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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급한 남창적(男娼的) 인기에서 헤어나라
조선 최초의 영화 마니아가 생겨났다. 조선에 영화가 들어온 지 20여 년이 지나자 영화를 단순히 즐기는 것 이상으로 영화에 관심을 지닌 마니아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영화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변사의 해설에도 집요한 관심을 보였다. 이제 서상호처럼 ‘메리’를 ‘뺑덕어멈’이라고 번안하고, 있지도 않은 대사를 대충 넣었다간 영화 마니아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변사의 해설에 불만을 지닌 영화 마니아가 변사를 향해 불덩이를 던지는 사건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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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서린동 삼십구 번지 거주 문해광(京城 瑞麟洞 三十九番地 文海光). 당년 십팔 세 된 아이는 일전 우미관 활동사진을 구경하러 가서 삼등석에 앉아 있던 중 별안간 숯불덩이를 종이에 싸서 무대로 던진 까닭에 사진 비추이는 휘장 아래가 동전 둘레만 하게 타는 것을 즉시 꺼버린 소동이 생기어 그때 취체 갔던 순사가 전기 문해광을 종로 경찰서로 인치 취조한 결과 그 자백한 말을 들은즉 사진이 비추일 적에 변사되는 자가 설명을 잘못하여 사진의 내용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명한 것이 괴악함으로 참다못하여 분김에 불덩이를 싸서 변사에게 장난으로 던진 것이 잘못되어 그같이 휘장이 탔다 하였는데 이에 소위는 경찰범 처벌 규칙에 의하여 구류 칠일에 처하였다가 엄유 방송하였다더라.
―“변사에게 불덩이―설명을 잘 못한다고”, <매일신보>, 1919년 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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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의 해설이 도마에 올랐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둥, 사투리를 심하게 써서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둥, 경어체를 쓰지 않고 반말로 해설을 한다는 둥, 비루한 음담패설을 한다는 것 등이었다. 해설도 문제였지만 변사의 교양이나 지식이 문제가 되었다. 변사 면허시험 문제를 보아서 알겠지만, 그들의 지식수준이 그리 높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유창한 달변과 순간적인 기지, 그리고 관객을 휘어잡는 퍼포먼스와 같은 중요한 자질을 겸비했음에도 영화 마니아 계층이나 지식인들은 그들의 해설을 ‘삼류’ 취급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겸비한 관객들이 늘어날수록 변사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갔다. 더욱이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예전의 인기를 등에 업고 타성에 젖어 활동한다는 비판이 높아만 갔다. 영화 마니아였던 소설가 심훈의 글을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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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무리한 주문일지 모르나 관중의 대부분이 학생이요 학생들은 적어도 초등 정도 이상의 영어 지식은 가졌기 때문에 해설자도 간단한 회화 자막쯤은 알아볼 만큼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제명(題名)이나 배우들의 이름을 얼토당토않게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 영화는 날로 완성의 시기로 들어간다. 그런데 조선의 해설자는 십년 전과 후가 꼭 같이 아무 향상이 없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다. 일개의 해설자로 나설 양이면 남창적(男娼的) 인기에만 포니(抱抳)할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영화를 감상할 눈이 생겨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과학적으로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다.
―심훈, “관중의 한 사람으로 해설자 제군에게”, <조선일보>, 1928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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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소설을 정복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화의 파급력이 상당했던 시기에 소설가 심훈도 조선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영화가 단순히 대중의 오락물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심훈의 생각이었다. 영화가 대중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조선의 영화도 변해야 한다는 의견이 각계에서 흘러나왔다. 아마 이상적인 변사는, 그 사실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러시아의 위대한 혁명가 트로츠키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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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민중을 감화시킨다는 의미하에서 해설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변사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다. 일찍이 트로츠키가 시베리아에 방랑할 때 그는 해설자가 되었었다. 그것은 영화 예술이 가장 민중 지도에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컴컴한 무대 위에 서서 ‘스크린’을 통하여 제국(帝國)의 횡포압정(橫暴壓政)을 타매하였으며 민중의 원분(怨憤)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碧波生, “映畵解說者의 片語”, <中外日報>, 1927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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