 부탁으로 물을 떠다가 슬며시 연지동 문수경에게 하루 한 지게씩 주기로 약속하고 한 달에 30전씩 받던 일이 탄로되었고
◀ 경성 누하동 사는 류옥현(57)은 근처 김두환의 부탁을 들어 수통물을 길어다주는데 틈틈이 그 동네 김경창의 집에 물을 떠다주던 일이 발각되어 지금 모두 취조 중이라는데 범과자가 많은 모양이더라.
―“위반자 속출”, 〈매일신보〉, 1915년 8월 12일.

 
   



식민지 당국의 정책에 따라 경성수상조합의 ‘물장사’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렇다고 ‘물장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라진 것은 ‘경성수상조합’이었다. ‘경성수상조합’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조합의 힘은 ‘비공식’적으로 발휘되고 있었으며, 물장수들도 비공식적으로 활동했으며, 수좌인준증권도 재산으로 취급되어 여전히 매매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수도요금을 징수하기 위해서 ‘수도총대(水道總代)’를 선발하고 수도요금 징수와 납부 등의 수도업무를 무보수로 담당하게 하였다. 수도총대는 이용자 15호 당 1명이었다. ‘수도총대’라는 직책이 신설되면서 물장수들은 일반 수용자 자격으로 수도 사용을 신청하여 수도 열쇠와 감찰을 받은 후 ‘불법’으로 수돗물을 판매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당국의 단속을 피해 물을 ‘밀매’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물장수들의 ‘물 밀매’는 그들이 그저 돈벌이를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물지게꾼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호구지책이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식민지 당국과 수좌인준증권을 가진 거대 물장사들 사이에서 힘없는 물지게꾼 혹은 영세한 물장수들만 큰 피해를 보았던 셈이다.

급기야 1924년 조선총독부는 수도 방임제에서 수도 계량제로 제도를 변경한다. 수도에 계량기를 설치한 것이다. 이로써 비공식적으로 활동했던 물장수들은 정말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 비공식적으로 활동했던 물장수들은 다시 조합을 결성하기로 한다. 총 351인의 발기로 자본금 20만 원의 ‘경성공수조합(京城供水組合)’을 조직하였는데, 이 조직은 경성수상조합과 같은 수좌인준증권을 보유한 재력가들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급수부(물지게꾼) 중심의 ‘급수부조합’도 설립되어 활동을 벌였다. 두 조합은 여러 차례의 협의를 가진 후 순수한 급수부 중심의 ‘급수권 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명칭을 ‘급수조(給水組)’로 바꾼다. 하지만 급수조의 활동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고 순수한 급수부들의 권리가 어떻게 확보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침 1924년 시인 김동환은 “북청 물장사”란 시를 발표하여 이제는 정말로 ‘사라져 가는’ 물장수에 대한 향수를 아름답게 그려냈다. 

 

   
 

새벽마다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사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사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사
― 김동환, “北靑 물장사”, 〈동아일보〉, 1924년 10월 13일.

 
   



1800년대 전후에 생겨난 물장수는 몇 차례의 시대적 격변을 거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물장수의 명맥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식민지 조선의 수도 시설이 미미한 편으로, 지금처럼 각 가정마다 수도관이 연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장수의 명맥은 근근이 이어졌고, 1970년대 초반까지 존재했다. 

 

 

‘정부-상인(물장수)-소비자(인민)’의 이해가 미묘하고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공공재’로서의 자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물장수’의 존재는 다른 상품과는 달리 좀 더 근원적이고 윤리적인 물음을 요구한다. ‘물’을 팔 수 있다면, 바람과 공기와 흙도 팔 수 있는 것인가. 어쩔 수 없이 물을 팔아야 한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물장수는 사라졌지만 ‘식수’의 문제는 여전히 인류의 전 지구적 화두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백인들)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이다. (……)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벌판, 검은 숲에 걸려 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18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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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9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이 물부족국가이던데 그 맑고 맛나던 샘은 다 어디로 갔는고!
 

 

7. 토털 헬스케어? 물장수

 

 


수도의 개통, 물장수 조합이 생겨나다

 


1908년 9월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조선 최초로 근대식 수도 시설을 통해 ‘물 공급’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수돗물이 각 가정으로 배달되기 까지는 여러 해 동안의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1898년 ‘콜브란­보스트윅 상회’는 고종으로부터 서울의 수도 사업에 관한 특허를 받고, 1903년 12월 9일 서울 수도 사업의 특허에 관한 공식적인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1905년 콜브란­보스트윅 상회는 6만 5천 파운드를 받고 런던의 ‘인터내셔널 신디케이트’에 수도 사업 특권을 팔아치운다. 단, 수도 부설은 콜브란­보스트윅 상회가 이름을 바꾼 회사 ‘콜브란­보스트윅 개발회사’에서 담당하는 조건이었다. 인터내셔널 신디케이트는 서울의 수도 사업을 위해 ‘대한수도회사(Korean Water Works Limited, manager and engineer H. G. Foster Barham)’를 설립하였다. 대한수도회사는 상수도 시설과 경영의 관리를 담당했으며, 콜브란­보스트윅 개발회사는 1906년 8월 뚝섬(뚝도) 정수장 공사에 착공하여 1908년 8월에 공사를 마친다. 대한수도회사는 1908년 9월 1일부터 급수 인구 12만 5천 명에게 하루 12,500㎥의 급수를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각 가정마다 수도 파이프가 연결된 것은 아니었고, 도시의 중요한 거점에 수돗물이 나오는 공용 수도를 설치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 최초의 근대식 수도 시설이 탄생했다. 근대식 수도 시설의 탄생으로 인해 인민들이 좀 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글로벌 기업의 조선 진출은 물장수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형국이었다. 이에 생계를 위협받게 된 물장수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순량(純良)한 물을 음용하오.
제군은 질병으로 하여금 고뇌를 당하시옵나이까.
제군은 친우와 애자(愛子)를 영결(永訣)하심이 있으셨나이까.
제군은 항상 신기(身氣)가 피곤하고 정력이 노손(勞損)하였나이까.
순량한 물을 음용하시면 이들 고난을 면하시리이다.
순량한 물을 반드시 음용하시고 불량한 우물물은 폐용(廢用)하시어 독해(毒害)를 면하시오. (……)
급수상(汲水商)이 순량한 한강수로만 음료수를 공급함을 반드시 주목하오. (……)
한 동네 안에 있는 각 집에서 동시에 수돗물을 취용(取用)하게 되는 경우에는 급수 요금을 특별히 저렴하게 하겠습니다.
― “유한책임(有限責任)” 대한수도회사 왈 ‘대한수도회사 광고’, 〈대한매일신보〉, 1909년 3월 5일.

 
   


 
그러나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은 물장수들만이 아니었다. 대한수도회사 역시 기존의 ‘물 시장’을 제패하고 있었던 물장수와 맞서야 하는 과제에 봉착한다. 대한수도회사가 일차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대대적인 ‘물 광고’였다. 대한수도회사는 인민들에게 수돗물이 우물물보다 더 좋은 물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대한수도회사의 수돗물 광고는 공격적이었다. 우물물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이라는 것이었다. 대한수도회사는 한강물을 정수한 수돗물이야말로 일상에 만연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수’라 선전했다.

물장수들은 대한수도회사에 맞서 단체를 조직한다. ‘수상야학회(水商夜學會)’와 ‘수업회의소(水業會議所)’였다. 하지만 이 두 단체에 가입하는 물장수들의 계층은 달랐다. ‘수상야학회’에 가입하는 물장수들의 대부분은 비록 물자리는 갖고 있었지만 자본이 부족하여 스스로 급수노동을 했던 계층이었다. 물론 이 중에서도 몇몇은 물지게꾼을 고용한 부류도 있기는 했다. ‘수업회의소’에 참여한 물장수들은 대한수도회사에 대항하여 천일회사(天一會社)를 설립하고 우물물 영업을 계속하고자 했던 부류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은 ‘자본금소유주(資本金所有主)’라고 불렀다. 수업회의소에 참여한 물장수들은 물자리뿐만 아니라 개인 우물도 소유하고 있었던 재력가들이었다.

수상야학회는 대한수도회사에게 자신들이 보유한 물자리 권리를 보상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한수도회사는 수상야학회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대신 대한수도회사는 수돗물 특판을 수상야학회에 일임한다. 대한수도회사의 입장에서도 고육지책이었다. 기존의 물장수를 배제하고서는 소비자에게 물 공급을 원활하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수상야학회는 대한수도회사의 수돗물을 공급하는 하청 업체가 되었다. 대한수도회사는 수상야학회에게 511개의 급수전(給水栓) 중에 200개를 지급하였다.  

 


 
수상야학회 소속의 물장수들은 일명 특설 공용전〔共同栓〕을 통해 수돗물을 집집마다 배달하게 되었으며, 물장수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보증금과 월세를 대한수도회사에 납부하게 되었다. 대한수도회사의 특설 공용전이 수상야학회에 임대되자 우물물을 판매하던 물장수들은 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러한 경위로 우물을 보유하고 있었던 자산가들은 수업회의소를 조직하고 대한수도회사에 대항하게 된다.

수업회의소는 수상야학회 측에 자신들과 영업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수상야학회에서도 처음에는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나 결국 대한수도회사의 회유에 넘어가 수업회의소와의 상생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더욱이 수상야학회와 대한수도회사는 1908년 9월 말부터 10월까지 ‘무료급수’를 실시하였다. 이는 수도의 시험 가동을 빌미로 경쟁 상대였던 수업회의소의 기를 꺾기 위한 일종의 판촉 기간이었다. 약 10주간의 무상 급수가 끝나자 수상야학회는 학부(學部)에서 명령한 학회의 영업 활동 금지 정책에 따라 명칭을 ‘수상영업회(水商營業會)’로 개칭하고 다시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수상야학회가 명칭을 바꾼 이유는 수상야학회는 원래 노동 야학회의 한 분과로서 가입하였다가 독립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학회였기 때문이었다.

수상영업회 소속의 물장수들은 대한수도회사 소속 물장수임을 증명하는 호패를 차고 등유 깡통으로 만든 물통을 사용했으며, 자신들이 대한수도회사의 ‘공식 급수부’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다.  

 

   
 

본회(本會)에서 한성부수도회사와 계학하고 5부내(五部內) 음료수 공급역(供給役)을 모두 관리하여 조만간 개통함. 수진동내(壽進洞內) 수상야학회.
― “광고”, 〈황성신문〉, 1908년 8월 26일.

 
   



수상영업회 소속 물장수는 등유 깡통으로 만든 물통을 지고 다녔기 때문에 ‘깡꾼’이라고 불렀으며, 우물물을 판매했던 수업회의소 소속의 물장수나 물지게꾼 혹은 개인적으로 물을 판매했던 물장수는 나무로 만든 물통을 지고 다녔기 때문에 ‘통꾼’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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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시절 펌프물 마시다가 수도물로 바뀔 때 냄새가 나서 마시기 어려웠는데...
 

 

7. 토털 헬스케어? 물장수

 

 


물장수의 전성시대
  

 

   
 

물장수들은 공인된 제도로서 존재하여 방대한 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이 일은 진지하고도 힘든 일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비용은 비싸다. 이 비싼 비용은 작업에 대한 사례금 조로 지불된다. 서울의 밀집 지대에서 물장수를 하려면 50~100달러의 권리금을 지불하고 그 자리를 사야한다. 물을 공급 받는 각 가정은 매달 요금을 지불한다. 이 물은 훠킨(firkin, 약 34리터들이의 나무통을 뜻한다. 그런데 헐버트의 이 기록은 어깨에 멘 물통 두 개의 용량을 합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보통 물통 한 개의 용량은 약 15리터였다. ―필자)을 거꾸로 세운 것과 모양이나 크기가 같은 나무통으로 운반된다. 이 통은 사람의 등에 약간 걸쳐 있으며 끈으로 어깨에 매달리어 있는 긴 나무의 양 끝에 달려 있다. 물통은 대나무 끈으로 동여매어져 있으므로 물장수가 묘한 몸짓을 하면서 걸을 때에는 물통이 흔들리어 그 동여맨 부분이 서로 마찰되어 마치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손수레의 차축에서 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행인들은 물장수에게 길을 비켜준다.
― H. B. 헐버트 지음, 신복룡 옮김,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평민사, 1984(1906).

 
   
  

 

 

 

1886년 육영공원의 교사로 부임한 헐버트의 기록에 따르면 물장수는 방대한 조직을 갖춘 공인된 제도였다. 그러나 물장수가 처음부터 특정한 조직을 갖춘 채 등장한 것은 아니었으며, ‘물 판매’라는 상행위 역시 ‘공인된 제도’로서 인정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물장수가 거대한 조직을 갖추고, 더 나아가 정부로부터 ‘공인된 제도’로서 취급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물장수의 생계를 위협하는 ‘대한수도회사’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장수가 언제 등장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1800년대 전후로 그 시기를 잡는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도 잘 아는 ‘북청 물장수’도 포함된다. 물장수는 아침저녁으로 각 가정에 물을 배달하는 사람을 뜻한다. 헐버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직업 중의 하나가 물장수라고 했다. 그만큼 물장수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08년 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서울에서 물장수를 직업으로 했던 사람은 대략 2천여 명 정도였다. 1910년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따르면 당시 서울의 인구는 233,590명 이었으며, 이 중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3,672명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서울 상업 인구의 15%가 물장수였던 셈이다.

물장수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물은 배달시켜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인데, 이는 여전히 서울 시내에 있는 우물의 수질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10년대 서울 시내의 우물 수는 총 11,410개였다. 이 중에서 식수로 사용하기 부적당하다고 판단된 우물은 9,911개였다. 우물은 많았지만 식수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우물은 많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우물을 소유한 집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울 사람들은 물장수에 의존하여 식수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짐 때문에 행인들을 의식할 여유가 없는 또 한 축의 사람들이 있다. 바로 물지게꾼이다. 물지게 양 끝에 걸린 양동이의 무게 때문에 생긴 반동으로 물지게꾼의 걸음은 빨라질 수밖에 없으며, 넘칠 만큼 물을 가득 채운 탓에 물은 자꾸만 양동이 밖으로 튀어나와 그의 뒤에는 늘 얼음 제방이 남는다. 

그들이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은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있다. 큰 길에서 벗어나 통행로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우물은 돌로 쌓은 원형의 샘으로 주위보다 2피트 정도 높다. 물 긷는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인가와 아주 가깝기 때문에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직업적인 물지게꾼을 비롯해 일반 가정집의 여종 등이 하루 종일 긴 행렬을 이루며 이곳을 오고 간다.
― 퍼시벌 로웰 지음, 조경철 옮김,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예담, 2002(1885).

 
   



물장수는 약 30리터의 물을 어깨에 지고 다녔다. 물장수는 육체적으로 힘겨운 노동을 감내해야만 하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힘겹게 지고 나른 물값은 대략 1,000갤런(약 3,785리터)에 22펜스(약 92전) 정도였다. 물장수 한 사람당 약 10~20호를 상대로 거래하였고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각 가정에 물을 배달했다. 이와는 다르게 물을 지고 다니면서 파는 물장수도 존재했다.  

 

 


이처럼 2천여 명이 물장수로 생업을 삼았지만, 이들 모두가 똑같은 물장수는 아니었다. 물장수를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했다. 우물과 물자리(수좌, 水座)와 급수 노동이 그 요건들이었다. 한강에 물이 넘쳐 난다고 해서 그 물을 그냥 퍼다 파는 것은 아니었다. 물장수는 자신이 물을 판매하는 담당 구역이 있었고, 신참 물장수들이 자신의 구역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물장수가 물을 판매하는 담당 구역을 물자리[水座]라고 불렀으며, 이 자리의 권리를 급수권(汲水權)이라고 한다. 이 급수권은 무형의 재산으로 인정되어 매매되었다. 때문에 직접 물을 배달하지 않고 물지게꾼을 고용하면서 물자리세만 받는 물장수도 생겨났다. 물장수 중에는 북청(北靑) 출신의 물장수가 많았는데, 이들을 ‘북청 물장수’라 불렀다. 이들이 유명한 데에는 북청 사람들이 자신들의 연고지를 기반으로 똘똘 뭉쳐 급수권을 주장함으로써 ‘물장사’를 독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재력가 중에는 직접 우물을 파서 물장수에게 물을 파는 사람도 생겨났다. 따라서 물장수도 여러 계층이 존재했다. 우물을 소유하고 물장수에게 물을 파는 물장수, 급수권을 이용하여 물자리세만 받는 물장수, 물자리세를 내고 영업하는 물장수, 물자리세를 내고 영업하는 물장수에게 고용된 물지게꾼 등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을 팔아먹은 것도 그리 허황된 일만은 아니었다. 조상 대대로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다 팔았다면, 대동강에서 취수할 수 있는 권리가 김선달에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선달에게 속아 넘어간 자들은 돈에 눈이 먼 상인들이었으니, 속이기가 마냥 어렵지만도 않았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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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배달문화의 초석이 물이였네요.
 

 

7. 토털 헬스케어? 물장수

 

 


위생은 하늘로 머리를 두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희망 없이 된 듯했을 때 아시아에 호열자가 발생했다. 왜 조선 사람들이 해마다 여름이면 전국적으로 이 유행병을 겪는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중 하나이다. 모든 오물이 불결하고 좁은 도랑으로 흘러내려 도랑은 종종 폐물로 막혀 도로로 흘러넘칠 정도가 되었다. 녹색의 이끼 낀 물웅덩이는 정원과 길가에 있고, 우물은 가까이에서 더러운 의복을 세탁한 배수로 오염되어 있으며, 썩은 야채들이 도로와 집의 창문 아래에 수북이 버려져 썩고 있다. 비위생적이라든가 불결하다든가 하는 정의(定義)에 속하는 모든 상상 가능한 모습들이 널리 퍼져 있다. 아직 걷지 못하는 어린아이조차 날것의 푸른 오이와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쓴 딸기, 그리고 물렁물렁하고도 뜨거운 빵을 먹는다. 그들은 뜨겁거나 차가운 밥에 거칠고 소화가 잘 안 되는 김치를 급하게 먹으며, 배추는 도랑물에 씻어 무와 함께 소금과 고춧가루로 맛을 낸다. 모든 종류의 녹색 수확물을 자연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채 먹음으로써 서구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그런데도 탈나지 않는 것은 재앙으로부터 보편적으로 면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조선 사람들이 웃으면서 태연하게 일반적인 권리로 당연히 받아들이는 자연의 여신에 대한 무례하고 자유로운 행동을 10분의 1이라도 감히 행한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나 즉시 그리고 당연히 죽을 것이 분명하다.
― L. H. 언더우드 지음, 신복룡, 최수근 역주, 〈상투의 나라(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 집문당, 1999(1904)

 
   

 

1888년 3월 일본 상선 한 척이 제물포 항구에 도착했다. 제물포에 내린 승객들 중에는 훗날 명성황후의 주치의로 활동하게 될 릴리아스 호턴(Lillias S. Horton)도 있었다. 릴리아스 호턴은 이미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죽을 때까지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릴리아스 호턴 언더우드’의 눈에 비친 조선은 말 그대로 불결함의 총 집결지였다. 언더우드의 눈에는 온갖 더럽고 지저분한 인간 세상의 풍물이 조선에 총집합한 것처럼 보였다. ‘문명화 된’ 미국의 선교사들 뿐 아니라 국내의 언론들도 앞다투어 ‘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위생’ 담론의 밑바탕에는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이 지나치게 비위생적이라는 사실, 그에 대한 뿌리 깊은 ‘수치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1883년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불리는 〈한성순보〉가 발간되었다. 〈한성순보〉의 발간은 조선의 근대 개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한성순보〉의 발간 목적은 ‘국민 계몽’에 있었다. 이를 위해 〈한성순보〉에는 다양한 근대 계몽에 관한 기사가 실렸을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사정을 소개했다. 1884년 5월 5일자 〈한성순보〉의 “각국근사(各國近事)”란에 ‘만국위생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에 이태리에서 만국위생회를 조직하여 한다. 이는 일찍이 없었던 뜻있는 사업이다. 대체로 위생이라고 하면 모든 병을 발생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것이며 의료라고 하면 이미 발생한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때문에 의료와 위생이 병행하게만 된다면 사람마다 건강해져서 어떤 유행병에도 구제되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위생은 하늘로 머리를 두고 죽기를 싫어하는 세계의 동포와 우리 백성들의 급선무이다.

병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6가지 있으니 음식과 공기와 기후와 행위와 유전과 감염이다. 더러운 물은 百病의 원인이다. 땅 위의 더러운 먼지는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고 이것이 다시 물에 침투하여 물을 오염시킨다. 따라서 도로를 깨끗이 쓸고 마을마다 도로를 정비하여야 한다.

현재 구미 각국에는 자체 내에 위생국(衛生局)이 있어서 마음을 다해서 대책을 강구하고 여러 방면으로 검사하고 실험하며, 이런데 능통한 사람을 관리로 채용하여 모든 전국 위생 사무에 관계되는 일이면 감독하는 업무를 실시하고 있으니 그 규칙에는 다섯 가지 조항이 있다. 1은 먹는 음식과 물에 대한 철저한 관리. 2는 市道와 골목길, 하수도, 변소 등을 소제하여 더러운 것이 흘러내리거나 증발하지 못하게 한다. 3은 감염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병원으로 옮겨 치료하고 그 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소독한다. 4는 자녀가 출생하면 반드시 우두법에 따르도록 한다. 5는 일체의 의약 도구를 검사하여 경솔하게 사용하거나 부질없이 시험하지 못하도록 한다.

 
   



위생이야말로 근대 개화의 급선무였다. 이에 따라 1894년 7월 30일 위생국이 신설된다. 위생국은 전염병 예방과 의약 및 우두와 관련된 사무를 담당했다. 그 구성원은 참의(參議) 1명, 주사(主事) 2명이었다. 그동안 방역 사업, 의약 관련 사무, 우두 사업 등이 별개의 기구들을 통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혼란을 극복하고 제반 위생 사무를 총괄하는 단일 기구가 탄생한 것이다.  

 


 

위생은 병을 예방하는 것이며, 의료는 병을 치료하는 행위를 말한다. 치료는 일차적으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전제로 하지만, 위생은 도래할 질병, 미래의 환자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의 시스템이다. 이는 일상의 습속을 개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몇 백 년 동안 지속되었던 일상을 어느 날 갑자기 바꾸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위생은 질병과의 전쟁이기도 했지만 민중의 삶의 습속과 싸우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문명’한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 위생 개혁에 갖은 노력을 쏟아 부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우물 개량이 시급한 과제로 부각된다. 바야흐로 ‘물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물과의 전쟁, 위생순검이 납신다

  

   
 

대저 물이란 것은 사람의 일용 음식에 들어가지 않는 데가 없다. 의복을 세탁하는 데든지 무슨 물건을 만드는 데든지 몸을 정결하게 하는 데든지 무릇 천만 가지에 물을 사용하지 않고 되는 일이 별로 없다. 사람은 하루라도 물을 먹지 못하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물이 아니고는 일신의 혈맥도 관통하게 할 수 없고 다른 음식을 소화도 잘할 수 없으며 신체와 목숨을 잘 기르지 못할 것이다.
― “논설”, 〈제국신문〉, 1900년 5월 24일.

 
   


조선 정부는 위생 개혁의 일환으로 우물과 개천을 관리하기 시작한다. 우물과 개천의 관리는 각종 세균에 의한 발병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는 조선인의 신체, 곧 인종을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계몽 지식인들은 서구의 나라들이 ‘문명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을 잘 관리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민중들에게 역설했다. 정부에서는 각 동네마다 우물을 개량하기 시작했다. 우물에 입구에 문을 설치하여 개천의 더러운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며, 우물 주변에는 돌로 발판을 만들어 발에 묻은 오물이나 흙이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했다. 또 우물 위에는 지붕을 만들어 빗물이나 더러운 먼지의 침입을 예방했다. 우물의 물을 긷는 두레박도 여러 집에서 돌려쓰지 못하게 했다. 두레박을 통해 혹시나 병균이 전염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지만 오랜 습속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서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먹는 물은 대소변 거른 물, 섞인 물을 먹는 것이라. 그 물 한 방울을 현미경 밑에 놓고 보면 가득한 것이 버러지 같은 생물인데 그 생물 까닭에 대개 열 사람이면 아홉은 체증이 있다든지 설사를 한다든지 학질을 앓는다든지 무슨 병이 있던지 성한 사람은 별반 없다. (……) 우리가 바라건대 한성부에서는 억지로라도 위협하여 가면서라도 욕은 먹고 시비를 듣더라도 조선 인민이 정한 물을 먹게 해 주는 것이 이 어둔 백성들을 인도하는 본의가 될 것이다.
― “논설”, 〈독립신문〉, 1897년 9월 2일.
  

양잿물이 지독하여 위생에 극해하거늘 무식한 여인네가 우물가에서 빨래하니 그 뉘가 금단하면.
― “시사필언”, 〈제국신문〉, 1901년 3월 23일.

 
   



대소변을 거른 물, 버러지 가득한 물, 양잿물 섞인 물……. 그런 물들은 서구인의 눈으로 보기엔 미개하고 불결한 물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런 물을 자연스럽게 사용해 온 조선인들에게는 위생개혁 자체가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왔다. 


조선 사람들은 아직도 개천에서 빨래를 했고, 농사를 위해 퇴비를 개천이 가까운 곳에 쌓아 놓았다. 화장실의 오물이 개천을 통해 흘러갔고 가끔씩 개천에서 오줌을 누기도 했다. 계몽 지식인들이 보기에 이 모든 행위는 건강에 아주 해로운 것이자 미개한 짓이었다. 인민의 자발적인 위생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자 정부에서는 드디어 공권력을 투입한다. 정부에서는 인민들이 정부에서 정한 ‘위생규칙’을 지키는지 어기는지를 감시하는 임무를 지닌 경찰을 선발하여 인민들의 위생 단속을 실시한다. 이른바 ‘위생순검’이 출현한 것이었다.

위생순검은 개천에서 빨래하는 사람들,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들, 변소를 치우지 않는 집, 길가에 퇴비를 쌓아 놓은 것, 시장에서 상한 음식을 파는 것, 술 마시고 아무데서나 잠을 자는 것 등을 감시하고 단속했다. 여기에 더해 위생순검들은 자신이 담당한 구역에 있는 우물을 하루에 몇 차례씩 관리하고 감독했다. ‘위생 규칙’을 어긴 사람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태형(笞刑)을 받거나 당시의 생활수준에 비해 가혹한 벌금을 내야만 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위생 사업이 이제 사람을 죽도록 고생시키는 흉물스런 죽음의 사업이 되었다. 한마디로 ‘위생’이 곧 ‘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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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방사능 오염된 물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7. 토털 헬스케어? 물장수

 

 


한양의 진기한 구경거리
 



   
 

조선 사람의 생활의 색다른 모습은 물장수이다. 물론 조선에서도 급수 시설과 같은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상당한 규모의 공동 수도 사업을 하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 물을 공급한다는 점에서는 조선보다 더 좋은 자연 조건을 가진 나라는 별로 없다. (……)

물장수들은 스위스나 영국의 우유장수들이 사용했던 것과 매우 흡사한 지게를 멘다. 물지게는 어깨로 메도록 되어 있다. 지게의 끝에는 밧줄이나 쇠사슬이 달려 있고 그 끝에 고리가 달려 물통의 손잡이에 달린 고리에 연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동이에는 각기 약 3갤런을 담을 수 있으며 지게의 양쪽에 두 개를 걸 수 있다.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이웃들에게 물을 공급한다. 물을 공급한 대가로 그들은 각 가정으로부터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받는다. 정부가 집에 우물을 파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

물론 물장수들은 길가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으며 비록 그가 지게를 메지 않았더라도 그의 걸음걸이로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동이에 물을 가득 담고도 물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보폭과 진동을 유지하는지 외국인들의 눈에는 신기롭기만 하다. 그들은 심지어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한 덮개도 씌우지 않았다.
― G. W. 길모어 지음, 신복룡 옮김, 〈서울풍물지(Korea from its Capital)〉, 집문당, 1999(1892)

 
   
   

 

 

  

미국 선교사이자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길모어가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86년이었으며, 〈서울풍물지〉가 출간된 것은 1892년이었으니, 이 책은 미국 선교사가 본 19세기 말 한양의 풍경을 담고 있는 셈이다. 미국 선교사 길모어의 눈에 물장수의 모습은 낯선 것이었다. 물론 조선의 물장수가 스위스나 영국의 우유장수와 비슷한 행색을 하고 있었기는 했지만, 물을 파는 사람을 길모어는 처음 본 것이었다. 길모어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의 기이한 풍경 중 하나로 물장수의 존재를 꼽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이나 미국에는 물장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세기 당시 흔히 ‘문명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는 모두 상수도를 통해 식수를 공급받았다. 서구에서 상수도를 도입한 것은 전염병 때문이었다. 19세기 초 유럽은 콜레라로 몸살을 앓았다. 유럽인들은 전염병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기 위해 공중위생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공중위생 사업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진행된 것이 도시 환경의 정비였으며, 이 중에서도 상수도와 하수도의 정비가 먼저 실시되었다. 콜레라의 원인이 불결한 공중위생 상태 때문이며, 식수의 관리야말로 콜레라를 예방하는 지름길이라고 유럽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1613년 인구 15만의 영국 런던에 상수도가 보급되었다. 함부르크에서는 1842년, 단치히에서는 1869년, 베를린에서는 1870년에 상하수도 설비가 완공되었다. 그리고 최초의 근대적 하수 시설이 1850년대에 파리의 리옹 가에 설치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눈에 잘 뜨이는 직업 중의 하나는 물장수이다. 시골에서는 아낙네들이 샘이나 우물에서 물동이에 물을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나르지만 도시에서는 이런 일을 하는 특수한 계층의 남자들이 있다. 서울에서는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초라한 우물을 이용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국인들은 우물 바로 옆에서 흙이 묻은 옷을 빠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며 오물은 쉽사리 우물로 흘러들어 간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물 옆에서 채소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씻는다. 이와 같은 우물들은 위생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우리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콜레라나 그 밖의 전염병의 원인을 찾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우물로부터 대도시에로 물을 공급하는 일은 적은 일이 아니다.
― H. B. 헐버트 지음, 신복룡 옮김,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평민사, 1984(1906)

 
   
 

 


  

외국인들이 조선의 물장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 것은 ‘물장수’라는 직업도 직업이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조선의 ‘식수’가 매우 불결하다는 데 있었다.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마시는 조선인들의 풍습을 외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조선의 우물은 불결했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그 물을 먹고 살아간다는 것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외국인들이 보기에 한양과 같은 도시에 상수도 시설이 없다는 것은 더더욱 놀랄 일이었다. 그렇기에 식수를 배달해주는 물장수의 존재가 외국인들의 눈에는 신기한 구경거리였고, 물장수의 존재는 조선이 비위생적인 나라이자 ‘미개한’ 나라임을 증명하는 직업이었던 셈이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조선을 여행한 외국인들이 남긴 글의 내용 중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단어는 ‘불결’이라는 두 글자이다. ‘문명국’의 수준을 측정하는 방식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공중위생과 보건 위생의 수준이야말로 문명국이냐 문명국이 아니냐를 구별하는 척도 중의 하나이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조선의 공중위생과 보건위생 수준은 매우 열악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을 ‘불결한 나라’로 지목했다. 외국인들만이 당시 조선의 상황을 그렇게 불렀던 것은 아니었다. 근대 문명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했던 개화파 역시 그랬다. 김옥균의 문명개화 프로젝트의 핵심을 담고 있는 “치도약론”(1882)의 핵심 역시 ‘위생’이었다. 서구와 같은 문명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문명개화 프로젝트의 중심에 ‘국민’의 ‘위생’이 놓임으로써 조선은 ‘불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그 핵심 산업은 바로 대대적인 수질 관리 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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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인들의 사랑방 우물을 잃고 한국의 어머니상도 잃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