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메디컬 트릭스터, 약장수

 

 


의료 제도를 개혁하고, 약의 유통을 감시하다

 


한의학이 비판받으면서 서구의 의학은 ‘문명의 빛’이 되어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구와 같은 문명국이 되고자 하는 정부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시기였다. 민간에서는 아직까지 전통 의료 행위인 한의학과 민간 의료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평택군 역말 약국 하는 의원 김 씨가 남의 삼대독자 이일학을 고친다 하고 무슨 약 네 개를 주거늘 아침 전에 먹였더니 미초[未初: 오후 한 시경]부터 토사하다가 즉사하였다 하니 우리나라에 시급한 것은 의학교를 널리 설립하여 이렇게 비명횡사하는 폐가 없게 함이 좋을 것이다.
― “잡보”, 〈제국신문〉, 1899년 3월 16일.

 
   



민간에서는 의원의 잘못된 약 처방과 침술로 인해 가끔씩 비명횡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더욱이 약을 보관하는 것 또한 비위생적인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건강한 국민’의 육성이야말로 부국강병의 기본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의료 행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대한제국은 1900년 1월 2일 자로 내부령(內部令) 제27호를 반포한다. 이는 새로운 의료 행위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내부령 27호에는 의사규칙, 약제사규칙, 약종상규칙(藥種商規則)이 포함되어 있었다. 총 32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조항 중에 제1조부터 7조까지는 의사에 관한 규칙이었고, 8조부터 22조까지는 약제사에 관한 규정이었으며, 23조에서 24조까지는 약종상규칙이었다. 정부는 의사와 약제사(약사)와 약종상(약장수)을 구별하였다. 의사와 약제사에 대해서는 종전보다 철저한 자격조건을 부여했는데, 의사와 약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과대학과 약학과의 졸업증명서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내부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약제사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제조할 수 있으며, 약국을 개업하여 의사의 처방에 따른 약을 제조하여 판매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약제사와 약종상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약제사는 약을 제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약종상에게는 약을 제조할 권한이 없었다. 약종상은 규정상 단순히 ‘약품을 판매하는 자’였다. 약종상은 약품 판매에 관한 허가증이 있는 사람을 뜻했다.

의사, 약제사, 약종상의 규정을 정한 정부는 27조 말미에 〈약품순시규칙(藥品巡視規則)〉을 마련하여 약국을 비롯하여 약품을 판매하고 제조하는 장소의 위생 상태를 감독하기에 이른다. 약품 감시원은 감시할 시간을 미리 예고하여 고시하였으며, 썩거나 상한 약품을 발견하면 소각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와 같은 ‘약품순시규칙’이 정해진 이유는 여전히 약국의 약품 관리가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약을 권하는 사회
 


   
 

개성군 영창학교의 체조 교사 원제상 씨가 본래 임질이 있더니 근일에 또 안질이 있어서 자기의 오줌으로 눈을 씻다가 임질이 전염하여 백약이 무효하고 눈이 멀 지경이 된지라. 원 씨는 명예로 배의학교와 영창학교에서 열심히 교수하다가 병으로 위태함을 사람마다 가엾게 여긴다더라.
― “임질 전염”,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27일.

 
   


요즘 같은 상황에서 이런 기사가 났다면 아마 각종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 1위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의 초점은 임질이라는 ‘성병’이 아니라 눈이 멀게 된 훌륭한 교사에게 맞춰져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성병이 ‘감기’와도 같은 것이었을까? 이 기사에는 성병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사람들이 가엾게 생각하는 것은 ‘백약이 무효’라는 점이다. 임질균이 눈에 들어가 안질이 걸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임질을 잘 치료할 수 있는 약만 있었어도 원제상 씨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만약 원제상 씨가 ‘화평당약방’에서 판매하는 ‘사향소창단’을 빨리 복용만 했더라도 이런 변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서서 풀무골 사는 박정호 씨가 주마창으로 칠팔 년에 백약이 무효하여 가산을 탕진하여 죽기만 기다리더니 남문 밖 이문골 사는 양약국 하는 염진호 씨가 와서 보고 가세와 병세를 불쌍하게 여겨 인명 살리기만 주의하여 수공과 약값은 관계하지 않고 기계와 약을 가지고 날마다 와서 치료한 지 몇 달 만에 완치되어 출입을 한다니 염 씨는 참 위생하고 시제[施濟]하는 도리가 매우 훌륭하더라.
― “잡보”, 〈제국신문〉, 1899년 4월 11일.

 
   



종기로 고생을 하던 박정호를 살린 것은 ‘양약’이었다. 칠팔 년 동안 썼으나 효과가 없었던 약은 민간에서 떠도는 약이었을 터이다. 당대의 신문에는 이처럼 ‘양약’과 ‘서구 의술’을 통해 생명을 건진 미담들이 자주 실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서구식 의료 행위와 ‘양약’은 서서히 민간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민중들이 한의원이나 구시대의 ‘약방’에서 제조한 약이 아닌 ‘신약’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약 광고’의 힘이 컸다.  

 

 

1900년대 초부터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약 광고가 실리기 시작한다. ‘신약 전쟁’에 뛰어든 사람은 이경봉과 이응선이었다. 이경봉은 태평로에 ‘제생당대약방’을 설립하였고, 이응선은 광교 근처에 ‘화평당약방’을 세웠다. 더욱이 이응선의 경우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사진이 실리기도 했는데, 한 개인의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는 이응선이 처음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이응선이 1909년 조선을 휩쓴 콜레라 발병 때 자신이 개발한 약을 무상으로 공급하였기 때문이었다.    

 

   
 

본국에서 십년을 연구하여 사향소창단이란 약을 발명하였는데, 남녀 물론하고 무슨 창병이든지 한 제를 매일 한 개씩 먹으면 효험이 백발백중 되는 고로 매일 손님들이 와서 사가오니 창병 있는 사람들은 오래 고생하지 말고 속히 와서 문의하기를 희망함.
― “광고”,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1일.

 
   

 

이응선이 개발한 신약 중에 주력 상품은 ‘사향소창단’이었다. 한 제에 4원짜리와 2원 50전짜리가 있었다. 사향소창단 이외에 ‘회생수’와 ‘소생단’도 있었는데, 회생수와 소생단은 1909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무상으로 지급했던 약이었다. 이응선과 경쟁 관계였던 이경봉이 설립한 제생당대약방의 주력 상품은 ‘청심보명단’이었다.   

 

 

청심보명단은 소화불량, 멀미, 원기 부족에 도움을 준다는 약이었다. 이 약이 얼마나 잘 팔렸던지 ‘짝퉁 청심보명단’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에 제생당대약방에서는 신문에 유사품 주의 광고를 냈는데, 자신들이 파는 약은 ‘청심보명단’이지 ‘보명단’이 아니니 ‘보명단’을 ‘청심보명단’으로 속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시 약 광고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약’은 일종의 ‘자양강장제’와 같은 지금으로 말하면 건강식품에 가까웠던 약과 ‘성병 치료제’였다. 특히 성병 치료제는 약 광고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화평당약방의 사향소창단도 성병 약이었으며, ‘종로자혜약방’에서 판매하는 ‘남녀창병거근약’도 성병 치료제였다. 그만큼 당시 조선인들에게 임질과 매독 같은 성병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자양강장제, 위장약, 성병 치료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약품들이 신문 광고를 대거 장식해갔다. 약의 종류도 다양했다. 태양조경환(胎養調經丸), 자양환(滋陽丸), 백응고(白鷹膏), 안령환(安靈丸), 건뇌환(健腦丸), 실모산(實母散) 등등. 그런데 신문에 실린 약 광고를 보면 대부분 ‘과대광고’였다. 이 과대광고를 살펴보면 하나의 약이 특정한 질병에 효험이 있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으로 선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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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10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별로 국민의 병증상이 달라지네요. 성병-폐병-간질환-방사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