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80년전 캐나다로 유학간 아버지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1-3
 
 
한겨레  
 








 

» 캐나다 토론토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11월부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뉴칼리지에서 6개월간 연구하던 시절 아버지 문재린이 그 지역 전통의상인 킬트에 백파이프를 들고 찍은 기념사진. 36살 때 모습이다.
 
1919년 3월13일 북간도 용정에서도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그날 어머니 김신묵은 30리나 되는 용정까지 걸어가서 만세를 불렀다. 새벽밥을 해 먹고 길을 나서 종일 굶었는데도 배고픈 줄도 모르셨다고 했다. 아버지 문재린도 북간도에서 제일 큰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의 지회 서기직을 맡았고, <독립신문> 기자 일을 하느라 분주히 돌아다녔다. 이때부터 독립운동의 열기는 높아갔지만 일제의 탄압도 더욱 거세어졌다. 이듬해(경신년) 토벌에는 일제가 노루바위라는 곳의 교회당에 교인들을 집어넣고 통째로 불을 지른 뒤 뛰어나오는 사람은 총으로 쏴서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명동교회도 가만히 있다가는 크게 화를 당할 것 같아 문재린을 포함한 대표자 5명을 일본 경찰에 자수시키기로 했다. 아버지는 20년 겨울 일본 영사관에 갇혀 두 달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이것이 아버지의 첫번째 옥고였다. 해방 이후 남쪽으로 나올 때까지 아버지는 세차례나 더 옥살이를 한다) 그때 나를 뱃속에 갖고 있었던 어머니는 과부가 되는 줄 알고 무척 놀랐고, 내가 심하게 태동을 해서 걱정을 하셨단다. 그래서인지 나는 태어나서도 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다.

<독립신문>은 용정민회의 기관보인 <간도일보>의 주필이었던 유하천이 만들었다. 아버지는 기자로 일하면서 신문을 등사판으로 수백 장씩 찍어냈고 학생이나 부녀자들을 시켜서 곳곳에 퍼뜨렸다. 그렇게 뜻있는 청년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느라 빠져나가 교회가 텅 비고 학교에도 선생이 없게 되자 아버지는 스스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22년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아버지는 졸업한 이듬해 27년부터 모교회인 명동교회와 용정 토성포교회에서 시무했다.

28년 아버지는 캐나다 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토론토의 임마누엘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898년 처음으로 한국에 선교사를 보낸 캐나다 선교부는 다른 완고한 선교부들에 비해 재정은 취약했지만 신앙이 새롭고 관대하였다. 예를 들어 한국 선교산업을 선교사들이 독단적으로 집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27년부터 이사회를 신설하고 선교부 대표와 한국인 대표가 동수로 참석하도록 했다. 또 앞으로 한국 교회는 한국인들이 꾸려나가야 할 것이므로 젊은 학생들을 유학 보내서 세계 교회와 어깨를 나란히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 첫 유학생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을 주문한 다른 선교부와 달리 캐나다 선교부는 항일 독립운동을 후원해 주기까지 했다.



 

» 문동환 목사
 
아버지는 내가 11살 되던 32년에 귀국해 용정 중앙교회에서 시무를 하면서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 그리고 제창병원의 이사로 활동하느라 굉장히 분주하였다. 그 덕분에 내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귀국 이후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밥을 입에 넣은 채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을 정했다. 밥을 입에 넣고 말을 하면 그대로 굶어야 한다는 다소 극단적인(?) 처방까지 내놓으셨다. 하루는 내가 대문을 열고 “학교 다녀왔습니다!” 소리를 질렀더니 아버지가 밥을 입에 문 채로 “무어라고 했어?” 그러는 거다. 그 바람에 입에서 밥알이 튀어나왔다. 나는 “아버지가 밥을 입에 넣고 말씀하셨다!”고 신나게 소리를 쳤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럼 할 수 없지. 밥을 굶어야지.” 그러시면서 윗방으로 올라가셨다. 이렇듯 아버지는 순수하게 원칙을 지키는 분이었다.

한번은 밥을 먹다 익환 형과 내가 말다툼을 했다. 아버지는 우리 둘에게 창고에 들어가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벌을 서라고 했다. 우리 둘은 씩씩거리면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창고 안에 크리스마스 때 불을 밝히는 초롱이 있었다. 언제 싸웠냐는 듯이 우리는 그 초롱을 들고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벌을 서면서도 화목하게 찬송을 부르니 용서한다. 와서 밥을 먹어라!” 했다.

용정에서 아버지께 자전거를 가르쳐드린 일도 기억난다. 집 뒤 운동장에 나가서 “바른편으로, 왼편으로” 하면서 아버지 뒤에서 자전거를 붙잡고 뛰었다. 아버지는 체격은 꽤 컸지만 운동신경은 둔한 편이어서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끝내 용정에서 유일하게 자전거를 타고 심방을 다니는 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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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잘생기고 착한 익환형에 열등감
떠돌이 목자의 노래1-2
 
 
한겨레  
 








 

» 1930년대 명동촌 동거우의 집에서 찍은 가장 오래된 가족사진이다. 왼쪽부터 13살 때 병사한 동생 두환, 동환(필자), 어머니 김신묵, 할머니 박정애, 맏형 익환, 여동생 선희.
 
‘작문시간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없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명동학교는 민족정신을 심어주는 교육을 했다. 내 아버지 문재린은 1913년 명동중학교를, 어머니 김신묵도 그 이듬해 명동여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때 남몰래 혼자서 한글을 깨우쳤던 어머니는 학교에 다니는 게 소원이었는데, 결혼한 뒤 시아버지가 보내주어 여학교에 다닌 것이다. 그곳에서 아명인 ‘고만녜’를 버리고 김신묵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어머니의 담임은 신간회에서 간도 교육의 사명을 받고 온 정재면 선생이었다. 그때 명동학교의 선생 월급은 턱없이 적었지만 유한양행의 설립자인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씨가 생활비를 대주어 대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정 선생은 해방 뒤 서울로 내려와 송추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세상을 뜨셨다.

국어 담당으로 우리 부모님의 주례를 섰던 박태환 선생은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저서에 서문을 쓸 정도로 실력자였다. 박태환과 정재면은 함께 서울 상동감리교회 안에 있던 기독청년학원에서 공부를 한 동창이었다. 그곳 출신들이 정 선생을 따라 명동으로 들어왔다. 역사학자 황의돈(문교부 편수관, 단국대·동국대 교수), 주시경의 제자로 조선어학회 사건의 주역인 한글학자 장지영(연세대 교수) 등도 차례로 교사로 부임했다. 장지영은 국어학자였지만 박태환이 국어를 가르치니까 대신 영어를 맡았다. 여학교에서는 정재면의 누이인 정신태가 성경을 가르쳤고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시조인 이동휘의 둘째 딸 이의순이 음악·재봉·이과를 가르쳤으며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늘 강조했다.

우리 가족이 살던 동거우는 명동학교가 있는 학교촌으로부터 약 5리 정도 떨어져 있던 까닭에 우리 형제들은 1학년부터 입학하는 게 무리였다. 우리가 처음 공부를 시작한 곳은 뒷방이었다.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면서 우리에게 초등학교 3학년까지 과정을 직접 가르쳤다. 어머니는 늘 주일학교와 야학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종이가 없어서 목판에 모래를 넣고 나뭇가지로 글을 쓰곤 했다. 한글을 배운 다음에는 구구단을 외웠다. 예수님이 어린 양을 안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달력 뒷면에 어머니는 구구단을 적어놓았다. 늘 진지하고 엄격한 어머니는 애국가와 독립군의 노래도 가르쳐주었다. 을지문덕, 이순신,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우리들은 집 뒤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를 오르거나, 어머니가 누에를 키우기 위해 심어놓은 뽕나무의 오디를 따먹기도 했다. 배가 고프면 나리꽃의 뿌리를 캐먹기도 하고, 콩을 서리해서 불을 피워 콩을 익혀 먹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 개울가에서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었는데 그 쫄깃쫄깃한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개구리를 얼마나 많이 잡아먹었는지 한여름인데도 동네에서 개구리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세 살 위인 형 익환은 명동 소학교 3학년으로 입학했다. 후에 같이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고, 민주화 운동의 동지가 된 형을 나는 어려서부터 많이 따랐다. 그러나 장남인데다가 생긴 것도 시원시원한 형의 그늘에서 나는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 문동환/목사
 
이웃집 아주머니들은 우리 형을 보고 “그놈 참 잘도 생겼네” 하고 칭찬을 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면 “눈도 크다. 퉁사발눈이네” 하며 놀리곤 했다. 형은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심성도 착해 맞으면 맞았지 때리는 일이 없었다. 어린 나에게 양보도 잘해서 어머니의 칭찬을 받았다. 늘 모범적이어서 어른들의 편애를 받았다.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 나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하루는 외삼촌이 우리에게 참나무로 팽이를 만들어 주었다. 형이랑 주거니받거니하면서 팽이를 돌리는 게 너무 신이나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장난감이 다 있을까? 그렇게 놀고 있는데 형이 말했다. “동환아, 팽이 돌리기가 너무 재밌어서 예수님을 잊어버리겠어. 팽이를 아궁이에 넣어버려야지 안 되겠어. 예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건 모두 우상이랬어.” 그러고는 형은 아직 손때가 타지도 않은 새 팽이를 불 속에 던져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빨갛게 타들어 가는 팽이를 보면서 아깝고 속상해서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형은 명동학교에서 윤동주, 송몽규와 친하게 지내면서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받았다. 또 학교가 끝난 뒤에는 외할아버지 김하규에게 찾아가 한학도 배웠다. 하지만 그 유명한 명동학교를 다녀보지 못한 게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여덟 살 되던 해 삼촌 문학린이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의 은진중학교 국어 선생으로 오자 어머니가 나를 삼촌한테 보내 영신소학교에 입학시켰던 것이다. 국어나 산수는 3학년에 입학할 수준이었지만 일본어를 전혀 못했기 때문에 2학년으로 들어갔다.


문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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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민족운동의 요람’서 운명을 타고나다
떠돌이 목자의 노래1
 
 
한겨레  
 








 

» 나의 아버지 문재린(기린갑이·왼쪽)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고만녜·오른쪽) 권사 부부, 1951년 제주도 피난시절 모습이다.
 
 19세기가 저물어가는 1899년 2월18일 새벽 다섯 살 고만녜는 졸린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섰다. 30대 후반의 동학도이자 실학자였던 아버지 김하규의 식솔을 비롯해 김해 김씨 가문 63명은 이날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살을 여미는 바람을 뺨에 맞으며 고향 회령을 떠나 북간도로 향했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며 고만녜가 자꾸 넘어지자, 우차를 몰던 김하규는 고삐를 큰아들 진묵에게 넘겨주고, 넷째딸을 자신의 짐 위에 앉혔다. 고만녜는 “아바이, 우리 부걸라재 가면 부자가 되능겜둥?” 하며 새로운 세상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래 우리는 부자가 될 거다. 거기는 감자도 내 주먹만큼씩 크지.” 아버지의 목을 껴안고 온기를 느끼던 고만녜에게 그 말은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들렸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고만녜는 눈을 떴다. 두만강 건너편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고 있었다. 멀리 회령의 회바람벽을 한 원님 관사가 눈에 들어왔다. 고만녜의 옆에는 문씨 가문의 한 살 아래 사내아이 기린갑이가 불을 쪼이고 있었다.

이들 북간도 이주단은 종성의 두민(頭民·한 고을의 우두머리가 되는 어른)을 지낸 학자이자 기린갑이의 증조부인 문병규, 동북쪽 국경을 지킨 무인의 후손인 김약연,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 그리고 고만녜의 아버지인 회령의 김하규 등 네 가문으로 모두 141명이나 됐다.

 이들이 이날 향한 곳은 두만강변에서 50여리 떨어진, 나중에 ‘명동촌’이라 불리는 부걸라재(중국말로 비둘기 바위)였다. 그로부터 22년 뒤 그 고만녜 김신묵(1895~1990년)과 기린갑이 문재린(1896~1985년)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내가 태어났다.

명동촌의 아이들은 학교나 교회나 집에서 귀에 뿌리가 나도록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쳐지지 않는 생이란 무의미한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이순신·을지문덕 장군 등 옛 위인뿐만 아니라 청산리 전투의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애국가, 독립군 행진가를 가르쳤다. 베갯머리에도 태극기를 수놓았다. 동네에 나가서도 ‘독립군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말의 배에 딱 달라붙으면 아무도 볼 수 없고, 땅에 개미처럼 기어 십리를 간다’는 등 독립군의 영웅담을 늘 들었다.

 조국의 쇠망에 의분했던 네 명의 실학파 선비들이 북간도로 이주한 목적 중에는 이처럼 아이들을 잘 가르쳐 나라를 지킬 인재를 길러보자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만주인의 땅을 사서 돈을 낸 비례대로 나누고, 그 중 가장 좋은 땅을 갈라내어 학교 운영비를 조달할 학전으로 삼았다. 나의 할아버지 문치정은 신임이 두터워 마을의 재정을 맡았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 뒤 일본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의정부 참판 이상설은 후에 임시정부 주석이 된 이동녕 등과 함께 함께 용정에 들어와서 서전서숙을 시작해, 간도에는 신학문 바람이 불었다. 2년 뒤 4월 이상설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 밀사로 간다. 그 여파로 서전서숙이 문을 닫은데다, 서울 조정에서 신학문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김약연·김하규·남위언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세 서당을 합쳐 명동(明東)서숙을 만들었다. ‘동이족의 후예들을 밝히기 위해 일꾼을 기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그 때부터 마을 이름도 부걸라재 대신 명동촌으로 불렸다.

 교사로는 이동휘·안창호·김구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서 간도 조선족의 교육운동을 위해 파송한 정재면이 초청됐다. 그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하게 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유학자들은 주저했으나, 신학문 선생을 놓치기 싫어 이를 승낙하고, 1908년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무주임으로 하는 명동학교를 열었다. 일년 뒤 정재면은 신학문의 완성을 위해서는 부모들까지도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명동 주민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으나, 결국 모두 상투를 자르고 22살의 젊은 선생 앞에서 성경을 배우며 예배를 드렸단다. 이는 신문명을 갈망하는 선각자들의 처절한 몸짓이기도 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서구문명의 정신적 기초가 되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동만주와 한반도 동북지방 일대에 포교한 캐나다 북장로회는 평안 남북도에 포교한 미국 장로교보다 진보적이어서, 기독교는 곧 명동촌의 항일 민족주의 의식을 키우는 강력한 도구가 됐다. 명동학교는 곧 민족운동의 요람이 됐다.




그런 명동촌에서 태어나면서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규정’되었는지도 모른다. 문동환 목사, 삽화 박재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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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정론 위한 자기희생 잊지 마오
세상을 바꾼 사람들 11-5
 
 
한겨레  
 








 

» 삽화 박재동 화백
 
<한겨레>보다 늦게 창간된 어느 신문사 사람이 무슨 얘기 끝에 “한겨레는 ‘브랜드 파워’가 있다”고 한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20년이 되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때가 됐다. 브랜드라면 요샛말로 ‘명품’이라는 뜻인데, 승용차의 ‘베엠베’(BMW), 향수의 ‘샤넬’을 떠올려도 이상스러울 것이 없으며, 조악품과 싸구려의 반대말로 쓰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음속으로 한겨레에는 일반 상품에 붙이는 ‘브랜드 파워’란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겨레는 상업재가 아니고 공공재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상법상의 주식회사, 한 부에 600원, 한 달 구독료 1만5천원, 직원은 법인 한겨레신문사의 피고용자 신분, 정년 퇴직 …, 다른 신문과 한겨레의 같은 점을 들자면 16절지 한 장을 가득 메워도 모자랄 판이다.

주관적이란 비난을 무릅쓰고 단언하건대, 한겨레는 상업적 이윤 추구를 위해 출범한 것이 아니다. 인수·합병(M&A)의 귀신이 나와 비싼 값을 주고 한겨레 주식을 몰래 사 모아 경영권을 장악하는 방법, 직업 테러 분자들을 동원하여 한겨레에 물리적 타격을 가하는 방법, 교묘한 수법을 써서 한겨레 내부 분쟁을 조장하는 방법 등 시장경제 사회에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쓰든 일시적 훼손을 가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한겨레를 변질시키거나 말살하려는 기도는 실패할 것이다. 4·19 혁명과 6월 항쟁과 6·15 선언을 일궈낸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지금 한겨레를 지킬 만한 저력을 지녔다.

문제는 한겨레 종사자들이 어떻게 하느냐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특히 회사 안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봉급생활자로 설정하고 안주하는 자세야말로 경계해야 한다. 성실과 근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때로는 번뜩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고, 때로는 자기희생과 인욕(忍辱)을 감수해야 한다.

완전히 폐기된 구식 용어, ‘지사’(志士)란 말의 본디 쓰임새가 있는 곳이 바로 한겨레다. 한겨레를 영달의 발판으로 이용하고 싶은 유혹이 들거들랑 그 순간 떠나라!

한겨레 재임기간(1988~91) 나의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창간 동인들을 포함하여 한겨레에 애정을 지닌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 ‘편집인 겸 부사장’으로서 겪은 안팎의 인욕은 무수하지만 후진들에 참고가 될 듯하여 하나만 털어놓겠다. 인욕이란 말은 수동적 위치에서 취하는 언행을 통해 적극적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이므로 욕된 일을 행한 자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당시 신문 발행 여부를 소관하는 부처의 장관이 나에게 “한겨레에 외국 불순자금이 유입된 사실이 포착되어 기관에서 조사 중인 모양이니 조심해야 되겠습디다”라 말하는 거였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사극에서라면 ‘어허 별 해괴한 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하며 손에 든 부채를 한번 요란하게 펼치는 것으로 장면은 바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1930~61)에게 총련의 자금으로 신문사를 차렸다는 날조된 혐의를 씌워 1961년 박정희가 교수형에 처했던 사실이 있는 터라 나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한겨레의 몇 사람을 넥타이 공장(서대문 형무소의 교수대를 가리키는 말)에 보내겠다는 수작이구나’ 하는 공포감과 ‘공갈·협박치고는 되게 유치하다’는 생각이 엇갈리는 거였다.



 

» 임재경/언론인
 
‘불순 외국자금 유입’ 첩보를 입수했다면 수사기관의 1급 기밀사항인데 소관 장관이 피의자인 한겨레 관계자에게 발설하는 것은 상식으로 불가해한 짓이다.

이 자명한 공갈·협박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것이 문제였는데, 우선 발행인 겸 대표이사인 청암(송건호의 아호)에게 보고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나는 하룻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청암 역시 십중팔구 한겨레에 겁을 주려는 협박이라 생각하겠지만 대응 방식을 회사 공식기구에서 논의해 보자고 할 때는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적극 대응론이 고개를 들 터인즉, ‘한겨레 말살 음모를 분쇄하자’는 팻말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가는 방식이다. ‘리영희 고문 방북취재 계획’ 사건과 ‘서경원 방북 자료 압수수색’ 사건으로 피가 마르는 소모전을 했는데 또다시 소모전을 치르게 되면 신문 제작에 큰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 뻔하다. 더구나 저쪽에서 ‘불순자금 여부를 가리게 경리 자료와 주주 관련 자료를 내놓으라’ 하면 어떻게 할지 캄캄했다. 국가보안법 혐의는 그쪽에서 씌워 놓고 ‘네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입증하라’는 것이 무고한 사람 괴롭히는 상투 수법이다.

온건 대응은 알아서 기는 건데, 그것은 한겨레의 죽음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협박에 대한 강-온 대응 어느 쪽이거나 저들은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면 협박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묵살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 혹시 ‘외국의 불순자금’이 정말 들어왔으면 어쩌나 싶어 다음날 저녁 괜히 주주관리실에 들어갔다. 퇴근 준비 중인 여성 직원이 어쩐 일이냐고 물어 종이 상자에 쌓인 전산용지에 손을 얹으며 “요새 바쁘지?” 하고 그냥 나왔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협박을 묵살하자니 간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욕된 도발에 대한 묵살, 즉 ‘무대응’처럼 쉬운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무대응이야말로 내공이 필요한 인욕의 경지임을 이때 터득했다. 끝내 신문 발행 소관 장관의 협박을 묵살한 것은 재임 중 스스로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의 하나라 하겠다.


임재경/언론인

삽화 박재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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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광고차별, 그건 위법이오”
세상을 바꾼 사람들 11-4
 
 
한겨레  
 








 

» 1991년 11월 28일 저녁 열린 <한겨레> 공덕동 새 사옥 완공기념 축하연에서 내빈들이 축배를 들고 있다. 왼쪽부터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송건호 한겨레신문 사장,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박준규 국회의장,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 김대중 민주당 공동대표. <한겨레> 자료사진
 
6만여 국민이 200억원의 돈을 내 좋은 신문을 만들어 보라 했을 때는 한두 해 신나게 뚱땅거려 보라는 뜻이 아님은 한겨레신문 창간 주역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용감하게 진실을 보도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나가는 일은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해 나갔으나 밑천을 축내지 않는 일은 힘에 부쳤다. 나는 광고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떠들어 댔으나 정작 광고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몰랐다.

초창기 광고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마웠던 두 사람을 빼놓을 수 없는데, 엘지(LG)그룹의 이헌조(엘지전자 회장 역임, 은퇴)와 포항제철의 박태준(포항제철 회장, 국무총리 역임). 대학 3년 위인 이헌조는 1950년대 중반 동숭동의 중국집 진아춘에서 생전 처음 내게 배갈(고량주)을 마시게 한 선배로, “아우가 신문을 만든다니 당연히 도와야지” 하며 선뜻 광고를 주었으되 기사와 관련하여 나에게 청탁을 한 적이 없었다.

박태준은 <한국일보> 논설위원인 나와 재벌의 철강업 진출 문제를 놓고 토론하던 중 ‘영리 위주의 민간 철강업은 시기상조이며, 19세기 말 독일의 경험으로 보아 재벌의 철강업은 남북관계 등 외교 분야의 위험 요인’이라고 하자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인연에다 박태준은 70년대 경제부 기자로서 정태기(한겨레 사장 역임)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들었다. 또 정태기와 고교·대학 동창인 이대공(포항제철 부사장 역임,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이 움직여 포항제철의 광고는 아주 초기부터 들어왔다. 그들 쪽에서 켕기는 구석이 있어 광고를 준 것 아니냐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대기업과 국영기업들이 왜 우리에게 그토록 매정하고 적대적이었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안기부의 노골적인 광고수주 방해 공작이 활개를 치던 때의 일임을 새겨들어야 한다.

광고담당 이사 이병주(동아투위 위원장, 한겨레 상무 역임)는 이따금 내게 와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전국 모든 일간지에 게재하는 공익광고를 유독 한겨레만 빼놓는다는 거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축하자”는 광고였는데, 경제기획원 소관이다. 울화가 치밀어 최학래 당시 경제부장(한겨레 사장 역임)을 앞세우고 국무회의에 참석 중인 조순(서울대 상대 학장,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역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만나러 광화문 종합청사로 갔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만난 그는 내 항의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앞으로 시정하겠다는 약속조차 하지 않는 그에게 “귀하는 지금 예산회계법의 차별 금지 조항을 위반하고 있소”라는 말을 내뱉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런 조순이 2005년엔가 한겨레 필진으로 위촉됐다는 기사를 읽고 15, 6년 전의 일이 떠올라 이번에는 한겨레의 사장, 논설주간, 편집국장과 만난 자리에서 악을 썼다. “조순은 그때의 위법 처사에 유감을 표명해야 하고 원고료는 발전기금으로 내놔야 한다”고.

자본금을 매일 까먹는 처지에 비상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엘지를 제외한 삼성·현대·대우 등은 이른바 ‘재벌 총수’와 접촉하지 않고는 광고 수주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인데, 창간 초기 한겨레 간부들 가운데 그들과 연줄이 닿는 사람이 없었다. ‘전경련’ 회장직과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하였으며 북한을 방문해 경제교류를 타진하고 있던 현대의 정주영을 나는 타깃으로 잡았다. 여당 원내총무 이종찬(국정원장 역임)에게 전화를 걸어 정 회장의 아들 정몽준 의원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며칠 뒤 63빌딩의 일식집에서 만나자는 응답이 왔다. ‘한겨레는 정주영 회장의 남북교류 노력을 평가한다. 송건호 사장이 정 회장을 만나고자 하니 노력해 달라’고 하자 정몽준은 ‘그 문제는 여기서 답할 수 없고 아버지를 만나 타진해 보겠다’는 미지근한 반응. 그러나 후속 반응은 의외로 빨라 며칠 뒤 연락이 왔는데, “모레 아침 7시 계동 사옥으로 수행자 없이 사장님만 나오시되 보안을 유지해 주시오”라는 거였다. 이런 일이 처음인 청암은 떨떠름해하며 정 회장에게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지 나에게 물었다. ‘절대 광고 문제를 먼저 꺼내지 마세요.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광고 이야기는 안 해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밝은 표정으로 돌아온 청암이 전하길, 방에 들어서자마자 정 회장이 나를 껴안으며 ‘고생이 얼마나 많으시오. 우리 함께 평양에 갑시다’라 하더란다. 송-정 회동의 공개가 한겨레의 이미지에 미칠 파장과 기자들의 사기에 끼칠 영향에 신경이 쓰여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신홍범과 성유보의 의향을 물었다. 둘 다 숨길 것 없이 공개하라고 했다. 아무튼 창간 초기 내가 해낸 최대 악역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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