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CTS 혁명’ 염탐온 뜻밖의 손님
세상을 바꾼 사람들②
 
 
한겨레  
 








 

» 50억원의 최소 자본금으로 한겨레신문사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국내 첫 컴퓨터조판시스템(CTS)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편집 기술이었던 까닭에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1988년 5월14일 외신들이 창간호 제작과정을 취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창간을 축하하기 위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영등포 변두리 뚝방촌까지 찾아온 손님들은 일일이 거명할 나위도 없이 민주화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분들이다. 반면 당연히 올 것으로 믿었던 몇 분은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한때 해직기자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천관우(<조선일보> 편집국장과 <동아일보> 주필 역임)와 그 자신이 80년 해직 언론인이며 나를 포함한 <한겨레> 주축 멤버들과 교분을 나누던 박권상(<동아일보> 논설주간과 KBS 사장 역임)이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못내 섭섭했다. 예외라면 일흔 가까운 노령의 이열모(이승만 정권 시절 재무부 이재국장을 역임했고 관계를 물러난 이후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와 언론계 출신의 남재희(<조선일보> 정치부장-논설위원, <서울신문> 편집국장-주필 역임한 3선 의원)다. 남재희는 송건호 사장과 충북 동향이며 나와는 조선일보 시절 형 아우 하며 아주 가깝게 지냈다. 1980년 여름 전두환의 계엄사 요원들에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열흘 동안 취조를 받고 서울 구치소로 넘어가 석 달 만에 풀려났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추석 전날이었다. 그는 내 가족을 위로하려고 내 집에 와 있었다. 사소한 의리 같지만 사촌과 동서가 전화를 하지 않는 삼엄한 시기였다.

창간하는 날 매스컴 동업자들을 부르지 않았다. 경황이 없어서 그랬으려니와 그들에 대한 반감으로 인하여 간부들 가운데 누구도 매스컴 동업자 초대를 입에 담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창간 모금을 준비하는 시점부터 홍보물을 통해 그쪽을 치고 나갔으며 특히 창간 이후에는 보도와 논평에서 거대 매체 간부들의 실명을 들어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신문협회와 편집인협회가 보이콧 대상이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판에 아주 예상치 못한 손님이 양평동을 찾아왔다.

창간 몇 달 뒤의 일. <중앙일보>의 김동익 사장(<조선> 정치부 기자를 거쳐 <중앙> 편집국장-주필, 노태우 정부의 정무장관 역임)으로부터 양평동 사옥을 방문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김동익은 나와 <조선>의 견습기자 동기일 뿐 아니라 20대 총각 시절 경찰 출입을 하며 사창가를 같이 헤매던 허물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80년대 초 언젠가 낭인이던 내가 그의 사무실(삼성 비서실)을 찾아갔을 때 마침 부재중이라 연락을 바란다는 말을 남겼으나 종내 응답이 없어 만나기를 꺼린다는 감을 잡았고 그 뒤 몇 해 동안 대면한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의 전화를 받는 순간 쓰라린 기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반갑다는 생각에다 어깨가 으쓱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네가 나를 이제는 파리아(pariah, 인도의 4개 종성 가운데 최하의 천민계급)로 취급하지 않는구나. <한겨레>도 당당한 신문이 됐구나’ 하는 일종의 자만심이었다. 정태기 인쇄인 겸 상무이사에게 김동익의 내방 이야기를 꺼냈더니 “우리 시티에스(CTS) 조판 시스템을 염탐하려는 것이니 그리 알아 두십시오”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설마 했지만 창간 축하를 할 의향이라면 먼저 점심이나 저녁을 하자고 하는 것이 순서인데, 아니나 다를까 양평동 사옥 내 사무실에 온 그는 차 한잔 마시는 둥 마는 둥 곧 인쇄시설과 조판실을 돌아보고 싶다는 거였다. 정태기의 말은 들어맞았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아이티(IT) 왕국의 <중앙>이 가로쓰기와 컴퓨터 조판 시스템의 전면 도입을 실시한다는 사고를 냈다.



 

» 언론인 임재경
 
보도와 논평, 그리고 신문 지면의 레이아웃이라면 할 말이 많으나 신문의 조판과 인쇄 분야에는 백지나 다름없는 내가 <한겨레>의 20년 전을 회상하며 초장부터 시티에스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신문의 물질적 기반 혹은 물적 토대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전하는 기능과 목적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으나 근대적 의미의 신문과 삐라(전단)는 근본에서 성격과 조건이 다르다. 우리 사회와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보도하며 그 현상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문제들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연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신문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대중에게 하루도 쉬지 않고 새소식과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인쇄기구가 불가결의 도구인데 그것은 막대한 자금이 든다. 이 땅의 정치를 쥐락펴락하고 소비 양식을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는 이른바 ‘조중동’이 일제하의 최대 지주, 최고의 금광 부호, 그리고 해방 이후 최대 제조업 재벌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새 신문을 만들려는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언론인 임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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