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메디컬 트릭스터, 약장수

 

 


만병통치약의 탄생
 


 

   
 

조선의 각 신문에는 특색이 있다. 매약광고가 8할을 점령한 사실이 그것이다. 말하길, 매독약, 임질약, 폐병약, 성 흥분약. 외국 사람이 보면 조선인은 모다 화류병자라고 할 일. 광고료도 귀하나 민족의 체면은 더 귀하다.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삼천리〉, 1931년 4월 1일.

 
   



대한제국 시기와 식민지 시기에 민간에 유통되어 인기를 끌었던 대부분의 약은 ‘매약(賣藥)’이었다. 약종상은 약품을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지닌 사람이었으며, 제약자는 약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사람을 뜻했고, 매약업자는 매약으로 제조된 제품을 판매하는 사람이었다. 매약이란 의사의 처방전에 따라 조제한 약이 아닌, 주치병과 약효를 붙여 포장된 약품을 뜻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활명수’와 같은 ‘일반의약품’을 뜻한다. 이 매약만을 판매할 수 있는 사람을 매약업자 혹은 매약상(賣藥商)이라 한다. 국내에서 개발된 매약도 있었지만, 일본에서 수입된 매약이 많았다. 매약 제조사들은 특정한 주치병에만 효과가 있는 약을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과대광고를 했다. 신문은 ‘사실’을 전한다고 믿었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약 광고 또한 많은 부분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일례로 건뇌환(健腦丸)을 복용하면 두통, 졸증, 중풍, 변비, 이명, 건망증, 우울증, 신경병, 뇌막염, 뇌충혈 등 각종 질병에 효과가 있다는 선전은 거의 ‘만병통치’의 개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제약회사들은 근대적인 ‘과학’과 전근대적이라 불리는 ‘비과학적인 초월의 세계’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광고를 만들어 하나의 약을 복용하면 마치 장생불사하고 회춘보원(回春保元)할 수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약 광고에는 ‘신약(神藥)’, ‘영약(靈藥)’, ‘묘약(妙藥)’, ‘기사회생(起死回生)’과 같은 자극적인 문구가 꼭 들어가 있었다.

1910년 9월 2일자 〈매일신보〉 광고에는 화평당의 ‘팔보단(八寶丹)’, ‘소생단’, ‘회생수’를 비롯한 다양한 약 광고가 실렸는데, 그 광고의 중심에 ‘기사회생’이란 큼지막한 문구를 박아 놓았다. 화평당은 ‘기사회생’이란 말로는 도저히 ‘팔보단’의 효험을 선전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1911년에 이르면 시각적 이미지를 동원한다. 일단 광고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문명한 오늘날 교통기관으로 제일 중요한 철도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있을지라도 우리 화평당의 팔보단을 알지 못하고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 있으리오.
― “광고”, 〈매일신보〉, 1911년 1월 7일.

 
   



광고에는 증기를 내품는 시커먼 기차가 그려져 있고, 기차의 몸통에 ‘팔보단’을 적어 넣었다. 기차의 이름이 ‘팔보단’인 셈이었다. 기차라는 근대 과학의 총아와 팔보단이 결합하고, 더 나아가 팔보단이 기차보다 더 유명하다는 것을 알리는 화평당의 광고 전략이었다. 화평당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신정약방의 ‘인단(仁丹)’ 광고에는 근대식 공장 이미지가 들어갔고, 청심보명단 광고에는 양복을 입은 신사가 조선인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비행선을 가리키는 모습의 이미지를 사용했는데, 비행선에 ‘청심보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비행선은 지상에서 이륙하여 억천만리(億千萬里)의 공중을 정복하고, 보명단은 해우(海隅)에서 나와 억천만인(億千萬人)의 위병을 정복한다.
― “광고”, 〈매일신보〉, 1911년 4월 25일.

 
   



이미 서구를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던 일본에서 생산된 매약인 ‘인단’의 광고 역시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제약회사에서 설명하는 인단의 효능은 멀미, 두통, 현기증, 복통, 소화불량, 구취제거, 과음 후 각성 효고, 감기, 전염병 예방 등이었는데,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이었다. 이처럼 제약회사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약의 효능을 과대해서 광고하거나 부분적으로는 허위 광고를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많이 팔면 그만이었다. 

 



제약회사들은 자신들이 판매하고 있는 약을 선전하기 위해서 ‘만병통치’의 개념과 ‘신약’, ‘묘약’, ‘영약’이라는 초월적인 세계에서나 사용될 법한 문구를 사용했으며, 함께 이것이 마친 근대적이고 과학적이고 문명적인 것처럼 기차와 비행선과 공장의 이미지를 겹쳐놓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약들의 ‘만병통치’라는 효능이 마치 과학적 연구의 산물인 것처럼 소비자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이들 제약회사에서 명명한 약의 이름 또한 소비자들을 초월적인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마치 불로장생의 세계로 진입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일본에게 인단이 있었다면 식민지 조선에게는 팔보단, 청심보명단이 있었는데, 이 약명의 공통점은 ‘단(丹)’을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단’이란 일반적으로 수은이나 유황 등이 함유된 광물성 약제로 가열과 서 가열과정, 승화 과정을 거치 만든 화합 제제를 뜻한다. 하지만 이 ‘단’자는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선단(仙丹)’ 세계의 환유적 소재였다.

매약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제약회사들의 광고 전략은 도를 넘는 것이었다. 총독부가 앞장서서 제약회사들의 과대/허위 광고를 문제 삼았지만, 제약회사들의 약 광고 관행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또한 약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은 언제나 ‘건강 염려증’에 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인단, 청심보명단, 팔보단 등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소비자들은 당대의 인기 있는 약을 구매하기 위해 제약회사의 지정 판매처인 약방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이러한 약들을 약방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매약행상이 전국을 떠돌다
 

  

   
 

매약청매업(賣藥請賣業)은 본업을 삼아도 넉넉히 될 수 있으나 부업으로 가정의 부인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약국(洋藥局)을 내는 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즉 제약사(藥劑師)가 경영하는 양약국과 약품만을 파는 양약국과 그 외에 매약―이 매약이라는 것은 의사나 약제사의 설명이 필요 없고 그대로 복용할 수 있는 즉 다시 말하면 봉지나 갑에 넣어서 설명서와 정가가 박혀 있는 것―을 판매하는 매약청매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별다른 면허도 영업세도 필요하지 않고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한 50원 이나 100원만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그대로 보통 집에서 별다른 설비도 할 것이 없이 마치 한방약국(漢方藥局) 같이 그대로 자기가 거처하는 방안에다 여러 가지 약품을 사다가 두고 대문에 조그만 간판을 붙이고 할 수 있고(……)
― “아무 가정에서나 할 수 있는 신식 부업 몇 가지, 200원 자본으로 매월 90원 수입되는 매약청매업”, 〈별건곤〉, 1929년 4월 1일.

 
   

 

의료 기관이 부족한 식민지 조선에서 매약은 누구나 팔 수 있었다. 일반의약품이었던 매약을 판매한다고 해서 특별한 규제나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매약회사의 약을 도매로 받아다가 소매로 팔면 그만이었다. 매약 판매는 수익이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너도나도 매약에 손을 대는 경우가 흔했다. 매약회사에서는 각종 신약이 출시되었고, 매약상인들은 이 약을 떼다 팔았다. 수익이 많이 나는 장사였기 때문에 고학생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서 매약행상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학교의 경비가 부족하자 교장이 교사들을 데리고 매약행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전문적인 매약행상이 아니었다. 학교의 자금부족, 학비 부족, 어려운 가정 형편 등으로 인한 궁여지책이었다. 이와는 달리 전문적으로 매약행상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매약상회 소속의 매약행상들이었는데, 매약을 가지고 전국 팔도를 누비며 약을 팔았던 약장수였다.

시골 장터의 약장수들은 손풍금을 켜기도 하고 바이올린―당시의 말로는 깽깽이―을 켜며 호객 행위를 했다.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볼 수 있는 노래도 하고 북도 치고 서커스도 하며 호객 행위를 하는 약장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시골 사람들은 약장수의 손풍금과 바이올린 소리와 재치 있는 입담에 넘어가 약을 구매했는데, 이렇게 약을 파는 약장수는 그래도 ‘좋은 약장수’였다. 약장수, 즉 매약행상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그들의 판매 전략이 사람들에게 유흥판을 제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불법행위 때문이었다.  

 

   
 

소위 행상매약청매업자들이 경향 각처로 출몰하면서 강압적으로 매약을 하는 동시에 더욱이 극빈자 농민의 고혈을 착취하는 불법행동이 비일비재한 현상에 이르러 경찰당국에서도 매우 단속에 머리를 앓는 터인바 이제 그들 청매업자의 가증한 행동을 적발하건대 그들 청매업자는 그 수가 전 조선에 2, 3천명에 달하는 터로 (……) 그들은 음력으로 정월 초순경이면 각각 소속된 상회에서 20전 짜리 약을 약 7전에 사가지고 각각 지가의 배치할 곳을 찾아 떠나는데, 방방곡곡에 어느 곳에 그들의 발길이 가지 아니하는 곳이 없는 터이며 더욱 민지가 깨지 못하고 세상 물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촌 중에서도 두메산골을 찾아가 가증한 수단으로 1원짜리 약포를 주인이 없거나 있거나 관계없이 아무 말 없이 약을 던져주고 호주의 성명을 기입하여 두며 더욱이 촌사람들이 약을 받지 않으면 그 때에는, 이것이 어떤 약인줄 아느냐! 이것은 면소(面所)에서 배치하는 것이다. 또 군(郡)에서 경찰서에서 위생을 보급하기 위하여 주는 것이라고 한 후 어리석은 촌민의 마음을 두렵게 하여 강제로 약을 맡긴 후 한 여름을 지나고 가을이 되면 약 값을 받게 되는 터인바 그때에는 두 세 사람씩 때를 지어가지고 강제로 약값을 징수하며 만약 약 값을 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심하면 구타까지 가하며 그 집안에 있는 물건을 아무 것이나 뺏으며 잔인무도한 행동을 하는 터인바이라. (……) 약품도 상당히 효과가 있는 약품이면 어느 방면으로 보아 묵과할 수 있을지 모르나 가령 예를 들면 금계랍(金鷄蠟)에 밀가루를 넣어 팔며 (……) 말할 수 없는 부정 매약 행동이 많다.
― “전조선 농촌을 무대로 부정 매약상 발호”, 〈중외일보〉, 1928년 1월 31일.

 
   



의료 기관의 턱없는 부족은 매약상이 활개 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약장수는 의료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농어촌을 돌면서 약을 팔았다. 물론 정직하게 약을 판매한 약장수들도 있었겠지만, 순진한 시골 사람들의 속여 폭리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부정한 수단으로 폭리를 취한 약장수들은 대부분 유령단체에 소속된 약장수들이 많았다고 한다. 서울에는 조선매약상회, 조선상회, 판본제약소 등 거대 매약상회가 있었다.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회사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매약행상들은 불법적으로 매약 판매를 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경남 창원군 청가면 속선리 19번지에 본적을 두고 각처로 약을 팔며 돌아다니는 조병식은 충남 논산군 강경면 북정에 사는 김현순과 공모하여 ‘와세링’에 붉은 물감을 섞은 후 그것을 조가비에 넣어 가지고 상처 난 곳과 기타 여러 가지 종처에 효험이 많은 곰의 기름이니 두꺼비의 기름이니 하여 지난 달 28일에 안주군 율산리 거리에서 감언이설로 4원 50전을 편취하다가 안주 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취조한 결과 두 사람은 신의주에서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기기한 일이 판명되어 지난 5일에 안주지청 검사국으로 서류와 함께 압송되었다더라.
― “주의할 매약상”, 〈동아일보〉, 1922년 7월 16일.

 
   



약장수들의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뿐 아니라, 엉터리로 제조한 약을 먹고 죽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조선매약상회를 비롯한 나름대로 이름을 알린 매약상회들도 불법 매약행상들을 단속해야 한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도 나서서 불법 매약행상을 단속했지만, 검거된 불법 매약행상은 미미했다. 또한 매약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지 않아서 검증받지 않은 약재로 매약을 만들어 파는 매약행상도 등장했으며, 기존의 매약에 다른 첨가물을 넣어 소비자를 속이는 매약행상도 한 둘이 아니었다. 공권력이 불법 매약행상 단속에 나섰지만 불법 매약행상의 활동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쉽게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양한 쇼를 보여주며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던, 시골 장터 놀이판을 주름잡았던 ‘추억’ 속의 ‘약장수’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골 장터를 떠돌며 ‘만병통치약’을 팔았던 약장수의 그 ‘만병통치약’에 우리는 실소를 보내지만, 그 만병통치약이란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떠돌이 약장수가 아니라 근대 제약회사였다. 그 제약회사야말로 진정한 허풍선이 ‘약장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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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1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인들을 상대로 현대판 약장수가 재등장했네요.
 

 

8. 메디컬 트릭스터, 약장수

 

 


의료 제도를 개혁하고, 약의 유통을 감시하다

 


한의학이 비판받으면서 서구의 의학은 ‘문명의 빛’이 되어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구와 같은 문명국이 되고자 하는 정부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시기였다. 민간에서는 아직까지 전통 의료 행위인 한의학과 민간 의료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평택군 역말 약국 하는 의원 김 씨가 남의 삼대독자 이일학을 고친다 하고 무슨 약 네 개를 주거늘 아침 전에 먹였더니 미초[未初: 오후 한 시경]부터 토사하다가 즉사하였다 하니 우리나라에 시급한 것은 의학교를 널리 설립하여 이렇게 비명횡사하는 폐가 없게 함이 좋을 것이다.
― “잡보”, 〈제국신문〉, 1899년 3월 16일.

 
   



민간에서는 의원의 잘못된 약 처방과 침술로 인해 가끔씩 비명횡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더욱이 약을 보관하는 것 또한 비위생적인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건강한 국민’의 육성이야말로 부국강병의 기본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의료 행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대한제국은 1900년 1월 2일 자로 내부령(內部令) 제27호를 반포한다. 이는 새로운 의료 행위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내부령 27호에는 의사규칙, 약제사규칙, 약종상규칙(藥種商規則)이 포함되어 있었다. 총 32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조항 중에 제1조부터 7조까지는 의사에 관한 규칙이었고, 8조부터 22조까지는 약제사에 관한 규정이었으며, 23조에서 24조까지는 약종상규칙이었다. 정부는 의사와 약제사(약사)와 약종상(약장수)을 구별하였다. 의사와 약제사에 대해서는 종전보다 철저한 자격조건을 부여했는데, 의사와 약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과대학과 약학과의 졸업증명서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내부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약제사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제조할 수 있으며, 약국을 개업하여 의사의 처방에 따른 약을 제조하여 판매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약제사와 약종상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약제사는 약을 제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약종상에게는 약을 제조할 권한이 없었다. 약종상은 규정상 단순히 ‘약품을 판매하는 자’였다. 약종상은 약품 판매에 관한 허가증이 있는 사람을 뜻했다.

의사, 약제사, 약종상의 규정을 정한 정부는 27조 말미에 〈약품순시규칙(藥品巡視規則)〉을 마련하여 약국을 비롯하여 약품을 판매하고 제조하는 장소의 위생 상태를 감독하기에 이른다. 약품 감시원은 감시할 시간을 미리 예고하여 고시하였으며, 썩거나 상한 약품을 발견하면 소각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와 같은 ‘약품순시규칙’이 정해진 이유는 여전히 약국의 약품 관리가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약을 권하는 사회
 


   
 

개성군 영창학교의 체조 교사 원제상 씨가 본래 임질이 있더니 근일에 또 안질이 있어서 자기의 오줌으로 눈을 씻다가 임질이 전염하여 백약이 무효하고 눈이 멀 지경이 된지라. 원 씨는 명예로 배의학교와 영창학교에서 열심히 교수하다가 병으로 위태함을 사람마다 가엾게 여긴다더라.
― “임질 전염”,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27일.

 
   


요즘 같은 상황에서 이런 기사가 났다면 아마 각종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 1위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의 초점은 임질이라는 ‘성병’이 아니라 눈이 멀게 된 훌륭한 교사에게 맞춰져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성병이 ‘감기’와도 같은 것이었을까? 이 기사에는 성병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사람들이 가엾게 생각하는 것은 ‘백약이 무효’라는 점이다. 임질균이 눈에 들어가 안질이 걸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임질을 잘 치료할 수 있는 약만 있었어도 원제상 씨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만약 원제상 씨가 ‘화평당약방’에서 판매하는 ‘사향소창단’을 빨리 복용만 했더라도 이런 변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서서 풀무골 사는 박정호 씨가 주마창으로 칠팔 년에 백약이 무효하여 가산을 탕진하여 죽기만 기다리더니 남문 밖 이문골 사는 양약국 하는 염진호 씨가 와서 보고 가세와 병세를 불쌍하게 여겨 인명 살리기만 주의하여 수공과 약값은 관계하지 않고 기계와 약을 가지고 날마다 와서 치료한 지 몇 달 만에 완치되어 출입을 한다니 염 씨는 참 위생하고 시제[施濟]하는 도리가 매우 훌륭하더라.
― “잡보”, 〈제국신문〉, 1899년 4월 11일.

 
   



종기로 고생을 하던 박정호를 살린 것은 ‘양약’이었다. 칠팔 년 동안 썼으나 효과가 없었던 약은 민간에서 떠도는 약이었을 터이다. 당대의 신문에는 이처럼 ‘양약’과 ‘서구 의술’을 통해 생명을 건진 미담들이 자주 실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서구식 의료 행위와 ‘양약’은 서서히 민간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민중들이 한의원이나 구시대의 ‘약방’에서 제조한 약이 아닌 ‘신약’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약 광고’의 힘이 컸다.  

 

 

1900년대 초부터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약 광고가 실리기 시작한다. ‘신약 전쟁’에 뛰어든 사람은 이경봉과 이응선이었다. 이경봉은 태평로에 ‘제생당대약방’을 설립하였고, 이응선은 광교 근처에 ‘화평당약방’을 세웠다. 더욱이 이응선의 경우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사진이 실리기도 했는데, 한 개인의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는 이응선이 처음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이응선이 1909년 조선을 휩쓴 콜레라 발병 때 자신이 개발한 약을 무상으로 공급하였기 때문이었다.    

 

   
 

본국에서 십년을 연구하여 사향소창단이란 약을 발명하였는데, 남녀 물론하고 무슨 창병이든지 한 제를 매일 한 개씩 먹으면 효험이 백발백중 되는 고로 매일 손님들이 와서 사가오니 창병 있는 사람들은 오래 고생하지 말고 속히 와서 문의하기를 희망함.
― “광고”,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1일.

 
   

 

이응선이 개발한 신약 중에 주력 상품은 ‘사향소창단’이었다. 한 제에 4원짜리와 2원 50전짜리가 있었다. 사향소창단 이외에 ‘회생수’와 ‘소생단’도 있었는데, 회생수와 소생단은 1909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무상으로 지급했던 약이었다. 이응선과 경쟁 관계였던 이경봉이 설립한 제생당대약방의 주력 상품은 ‘청심보명단’이었다.   

 

 

청심보명단은 소화불량, 멀미, 원기 부족에 도움을 준다는 약이었다. 이 약이 얼마나 잘 팔렸던지 ‘짝퉁 청심보명단’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에 제생당대약방에서는 신문에 유사품 주의 광고를 냈는데, 자신들이 파는 약은 ‘청심보명단’이지 ‘보명단’이 아니니 ‘보명단’을 ‘청심보명단’으로 속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시 약 광고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약’은 일종의 ‘자양강장제’와 같은 지금으로 말하면 건강식품에 가까웠던 약과 ‘성병 치료제’였다. 특히 성병 치료제는 약 광고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화평당약방의 사향소창단도 성병 약이었으며, ‘종로자혜약방’에서 판매하는 ‘남녀창병거근약’도 성병 치료제였다. 그만큼 당시 조선인들에게 임질과 매독 같은 성병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자양강장제, 위장약, 성병 치료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약품들이 신문 광고를 대거 장식해갔다. 약의 종류도 다양했다. 태양조경환(胎養調經丸), 자양환(滋陽丸), 백응고(白鷹膏), 안령환(安靈丸), 건뇌환(健腦丸), 실모산(實母散) 등등. 그런데 신문에 실린 약 광고를 보면 대부분 ‘과대광고’였다. 이 과대광고를 살펴보면 하나의 약이 특정한 질병에 효험이 있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으로 선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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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10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별로 국민의 병증상이 달라지네요. 성병-폐병-간질환-방사능....
 

 

8. 메디컬 트릭스터, 약장수

 

 


돌팔이 한의사는 가라!

 


서구에서 태동한 근대 의학과 생체 권력은 19세기 조선에도 유입되었다. 유길준, 서재필 등을 비롯한 많은 계몽 사상가들은 문명국가 건설의 일환으로 서구 의학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국민의 건강이 곧 막강한 국력의 밑받침이 된다는 것이 계몽 사상가들의 논리였다. 계몽 사상가들은 서구의 의료 시스템을 갈망했지만, 그 갈망이 조선 사회에서 곧바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조선 사회에 서구식 의료 시스템이 도입된 것은 개신교의 의료 선교 덕택이었다.

조선에서 기독교가 선교 활동의 자유와 함께 국가로부터 보호와 지원을 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선교사 알렌이 갑신정변 때에 그의 ‘뛰어난’ 의술로 민영익을 사경에서 구출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이 계기였다. 알렌은 민영익의 생명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고종을 알현하게 된다. 이때 알렌은 고종으로부터 서울에 서구식 병원의 설립을 약속 받는다. 이후 1885년 한국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광혜원이 설립된다.   

 

 

여기에는 최초의 서구식 병원이 설립되었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가 있었다. 조선 정부가 미국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 활동의 자유를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의료 선교를 통해 유입된 서구의 근대 의학은 이미 몇백 년에 걸쳐 내려온 조선식 전통 의학인 한의학과 대결을 펼쳐야만 했다.  

 

   
 

조선의 의학 체계는 주로 중국의 의학 체계이며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뜸을 자주 놓기 때문에 조선 사람을 벗겨 보면 어떠한 통증을 고치기 위해 뜨거운 뜸을 놓은 자리가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침도 뜸만큼 자주 놓는데 때로는 침이 더러워 원래의 병보다 더 심한 병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언젠가 나는 침을 사용하여 매우 슬픈 결과가 일어난 경우를 본 적이 있다.

그 일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낸 어느 늙은 관리의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의 외아들은 7대 독자였는데 미남자였고 건강했으며 나이는 약 21세였다. 하루는 뒷머리가 아프다고 했더니 그와 같이 있던 친구 한 사람이 침을 맞도록 권했다. 한의사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청년의 어머니는 병풍 뒤에서 침을 맞고 아픈 것을 멈추게 하라고 재촉했다. 아들이 이에 동의하고 그의 친구가 대담하게 환자의 목 뒤에 침을 꽂았다. 그러나 잘못되어 침이 골수를 꿰뚫어 젊은이는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쓰러져 죽고 말았고, 몇 시간 내에 그의 어머니도 충격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의 불쌍한 늙은 친구는 아들과 단 하나밖에 없는 부인을 한꺼번에 잃고 말았다. 그는 나의 조선인 친지 중에 한 명의 부인을 가진 몇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H. N. 알렌 지음, 신복룡 역주, 〈조선견문기(Things Korean)〉, 집문당, 1999(1908)

 
   



의사였던 알렌의 회고에도 등장하지만 조선의 전통 의료 시스템 중 하나인 ‘침술’은 알렌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구인들로부터 야만적인 의료 행위로 지탄을 받았다. 알렌이 보기에 조선의 ‘침술’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의료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사이비 의술’에 가까웠다. 침술과 뜸으로 상징되는 조선의 한의학에 대한 비판은 알렌과 같은 서구의 의사에게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1896년 민중 계몽의 일환으로 창간된 독립신문에는 비과학적인 의료 행위에 대한 강한 비판이 자주 게재되었다. 역시 미국에서 의사 면허를 딴 필립 제이슨(서재필)이 창간한 신문다웠다.  

 

 

   
 

못된 의원은 민간에 큰 화다. 조선 사람 중에 의원 때문에 죽는 사람이 일 년에 몇천 명이니 의원이 없었다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죽을 리가 없다. 무식한 의원의 학문 없는 약과 침 까닭에 불쌍한 인생이 목숨을 많이 잃었으니 어찌 불쌍하지 아니 하리요. 외국에서는 사람이 의원이 되려면 적어도 일곱 해를 날마다 학교와 병원에서 각종 병을 눈으로 보고 다스리는 법을 공부한 후에 대학교 교관들 앞에서 시험을 친 후, 다시 의원 노릇을 하려면 그 동리 판윤 앞에 가서 상등 의원들을 청하여 다시 시험 보고 그 사람이 내치 외치와 부인병과 아이병과 해산 하는데 관계되는 학문과 화학과 약물학과 약 만드는 법을 다 시험을 친 후에야 판윤이 인가장을 주어 비로소 민간에 나아가 의원 노릇을 하는 법이라. 의원이 이 학문들을 모르고 책을 보고 의원인 채 하는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위태한 사람이라.

근일에 들으니 소위 의원이라 하는 자들이 사람에게 침을 놓아 죽은 사람이 많이 있다니 침이라 하는 것은 당초에 학문이 없는 물건이라. 외국에서는 의원이 사람의 살을 기계를 가지고 건드리려면 그 기계를 더운물에 넣고 끓여 그 기계에 있는 박테리아(독물)가 다 죽은 뒤에 다시 약물에 넣어 아주 염려 없는 후에 비로소 살도 베고 오장을 열고 다시 기워 매면 그 사람이 몇 날이 못 되어 도로 살아나는 것이 묘리이다. (……) 조선 의원은 첫째 사람이 어떻게 생긴 것도 모르는 것이 의원 공부할 때에 죽은 사람을 해부해 본 일도 없으니 어찌 각종 혈관과 신경과 오장육부가 어떻게 놓여 있으며 그것들이 다 무슨 직무를 하는 것인지 그 중에 하나가 병이 들면 어떤 병증세가 생기는지 화학을 모른즉 약이 어찌 효험이 있는지 약을 쓰면 그 약이 어떻게 사람의 몸에 관계가 되는지 도무지 모르고, 덮어 놓고 약을 주며 덮어 놓고 침을 놓으니 이것은 곳 사람을 위태한 곳에다가 집어넣는 것이다. 정부에서 백성을 위하여 의학교와 병원은 아직 못 세워 주더라도 제일 침놓는 법은 금하여 불쌍한 목숨들이 살터이요. 또 사람이 병이 들면 조선서는 무당과 판수로 굿을 한다, 넋두리를 한다, 하여 병인이 편안히 잠잘 수도 없게 하며 또 그 굿하던 음식을 병인에게 먹게 하여 병이 더치게 하며, 그 까닭에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 우리 생각에는 한성 판윤과 경무사가 백성을 위하여 사업을 하려면 침쟁이와 무당과 판수와 재 올린다는 중들을 엄금하면 그 까닭에 사는 사람이 몇만 명일 터이요. 또 이 노릇 하여 벌어먹는 사람들은 당장은 좋지 않다고 할지라도 얼마 되지 않아 감격한 생각들이 있을 것이니, 불쌍하고 무죄한 인생들을 속이고 돈을 뺏으며 목숨을 잃게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불평할지라. 그것을 금하여 주니 어찌 감사치 아니 하리요. 사업이 다른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위하여 이롭고 편하도록 하여 주는 것이 사업이니 여간 몇이 원망한다고 상관할 것 없이 몇 가지를 경무청과 한성부에서 하기를 우리는 믿고 바라노라.
― “논설”, 〈독립신문〉, 1896년 12월 1일.

 
   



기독교 의료 선교는 조선인들의 세계관과 의학 사상적 인식과는 무관하게 과학과 문명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한의학과 민간 의료를 비과학과 야만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주변부화 시켰다. 이로써 ‘기독교(의료 선교)-과학-문명’의 도식이 성립하게 된다. 기독교를 종교로서보다는 문명개화의 힘으로 받아들인 근대 초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기독교를 통해 들어온 서구 근대 의학은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한의원은 악의 상징으로 서구의 의사는 생명을 구하는 명의로서 부각된다.

한의학/한의원이 위험한 존재로 비판 받은 것은 의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며, 의료 기구를 비위생적으로 관리하며, 해부학적 경험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더구나 한의원의 의료 행위를 무당과 판수와 같은 ‘미신’을 믿는 것과 동일선상에 배치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전통적 사유 체계에 대한 부정과 함께 서구의 과학과 합리적 치료 체계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한다. 이로써 전통적 사유 체계는 주변부화 되어 하나하나 지워져나가고 서구의 과학적 의료 체계를 통한 신체에 대한 인식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사라진 직업의 역사> 설 연휴 연재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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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뚜르 2011-02-07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의원에 가면 솔솔 풍기던 한약재 냄새가 왠지 그립네요...정말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서양의학과 이렇게 다른 것이었군요!

자음과모음 2011-02-07 10:59   좋아요 0 | URL
요새 한약제 가격이 상승하면서 진료비가 따라서 상승해, 문닫는 한의원들이 많아졌다는데요. 언젠가는 정말 한약 냄새가 그리운 냄새가 되는 날이 올지 모르겠어요

비로그인 2011-04-10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렌이 일찌기 한의학의 근원을 깨우쳐 양한방을 접목하는 계기가 있었더라면 한국의료수준이 많이 발달했었을텐데 아쉽네요.
 

 

8. 메디컬 트릭스터, 약장수

 

 


죽음은 더 이상 갑작스럽게 우리를 덮치지 않는다

 


18세기 서구의 근대 과학은 급격한 발전을 이룩했다. 이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역시 점진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죽음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손님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서서히 침입하는 손님이었다. 대량 사망의 일시적인 드라마와 같은 전염병인 페스트나 콜레라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두려운 질병은 우리의 삶 속에 미끄러져 들어와 조금씩, 조금씩 생명을 갉아먹으면서 마침내는 죽음의 문턱에까지 인도하는 그러한 질병들이었다.

18세기에 태동한 근대 의학의 핵심은 ‘삶을 관리’하는 기술이었다. 삶을 관리한다는 것은 단지 질병의 치료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력의 기본적인 목표 중 하나는 ‘전체 인구의 건강과 신체적 복지’였다. 건강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임과 동시에 사회 전체의 목표가 된 것이다. 18세기에 생겨난 정치권력의 새로운 기능 중 하나는 육체적 복지, 건강, 장수를 사회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의학의 사회적 기능 변화를 일으킨 근본 원인은 노동력과 인구의 문제였다. 18세기 유럽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정치권력은 증가한 인구를 생산의 순환 속으로 편입시키고, 그들을 적절한 권력 장치를 동원해 보다 정교하게 관리해야만 했다. 당시는 인구 문제를 사회적 부를 갉아먹는 대상으로서가 아닌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18세기에는 ‘분류 의학’이 성립된다. 분류 의학은 질병이 갖는 역사적이며 지형학적인 의식이 무엇인가를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질병이 발생한 지역의 토양, 기호, 계절, 강우량, 전염성의 근원, 기근 등이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다시 말해서 분류 의학이란 린네가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설명하고 분류한 방법론을 질병의 분류에 적용한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신체에 자리 잡은 질병을 종(種)과 종류(種類) 혹은 종족(種族)의 위계질서로 분류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류법은 질병의 도표를 만드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의사들은 비로소 각각의 질병을 기억하고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풍토병과 전염병은 도표화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이에 ‘분류 의학’과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형태의 의학 담론이 구성되기 시작한다. 18세기 중반까지의 전염병이란 ‘갑자기 들이닥치는 죽음’으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감염되었느냐에 따라 그것을 ‘전염병’이라 부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냥 ‘질병’이라고 호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생성된 의학 담론은 전염병의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전염병을 해결하려 했던 의학은 분류하기의 의학과는 대조적이다. 그것은 마치 집단적인 현상을 단 한 번에 뭉뚱그려 파악했던 의학적 시선이 환자 하나하나를 관찰하여 다양한 질병 속에서 독특한 현상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기를 기다렸던 개별적 의학적 시선과 대조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환자를 관찰함으로써 다른 환자의 상태를 유추할 수 있고, 전염병이 발생한 시간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생각하며, 질병의 종류를 파악하기 위해 그것이 드러난 장소를 차별적으로 개념정의하고 병의 원인을 분류하는 등의 방법으로 질병의 일관된 모습을 찾으려는 작업과, 동질적인 표면처럼 등장하는 질병의 역사적이고 지형학적인 공간을 찾으려 했던 작업이 바로 전염병을 해결하려 했던 새로운 의학이 관심을 기울였던 일들이다.
― 미셸 푸코 지음, 홍성민 옮김, 〈임상의학의 탄생〉, 인간사랑, 1993.

 
   



분류 의학은 질병을 인간의 육체와는 무관한 ‘독립된 실체’로 생각했다. 하지만 새롭게 구성된 의학담론은 지식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의료 행위에 있어서도 국가의 공공기관이 의학적 지식과 의료 행위를 관리하고 다뤘다. 1776년에 프랑스는 의학의 중앙집권화를 위해 ‘왕립의학회’를 창설했다. 1776년 4월 29일 왕립의학회에서 발표된 칙령의 서문은 당시 의학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전염병이 위험스럽고 파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그것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의사들로 하여금 어떠한 조처를 취해야 좋은지 모르게 만드는 경우일 뿐이다. 그러나 전염병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이유는 서로 다른 전염병의 증상과 성공적인 치료방법들을 연구하고 기술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 미셸 푸코 지음, 홍성민 옮김, 〈임상의학의 탄생〉, 인간사랑, 1993

 
   

 

 

 

중앙집권화된 의학은 전국가적으로 전염병에 대한 조사와 연구, 사례 분석 그리고 기록 등을 통하여 질병에 대한 조직적인 관리의 시스템을 가동했다. 전염병이 퍼질 가능성이 있는 지역의 행정감독관은 질병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전문적인 의사 이외에 여러 명의 보조의사를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경찰력과 행정력, 즉 검역감시관을 지방에 파견하여 지역 의사들의 활동과 주민들의 건강 상태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감시를 실시하였다. 검역감시관은 질병과 전염병에 대해 막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의사의 의료 행위를 통제하고 감독하였다.

1793년 프랑스 혁명 전쟁 이후 의사들은 국가 정책에 복무하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제 의학이란 병을 고치기 위한 ‘기술적인’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 의사들은 병원에서 수많은 환자를 돌보는 대신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건강과 덕목 그리고 행복의 지표를 관리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여기서 의학은 ‘건강한 사람을 관리’하는 것인데, 그 ‘건강’이란 병에 걸리지 않은 상태를 넘어서 ‘정상적인 사람’의 모델을 포괄했다. 18세기 혁명전쟁 이후의 의학은 개인의 ‘건강’을 관리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정상과 비정상적 병리 상태까지 고려하기 시작했다.

18세기의 의학적 시선은 질병의 빈도나 주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질병이 다른 질병과 구분되는 독특한 특성만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임상의학은 질병을 ‘증상’(symptom)을 통해 파악하게 되는데, 이 때 중요한 것은 증상의 빈도나 주기 등이다. 다시 말해 ‘계산 가능성’을 통해 질병을 포착하는 것이다. 임상의학의 발전은 의학 이론만이 아니라 의학의 사회적 역할과 의료 제도 등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더욱이 19세기에 이르자 병원은 치료의 장소뿐만이 아니라 의학의 교육과 환자의 교정을 위한 장소로 변모하게 된다. 질병은 인간의 고통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임상의학적 ‘시선’으로 ‘분석’되고 ‘범주화’되는 ‘병리해부학적’ 공간 속의 실체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임상의학이 만개할 수 있었던 원인의 하나로 ‘진료소’의 탄생을 들 수 있다. 진료소는 새로운 의학 지식의 원천이자 동시에 의사의 훈련장이었다. 진료소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의학의 중앙집권화가 어느 정도 해체되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의학의 중앙집권화가 무력화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유화되었던 병원이 민간단체의 성격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병원의 조직과 관리는 아직까지 국가의 행정 업무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관할 구역에 진료소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권력은 매우 신중하고 세심하게 그리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개인의 신체에 대한 권력 기술은 19세기에 들어서면 그 절정을 이룬다. 권력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을 장악하고 ‘삶과 죽음을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른바 ‘생체 권력’이 출현한 것이다. 생체 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라기보다 사망률이다. 이 메커니즘은 예측과 통계를 통해 사망률을 낮추고, 수명을 연장시키고, 출산을 권장하기 위한 방식으로서 작동한다. 요컨대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인구에 반드시 있게 마련인 우연적인 요소들 주변에 최대한의 보조 장치를 마련하고, 삶의 질을 최적의 수준으로 만드는 규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즉 종(種)으로서의 인간의 생물학적 과정들을 고려하고, 여기에 규율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교와 군대가 규율 권력을 생산하고 관리한다면, 의료 기관과 구호 기금 그리고 보험 등이 바로 생명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생물학적 혹은 생체 권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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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랄라 2011-01-2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메디컬 트릭스터! 제목 죽이는데요~^^*

자음과모음 2011-02-07 11:00   좋아요 0 | URL
트랄라님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비로그인 2011-04-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명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능력이 지나치게 발달한 것 같아요.
 

 

8. 메디컬 트릭스터, 약장수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초등학교 때였다. 어머니는 방학만 되면 어김없이 나를 남쪽 바닷가로 내려보냈다. 바닷가에서 외로이 생활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라는 이유에서였다. 서울역에서 통일호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몇 번 더 버스를 갈아타면 고향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온 손자를 위해 할아버지는 ‘매번 똑같은’ 행사를 준비해 놓았다. 산소에 가기, 동네 어른들께 인사하기, 장터에 가기. 이 행사 말고 겨울 방학 때는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연’이 보너스로 준비되어 있었다. 산소에 가서 절을 하고, 산소에서 내려오는 길에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하면, 그 다음은 장터로 향했다. 장터로 갈라치면 고향집에서 20여 분을 걸어 나가 버스를 타야 했다. 읍내의 장터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할아버지가 장터를 찾은 이유는 특별히 무슨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읍내 장터에서 이모는 채소와 야채를 팔았다.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손자를 데리고 장터에 간 것은 첫째는 이모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였고, 그 다음에는 친구들과 막걸리 한 잔을 하기 위해서였다. 옛날의 장터는 요즘의 마트와는 아주 다른 곳이었다. 물론 요즘도 ‘재래시장’이 있어 텔레비전 속에서나마 그 훈훈한 풍경을 엿볼 수는 있다. 장터와 마트의 가장 큰 차이는 물건 값이나 시설의 편의성 등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장터에는 있고, 마트에는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였다. 시골 장터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물건을 사러 나오는 손님들이나 어찌 보면 한 사람 건너면 모두 친분이 있을 정도로 끈끈한 지역 공동체의 일원들이었다.

할아버지 역시 장터 상인들과 친했다. 할아버지가 장터에 나간 것은 좌판에 펼쳐놓은 물건을 고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일주일마다 한 번씩 서로의 소식과 안부를 묻기 위한 일종의 ‘마실’이었다. 이런 장터에 그 지역 사람들이 아닌 외지인들이 가끔씩 좌판을 펼쳐놓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외지인이 바로 약장수였다. 약장수는 약만을 팔지는 않았다. 약장수는 약을 팔기 전에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호객 행위인 셈이었다.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고, 접시를 돌리기도 하고, 덤블링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독사를 잡아채는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쇼가 끝나면 입심 좋은 사회자가 드디어 약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자아~자아~,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녀. 사고 싶다고 매일 살 수 있는 게 아녀. 저기 가는 아저씨 일단 한 번 앉아 봐. 저기 가는 아줌마, 눈치 보지 말고 일단 한 번 앉아 봐. 안 사도 뭐라고 안 해. 일단 한 번 구경이나 해봐. 이게 말로만 듣던 그 만병통치약이여. 이거 한 통만 일단 잡숴봐. 며칠만 지나봐. 몸이 불끈불끈 하고 난리가 날 것이여…….

 
   



호기심 반, 의심 반이지만 몇몇 사람들은 약장수가 선전하는 ‘만병통치약’을 샀다. 그 약이 정말 만병통치약이라 생각하고 구매한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약장수의 화려하고 달달한 언변에 빠져들어 약을 구매했다. 약을 산 사람들 자신이 구매한 약이 정말 만병통치약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몸에 좋은 것이겠거니 하고 약을 구매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약을 구매한다기보다 약장수들이 펼쳐놓은 여흥판에 대한 일종의 답례는 아니었을까.

약장수가 판매한 그 만병통치약이 진정 몸에 좋은 약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검증도 되지 않은 약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고파는 관행이나 문화는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약장수가 팔았단 그 ‘만병통치약’은 언제부터 등장한 것일까. 특별히 아프지도 않으면서 행여나 하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기 위해 일상적으로 약을 복용하는 행위는 과연 언제부터 일상적인 우리네 삶의 한 방식이 되었던가. 더 나아가 사람들이 약의 효능보다는 약장수의 화려하고 달콤한 언변이나 제약회사의 선정적인 과대광고를 통해 약을 구매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시골 장터에서 활약했던 약장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전근대적 장터 문화나 약 판매 관행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더 크게는 근대 의학과 제약 산업의 형성 배경을 묘파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구에서 태동한 근대 의학과 근대 초기 조선에서 위생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약장수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직업이 아니다. 약장수가 등장하기 까지는 서구의 근대 의학과 제약 산업, 그리고 조선의 전통적 의료 시스템인 한의학과 서구 의학의 대결 등이 얽히고설켜 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장터 곳곳에서 활약했던 약장수들이 등장한 배경과 그들의 삶의 편린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참을 에둘러 가야만 한다.

 


점성술을 모르는 의사는 바보다?
 


〈물장수〉란 글에서 근대 초기 ‘물 시장’과 ‘위생’의 관계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지만, 근대 초기 조선은 ‘건강’에 대해서 집요하리만치 강박적인 사회였다.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이야 아주 오래된 인간의 욕망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웅 서사시이자 ‘최초’의 신화라고 불리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길가메시 왕이 모험을 떠났던 것 또한 ‘불멸의 꿈’, ‘영생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길가메시 왕이 불멸을 꿈꾸고 영생을 바랐던 것은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일상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아주 막연한 문제였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리기 위한 인간의 욕망이 ‘의학’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학문으로서의 ‘의학’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에 침입하는 질병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고대시대에도 분명 있었으나 그때의 ‘의학’은 지금과 같은 기술적인 학문은 아니었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로부터 내려오던 신체와 질병에 대한 인식은 자연철학을 밑바탕으로 한다.   

 

 

히포크라테스는 신체 내부의 운동을 우주의 순환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했다. 신체 내부의 운동과 우주의 순환을 파악하기 위해 히포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점성술’이었다. 히포크라테스에게 천제의 움직임을 살피는 점성술은 인간의 맥박(별들의 순행)을 관찰하는 준거가 되었다. 그에게 질병은 체액 간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의미했다.

체액설은 엠페도클레스의 자연철학 이론을 인체라는 소우주에 접목시킨 것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자연철학은 자연의 구성 요소를 물, 불, 공기, 흙 등의 4원소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인체에는 자연의 4원소에 대응하는 혈액, 점액, 흑담즙, 황담즙이라는 네 가지 종류의 체액이 존재하는데, 건강은 이 구성 요소들이 양적/질적으로 정확한 비율로 혼합되어 있을 때 달성된다고 생각했다. 히포크라테스에게 건강이란 신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며, 질병이란 그런 조화가 깨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결국 질병이란 네 가지 체액 가운데 어느 한 요소가 모자라거나 넘칠 때, 혹은 몸 안에서 따로 떨어져 서로 융합이 잘 되지 않을 때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세계와 인간을 대우주와 소우주로 이해하고 이들 사이의 통일적 관계를 설정하는 총체론적 입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는 ‘점성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바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18~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제점성술을 믿는 의사야말로 ‘바보’가 되었고, 체액설에 근거한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야말로 ‘사이비 의사’로 지목받게 되었다. 의학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 되었다. 파스퇴르와 코흐에 의해 세균설과 감염설이 확립되면서 의학은 진정한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질병은 더 이상 몸의 내부/외부적 균형이 깨진 상태가 아닌, 세균의 감염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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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p 2011-01-28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의학 관련 글은 언제 읽어도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정말 흥미로운 주제인 듯. 우리 몸에 대한 이야기이니...

자음과모음 2011-02-07 11:02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는 시대와 나이를 막론하고 함께 흥미롭게 생각하고 얘기해볼만한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있네요- "몸!". 단순하게도, 누구나 몸은 있기 때문이지요! :-)

비로그인 2011-04-10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인들은 인체의 발란스가 깨져서 생기는 병이 더 큰 문제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