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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선을 타고 시작된 황태자의 로맨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의친왕 이강의 나이 61세였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비운의 황태자 의친왕은 여섯 번 혼례를 치렀다. 슬하에 자녀도 많았다. 의친왕은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여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하고자 했으나, 중국의 안동(安東)에서 일본의 경찰에 붙잡혀 그 뜻을 펼치지 못했다. 이후 일제의 감시 속에서 반평생을 지내온 그였다.
격정의 세월을 헤쳐온 의친왕.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았다. 헌데 그에게 다시 봄이 찾아왔다. 한 여인을 마음에 품은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홍정순이었고, 아직 10대 소녀였다. 의친왕은 홍정순을 마음에 두었고, 홍정순 역시 의친왕을 지아비로 섬기기로 마음먹었다. 의친왕이 61세였고, 홍정순은 19세였다.
의친왕은 일곱 번째 혼례를 치렀다. 비운의 황태자에게 시집을 간 홍정순은 조선의 마지막 후궁이 되었다. 일곱 번의 혼례를 치른 의친왕은 이로써 슬하에 13남 9녀를 두게 되었다. 이 중 11번째 아들이 <비둘기 집>이란 노래를 부른 가수 이석이다. 이석의 어머니는 조선의 마지막 후궁인 홍정순이었으며, 그녀는 창덕궁 ‘전화교환수’였던 것이다.

전화교환수와 사랑에 빠진 의친왕. 그녀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겼을까, 아니면 그녀의 목소리에 정이 들었을까. 그녀가 만약 전화교환수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의친왕을 만날 수나 있었을까. ‘신여성’ 혹은 ‘모던 걸’이 선택했던 직업 ‘전화교환수’. 전화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전화교환수라는 직업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의친왕의 마지막 로맨스는 시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최첨단 미디어인 전화가 맺어준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한 편 더 보도록 하자.
조선 최초의 ‘폰팅’: 사랑은 전화선을 타고
1929년 1월, 조선 최초의 ‘폰팅’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폰팅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용당포인(龍塘浦人)’이라는 필명의 기자였으며, 그 내용은 “전화로 3년 간 연애”라는 제목으로 <별건곤>에 실려 있다. 기자가 몇 해 전의 일이라고 했으니, 1925년 무렵일 것이다. ‘폰팅’이라고 해서 요즘처럼 ‘매춘’과 연관된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고, ‘19금’에 걸릴 일도 없다.
연애의 주인공은 K라는 남자와 C라는 여자다. 이들은 지방 우체국 사무원이었고, 근무지는 서로 달랐다. 우체국이라는 관공서에 근무하다 보니 이들에게 ‘전화’는 다른 사람들보다 익숙한 물건이었다. K와 C는 어느 날 우체국 업무에 관한 일로 우연히 통화를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우연치 않은 통화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직업적 동료가 아닌 연인으로 발전하게 만들었다. 둘은 전화를 할 때마다 “유달리 목소리가 더 곱고 다정하게” 들림을 느끼고 하루에 한 번씩 전화 통화를 했다. 물론 상사 몰래 시작된 은밀한 로맨스일 것이다.

전화로 밀어를 속삭인 지 3년이 지났지만 이들은 한 번도 실제로 대면한 적이 없었다.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다정다감하고 감미로운 서로의 목소리에 이끌려 자그마치 3년을 그들은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번개’도 하지 않은 채 3년 동안 전화기를 통해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던 어느 날 K는 마산에 있는 온천에 가게 된다. 온천욕을 하고 있던 K는 “어떤 여자가 이야기를 하는데 평소에 전화로 듣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K의 눈이 아닌 귀가 ‘그 여자’가 자신의 연인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K는 자신의 귀를 의심치 않았다. 여관에 가서 숙박부의 이름을 확인해보니 ‘그 여자’가 바로 자신과 3년 동안 전화 통화를 한 바로 C였다. 너무나 기뻤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나서 자신이 당신과 3년 동안 밀어를 나눴던 사람이라고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K에게 C는 첫사랑이었다.
K는 용기를 냈다. 만나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야 한다. K는 여관 주인에게 사정을 말하고, C를 불러줄 것을 부탁했다. 여관 주인의 말을 듣고 C는 K를 만나러 왔다. 만나긴 했지만, 서로 긴가민가했다. 그렇지만 몇 마디 주고받은 그들은 자신들이 3년 동안 “전화로 정(情)을 통하던 사람”들이었음을 확인한다. 그러자 두 사람의 “가슴속에는 남모르는 불길이” 타올랐다.
이 두 청춘 남녀는 그날부터 대놓고 만나기 시작했다. 서로의 감정을 더 솔직하게 속살거렸고, 마침내 약혼까지 했다. 그러나 이들의 약혼이 그 둘만의 ‘몰래한 사랑’이었는지 어떤지 그 속사정은 모를 일이지만, C의 아버지가 이들의 사랑에 훼방을 놓는다. 결국 아버지의 강압으로 C는 우체국까지 그만두게 된다. K와 C는 이제 “전화 하나를 가지고 오직 따뜻한 정을 통하던 것이 그것조차 아주 끊어지고” 말았다. 결국 C의 아버지는 그녀를 다른 사람과 결혼시켜버렸다.
K와 C의 애틋한 사랑을 전하는 ‘용당포인’이라는 기자는 비록 아버지의 반대로 이 둘의 사랑이 끊어졌지만, 전화가 있는 한 “이 세상에 전화가 없어질 때까지 그들의 사랑의 실마리는 전파와 같이 통할” 것이라며 두 사람의 애처로운 사랑을 위로한다.

K와 C의 사랑은 ‘전파’를 타고 싹텄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들은 빠른 전파를 매개체로 동일한 시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수많은 전봇대와 전선을 타고 흘러가 서로를 감전시켰다. 전파의 속도는 그 어떤 ‘매파’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그들의 운명을 묶었던 것이다.
만약 전화가 없었다면 이들의 사랑은 시작될 수 있었을까. 만약 전화교환수가 이들의 전화를 잘못 ‘중매’했다면 이들의 사랑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의친왕과 홍정순의 사랑을, K와 C의 사랑을 중매해준 최신 전기통신 미디어였던 전화. 그 전화로 인해 탄생한 신종 직업인 전화교환수의 역사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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