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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쟁이 전기통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에 고종은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봉명사신(奉命使臣)을 보냈다. 이때 조선의 유학자 박대양(朴戴陽)은 정사(正使) 서상우(徐相雨)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난생 처음 일본을 방문한 박대양에게 일본은 ‘마귀의 세계’였다. 박대양이 일본을 ‘마귀의 세계’로 부른 것은 일본 사람들이 ‘주자학’을 숭상하지도 않으며, 남녀의 ‘예의범절’도 지키지 않으며, 거기에다가 ‘서구 오랑캐’의 온갖 문물을 들여와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박대양이 정신을 빼앗겨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던 요사스런 서구의 문물은 무엇이었을까. 박대양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서구의 문물 중에는 1843년 모스가 발명한 유선 전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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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국(電信局)을 관람하였다. 전신을 맡은 사람이 눈으로는 글자를 보며 손으로는 기계를 만지니, 기계가 손을 따라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면서 마디마디 소리가 난다. 아마 손의 자세가 낮아지고 높아지곤 하는 사이에 저절로 기관(機關)이 있어서, 글자와 언어가 만 리의 밖에 능히 서로 통지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얼마 안 되어서 또 부산의 날씨를 물었는데, 그때가 오전 11시였다. 이곳은 날씨가 청명한데 부산은 바야흐로 흐리고 바람 불며 비가 올 것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6천여 리나 된다. 만 리 사이에 흐르고 맑음이 서로 같을 수는 없으나, 한 시간을 지나지 않는 사이에 소식을 서로 통하니 어리둥절하여 마치 요술쟁이의 거짓말 같다. 그러나 종전의 경험으로 보면 한 점의 착오도 없었다. 서양 기법이 사람을 현혹하게 만듦이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
―박대양 지음, 남만성 옮김, “동사만록(東槎漫錄)”, <국역 해행총재 6권>, 민족문화추진회, 1985, 431~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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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의 발명은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주 짧은 시간에 서로의 의견이나 소식을 교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신과 같은 근대 미디어의 탄생은 근대적인 시공간의 확장과 동시에 축소(압축)를 가능하게 했다. 나와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은 확장되었으며, 나와 타자와의 공간적 거리는 축소되어 ‘같은 공간’에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전신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공간, 당시 조선인의 인식으로는 판단 불가능한 한계 영역을 한 순간에 이동하게 할 수 있는 미디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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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안의 방에 전화를 설치하여 선(線)을 통해서 각 방을 연결하여 서로 수작하게 한다. 대개 런던 시내에 전화회사가 있어 그 선이 성안의 수백만 집에 연락하기 때문에 시내의 백리 안이 편리하기가 지척에서 서로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는 모두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던 것이다.
―민영환 지음, 이민수 옮김, “사구속초(使歐續草)”, <민충정공 유고(전)>, 일조각, 2000,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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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은 1897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하례식 특명공사로 영국에 파견되었다. 영국에 도착하여 호텔에 여장을 푼 그는 호텔의 화려한 스펙터클에 압도된다. 난생 처음 엘리베이터도 탔다. 민영환은 순식간에 몇 층을 오르고 내리는 엘리베이터의 기묘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더욱이 전화는 그가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한 신기한 물건이었다. 가느다란 전선을 통해 수백만 명을 ‘수작’하게 만드는 전화기의 위용에 대해 민영환은 그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물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민영환이나 박대양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19세기 말 외국을 방문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한결같이 경험했던 문제였다. 외국으로 파견된 조선의 사신들은 서구의 기계문명에 넋을 놓았다. 서구의 기계 문명은 신이 계시한 질서나 자연 그대로의 질서가 아니었다. 전기, 전신, 전화 등, 인간의 힘으로 만든 기계가 자연의 속성을 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리풍, 덕률풍, 전어통
그것은 ‘악마의 힘’이었다. 1881년 고종은 일본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파견했다. 그때 어윤중의 수행원 자격으로 유길준이 동행했다. 유길준은 일본에서 전등을 본다. 전깃불을 본 유길준은 ‘인간의 힘’이 아닌 ‘악마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다. 1887년 3월, 경복궁에 100촉짜리 ‘물불’이 켜졌다. 유길준이 말한 ‘악마의 힘’으로 켜진 전등이었다. 이후 민영환이 영국에서 공무를 마치고 돌아온 1898년 1월 경운궁에서 또 한 번의 전기테크놀로지의 마술이 펼쳐졌다. ‘얼리어답터’였던 고종의 어명에 따라 다리풍(多離風), 덕률풍(德律風), 전어통(傳語筒) 등 다양한 ‘음역(音譯)’으로 불린 전화가 가설된 것이다.
서구의 박래품인 전화가 궁중에 가설되자 갖가지 에피소드들이 넘쳐났다. 유교적인 의례에 익숙한 신하들에게 전화는 불편한 기계에 불과했다. 고종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더욱 난감했다. 고종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신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어명을 내렸는데,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이 전화를 통한 명령 하달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커먼 기계에 입을 대고 말하는 것이 찝찝할 뿐더러 국왕의 목소리에 어떻게 예의를 갖춰야 할지도 몰랐다. 눈앞에서 울리고 있는 것은 분명 요상한 기계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그 기계 안에는 ‘국왕’의 ‘옥음(玉音)’이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이를 어찌할 것인가. 고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신하들은 곧장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건한 마음을 갖추고 전화기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네 번의 큰 절이 끝난 후 신하들은 공손하게 전화기를 들었고,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존엄한 국왕의 옥음을 경청했던 것이다.

순종도 부왕인 고종의 영향을 받았다. 순종은 부왕인 고종에게 하루에 네 번씩 전화를 걸었다. 부자지간의 정이 남달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순종이 고종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다름 아닌 문안 인사를 위해서였다. 전화가 없었다면 순종은 하루에 네 번씩 고종의 처소를 방문해야만 했을 터인데, 전화가 생기자 전화로 문안 인사를 대신했던 셈이다. 서구의 문물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갖고 애용했던 고종이었기에 전례를 깨는 순종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다. 물론 신하들은 마뜩치 않았지만 말이다. 고종이 승하하자 순종은 혼전(魂殿)과 산릉(山陵)에 직통 전화를 가설했다. 평소 전화를 애용했던 아버지를 위해서일까. 순종은 수시로 전화로 곡을 하며 아버지의 혼백을 위로했다.
커피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즐겼던 ‘얼리어답터’였던 고종 덕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화는 다른 서구 문물에 비해 일찍 수입된 편이다. 전신과 전화와 같은 통신기술의 발 빠른 수입은 긴급한 국가적 사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전화의 높은 가격과 설비 부족으로 전화가 일상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더 흘러야 했다. 초창기 전화는 보통 관공서나 상점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레이엄 벨이 특허를 받은 전화기는 ‘자석식 전화기’였다. 이 전화기는 발신자가 전화기의 핸들을 돌리면 신호가 호출되고, 전화교환수가 발신자와 수신자를 연결시켜주는 방식이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사용되었던 전화기는 자석식 전화기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한 ‘공전식 전화기’였다. 공전식 전화기는 발신자가 전화기를 들어올리기만 하면 공전식 전화교환기의 표시 램프가 점등되고, 이 점들을 보고 전화교환수가 발신자에게 수신자의 이름을 물어 전화를 연결시키는 방식이다.

1910년도에 조선에서 유통된 전화기는 6,774대였는데 대부분 관공서에서 사용되었다. 1920년에 이르면 전화기의 보급률은 1910년에 비해 두 배로 증가한 1만 5,641대였으며, 1930년에는 4만 128대로 증가했다. 통계 수치로만 본다면 전화의 보급률은 확실히 증가했다. 그렇지만 전화의 소유주를 살펴보면 당시 보급률의 70퍼센트 이상이 일본인들이었으며, 전화를 사용한 곳 또한 신문사, 요리집, 관청, 극장 등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전화는 여전히 고가의 상품에 불과했던 셈이다. 마침 1930년대에는 ‘공중전화’가 도심의 거리 곳곳에 가설되어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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