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토털 헬스케어? 물장수

 

 


수도의 개통, 물장수 조합이 생겨나다

 


1908년 9월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조선 최초로 근대식 수도 시설을 통해 ‘물 공급’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수돗물이 각 가정으로 배달되기 까지는 여러 해 동안의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1898년 ‘콜브란­보스트윅 상회’는 고종으로부터 서울의 수도 사업에 관한 특허를 받고, 1903년 12월 9일 서울 수도 사업의 특허에 관한 공식적인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1905년 콜브란­보스트윅 상회는 6만 5천 파운드를 받고 런던의 ‘인터내셔널 신디케이트’에 수도 사업 특권을 팔아치운다. 단, 수도 부설은 콜브란­보스트윅 상회가 이름을 바꾼 회사 ‘콜브란­보스트윅 개발회사’에서 담당하는 조건이었다. 인터내셔널 신디케이트는 서울의 수도 사업을 위해 ‘대한수도회사(Korean Water Works Limited, manager and engineer H. G. Foster Barham)’를 설립하였다. 대한수도회사는 상수도 시설과 경영의 관리를 담당했으며, 콜브란­보스트윅 개발회사는 1906년 8월 뚝섬(뚝도) 정수장 공사에 착공하여 1908년 8월에 공사를 마친다. 대한수도회사는 1908년 9월 1일부터 급수 인구 12만 5천 명에게 하루 12,500㎥의 급수를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각 가정마다 수도 파이프가 연결된 것은 아니었고, 도시의 중요한 거점에 수돗물이 나오는 공용 수도를 설치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 최초의 근대식 수도 시설이 탄생했다. 근대식 수도 시설의 탄생으로 인해 인민들이 좀 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글로벌 기업의 조선 진출은 물장수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형국이었다. 이에 생계를 위협받게 된 물장수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순량(純良)한 물을 음용하오.
제군은 질병으로 하여금 고뇌를 당하시옵나이까.
제군은 친우와 애자(愛子)를 영결(永訣)하심이 있으셨나이까.
제군은 항상 신기(身氣)가 피곤하고 정력이 노손(勞損)하였나이까.
순량한 물을 음용하시면 이들 고난을 면하시리이다.
순량한 물을 반드시 음용하시고 불량한 우물물은 폐용(廢用)하시어 독해(毒害)를 면하시오. (……)
급수상(汲水商)이 순량한 한강수로만 음료수를 공급함을 반드시 주목하오. (……)
한 동네 안에 있는 각 집에서 동시에 수돗물을 취용(取用)하게 되는 경우에는 급수 요금을 특별히 저렴하게 하겠습니다.
― “유한책임(有限責任)” 대한수도회사 왈 ‘대한수도회사 광고’, 〈대한매일신보〉, 1909년 3월 5일.

 
   


 
그러나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은 물장수들만이 아니었다. 대한수도회사 역시 기존의 ‘물 시장’을 제패하고 있었던 물장수와 맞서야 하는 과제에 봉착한다. 대한수도회사가 일차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대대적인 ‘물 광고’였다. 대한수도회사는 인민들에게 수돗물이 우물물보다 더 좋은 물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대한수도회사의 수돗물 광고는 공격적이었다. 우물물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이라는 것이었다. 대한수도회사는 한강물을 정수한 수돗물이야말로 일상에 만연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수’라 선전했다.

물장수들은 대한수도회사에 맞서 단체를 조직한다. ‘수상야학회(水商夜學會)’와 ‘수업회의소(水業會議所)’였다. 하지만 이 두 단체에 가입하는 물장수들의 계층은 달랐다. ‘수상야학회’에 가입하는 물장수들의 대부분은 비록 물자리는 갖고 있었지만 자본이 부족하여 스스로 급수노동을 했던 계층이었다. 물론 이 중에서도 몇몇은 물지게꾼을 고용한 부류도 있기는 했다. ‘수업회의소’에 참여한 물장수들은 대한수도회사에 대항하여 천일회사(天一會社)를 설립하고 우물물 영업을 계속하고자 했던 부류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은 ‘자본금소유주(資本金所有主)’라고 불렀다. 수업회의소에 참여한 물장수들은 물자리뿐만 아니라 개인 우물도 소유하고 있었던 재력가들이었다.

수상야학회는 대한수도회사에게 자신들이 보유한 물자리 권리를 보상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한수도회사는 수상야학회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대신 대한수도회사는 수돗물 특판을 수상야학회에 일임한다. 대한수도회사의 입장에서도 고육지책이었다. 기존의 물장수를 배제하고서는 소비자에게 물 공급을 원활하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수상야학회는 대한수도회사의 수돗물을 공급하는 하청 업체가 되었다. 대한수도회사는 수상야학회에게 511개의 급수전(給水栓) 중에 200개를 지급하였다.  

 


 
수상야학회 소속의 물장수들은 일명 특설 공용전〔共同栓〕을 통해 수돗물을 집집마다 배달하게 되었으며, 물장수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보증금과 월세를 대한수도회사에 납부하게 되었다. 대한수도회사의 특설 공용전이 수상야학회에 임대되자 우물물을 판매하던 물장수들은 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러한 경위로 우물을 보유하고 있었던 자산가들은 수업회의소를 조직하고 대한수도회사에 대항하게 된다.

수업회의소는 수상야학회 측에 자신들과 영업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수상야학회에서도 처음에는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나 결국 대한수도회사의 회유에 넘어가 수업회의소와의 상생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더욱이 수상야학회와 대한수도회사는 1908년 9월 말부터 10월까지 ‘무료급수’를 실시하였다. 이는 수도의 시험 가동을 빌미로 경쟁 상대였던 수업회의소의 기를 꺾기 위한 일종의 판촉 기간이었다. 약 10주간의 무상 급수가 끝나자 수상야학회는 학부(學部)에서 명령한 학회의 영업 활동 금지 정책에 따라 명칭을 ‘수상영업회(水商營業會)’로 개칭하고 다시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수상야학회가 명칭을 바꾼 이유는 수상야학회는 원래 노동 야학회의 한 분과로서 가입하였다가 독립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학회였기 때문이었다.

수상영업회 소속의 물장수들은 대한수도회사 소속 물장수임을 증명하는 호패를 차고 등유 깡통으로 만든 물통을 사용했으며, 자신들이 대한수도회사의 ‘공식 급수부’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다.  

 

   
 

본회(本會)에서 한성부수도회사와 계학하고 5부내(五部內) 음료수 공급역(供給役)을 모두 관리하여 조만간 개통함. 수진동내(壽進洞內) 수상야학회.
― “광고”, 〈황성신문〉, 1908년 8월 26일.

 
   



수상영업회 소속 물장수는 등유 깡통으로 만든 물통을 지고 다녔기 때문에 ‘깡꾼’이라고 불렀으며, 우물물을 판매했던 수업회의소 소속의 물장수나 물지게꾼 혹은 개인적으로 물을 판매했던 물장수는 나무로 만든 물통을 지고 다녔기 때문에 ‘통꾼’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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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시절 펌프물 마시다가 수도물로 바뀔 때 냄새가 나서 마시기 어려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