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입막음 술판’서 용춤 춘 기자들
세상을 바꾼 사람들 ④-2
 
 
한겨레  
 








 

» 1967년 1월 울산 한국비료 공장 시동식에서 장기영 당시 부총리(앞줄 왼쪽 다섯번째)와 성상영 한국비료 사장(앞줄 오른쪽 네번째) 등이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전례없는 화입식은 이후 4월 준공식을 하기까지 사이에 벌어진 소동이다. 사진 <한국비료30년사>
 
기자 초년병이 중앙·지방 행정부, 국회, 법원과 중요한 민간기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기자실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 대부분 심각한 회의와 반발심에 휩싸인다. 지금의 기자실이 45년 전에 견줘 얼마나 달라졌을까? 섣불리 가늠하기 어렵다.

기자가 출입처의 기자실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기자단에 가입하는 것은 별개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큰 신문들은 기자단 가입에 문제가 없었으나 방송과 지역 신문은 원칙적으로 불가였고, 아주 고약한 데서는 몇 달의 유예기간을 두어 초입자의 기자단 가입을 ‘심사·통과’시킨다. 미국 갱 영화에 나오는 신디케이트(마피아와 동의어로 폭력조직)처럼 내부 비밀을 잘 지키느냐가 가장 중요한 심사 기준이었다. 특정 비리·불법을 눈감아주거나 그 반대로 보조를 맞추어 두들겨 패기도 하는 어처구니없는 짬짜미 곧, 담합행위다. 행정부서 가운데서도 특히 경제부처 기자단의 짬짜미가 심했다. 담합을 어기는 기자에 가해지는 제재는? 요샛말로 하여 ‘왕따’이고, 기자단 고참들의 미움을 사면 ‘취재 완전 불능’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초년병은 기사를 ‘물먹을’ 위험에 부닥치기도 한다. 이럴 때 본사 데스크가 기자단에서 왕따당한 후배 초년병을 두둔하고 격려해 주느냐면, 내 경험으로는 아니다. “어리석은 친구 같으니 … 출입처 기자들과 잘 어울려야지!” 하는 반응이 고작이었다. 취재 요령과 기사 작성 능력이 출중하다면 모를까, 기자단으로부터의 왕따는 열이면 아홉 외근기자 부적격 판정 사유로 작용했다. 저널리즘은 미디어들 사이의 경쟁만이 아니고 저널리스트 사이의 피 튀기는 싸움판이다.

1967년 초봄, 삼성의 ‘한비 화입식’ 초청에 대한 경제기획원 기자실의 반응이 어땠는지 41년 전의 일이라 확실히 떠오르는 장면은 없다. 전무후무한 화입식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것이 국가에 헌납하기로 한 약속을 뒤집으려는 공작인데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울산에 가서 한바탕 기분풀이할 생각에 기자들이 들떠 있었던 기억이 아슴프레 남아 있다. 화입식이 있던 날 아침 김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울산행 전세 비행기에 오르니 취재기자 10여명 말고도 국회의원, 경제 관료와 삼성 관계자들 여럿이 보인다. 특히 의외라 싶은 인물들은 삼성 소유였던 <동양방송>(TBC) 상무인 김규(당시 이병철의 사위로 훗날 서강대학 교수), 무슨 부장직의 홍두표(전두환 정권 아래서 전매청장과 한국방송공사 사장 역임)다. 이 두 사람은 같은 대학을 다니긴 했으나 십여 년 전혀 대면한 적이 없었는데 나를 반기는 품은 민망하리 만큼 은근하다. 여론 무마를 위해 특별한 계략을 짜고 그 각본대로 움직인다는 확신이 섰다.



 

» 언론인 임재경
 
말이 화입식이지 의식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공장을 둘러보는 둥 마는 둥 기자 일행은 자동차 편으로 동래 온천장의 호텔 겸 요정으로 가는 거였다. 기자들에게 현금이 든 흰봉투 하나씩을 건넨 다음 이내 술판이 벌어졌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고 나자 노름을 즐기는 기자들은 준비된 방으로 몰려갔다. 기사를 보내는 것은 바로 지금! 지금 살짝 빠져나가지 않으면 마감시간을 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방으로 달려간 나는 교환을 불러 신문사 번호를 대고 연결을 부탁했다. 그때가 저녁 7∼8시쯤 되었을까, 지역판은 마감시간이 지났으나 서울판 마감은 아직 충분했다.

‘삼성은 왜 전례 없는 화입식을 거행할까’, ‘전세 비행기를 준비하여 수십 명의 브이아이피(VIP)를 모신 까닭은 ?’, ‘기자들에 대한 융숭한 대접은 무언가’ 하는 점을 들고 이것은 한국비료 국가 헌납 백지화를 꾀하려는 수순이 진행되고 있다는 정황이라는 내용의 상자 기사였다. 30분 남짓하게 송고를 마친 다음 나는 슬며시 술판으로 되돌아와 앉았다. “잘들 노는구나, 내일 아침 너희 모두 악 소리를 지를 텐데” 하는 쾌감이 서른한 살 젊은 나에게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언론인 임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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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밀수’ 삼성, 그때도 국고헌납 약속
세상을바꾼사람들④-1
 
 
한겨레  
 








 

» 1966년 9월 한국비료의 밀수사건으로 국회 똥물 투척사건이 벌어지는 등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은 한비를 국가에 헌납하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합동연감>
 


<한겨레>가 창간되기 20년 전, 즉 1960년대 후반, 그러니까 40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조선일보>의 경제부 기자였다. 요즘 전세계의 자본을 끌어들여 연 8∼9%의 고속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처럼, 65년 6월 한-일 협정을 체결하고 나서 박정희는 일본 자본 도입을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아니 한-일 협정 그 자체를 배후에서 추동한 한국의 재벌들은 일본 자본을 이른바 ‘민간 상업차관’ 형태로 들여오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각종 단순 소비재, 내구 소비재, 건축자재 등의 생산설비가 주종을 이뤘으며, 기간산업은 청구권 자금을 재원으로 한 포항제철과 삼성이 상업차관으로 건설하는 ‘한국비료’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경천동지할 사건이 터졌다. 삼성은 거대한 물량의 비료제조 시설물 속에 고급 도기 위생기구(양변기류)와 인공감미료 사카린을 대량으로 숨겨 들여오는 밀수를 자행했던 것이다. 밀수한 두 품목은 수입 금지품이거나 관세율이 굉장히 높아 관세와 물품세를 내지 않을 땐 곧 폭리를 뜻했다. 삼성의 밀수는 세관이 적발한 것이 아니라 밀수품이 시중에서 한참 유통되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다음 신문들이 뒤늦게 보도한 것이다.

2007년 가을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자금 실태를 폭로한 뒤 벌어진 사법부서의 대응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법정에 간 삼성의 한비(韓肥) 밀수 사건은 끝내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때 신문사들이 특별 취재팀 같은 것을 만들어 본격적인 탐사보도를 했을까. 물론 아니다.

차관을 승인하고 사후관리를 담당하는 경제기획원, 수입자재의 통관 부서인 재무부, 비료 공장 건설을 점검하는 상공부, 밀수품의 유통을 단속·처벌해야 할 경찰과 검찰이 삼성 밀수의 공범이라는 소리가 들끓었다. 당시 야당 의원이었던 김두한(항일투사 김좌진의 아들이고 한 시절 의협 세계를 주름잡았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장기영(<한국일보> 창업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퍼온 똥물 한 동이를 퍼붓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행정부뿐만이 아니라 집권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이었던 김성곤(<동양통신> 소유자),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삼성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국민 사과고 ‘엄정수사’고 간에 고식적인 방법으로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했다. 삼성이 선택한 수습안은 이병철(삼성의 창업자로서 현 이건희 회장의 부친)이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 박정희에게 한국비료 공장을 계획대로 건설한 다음 국가에 깨끗이 헌납하겠다는 약속을 문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재벌들이 국가 헌납 제의로 형사 책임을 모면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멜로디인 셈이다.



 

» 언론인 임재경
 
속담대로 뒷간에 갈 때와 급한 용변을 마치고 난 뒤의 사람 마음은 달라지는 법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제당-모직물 공장을 건설하여 두 분야 시장을 장악함으로써 재미를 볼 대로 본 삼성이 한국 최대의 비료공장을 세워놓고 국가에 바치자니 밤잠이 올 턱이 없다. 헌납 약속을 휴지화하는 계책이 삼성 안에서 꿈틀거렸고 마침내 그 정지 작업을 착수하는 단계에 왔던 것이다.

67년 초여름 한국비료공장이 ‘화입식’(火入式)을 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화입은 불을 지핀다는 말인데 공장의 시운전에 해당한다. 보통 건설공사에 참여한 실무자들이 돼지머리와 시루떡을 차려놓고 간단하게 고사를 지내는 게 고작이다. 기공식과 준공식은 있어도 많은 손님을 모아놓고 벌인 화입식은 삼성의 한국비료공장이 전무후무하다. 화입식에 정계·관계 요인들과 기자단을 초청한다는 거였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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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YS “내가 기둥 하나 세워줬는데”
세상을 바꾼 사람들③
 
 
한겨레  
 








 

» 그림 박재동 화백
 
새 신문 창간을 내걸고 나서 몇 달 사이에 50억원이 걷힌 것은 6월 항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스펙터클’(보기 드문 일대 장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말이 좋아 십시일반이지 몇 만 명이 구체적 반대급부 없이 현금을 자발적으로 낸 것은 거의 신앙적 열정이라 할 만하다. <한겨레>가 창간 주주 각기에게 성의를 다해 감사의 예를 갖추었느냐를 돌이켜볼 때 죄송하다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릴 길밖에 없다. 특히 창간위원 중의 한 사람이고 초대 편집인과 부사장이란 직책을 맡았던 사람으로서는 구식 표현으로 하여 백골난망이다.

주식회사 <한겨레>의 임재경 명의 보유주식은 5천원짜리 주식 4천여 주, 액면가 총액이 2천만원을 넘는다. 당시 부사장 월급이 113만원이었으므로 20개월분 봉급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군사정권의 탄압에 대비한다는 속셈에서 비망록을 일절 만들지 않는 것이 회사 간부들의 불문율이었던 까닭에, 여기 이 글은 전적으로 기억에만 의존한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500만원뿐이다. 나머지 1599여만원은 “제발 부탁이니 임형 명의로 해주시오”라는 거였다. <한겨레> 신문의 주주로 등재되는 데서 오는 불이익 혹은 위험을 피하고 싶다는 조건이다. 이럴 때 “비겁하게 … 그러려면 그만두시오”라 한다면 그건 무얼까. 마틴 루서 킹과 버락 오바마를 잇는 미국의 위대한 흑인 지도자 제시 잭슨이 1980년대 중반에 던진 말인데 “하늘이 내리는 기회를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란 비유로 대신하겠다.

이 글을 쓰면서 1500만원 투자자들의 실명을 공개할 때가 오지 않았나를 무척 고심했다. 지금은 20년 전처럼 <한겨레> 주주라는 것이 불이익을 당하는 세상은 아니겠지만 각기 노는 물에 따라서는 ‘이중 플레이’를 했다는 입방아를 듣기 십상이다. 그렇더라도 내 이름을 빌려 투자한 사람들이 시대의 변화를 올바로 읽고 새로운 신문의 필요를 절감했다는 것은 자랑스러우면 자랑스럽지 쉬쉬할 일은 절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불찰이지만 내 이름으로 투자한 실제 주인들을 죄다 떠올리지는 못한다. 그중 두 사람은 500만원씩을 낸 김인기와 조규하다. 앞의 분은 나와 대학 시절부터 30대 중반까지 밤 가는 줄 모르며 거대 담론을 나누었던 김상기(미국 남일리노이대학교 철학교수)의 백씨이고 뒤의 분은 언론계(<한국일보>, <동아일보>의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전경련 상근 부회장과 전라남도 지사를 지낸 사람이다. 실명 노출을 꺼리는 출자자들이 창간인들의 이름 속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큰데 실제 출자자들의 상당수가 이미 노령에 이르렀을 터인즉 <한겨레>는 하루속히 주권을 발행하여 비록 종이쪽지일망정 감사의 징표를 남기는 것이 도리다.

다 알려진 사실로서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5천만원씩을 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출자는 쉽게 이루어졌는 데 비해 김영삼 전 대통령 쪽은 한참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자랑거리는 못 되지만 이럴 때 창간인들의 눈초리는 내게로 향했다. ‘당신이 움직여 보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1972~73년 <조선일보>의 정치부 차장이라는 경력과 74년의 민주회복국민회의 운동을 하는 짧은 기간에 내가 야당 정치인 접촉으로 우리들 가운데서는 그쪽과 안면이 비교적 잘 통하는 편에 속했지만, 정치 하는 사람들에게 돈 이야기가 내키지 않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덕룡과 대학 동기인 창간인도 여럿 있는데 왜 하필 내가 나서야 하는지 내심 불만도 없지 않았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해직기자 가운데서 외근 경력이 가장 긴 내가 새


 

» 언론인 임재경
 
신문을 만드는 일에 할 일이 있다면 악역과 인욕(忍辱)이라고 결심했다. 헬무트 슈미트와 같은 ‘마허’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악역과 인욕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한겨레>에 있는 4년 동안 내 신조로 삼았다.

1960년대 민완의 경제 관료로서 활약하다 정계에 투신하여 88년께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황병태(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 국회의원, 주중대사 역임)를 만나 간청 반 투정 반을 부렸다. 그와의 만남이 주효했던지 5천만원 출자는 이내 성사됐다. 문제는 그로부터 한두 해 뒤의 일이다. 롯데호텔 로비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우연히 마주쳤다.

“임 부사장! <한겨레>가 나에게 그렇게 해도 되는 깁니까. 내가 <한겨레>의 기둥 하나는 세워주었는데 말입니다.” 정치 9단답게 그는 얼굴에 웃음은 잃지 않았으나 그의 말은 나에게 다트처럼 와 꽂혔다.


언론인 임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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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CTS 혁명’ 염탐온 뜻밖의 손님
세상을 바꾼 사람들②
 
 
한겨레  
 








 

» 50억원의 최소 자본금으로 한겨레신문사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국내 첫 컴퓨터조판시스템(CTS)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편집 기술이었던 까닭에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1988년 5월14일 외신들이 창간호 제작과정을 취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창간을 축하하기 위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영등포 변두리 뚝방촌까지 찾아온 손님들은 일일이 거명할 나위도 없이 민주화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분들이다. 반면 당연히 올 것으로 믿었던 몇 분은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한때 해직기자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천관우(<조선일보> 편집국장과 <동아일보> 주필 역임)와 그 자신이 80년 해직 언론인이며 나를 포함한 <한겨레> 주축 멤버들과 교분을 나누던 박권상(<동아일보> 논설주간과 KBS 사장 역임)이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못내 섭섭했다. 예외라면 일흔 가까운 노령의 이열모(이승만 정권 시절 재무부 이재국장을 역임했고 관계를 물러난 이후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와 언론계 출신의 남재희(<조선일보> 정치부장-논설위원, <서울신문> 편집국장-주필 역임한 3선 의원)다. 남재희는 송건호 사장과 충북 동향이며 나와는 조선일보 시절 형 아우 하며 아주 가깝게 지냈다. 1980년 여름 전두환의 계엄사 요원들에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열흘 동안 취조를 받고 서울 구치소로 넘어가 석 달 만에 풀려났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추석 전날이었다. 그는 내 가족을 위로하려고 내 집에 와 있었다. 사소한 의리 같지만 사촌과 동서가 전화를 하지 않는 삼엄한 시기였다.

창간하는 날 매스컴 동업자들을 부르지 않았다. 경황이 없어서 그랬으려니와 그들에 대한 반감으로 인하여 간부들 가운데 누구도 매스컴 동업자 초대를 입에 담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창간 모금을 준비하는 시점부터 홍보물을 통해 그쪽을 치고 나갔으며 특히 창간 이후에는 보도와 논평에서 거대 매체 간부들의 실명을 들어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신문협회와 편집인협회가 보이콧 대상이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판에 아주 예상치 못한 손님이 양평동을 찾아왔다.

창간 몇 달 뒤의 일. <중앙일보>의 김동익 사장(<조선> 정치부 기자를 거쳐 <중앙> 편집국장-주필, 노태우 정부의 정무장관 역임)으로부터 양평동 사옥을 방문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김동익은 나와 <조선>의 견습기자 동기일 뿐 아니라 20대 총각 시절 경찰 출입을 하며 사창가를 같이 헤매던 허물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80년대 초 언젠가 낭인이던 내가 그의 사무실(삼성 비서실)을 찾아갔을 때 마침 부재중이라 연락을 바란다는 말을 남겼으나 종내 응답이 없어 만나기를 꺼린다는 감을 잡았고 그 뒤 몇 해 동안 대면한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의 전화를 받는 순간 쓰라린 기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반갑다는 생각에다 어깨가 으쓱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네가 나를 이제는 파리아(pariah, 인도의 4개 종성 가운데 최하의 천민계급)로 취급하지 않는구나. <한겨레>도 당당한 신문이 됐구나’ 하는 일종의 자만심이었다. 정태기 인쇄인 겸 상무이사에게 김동익의 내방 이야기를 꺼냈더니 “우리 시티에스(CTS) 조판 시스템을 염탐하려는 것이니 그리 알아 두십시오”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설마 했지만 창간 축하를 할 의향이라면 먼저 점심이나 저녁을 하자고 하는 것이 순서인데, 아니나 다를까 양평동 사옥 내 사무실에 온 그는 차 한잔 마시는 둥 마는 둥 곧 인쇄시설과 조판실을 돌아보고 싶다는 거였다. 정태기의 말은 들어맞았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아이티(IT) 왕국의 <중앙>이 가로쓰기와 컴퓨터 조판 시스템의 전면 도입을 실시한다는 사고를 냈다.



 

» 언론인 임재경
 
보도와 논평, 그리고 신문 지면의 레이아웃이라면 할 말이 많으나 신문의 조판과 인쇄 분야에는 백지나 다름없는 내가 <한겨레>의 20년 전을 회상하며 초장부터 시티에스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신문의 물질적 기반 혹은 물적 토대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전하는 기능과 목적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으나 근대적 의미의 신문과 삐라(전단)는 근본에서 성격과 조건이 다르다. 우리 사회와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보도하며 그 현상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문제들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연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신문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대중에게 하루도 쉬지 않고 새소식과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인쇄기구가 불가결의 도구인데 그것은 막대한 자금이 든다. 이 땅의 정치를 쥐락펴락하고 소비 양식을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는 이른바 ‘조중동’이 일제하의 최대 지주, 최고의 금광 부호, 그리고 해방 이후 최대 제조업 재벌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새 신문을 만들려는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언론인 임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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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중년 서생’ 색다른 신문에 미치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① -임재경/ 언론인
 
 
한겨레  
 








 

» 그림 박재동 화백
 
분단 이래 파란과 질곡의 한국 현대사 속에는 저마다 뜻과 열정을 다 해 더 나은 세상, 더 바른 삶의 길을 찾아온 ‘큰 인물’들이 유난히 많다. 식민의 핍박과 설움, 전쟁의 상흔과 이산의 아픔, 가난과 독재, 이념 갈등과 남북대립, 산업화와 민주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고비고비를 헤쳐오며 한 평생 묵묵히, 그러나 치열하게 진보를 향해, 열린 세상을 위해, 한 길을 걸어온 각 분야 원로들의 회고담을 <한겨레> 창간 20돌 특집으로 연재한다.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그들의 얘기 속에서 삶의 지혜와 다음 세대의 길을 함께 찾아갈 것을 기대한다.

 





1988년 5월15일 영등포 오목교 근처 양평동, 바라크(막사) 사옥의 낡은 윤전기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한겨레신문>을 한 아름 안아들고 2층의 편집국으로 단숨에 뛰어 올라가 거기 모인 창간 축하 손님들에게 신문 한 부씩을 나누어 주던 그 순간은 종생 잊지 못한다. 그때 내 나이 52살, 직책은 편집인 겸 논설주간, 여생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그 순간은 내 삶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칠십 줄에 들어선 지금 그때 거기서의 감격을 되풀이 읊조리는 것은 아무래도 쑥쓰럽다.

36년생인 나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61년 봄 <조선일보> 견습기자로 출발하여 80년 7월 전두환 일당이 날조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과도 내각 명단에 이름이 들어 있다는 구실로 <한국일보> 논설위원직을 파면당하고 나서 햇수로 8년 동안 취업 불가 딱지가 붙은 ‘더러운’ 세월을 보냈다.

기실 직업인으로서의 기자는 일반적으로 큰일을 꾸미고 성취하는 인간형과는 거리가 멀다. 치밀한 계산, 확고한 결의 그리고 끈질긴 노력, 세 가지가 다 모자라는데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믿는다. 분단된 서독의 정치가 가운데서 좌우를 막론하고 식자층의 폭넓은 신뢰를 받았던 사민당(SPD) 출신의 총리 헬무트 슈미트의 ‘일꾼’(Macher)과는 생판 다른 것이 신문기자다. 아무튼 그런 내가 <한겨레>와 같은 아주 색다른 성격의 신문을 만들어 내는 어려운 일에 몰입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펜대를 굴리는 사람’, 더 솔직하게는 ‘다른 사람보다 글 잘 쓰는 능력자’쯤으로 자신을 설정하였던 게 사실이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차려 놓은 밥상을 앞에 놓고 음식 맛을 탓하는 나쁜 뜻의 서생 꼴이라면 어떨지 모르겠다.

편집 노선과 경영방식이 기존 신문과 전혀 다른 신문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6월 항쟁이라는 시대적 기운에 등을 떠밀린 결과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모든 기사에 “내라, 말라”, “제목의 크기는 1단, 2단” 하는 식으로 언론에 ‘보도지침’을 내려 사전 검열을 행하는 현실을 온 국민이 알아차린 이상 새로운 신문의 출현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단지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드느냐는 것만이 문제였다.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기존 신문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분노를 폭발시킨 대표적 사례다. 이 와중에서 ‘5·3인천사태’로 투옥 중이던 이부영(75년 <동아일보> 해직, 민통련 사무처장, 3선 국회의원)이 교도소 안에서 특종을 발굴한 기막힌 사연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취재 목적으로 거기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의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참지 못하는 것이 기자의 혼이다.




75년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언론인들, 그리고 80년 전두환 일당에 의하여 해직당한 언론인들이 주축이 되어 창설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장 송건호, 초대 사무처장 성유보, 약칭 ‘언협’, 현재 맹활약 중인 민언련의 전신)가 지하 기관지인 <말>을 통해 보도지침의 내용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로 인하여 언협 2대 사무처장 김태홍(80년 <합동통신> 해직, <한겨레> 이사·판매국장, 17대 국회 보건복지위원장)과 언협의 실행위원 신홍범(75년 <조선일보> 해직, <한겨레> 제2대 논설주간)이 구속되어 6월 항쟁 전후 2~3개월 동안 법정투쟁을 벌였다. 이는 필리핀에 이어 한국에서도 ‘민중의 힘’(피플 파워)이 나타날 것을 예견한 외국 기자들에게 서울에 와서 빼놓을 수 없는 취재 대상이었다. 그러니 만큼 새 신문을 만드는 짐을 해직기자들이 걸머지는 것은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시대의 소명이었다.

다음은 ‘언제’ ‘어떻게’인데 두 가지 다 신문을 만드는 데 드는 자금을 조성하는 일과 직결되는 것이므로 해직기자들은 이런저런 전망을 입에 담을 뿐 확실한 안을 내지 못했다. 그 때 존재감을 뚜렷이 나타낸 것이 정태기(1975년 <조선일보> 해직, <한겨레> 상무이사와 12대 대표이사)다. 국민모금과 컴퓨터 조판이라는 아이디어를 내고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창의와 추진력 덕분이다. 뛰어난 존재는 경탄과 동시에 시기의 표적이 되는 법이다.

정태기는 <조선> 해직 이후 생계의 방편으로 몇 갈래의 비즈니스 판을 돌았는데 그 마지막 기회가 조그마한 컴퓨터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밑천 삼아 납으로 된 활자를 집조(문선·조판)하는 과정을 없애고 컴퓨터로 대신하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한겨레> 창간을 통해 실천하는 데 성공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냐, 아니면 ‘도달’한 것이냐를 두고 역사가들 사이에 분분한 논의가 있다지만 어떤 용어를 쓰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87년 가을 납으로 된 활자를 쓰지 않고 신문을 만들기로 한 것은 최소한의 돈으로 새 신문을 만들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필요에 직면한 우리에게는 절호의 돌파구였다. 즉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임재경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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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8-08-2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와 아내의 '주례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