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밀수’ 삼성, 그때도 국고헌납 약속
세상을바꾼사람들④-1
 
 
한겨레  
 








 

» 1966년 9월 한국비료의 밀수사건으로 국회 똥물 투척사건이 벌어지는 등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은 한비를 국가에 헌납하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합동연감>
 


<한겨레>가 창간되기 20년 전, 즉 1960년대 후반, 그러니까 40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조선일보>의 경제부 기자였다. 요즘 전세계의 자본을 끌어들여 연 8∼9%의 고속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처럼, 65년 6월 한-일 협정을 체결하고 나서 박정희는 일본 자본 도입을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아니 한-일 협정 그 자체를 배후에서 추동한 한국의 재벌들은 일본 자본을 이른바 ‘민간 상업차관’ 형태로 들여오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각종 단순 소비재, 내구 소비재, 건축자재 등의 생산설비가 주종을 이뤘으며, 기간산업은 청구권 자금을 재원으로 한 포항제철과 삼성이 상업차관으로 건설하는 ‘한국비료’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경천동지할 사건이 터졌다. 삼성은 거대한 물량의 비료제조 시설물 속에 고급 도기 위생기구(양변기류)와 인공감미료 사카린을 대량으로 숨겨 들여오는 밀수를 자행했던 것이다. 밀수한 두 품목은 수입 금지품이거나 관세율이 굉장히 높아 관세와 물품세를 내지 않을 땐 곧 폭리를 뜻했다. 삼성의 밀수는 세관이 적발한 것이 아니라 밀수품이 시중에서 한참 유통되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다음 신문들이 뒤늦게 보도한 것이다.

2007년 가을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자금 실태를 폭로한 뒤 벌어진 사법부서의 대응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법정에 간 삼성의 한비(韓肥) 밀수 사건은 끝내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때 신문사들이 특별 취재팀 같은 것을 만들어 본격적인 탐사보도를 했을까. 물론 아니다.

차관을 승인하고 사후관리를 담당하는 경제기획원, 수입자재의 통관 부서인 재무부, 비료 공장 건설을 점검하는 상공부, 밀수품의 유통을 단속·처벌해야 할 경찰과 검찰이 삼성 밀수의 공범이라는 소리가 들끓었다. 당시 야당 의원이었던 김두한(항일투사 김좌진의 아들이고 한 시절 의협 세계를 주름잡았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장기영(<한국일보> 창업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퍼온 똥물 한 동이를 퍼붓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행정부뿐만이 아니라 집권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이었던 김성곤(<동양통신> 소유자),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삼성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국민 사과고 ‘엄정수사’고 간에 고식적인 방법으로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했다. 삼성이 선택한 수습안은 이병철(삼성의 창업자로서 현 이건희 회장의 부친)이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 박정희에게 한국비료 공장을 계획대로 건설한 다음 국가에 깨끗이 헌납하겠다는 약속을 문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재벌들이 국가 헌납 제의로 형사 책임을 모면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멜로디인 셈이다.



 

» 언론인 임재경
 
속담대로 뒷간에 갈 때와 급한 용변을 마치고 난 뒤의 사람 마음은 달라지는 법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제당-모직물 공장을 건설하여 두 분야 시장을 장악함으로써 재미를 볼 대로 본 삼성이 한국 최대의 비료공장을 세워놓고 국가에 바치자니 밤잠이 올 턱이 없다. 헌납 약속을 휴지화하는 계책이 삼성 안에서 꿈틀거렸고 마침내 그 정지 작업을 착수하는 단계에 왔던 것이다.

67년 초여름 한국비료공장이 ‘화입식’(火入式)을 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화입은 불을 지핀다는 말인데 공장의 시운전에 해당한다. 보통 건설공사에 참여한 실무자들이 돼지머리와 시루떡을 차려놓고 간단하게 고사를 지내는 게 고작이다. 기공식과 준공식은 있어도 많은 손님을 모아놓고 벌인 화입식은 삼성의 한국비료공장이 전무후무하다. 화입식에 정계·관계 요인들과 기자단을 초청한다는 거였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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