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토털 헬스케어? 물장수

 

 


물장수가 사라져가고 물 도둑이 생겨나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게 되자 대한수도회사의 경영도 바뀌게 되었다. 대한수도회사는 일본 정부에 매도되었으며 경기도 관할이 되었다. 대한수도회사의 관영화 이후 한성수상조합은 명칭을 변경하여 ‘경성수상조합’으로 탈바꿈하였다. 또한 한성수상조합이 경성수상조합으로 바뀌기 이전인 1910년 3월에는 그동안 여러 단체에 난립해 있던 물자리 권리를 하나로 통합하여 ‘수좌인준증권(水座認准證券)’을 발행하였다.

대한수도회사가 관영화 되면서 요금의 징수 체계도 변화를 맞이했다. 1912년 3월 경기도는 경성수상조합이 직접 수도 요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했다. 경성수상조합은 월급제로 물장수를 고용하였으며, 이에 조합의 직원이 수도 요금을 직접 징수하게 된다. 물장수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수상조합은 오히려 물지게꾼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물장수들의 반발에 맞불을 놓았다. 결국 영세 물장수들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하는 거대한 조합의 이익에 밀려 고용 노동자의 위치로 점점 몰락해가고 있었다.

경성수상조합은 자신들이 직접 수도 요금을 징수하는 한편, 물지게꾼을 고용하여 각 가정에 물을 판매했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들의 원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물값으로 인한 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조합과 물장수 그리고 물지게꾼들 간의 반목도 그치지 않았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의 몫이었다.  

 

   
 

연전에 어떤 재산가가 수상조합을 조직할 때는 각 실업가가 연합하여 조직한 줄로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한두 명 개인의 경영에 지나지 못하고 각 실업가의 명의만 빌어 고주(雇主)라 칭하였다. 그 수상조합에서 각 인민들의 집에 물을 나눠주고 물값을 받는 것은 한두 달에 대략 6천 원 가량이다. 그 중 2천원은 수도국에 납세하고 그 나머지 4천 원 가량은 조합의 경비에 쓴다고 한다. (……) 근래 수상조합에서 각 민가에 물값을 받는 것을 보면 대단히 불규칙하여 남부와 북부가 같지 않고 이 동리와 저 동리가 같지 아니하고 이 집과 저 집이 같지 아니하여 하루를 한 지게 한 달에 서른 지게에 혹은 30전 혹은 35전 혹은 40전 혹은 45전이라 하니, 같은 물 같은 날 같은 수효에 어찌하여 이같이 불규칙한가. (……) 수상조합이 엄연하게 일개 관청으로 자처함인지 물값은 조합의 임의대로 가감하며 또 물값을 받을 때에 빈한한 인민이 미처 지급치 못하는 경우가 있으면 물을 주지 아니하고 혹은 완패한[성질이 고약하고 막돼먹은] 내지인을 시켜 민가에 돌입하여 물값에 물건을 압수하겠다 하며 혹은 유약한 부인 여자를 공갈하여 야료가 비상하다는 소문이 여러 곳에서 낭자하니 실로 가통 가증한 일이로다.
―“수상조합은 인민의 원굴(怨窟)”, 〈매일신보〉, 1912년 12월 14일.

 
   



1914년 6월 31일 식민지 통치 당국은 마침내 경성수상조합을 해산시킨다. 경성수상조합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식민지 통치 당국은 경성수상조합의 수좌인준증권에 대한 보상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수좌인준증권의 보유자가 약 55명 정도였고, 그 액면가는 17만 6천 800원의 거액에 달했다. 조선총독부가 경성수상조합을 해산시킨 것은 식민지 조선 인민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수상조합은 일본에도 없는 제도였을 뿐 아니라 수상조합으로 인한 갖가지 골칫거리를 일거에 척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경성수상조합을 해산시킨 것이었다. 식민지 당국이 경성수상조합을 해산시킴으로써 피해를 본 것은 어찌 보면 ‘순수하게’ 물을 배달했던 급수부, 혹은 물지게꾼들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당시의 거대한 규모의 ‘물 시장’에서 배를 채웠던 것은 물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급수노동을 하지 않았던 일부 거대 물장수들이었다. 그들은 직접 급수노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수좌인준증권을 현물처럼 매매하여 이익을 보기도 했다.

경성수상조합이 해산되면서 식민지 통치 당국은 공용전, 즉 공용수도를 기존의 228개에서 419개로 크게 증설했다. 이제 각 가정에서는 당국이 지급한 ‘물표’를 받아 공용수도에 가서 물표를 내고 물을 공급받게 되었다. 식민지 당국은 공용수도를 관리 및 감독하기 위해 수도국에 순사를 배치하였으며, 순사는 인민들이 수도 규칙을 지키며 공용수도를 이용하는 지를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요사이 경성시내에는 수통물에 대하여 날마다 경기도 수도국 순사의 발견으로 관영 수도 규칙에 의하여 종로 경찰서에 고발하는 건수가 하루에도 여러 건인데 최근에 고발된 자는
◀ 익선동 60번지 송원준(46)은 감찰도 맡지 않은 열쇠를 가지고 근처 수통물을 뜨다가 발견되었고
◀ 수송동 104번지 조진철(20)은 적선동 51번지 나카무라[中村]에게 부탁을 받아 수통물을 떠다주는 것을 기화로 여겨 적선동 김한태에게 하루 두 지게씩 물 내주고 한 달에 30전씩 받아먹던 일이 탄로되었고
◀ 경성 화동 사는 김성녀(39, 김씨 성을 가진 여자라는 뜻-필자)는 안사일이란 자의 부탁으로 물을 떠다 줄때에 가회동 이근영의 집에 떠다 준 일이 발각되었고
◀ 수은동 사는 김성녀(40)는 수통물을 떠서 남에게 많이 나누어 주다가 순사에게 들키어 고발되었고
◀ 봉익동 170번지 송인섭은 연지동 6번지 구득손의 부탁으로 물을 떠다가 슬며시 연지동 문수경에게 하루 한 지게씩 주기로 약속하고 한 달에 30전씩 받던 일이 탄로되었고
◀ 경성 누하동 사는 류옥현(57)은 근처 김두환의 부탁을 들어 수통물을 길어다주는데 틈틈이 그 동네 김경창의 집에 물을 떠다주던 일이 발각되어 지금 모두 취조 중이라는데 범과자가 많은 모양이더라.
―“위반자 속출”, 〈매일신보〉, 1915년 8월 12일.

 
   



식민지 당국의 정책에 따라 경성수상조합의 ‘물장사’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렇다고 ‘물장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라진 것은 ‘경성수상조합’이었다. ‘경성수상조합’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조합의 힘은 ‘비공식’적으로 발휘되고 있었으며, 물장수들도 비공식적으로 활동했으며, 수좌인준증권도 재산으로 취급되어 여전히 매매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수도요금을 징수하기 위해서 ‘수도총대(水道總代)’를 선발하고 수도요금 징수와 납부 등의 수도업무를 무보수로 담당하게 하였다. 수도총대는 이용자 15호 당 1명이었다. ‘수도총대’라는 직책이 신설되면서 물장수들은 일반 수용자 자격으로 수도 사용을 신청하여 수도 열쇠와 감찰을 받은 후 ‘불법’으로 수돗물을 판매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당국의 단속을 피해 물을 ‘밀매’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물장수들의 ‘물 밀매’는 그들이 그저 돈벌이를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물지게꾼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호구지책이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식민지 당국과 수좌인준증권을 가진 거대 물장사들 사이에서 힘없는 물지게꾼 혹은 영세한 물장수들만 큰 피해를 보았던 셈이다.

급기야 1924년 조선총독부는 수도 방임제에서 수도 계량제로 제도를 변경한다. 수도에 계량기를 설치한 것이다. 이로써 비공식적으로 활동했던 물장수들은 정말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 비공식적으로 활동했던 물장수들은 다시 조합을 결성하기로 한다. 총 351인의 발기로 자본금 20만 원의 ‘경성공수조합(京城供水組合)’을 조직하였는데, 이 조직은 경성수상조합과 같은 수좌인준증권을 보유한 재력가들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급수부(물지게꾼) 중심의 ‘급수부조합’도 설립되어 활동을 벌였다. 두 조합은 여러 차례의 협의를 가진 후 순수한 급수부 중심의 ‘급수권 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명칭을 ‘급수조(給水組)’로 바꾼다. 하지만 급수조의 활동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고 순수한 급수부들의 권리가 어떻게 확보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침 1924년 시인 김동환은 “북청 물장사”란 시를 발표하여 이제는 정말로 ‘사라져 가는’ 물장수에 대한 향수를 아름답게 그려냈다. 

 

   
 

새벽마다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사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사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사
― 김동환, “北靑 물장사”, 〈동아일보〉, 1924년 10월 13일.

 
   



1800년대 전후에 생겨난 물장수는 몇 차례의 시대적 격변을 거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물장수의 명맥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식민지 조선의 수도 시설이 미미한 편으로, 지금처럼 각 가정마다 수도관이 연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장수의 명맥은 근근이 이어졌고, 1970년대 초반까지 존재했다. 

 

 

‘정부-상인(물장수)-소비자(인민)’의 이해가 미묘하고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공공재’로서의 자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물장수’의 존재는 다른 상품과는 달리 좀 더 근원적이고 윤리적인 물음을 요구한다. ‘물’을 팔 수 있다면, 바람과 공기와 흙도 팔 수 있는 것인가. 어쩔 수 없이 물을 팔아야 한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물장수는 사라졌지만 ‘식수’의 문제는 여전히 인류의 전 지구적 화두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백인들)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이다. (……)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벌판, 검은 숲에 걸려 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18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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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9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이 물부족국가이던데 그 맑고 맛나던 샘은 다 어디로 갔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