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더 이상 갑작스럽게 우리를 덮치지 않는다
18세기 서구의 근대 과학은 급격한 발전을 이룩했다. 이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역시 점진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죽음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손님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서서히 침입하는 손님이었다. 대량 사망의 일시적인 드라마와 같은 전염병인 페스트나 콜레라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두려운 질병은 우리의 삶 속에 미끄러져 들어와 조금씩, 조금씩 생명을 갉아먹으면서 마침내는 죽음의 문턱에까지 인도하는 그러한 질병들이었다.
18세기에 태동한 근대 의학의 핵심은 ‘삶을 관리’하는 기술이었다. 삶을 관리한다는 것은 단지 질병의 치료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력의 기본적인 목표 중 하나는 ‘전체 인구의 건강과 신체적 복지’였다. 건강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임과 동시에 사회 전체의 목표가 된 것이다. 18세기에 생겨난 정치권력의 새로운 기능 중 하나는 육체적 복지, 건강, 장수를 사회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의학의 사회적 기능 변화를 일으킨 근본 원인은 노동력과 인구의 문제였다. 18세기 유럽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정치권력은 증가한 인구를 생산의 순환 속으로 편입시키고, 그들을 적절한 권력 장치를 동원해 보다 정교하게 관리해야만 했다. 당시는 인구 문제를 사회적 부를 갉아먹는 대상으로서가 아닌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18세기에는 ‘분류 의학’이 성립된다. 분류 의학은 질병이 갖는 역사적이며 지형학적인 의식이 무엇인가를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질병이 발생한 지역의 토양, 기호, 계절, 강우량, 전염성의 근원, 기근 등이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다시 말해서 분류 의학이란 린네가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설명하고 분류한 방법론을 질병의 분류에 적용한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신체에 자리 잡은 질병을 종(種)과 종류(種類) 혹은 종족(種族)의 위계질서로 분류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류법은 질병의 도표를 만드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의사들은 비로소 각각의 질병을 기억하고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풍토병과 전염병은 도표화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이에 ‘분류 의학’과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형태의 의학 담론이 구성되기 시작한다. 18세기 중반까지의 전염병이란 ‘갑자기 들이닥치는 죽음’으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감염되었느냐에 따라 그것을 ‘전염병’이라 부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냥 ‘질병’이라고 호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생성된 의학 담론은 전염병의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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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을 해결하려 했던 의학은 분류하기의 의학과는 대조적이다. 그것은 마치 집단적인 현상을 단 한 번에 뭉뚱그려 파악했던 의학적 시선이 환자 하나하나를 관찰하여 다양한 질병 속에서 독특한 현상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기를 기다렸던 개별적 의학적 시선과 대조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환자를 관찰함으로써 다른 환자의 상태를 유추할 수 있고, 전염병이 발생한 시간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생각하며, 질병의 종류를 파악하기 위해 그것이 드러난 장소를 차별적으로 개념정의하고 병의 원인을 분류하는 등의 방법으로 질병의 일관된 모습을 찾으려는 작업과, 동질적인 표면처럼 등장하는 질병의 역사적이고 지형학적인 공간을 찾으려 했던 작업이 바로 전염병을 해결하려 했던 새로운 의학이 관심을 기울였던 일들이다.
― 미셸 푸코 지음, 홍성민 옮김, 〈임상의학의 탄생〉, 인간사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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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의학은 질병을 인간의 육체와는 무관한 ‘독립된 실체’로 생각했다. 하지만 새롭게 구성된 의학담론은 지식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의료 행위에 있어서도 국가의 공공기관이 의학적 지식과 의료 행위를 관리하고 다뤘다. 1776년에 프랑스는 의학의 중앙집권화를 위해 ‘왕립의학회’를 창설했다. 1776년 4월 29일 왕립의학회에서 발표된 칙령의 서문은 당시 의학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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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위험스럽고 파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그것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의사들로 하여금 어떠한 조처를 취해야 좋은지 모르게 만드는 경우일 뿐이다. 그러나 전염병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이유는 서로 다른 전염병의 증상과 성공적인 치료방법들을 연구하고 기술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 미셸 푸코 지음, 홍성민 옮김, 〈임상의학의 탄생〉, 인간사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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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화된 의학은 전국가적으로 전염병에 대한 조사와 연구, 사례 분석 그리고 기록 등을 통하여 질병에 대한 조직적인 관리의 시스템을 가동했다. 전염병이 퍼질 가능성이 있는 지역의 행정감독관은 질병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전문적인 의사 이외에 여러 명의 보조의사를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경찰력과 행정력, 즉 검역감시관을 지방에 파견하여 지역 의사들의 활동과 주민들의 건강 상태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감시를 실시하였다. 검역감시관은 질병과 전염병에 대해 막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의사의 의료 행위를 통제하고 감독하였다.
1793년 프랑스 혁명 전쟁 이후 의사들은 국가 정책에 복무하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제 의학이란 병을 고치기 위한 ‘기술적인’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 의사들은 병원에서 수많은 환자를 돌보는 대신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건강과 덕목 그리고 행복의 지표를 관리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여기서 의학은 ‘건강한 사람을 관리’하는 것인데, 그 ‘건강’이란 병에 걸리지 않은 상태를 넘어서 ‘정상적인 사람’의 모델을 포괄했다. 18세기 혁명전쟁 이후의 의학은 개인의 ‘건강’을 관리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정상과 비정상적 병리 상태까지 고려하기 시작했다.
18세기의 의학적 시선은 질병의 빈도나 주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질병이 다른 질병과 구분되는 독특한 특성만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임상의학은 질병을 ‘증상’(symptom)을 통해 파악하게 되는데, 이 때 중요한 것은 증상의 빈도나 주기 등이다. 다시 말해 ‘계산 가능성’을 통해 질병을 포착하는 것이다. 임상의학의 발전은 의학 이론만이 아니라 의학의 사회적 역할과 의료 제도 등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더욱이 19세기에 이르자 병원은 치료의 장소뿐만이 아니라 의학의 교육과 환자의 교정을 위한 장소로 변모하게 된다. 질병은 인간의 고통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임상의학적 ‘시선’으로 ‘분석’되고 ‘범주화’되는 ‘병리해부학적’ 공간 속의 실체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임상의학이 만개할 수 있었던 원인의 하나로 ‘진료소’의 탄생을 들 수 있다. 진료소는 새로운 의학 지식의 원천이자 동시에 의사의 훈련장이었다. 진료소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의학의 중앙집권화가 어느 정도 해체되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의학의 중앙집권화가 무력화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유화되었던 병원이 민간단체의 성격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병원의 조직과 관리는 아직까지 국가의 행정 업무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관할 구역에 진료소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권력은 매우 신중하고 세심하게 그리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개인의 신체에 대한 권력 기술은 19세기에 들어서면 그 절정을 이룬다. 권력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을 장악하고 ‘삶과 죽음을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른바 ‘생체 권력’이 출현한 것이다. 생체 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라기보다 사망률이다. 이 메커니즘은 예측과 통계를 통해 사망률을 낮추고, 수명을 연장시키고, 출산을 권장하기 위한 방식으로서 작동한다. 요컨대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인구에 반드시 있게 마련인 우연적인 요소들 주변에 최대한의 보조 장치를 마련하고, 삶의 질을 최적의 수준으로 만드는 규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즉 종(種)으로서의 인간의 생물학적 과정들을 고려하고, 여기에 규율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교와 군대가 규율 권력을 생산하고 관리한다면, 의료 기관과 구호 기금 그리고 보험 등이 바로 생명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생물학적 혹은 생체 권력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