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리의 네트워커, 전화교환수
 

전화기인가, 주크박스인가?
   

대한제국 시기에 그리고 식민지 조선 초기를 살펴보면 전화는 대부분 ‘업무용’이었다. 지금처럼 전화가 온갖 ‘수다’를 떠는 도구로 사용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전화를 발명한 서구에서 전화는 다양한 용법으로 이용되었다. 전화는 단순히 사람의 목소리를 송신하는 데 그치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1881년이었다. 파리에서 열린 국제전기박람회에 전화가 출품되었다. 그레이엄 벨이 1876년에 전화기로 특허를 취득했으니, 약 5년 후의 일이다. 테아트로폰(theatrophone)이라 불리는 전화 수화기가 박람회장에 설치되었다. 사람의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이 신기한 기계에 관람자들은 마음을 빼앗겼다. 사람들이 전화에 홀린 건 가느다란 전선을 통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람자들이 테아트로폰에 귀를 가까이 대자, 아니나 다를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었다. 전화 수화기에서는 오페라가 흘러나왔고, 연극배우의 대사가 또렷하게 들렸다. 테아트로폰이 설치된 전시장은 관람객들로 연일 붐볐다. 전화 수화기를 통해 오페라와 연극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초기의 전화기는 이처럼 일반적인 ‘통신’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락 기계’의 기능도 수행했다. 라디오가 없던 시절, 전화기는 라디오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극장 공연이 전화기를 통해 송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송출되었다. 또한 최신식 호텔에서는 전화기가 주크박스의 역할도 했다. 전화기에 동전을 넣으면 약 5분 동안 음악이 흘러나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프루스트도 테아트로폰으로 드뷔시의 오페라 <펠리아스와 멜리장드(Pelleas et Melisande)>를 듣곤 했다고 한다. 교회의 미사, 선거 연설, 음악, 소설 낭독, 스포츠 경기 보도 등 전화기는 그야말로 다양한 장르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낸 최첨단 미디어였다.  

 


대문 밖으로 걸어 나온 ‘걸’들의 세상

 

전화의 등장으로 전화교환수라는 신종 직업이 생겨났다. 전화뿐만 아니라 서구로부터 유입된 각종 기계 문물로 인해 다양한 직업들 또한 등장했다. 근대화의 물결에 편승하여 새롭게 등장한 직업 중에는 특히 여성들의 활동이 중심을 이뤘던 분야가 많았다. 개항 이전까지만 해도 집안일을 돌보며 지냈던 여성들이 이제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고, ‘가사 노동’이 아닌 자신만의 직업을 갖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선택한 직업은 대부분 ‘서비스직’이었다.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을 당시에는 ‘신여성’ 혹은 ‘모던 걸’이라 불렀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에서 ‘신여성’ 혹은 ‘모던 걸’은 부정적 의미가 강했다. 일본에서만 해도 모던 걸은 경제적·정신적으로 독립한 여성을 뜻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퇴폐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모던 걸’이라는 말은 말하자면 ‘플리퍼(輕薄者[flipper])’라는 의미인데 이 ‘플리퍼’라는 것은 짐승 같은 생활[獸的生活]을 좋아하며 여자로서 상식을 갖지 못한 여자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으로 말하면 고전주의를 존중하던 ‘빅토리아 왕’ 시대에도 이미 문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 ‘모던 걸’이라는 것들은 정조를 귀중하게 여기는 이상 아래서 교양을 받을 기회가 없었음으로 인생의 실재가 어떠한 곳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여 항상 구사상을 배척하는 생각에 평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모던 걸이란 어떠한 여자인가”, <중외일보>, 1927년 7월 25일.

 
   



식민지 조선의 많은 남성들은 ‘모던 걸’을 천박하고 경박하며, 교양 없고 정조를 가볍게 생각하는 여자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여성들이 종사했던 직업명에도 별칭을 만들어 불렀는데, 항상 ‘걸(girl)’이라는 말을 붙여 썼다. 다방의 여급은 ‘카페 걸’, 백화점 여직원은 ‘데파트 걸’, 엘리베이터 안내원은 ‘엘리베이터 걸’, 극장에서 표를 파는 창구원은 ‘티켓 걸’, 버스 여차장은 ‘버스 걸’, 여자 전화교환수는 ‘할로 걸’이라 불렸다. 이러한 현상은 식민지 조선이 ‘도시화’, ‘근대화’, ‘산업화’ 됨에 따라 여성 서비스직이 많이 생겨난 결과였는데, 이는 전근대 사회와 비교해보면 매우 희귀하고 새로운 현상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서비스직에 종사했던 여성들은 언제나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신체는 매번 남성들에게 ‘보이고’ ‘만져졌다’. 식민지 조선의 많은 남성들은 거리를 활보하는 모던 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들의 외향적 모습 속에서 육체적 쾌락을 상상하는 등 이중적인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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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로로 2010-09-14 0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성 전화교환수들의 애환이 생생하게 펼쳐지네요... 지금도 이런 문제는 없어지지 않은 듯. 전화로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승원 2010-09-14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이승원 고객님이시죠?"라는 전화가 걸려 올때마다, 제 자신을 되돌아 본답니다^^.

비로그인 2011-04-04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시절 '걸'을 보던 시선이 요즘은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학교,회사,방송국,....남발되는 것 같으네요.
 

 

2. 소리의 네트워커, 전화교환수
 

요술쟁이 전기통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에 고종은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봉명사신(奉命使臣)을 보냈다. 이때 조선의 유학자 박대양(朴戴陽)은 정사(正使) 서상우(徐相雨)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난생 처음 일본을 방문한 박대양에게 일본은 ‘마귀의 세계’였다. 박대양이 일본을 ‘마귀의 세계’로 부른 것은 일본 사람들이 ‘주자학’을 숭상하지도 않으며, 남녀의 ‘예의범절’도 지키지 않으며, 거기에다가 ‘서구 오랑캐’의 온갖 문물을 들여와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박대양이 정신을 빼앗겨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던 요사스런 서구의 문물은 무엇이었을까. 박대양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서구의 문물 중에는 1843년 모스가 발명한 유선 전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신국(電信局)을 관람하였다. 전신을 맡은 사람이 눈으로는 글자를 보며 손으로는 기계를 만지니, 기계가 손을 따라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면서 마디마디 소리가 난다. 아마 손의 자세가 낮아지고 높아지곤 하는 사이에 저절로 기관(機關)이 있어서, 글자와 언어가 만 리의 밖에 능히 서로 통지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얼마 안 되어서 또 부산의 날씨를 물었는데, 그때가 오전 11시였다. 이곳은 날씨가 청명한데 부산은 바야흐로 흐리고 바람 불며 비가 올 것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6천여 리나 된다. 만 리 사이에 흐르고 맑음이 서로 같을 수는 없으나, 한 시간을 지나지 않는 사이에 소식을 서로 통하니 어리둥절하여 마치 요술쟁이의 거짓말 같다. 그러나 종전의 경험으로 보면 한 점의 착오도 없었다. 서양 기법이 사람을 현혹하게 만듦이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
―박대양 지음, 남만성 옮김, “동사만록(東槎漫錄)”, <국역 해행총재 6권>, 민족문화추진회, 1985, 431~432쪽.

 
   



전신의 발명은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주 짧은 시간에 서로의 의견이나 소식을 교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신과 같은 근대 미디어의 탄생은 근대적인 시공간의 확장과 동시에 축소(압축)를 가능하게 했다. 나와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은 확장되었으며, 나와 타자와의 공간적 거리는 축소되어 ‘같은 공간’에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전신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공간, 당시 조선인의 인식으로는 판단 불가능한 한계 영역을 한 순간에 이동하게 할 수 있는 미디어였던 것이다. 





 

   
 

여관 안의 방에 전화를 설치하여 선(線)을 통해서 각 방을 연결하여 서로 수작하게 한다. 대개 런던 시내에 전화회사가 있어 그 선이 성안의 수백만 집에 연락하기 때문에 시내의 백리 안이 편리하기가 지척에서 서로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는 모두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던 것이다.
―민영환 지음, 이민수 옮김, “사구속초(使歐續草)”, <민충정공 유고(전)>, 일조각, 2000, 251쪽.

 
   


민영환은 1897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하례식 특명공사로 영국에 파견되었다. 영국에 도착하여 호텔에 여장을 푼 그는 호텔의 화려한 스펙터클에 압도된다. 난생 처음 엘리베이터도 탔다. 민영환은 순식간에 몇 층을 오르고 내리는 엘리베이터의 기묘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더욱이 전화는 그가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한 신기한 물건이었다. 가느다란 전선을 통해 수백만 명을 ‘수작’하게 만드는 전화기의 위용에 대해 민영환은 그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물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민영환이나 박대양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19세기 말 외국을 방문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한결같이 경험했던 문제였다. 외국으로 파견된 조선의 사신들은 서구의 기계문명에 넋을 놓았다. 서구의 기계 문명은 신이 계시한 질서나 자연 그대로의 질서가 아니었다. 전기, 전신, 전화 등, 인간의 힘으로 만든 기계가 자연의 속성을 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리풍, 덕률풍, 전어통 


그것은 ‘악마의 힘’이었다. 1881년 고종은 일본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파견했다. 그때 어윤중의 수행원 자격으로 유길준이 동행했다. 유길준은 일본에서 전등을 본다. 전깃불을 본 유길준은 ‘인간의 힘’이 아닌 ‘악마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다. 1887년 3월, 경복궁에 100촉짜리 ‘물불’이 켜졌다. 유길준이 말한 ‘악마의 힘’으로 켜진 전등이었다. 이후 민영환이 영국에서 공무를 마치고 돌아온 1898년 1월 경운궁에서 또 한 번의 전기테크놀로지의 마술이 펼쳐졌다. ‘얼리어답터’였던 고종의 어명에 따라 다리풍(多離風), 덕률풍(德律風), 전어통(傳語筒) 등 다양한 ‘음역(音譯)’으로 불린 전화가 가설된 것이다.

서구의 박래품인 전화가 궁중에 가설되자 갖가지 에피소드들이 넘쳐났다. 유교적인 의례에 익숙한 신하들에게 전화는 불편한 기계에 불과했다. 고종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더욱 난감했다. 고종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신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어명을 내렸는데,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이 전화를 통한 명령 하달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커먼 기계에 입을 대고 말하는 것이 찝찝할 뿐더러 국왕의 목소리에 어떻게 예의를 갖춰야 할지도 몰랐다. 눈앞에서 울리고 있는 것은 분명 요상한 기계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그 기계 안에는 ‘국왕’의 ‘옥음(玉音)’이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이를 어찌할 것인가. 고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신하들은 곧장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건한 마음을 갖추고 전화기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네 번의 큰 절이 끝난 후 신하들은 공손하게 전화기를 들었고,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존엄한 국왕의 옥음을 경청했던 것이다.
 



순종도 부왕인 고종의 영향을 받았다. 순종은 부왕인 고종에게 하루에 네 번씩 전화를 걸었다. 부자지간의 정이 남달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순종이 고종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다름 아닌 문안 인사를 위해서였다. 전화가 없었다면 순종은 하루에 네 번씩 고종의 처소를 방문해야만 했을 터인데, 전화가 생기자 전화로 문안 인사를 대신했던 셈이다. 서구의 문물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갖고 애용했던 고종이었기에 전례를 깨는 순종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다. 물론 신하들은 마뜩치 않았지만 말이다. 고종이 승하하자 순종은 혼전(魂殿)과 산릉(山陵)에 직통 전화를 가설했다. 평소 전화를 애용했던 아버지를 위해서일까. 순종은 수시로 전화로 곡을 하며 아버지의 혼백을 위로했다.

커피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즐겼던 ‘얼리어답터’였던 고종 덕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화는 다른 서구 문물에 비해 일찍 수입된 편이다. 전신과 전화와 같은 통신기술의 발 빠른 수입은 긴급한 국가적 사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전화의 높은 가격과 설비 부족으로 전화가 일상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더 흘러야 했다. 초창기 전화는 보통 관공서나 상점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레이엄 벨이 특허를 받은 전화기는 ‘자석식 전화기’였다. 이 전화기는 발신자가 전화기의 핸들을 돌리면 신호가 호출되고, 전화교환수가 발신자와 수신자를 연결시켜주는 방식이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사용되었던 전화기는 자석식 전화기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한 ‘공전식 전화기’였다. 공전식 전화기는 발신자가 전화기를 들어올리기만 하면 공전식 전화교환기의 표시 램프가 점등되고, 이 점들을 보고 전화교환수가 발신자에게 수신자의 이름을 물어 전화를 연결시키는 방식이다.

  



1910년도에 조선에서 유통된 전화기는 6,774대였는데 대부분 관공서에서 사용되었다. 1920년에 이르면 전화기의 보급률은 1910년에 비해 두 배로 증가한 1만 5,641대였으며, 1930년에는 4만 128대로 증가했다. 통계 수치로만 본다면 전화의 보급률은 확실히 증가했다. 그렇지만 전화의 소유주를 살펴보면 당시 보급률의 70퍼센트 이상이 일본인들이었으며, 전화를 사용한 곳 또한 신문사, 요리집, 관청, 극장 등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전화는 여전히 고가의 상품에 불과했던 셈이다. 마침 1930년대에는 ‘공중전화’가 도심의 거리 곳곳에 가설되어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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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o 2010-09-0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리 어답터 고종의 전화기 에피소드 완전 재밌습니다 ㅋㅋㅋ

doingnow 2010-09-09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얼리어답터..ㅋㅋ

비로그인 2011-04-04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등과 커피와 전화 사용에 감사해야겠어요.
 

 

2. 소리의 네트워커, 전화교환수
 

전화선을 타고 시작된 황태자의 로맨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의친왕 이강의 나이 61세였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비운의 황태자 의친왕은 여섯 번 혼례를 치렀다. 슬하에 자녀도 많았다. 의친왕은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여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하고자 했으나, 중국의 안동(安東)에서 일본의 경찰에 붙잡혀 그 뜻을 펼치지 못했다. 이후 일제의 감시 속에서 반평생을 지내온 그였다.
 

격정의 세월을 헤쳐온 의친왕.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았다. 헌데 그에게 다시 봄이 찾아왔다. 한 여인을 마음에 품은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홍정순이었고, 아직 10대 소녀였다. 의친왕은 홍정순을 마음에 두었고, 홍정순 역시 의친왕을 지아비로 섬기기로 마음먹었다. 의친왕이 61세였고, 홍정순은 19세였다.

의친왕은 일곱 번째 혼례를 치렀다. 비운의 황태자에게 시집을 간 홍정순은 조선의 마지막 후궁이 되었다. 일곱 번의 혼례를 치른 의친왕은 이로써 슬하에 13남 9녀를 두게 되었다. 이 중 11번째 아들이 <비둘기 집>이란 노래를 부른 가수 이석이다. 이석의 어머니는 조선의 마지막 후궁인 홍정순이었으며, 그녀는 창덕궁 ‘전화교환수’였던 것이다. 

 

 

전화교환수와 사랑에 빠진 의친왕. 그녀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겼을까, 아니면 그녀의 목소리에 정이 들었을까. 그녀가 만약 전화교환수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의친왕을 만날 수나 있었을까. ‘신여성’ 혹은 ‘모던 걸’이 선택했던 직업 ‘전화교환수’. 전화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전화교환수라는 직업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의친왕의 마지막 로맨스는 시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최첨단 미디어인 전화가 맺어준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한 편 더 보도록 하자.
 


조선 최초의 ‘폰팅’: 사랑은 전화선을 타고
   

 1929년 1월, 조선 최초의 ‘폰팅’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폰팅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용당포인(龍塘浦人)’이라는 필명의 기자였으며, 그 내용은 “전화로 3년 간 연애”라는 제목으로 <별건곤>에 실려 있다. 기자가 몇 해 전의 일이라고 했으니, 1925년 무렵일 것이다. ‘폰팅’이라고 해서 요즘처럼 ‘매춘’과 연관된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고, ‘19금’에 걸릴 일도 없다.


연애의 주인공은 K라는 남자와 C라는 여자다. 이들은 지방 우체국 사무원이었고, 근무지는 서로 달랐다. 우체국이라는 관공서에 근무하다 보니 이들에게 ‘전화’는 다른 사람들보다 익숙한 물건이었다. K와 C는 어느 날 우체국 업무에 관한 일로 우연히 통화를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우연치 않은 통화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직업적 동료가 아닌 연인으로 발전하게 만들었다. 둘은 전화를 할 때마다 “유달리 목소리가 더 곱고 다정하게” 들림을 느끼고 하루에 한 번씩 전화 통화를 했다. 물론 상사 몰래 시작된 은밀한 로맨스일 것이다.
 

 

 


전화로 밀어를 속삭인 지 3년이 지났지만 이들은 한 번도 실제로 대면한 적이 없었다.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다정다감하고 감미로운 서로의 목소리에 이끌려 자그마치 3년을 그들은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번개’도 하지 않은 채 3년 동안 전화기를 통해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던 어느 날 K는 마산에 있는 온천에 가게 된다. 온천욕을 하고 있던 K는 “어떤 여자가 이야기를 하는데 평소에 전화로 듣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K의 눈이 아닌 귀가 ‘그 여자’가 자신의 연인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K는 자신의 귀를 의심치 않았다. 여관에 가서 숙박부의 이름을 확인해보니 ‘그 여자’가 바로 자신과 3년 동안 전화 통화를 한 바로 C였다. 너무나 기뻤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나서 자신이 당신과 3년 동안 밀어를 나눴던 사람이라고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K에게 C는 첫사랑이었다.

K는 용기를 냈다. 만나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야 한다. K는 여관 주인에게 사정을 말하고, C를 불러줄 것을 부탁했다. 여관 주인의 말을 듣고 C는 K를 만나러 왔다. 만나긴 했지만, 서로 긴가민가했다. 그렇지만 몇 마디 주고받은 그들은 자신들이 3년 동안 “전화로 정(情)을 통하던 사람”들이었음을 확인한다. 그러자 두 사람의 “가슴속에는 남모르는 불길이” 타올랐다.

이 두 청춘 남녀는 그날부터 대놓고 만나기 시작했다. 서로의 감정을 더 솔직하게 속살거렸고, 마침내 약혼까지 했다. 그러나 이들의 약혼이 그 둘만의 ‘몰래한 사랑’이었는지 어떤지 그 속사정은 모를 일이지만, C의 아버지가 이들의 사랑에 훼방을 놓는다. 결국 아버지의 강압으로 C는 우체국까지 그만두게 된다. K와 C는 이제 “전화 하나를 가지고 오직 따뜻한 정을 통하던 것이 그것조차 아주 끊어지고” 말았다. 결국 C의 아버지는 그녀를 다른 사람과 결혼시켜버렸다.

K와 C의 애틋한 사랑을 전하는 ‘용당포인’이라는 기자는 비록 아버지의 반대로 이 둘의 사랑이 끊어졌지만, 전화가 있는 한 “이 세상에 전화가 없어질 때까지 그들의 사랑의 실마리는 전파와 같이 통할” 것이라며 두 사람의 애처로운 사랑을 위로한다. 


 

 


K와 C의 사랑은 ‘전파’를 타고 싹텄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들은 빠른 전파를 매개체로 동일한 시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수많은 전봇대와 전선을 타고 흘러가 서로를 감전시켰다. 전파의 속도는 그 어떤 ‘매파’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그들의 운명을 묶었던 것이다.

만약 전화가 없었다면 이들의 사랑은 시작될 수 있었을까. 만약 전화교환수가 이들의 전화를 잘못 ‘중매’했다면 이들의 사랑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의친왕과 홍정순의 사랑을, K와 C의 사랑을 중매해준 최신 전기통신 미디어였던 전화. 그 전화로 인해 탄생한 신종 직업인 전화교환수의 역사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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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ingnow 2010-09-09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너무 재밌어요!!ㅋ이런 스토리로 드라마한편 만들어도 되겠어요..ㅋㅋ

이승원 2010-09-1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비로그인 2011-04-0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ljh 2011-04-1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1. 모던 엔터테이너, 변사 (5)
 

영화가 말을 하기 시작하다
 


1927년 미국에서 <재즈싱어>라는 영화가 발성장치를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발성영화, 즉 토키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는 <춘향전>(1935)이다. <춘향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한국 영화는 모두 무성영화였다. 관객들은 미국에서 수입된 발성영화를 관람했다. 발성영화가 등장하자 변사의 자리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변사의 수준을 의심하는 영화 마니아들이 생겨나면서 무성영화는 점점 삼류 영화 취급을 받게 되었다.     

 

   
 

재래의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의 열변에 도취당하던 일반 저급 대중 팬은 보고 듣기에 알기 쉬운 연극으로 가버리고 고급 팬은 외국 토키에 침식되어 조선영화의 무성판 같은 것은 눈도 떠보지 않고 토키로 나오면 가보고들 한다.
―서광제, "영화의 원작 문제-영화소설 기타에 관하야", <조광>, 1937년 7월

 
   

 


토키의 등장으로 변사의 위치가 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를 저급과 고급으로 나누는 문화의 구별 짓기 현상도 일어났다. 영화 마니아들은 더 이상 저급한 변사의 해설을 들을 수 없다며 발성영화로 몰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 무성영화 팬들을 삼류로 취급하면서 자신들과 구별 짓기를 했으며, 변사를 저급한 예술가로 취급했다.

또한 영화를 더 이상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민중 계몽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그만큼 영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파급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1930년 나운규는 <아리랑 그 후>(1930)를 제작했다. 물론 <아리랑 그 후>도 무성영화였으며, 공전의 히트를 쳤던 <아리랑>의 후속편이었다. 이 영화는 평단의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이유는 영화가 끝난 후 나운규가 직접 무대에 등장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했기 때문이었다. 나운규는 무대에서 기생들과 함께 춤을 추며 ‘아리랑’을 불렀다. 평단에서 보기에 나운규의 이런 행동은 무성영화의 변사들이 보여주었던 저급하고 저질스러운 행동에 불과했던 것이다. 평단의 비판이 있자, <아리랑 그 후>의 촬영기사 이필우가 이에 맞섰다.
  

 

 

   
 

 너희들보다 좀더 민중의 친우란 말이다. 너희들 앞에서 내가 지사라고 떠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만 이렇게 남을 잡아먹고 더구나 동족끼리 피를 빨아먹는 역사의 피를 받은 못된 버릇으로 남을 죽여버리려고 악을 쓰는 너희들 자신의 피부터 시험해보아라. 그 속에 누구에게든지 보여도 부끄럽지 아니할 만한 피가 몇 방울이나 나겠느냐. 왜 팔을 걷고 나와서 작품을 만들지 못하느냐. (……) 우리들의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는 많은 동지들에게 귀엽고 그리운 형제들에게 얼른 보이려고 제작한다. 그네들을 낙심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 무식한 광견들아 짖으려거든 짖어라. 우리는 누구보다도 조선 영화계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민중의 친우이다.
―李弼雨, "映畵界를 論하는 妄想裵들에게―製作者로서의 一言", <중외일보>, 1930년 3월 23~24일

 
   


과연 영화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과연 대중예술인가 고급예술인가를 놓고 평단과 영화 제작자가 한판 싸움을 벌였다. 평단에서는 영화는 고급예술이어야 하기에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와 같은 저급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영화 제작자는 영화야 말로 대중의 예술이기에 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야 한다고 맞섰던 셈이다. 변사의 해설에 울고 웃던 대중은 과연 그들의 말처럼 ‘무지’하고 ‘저급한’ 팬이었을까.
 



굿 바이, 변사

1914년 매일신보에 기획 기사가 실렸다. 조선의 예술인/연예인에 대한 특집 기사였다. 당대의 뛰어난 예술인/연예인 100인에 대한 기획 기사였다. 이 기사의 아흔 여덟 번째와 마지막 백 번째 자리에 변사가 등장한다. 아흔 여덟 번째는 변사 김덕경에 대한 소개였다.
   

   
 

활동사진이라 하는 이름이 조선 지방에 수입된 지가 불과 십여 년이라. 미미한 일개 쇼 부분에 지나지 못하더니 요사이 수 삼년에 이르러는 시세를 좇아 활동사진도 점점 발전되어 경성 내에도 오륙 처의 활동사진관이 생기었고, 그로 좇아 사진 설명하는 변사도 비로소 생기게 되었음이 시세의 자연한 일이라. 이에 조선인의 변사에도 김덕경이라 하는 사람이 신기록을 지었도다. 김군은 소학교로부터 중학 정도까지 지내어 상당한 학식이 있을 뿐 아니라 본래 사령이 좋은 사람으로 이십일 세부터 각 활동사진관으로 다니며 설명의 직책을 맡아 유창한 어조로 혹은 높였다 내렸다 연약한 아녀자의 음성도 지으며 혹은 웅장한 대장부의 호통도 능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로 그림이 비추이지만은 실제의 연극을 보는 듯 또는 현장에서 그 광경을 직접으로 당한 것같이 감염이 되니 이는 김덕경의 특이한 장기가 아니면 능치 못할 일이라. 금년은 이십 사세이니 조선의 변사가 이제 완전히 한 사람이 생기었음으로, 이를 좇아 많이 나겠지만은 김덕경은 더욱 장래가 유망하여 조선 변사 첫째 손가락을 꼽으리로다.
―"藝壇一百人"(98), <매일신보>, 1914년 6월 9일

 
   



김덕경 다음으로 백 번째에는 우미관의 변사 서상호와 이한경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이처럼 무성영화 초기만 해도 변사는 조선을 빛낼 뛰어난 예술인/연예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 마니아층이 형성되면서 변사의 해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등장했고, 여기에 더해 발성영화라는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등장으로 변사는 화려한 옛 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욱이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했던 변사 서상호의 방탕한 삶이 가십거리가 되면서 변사의 이미지는 더욱 추락했다. 발성영화의 등장으로 변사는 아직까지 발성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던 지방의 극장을 전전하면서 그 맥을 이어갔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 활동사진 변사는 각계각층의 수많은 비난을 받았다. 무지하다, 저급하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그렇지만 변사의 등장으로 인해 조선의 극장 문화는 비로소 꽃필 수 있었다. 변사의 전성 시대만 하더라도 극장은 그저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의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다. 극장은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공간이었다. 극장 안에서 관객은 영화를 보고, 변사의 퍼포먼스를 즐겼다. 그리고 관객은 변사의 ‘연기’에 개입하기도 했다. 잘하느니, 못하느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옳지 옳지, 그러면 그렇지, 얼씨구나 좋구나…….
     


무성영화 시대의 극장은 영화와 변사와 관객이 어우러진 축제의 장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3D가 나오고 4D가 나온들, 여전히 관객은 스크린 앞에서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다.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감각을 최적의 상태로 자극해주기만을 기다릴 뿐인 것이다. 변사는 사라졌지만, 변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축제의 공간으로서의 극장 문화만은 소중하게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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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 2010-09-06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변사와 인텔리 간의 갈등. 흥미롭습니다. 변사는 엔터테이너이고 지식인들은 혹독한 비평가들이었군요...^^

이승원 2010-09-1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변사에게 더 마음이 가죠^^*

황정매 2011-04-0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 모던 엔터테이너, 변사 (4)
 

저급한 남창적(男娼的) 인기에서 헤어나라

 

조선 최초의 영화 마니아가 생겨났다. 조선에 영화가 들어온 지 20여 년이 지나자 영화를 단순히 즐기는 것 이상으로 영화에 관심을 지닌 마니아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영화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변사의 해설에도 집요한 관심을 보였다. 이제 서상호처럼 ‘메리’를 ‘뺑덕어멈’이라고 번안하고, 있지도 않은 대사를 대충 넣었다간 영화 마니아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변사의 해설에 불만을 지닌 영화 마니아가 변사를 향해 불덩이를 던지는 사건도 일어났다.
 

   
 

경성 서린동 삼십구 번지 거주 문해광(京城 瑞麟洞 三十九番地 文海光). 당년 십팔 세 된 아이는 일전 우미관 활동사진을 구경하러 가서 삼등석에 앉아 있던 중 별안간 숯불덩이를 종이에 싸서 무대로 던진 까닭에 사진 비추이는 휘장 아래가 동전 둘레만 하게 타는 것을 즉시 꺼버린 소동이 생기어 그때 취체 갔던 순사가 전기 문해광을 종로 경찰서로 인치 취조한 결과 그 자백한 말을 들은즉 사진이 비추일 적에 변사되는 자가 설명을 잘못하여 사진의 내용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명한 것이 괴악함으로 참다못하여 분김에 불덩이를 싸서 변사에게 장난으로 던진 것이 잘못되어 그같이 휘장이 탔다 하였는데 이에 소위는 경찰범 처벌 규칙에 의하여 구류 칠일에 처하였다가 엄유 방송하였다더라.
―“변사에게 불덩이―설명을 잘 못한다고”, <매일신보>, 1919년 1월 18일

 
   


 
변사의 해설이 도마에 올랐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둥, 사투리를 심하게 써서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둥, 경어체를 쓰지 않고 반말로 해설을 한다는 둥, 비루한 음담패설을 한다는 것 등이었다. 해설도 문제였지만 변사의 교양이나 지식이 문제가 되었다. 변사 면허시험 문제를 보아서 알겠지만, 그들의 지식수준이 그리 높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유창한 달변과 순간적인 기지, 그리고 관객을 휘어잡는 퍼포먼스와 같은 중요한 자질을 겸비했음에도 영화 마니아 계층이나 지식인들은 그들의 해설을 ‘삼류’ 취급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겸비한 관객들이 늘어날수록 변사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갔다. 더욱이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예전의 인기를 등에 업고 타성에 젖어 활동한다는 비판이 높아만 갔다. 영화 마니아였던 소설가 심훈의 글을 한번 보자.
 

   
 

좀 무리한 주문일지 모르나 관중의 대부분이 학생이요 학생들은 적어도 초등 정도 이상의 영어 지식은 가졌기 때문에 해설자도 간단한 회화 자막쯤은 알아볼 만큼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제명(題名)이나 배우들의 이름을 얼토당토않게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 영화는 날로 완성의 시기로 들어간다. 그런데 조선의 해설자는 십년 전과 후가 꼭 같이 아무 향상이 없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다. 일개의 해설자로 나설 양이면 남창적(男娼的) 인기에만 포니(抱抳)할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영화를 감상할 눈이 생겨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과학적으로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다.
―심훈, “관중의 한 사람으로 해설자 제군에게”, <조선일보>, 1928년 11월 18일

 
   



영화가 소설을 정복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화의 파급력이 상당했던 시기에 소설가 심훈도 조선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영화가 단순히 대중의 오락물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심훈의 생각이었다. 영화가 대중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조선의 영화도 변해야 한다는 의견이 각계에서 흘러나왔다. 아마 이상적인 변사는, 그 사실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러시아의 위대한 혁명가 트로츠키였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민중을 감화시킨다는 의미하에서 해설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변사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다. 일찍이 트로츠키가 시베리아에 방랑할 때 그는 해설자가 되었었다. 그것은 영화 예술이 가장 민중 지도에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컴컴한 무대 위에 서서 ‘스크린’을 통하여 제국(帝國)의 횡포압정(橫暴壓政)을 타매하였으며 민중의 원분(怨憤)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碧波生, “映畵解說者의 片語”, <中外日報>, 1927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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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tter 2010-08-31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트로츠키가 '변사'로 활약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멋진걸요? ㅋㅋ

이승원 2010-09-0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상상이 아니면, 더 멋지겠지요^^* 트위터 님, 지금 자료를 찾고 있으니 아마 책으로 나올 때는 좀 더 구체적인 얘기가 전개될 것입니다. 그 때도 읽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