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토털 헬스케어? 물장수

 

 


한양의 진기한 구경거리
 



   
 

조선 사람의 생활의 색다른 모습은 물장수이다. 물론 조선에서도 급수 시설과 같은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상당한 규모의 공동 수도 사업을 하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 물을 공급한다는 점에서는 조선보다 더 좋은 자연 조건을 가진 나라는 별로 없다. (……)

물장수들은 스위스나 영국의 우유장수들이 사용했던 것과 매우 흡사한 지게를 멘다. 물지게는 어깨로 메도록 되어 있다. 지게의 끝에는 밧줄이나 쇠사슬이 달려 있고 그 끝에 고리가 달려 물통의 손잡이에 달린 고리에 연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동이에는 각기 약 3갤런을 담을 수 있으며 지게의 양쪽에 두 개를 걸 수 있다.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이웃들에게 물을 공급한다. 물을 공급한 대가로 그들은 각 가정으로부터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받는다. 정부가 집에 우물을 파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

물론 물장수들은 길가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으며 비록 그가 지게를 메지 않았더라도 그의 걸음걸이로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동이에 물을 가득 담고도 물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보폭과 진동을 유지하는지 외국인들의 눈에는 신기롭기만 하다. 그들은 심지어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한 덮개도 씌우지 않았다.
― G. W. 길모어 지음, 신복룡 옮김, 〈서울풍물지(Korea from its Capital)〉, 집문당, 1999(1892)

 
   
   

 

 

  

미국 선교사이자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길모어가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86년이었으며, 〈서울풍물지〉가 출간된 것은 1892년이었으니, 이 책은 미국 선교사가 본 19세기 말 한양의 풍경을 담고 있는 셈이다. 미국 선교사 길모어의 눈에 물장수의 모습은 낯선 것이었다. 물론 조선의 물장수가 스위스나 영국의 우유장수와 비슷한 행색을 하고 있었기는 했지만, 물을 파는 사람을 길모어는 처음 본 것이었다. 길모어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의 기이한 풍경 중 하나로 물장수의 존재를 꼽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이나 미국에는 물장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세기 당시 흔히 ‘문명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는 모두 상수도를 통해 식수를 공급받았다. 서구에서 상수도를 도입한 것은 전염병 때문이었다. 19세기 초 유럽은 콜레라로 몸살을 앓았다. 유럽인들은 전염병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기 위해 공중위생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공중위생 사업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진행된 것이 도시 환경의 정비였으며, 이 중에서도 상수도와 하수도의 정비가 먼저 실시되었다. 콜레라의 원인이 불결한 공중위생 상태 때문이며, 식수의 관리야말로 콜레라를 예방하는 지름길이라고 유럽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1613년 인구 15만의 영국 런던에 상수도가 보급되었다. 함부르크에서는 1842년, 단치히에서는 1869년, 베를린에서는 1870년에 상하수도 설비가 완공되었다. 그리고 최초의 근대적 하수 시설이 1850년대에 파리의 리옹 가에 설치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눈에 잘 뜨이는 직업 중의 하나는 물장수이다. 시골에서는 아낙네들이 샘이나 우물에서 물동이에 물을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나르지만 도시에서는 이런 일을 하는 특수한 계층의 남자들이 있다. 서울에서는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초라한 우물을 이용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국인들은 우물 바로 옆에서 흙이 묻은 옷을 빠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며 오물은 쉽사리 우물로 흘러들어 간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물 옆에서 채소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씻는다. 이와 같은 우물들은 위생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우리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콜레라나 그 밖의 전염병의 원인을 찾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우물로부터 대도시에로 물을 공급하는 일은 적은 일이 아니다.
― H. B. 헐버트 지음, 신복룡 옮김,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평민사, 1984(1906)

 
   
 

 


  

외국인들이 조선의 물장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 것은 ‘물장수’라는 직업도 직업이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조선의 ‘식수’가 매우 불결하다는 데 있었다.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마시는 조선인들의 풍습을 외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조선의 우물은 불결했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그 물을 먹고 살아간다는 것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외국인들이 보기에 한양과 같은 도시에 상수도 시설이 없다는 것은 더더욱 놀랄 일이었다. 그렇기에 식수를 배달해주는 물장수의 존재가 외국인들의 눈에는 신기한 구경거리였고, 물장수의 존재는 조선이 비위생적인 나라이자 ‘미개한’ 나라임을 증명하는 직업이었던 셈이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조선을 여행한 외국인들이 남긴 글의 내용 중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단어는 ‘불결’이라는 두 글자이다. ‘문명국’의 수준을 측정하는 방식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공중위생과 보건 위생의 수준이야말로 문명국이냐 문명국이 아니냐를 구별하는 척도 중의 하나이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조선의 공중위생과 보건위생 수준은 매우 열악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을 ‘불결한 나라’로 지목했다. 외국인들만이 당시 조선의 상황을 그렇게 불렀던 것은 아니었다. 근대 문명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했던 개화파 역시 그랬다. 김옥균의 문명개화 프로젝트의 핵심을 담고 있는 “치도약론”(1882)의 핵심 역시 ‘위생’이었다. 서구와 같은 문명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문명개화 프로젝트의 중심에 ‘국민’의 ‘위생’이 놓임으로써 조선은 ‘불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그 핵심 산업은 바로 대대적인 수질 관리 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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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인들의 사랑방 우물을 잃고 한국의 어머니상도 잃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