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미국에서 <재즈싱어>라는 영화가 발성장치를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발성영화, 즉 토키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는 <춘향전>(1935)이다. <춘향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한국 영화는 모두 무성영화였다. 관객들은 미국에서 수입된 발성영화를 관람했다. 발성영화가 등장하자 변사의 자리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변사의 수준을 의심하는 영화 마니아들이 생겨나면서 무성영화는 점점 삼류 영화 취급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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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의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의 열변에 도취당하던 일반 저급 대중 팬은 보고 듣기에 알기 쉬운 연극으로 가버리고 고급 팬은 외국 토키에 침식되어 조선영화의 무성판 같은 것은 눈도 떠보지 않고 토키로 나오면 가보고들 한다.
―서광제, "영화의 원작 문제-영화소설 기타에 관하야", <조광>, 193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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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키의 등장으로 변사의 위치가 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를 저급과 고급으로 나누는 문화의 구별 짓기 현상도 일어났다. 영화 마니아들은 더 이상 저급한 변사의 해설을 들을 수 없다며 발성영화로 몰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 무성영화 팬들을 삼류로 취급하면서 자신들과 구별 짓기를 했으며, 변사를 저급한 예술가로 취급했다.
또한 영화를 더 이상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민중 계몽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그만큼 영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파급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1930년 나운규는 <아리랑 그 후>(1930)를 제작했다. 물론 <아리랑 그 후>도 무성영화였으며, 공전의 히트를 쳤던 <아리랑>의 후속편이었다. 이 영화는 평단의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이유는 영화가 끝난 후 나운규가 직접 무대에 등장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했기 때문이었다. 나운규는 무대에서 기생들과 함께 춤을 추며 ‘아리랑’을 불렀다. 평단에서 보기에 나운규의 이런 행동은 무성영화의 변사들이 보여주었던 저급하고 저질스러운 행동에 불과했던 것이다. 평단의 비판이 있자, <아리랑 그 후>의 촬영기사 이필우가 이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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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보다 좀더 민중의 친우란 말이다. 너희들 앞에서 내가 지사라고 떠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만 이렇게 남을 잡아먹고 더구나 동족끼리 피를 빨아먹는 역사의 피를 받은 못된 버릇으로 남을 죽여버리려고 악을 쓰는 너희들 자신의 피부터 시험해보아라. 그 속에 누구에게든지 보여도 부끄럽지 아니할 만한 피가 몇 방울이나 나겠느냐. 왜 팔을 걷고 나와서 작품을 만들지 못하느냐. (……) 우리들의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는 많은 동지들에게 귀엽고 그리운 형제들에게 얼른 보이려고 제작한다. 그네들을 낙심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 무식한 광견들아 짖으려거든 짖어라. 우리는 누구보다도 조선 영화계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민중의 친우이다.
―李弼雨, "映畵界를 論하는 妄想裵들에게―製作者로서의 一言", <중외일보>, 1930년 3월 23~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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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영화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과연 대중예술인가 고급예술인가를 놓고 평단과 영화 제작자가 한판 싸움을 벌였다. 평단에서는 영화는 고급예술이어야 하기에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와 같은 저급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영화 제작자는 영화야 말로 대중의 예술이기에 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야 한다고 맞섰던 셈이다. 변사의 해설에 울고 웃던 대중은 과연 그들의 말처럼 ‘무지’하고 ‘저급한’ 팬이었을까.
굿 바이, 변사
1914년 매일신보에 기획 기사가 실렸다. 조선의 예술인/연예인에 대한 특집 기사였다. 당대의 뛰어난 예술인/연예인 100인에 대한 기획 기사였다. 이 기사의 아흔 여덟 번째와 마지막 백 번째 자리에 변사가 등장한다. 아흔 여덟 번째는 변사 김덕경에 대한 소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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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사진이라 하는 이름이 조선 지방에 수입된 지가 불과 십여 년이라. 미미한 일개 쇼 부분에 지나지 못하더니 요사이 수 삼년에 이르러는 시세를 좇아 활동사진도 점점 발전되어 경성 내에도 오륙 처의 활동사진관이 생기었고, 그로 좇아 사진 설명하는 변사도 비로소 생기게 되었음이 시세의 자연한 일이라. 이에 조선인의 변사에도 김덕경이라 하는 사람이 신기록을 지었도다. 김군은 소학교로부터 중학 정도까지 지내어 상당한 학식이 있을 뿐 아니라 본래 사령이 좋은 사람으로 이십일 세부터 각 활동사진관으로 다니며 설명의 직책을 맡아 유창한 어조로 혹은 높였다 내렸다 연약한 아녀자의 음성도 지으며 혹은 웅장한 대장부의 호통도 능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로 그림이 비추이지만은 실제의 연극을 보는 듯 또는 현장에서 그 광경을 직접으로 당한 것같이 감염이 되니 이는 김덕경의 특이한 장기가 아니면 능치 못할 일이라. 금년은 이십 사세이니 조선의 변사가 이제 완전히 한 사람이 생기었음으로, 이를 좇아 많이 나겠지만은 김덕경은 더욱 장래가 유망하여 조선 변사 첫째 손가락을 꼽으리로다.
―"藝壇一百人"(98), <매일신보>, 1914년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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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경 다음으로 백 번째에는 우미관의 변사 서상호와 이한경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이처럼 무성영화 초기만 해도 변사는 조선을 빛낼 뛰어난 예술인/연예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 마니아층이 형성되면서 변사의 해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등장했고, 여기에 더해 발성영화라는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등장으로 변사는 화려한 옛 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욱이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했던 변사 서상호의 방탕한 삶이 가십거리가 되면서 변사의 이미지는 더욱 추락했다. 발성영화의 등장으로 변사는 아직까지 발성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던 지방의 극장을 전전하면서 그 맥을 이어갔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 활동사진 변사는 각계각층의 수많은 비난을 받았다. 무지하다, 저급하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그렇지만 변사의 등장으로 인해 조선의 극장 문화는 비로소 꽃필 수 있었다. 변사의 전성 시대만 하더라도 극장은 그저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의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다. 극장은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공간이었다. 극장 안에서 관객은 영화를 보고, 변사의 퍼포먼스를 즐겼다. 그리고 관객은 변사의 ‘연기’에 개입하기도 했다. 잘하느니, 못하느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옳지 옳지, 그러면 그렇지, 얼씨구나 좋구나…….
무성영화 시대의 극장은 영화와 변사와 관객이 어우러진 축제의 장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3D가 나오고 4D가 나온들, 여전히 관객은 스크린 앞에서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다.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감각을 최적의 상태로 자극해주기만을 기다릴 뿐인 것이다. 변사는 사라졌지만, 변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축제의 공간으로서의 극장 문화만은 소중하게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