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이래 파란과 질곡의 한국 현대사 속에는 저마다 뜻과 열정을 다 해 더 나은 세상, 더 바른 삶의 길을 찾아온 ‘큰 인물’들이 유난히 많다. 식민의 핍박과 설움, 전쟁의 상흔과 이산의 아픔, 가난과 독재, 이념 갈등과 남북대립, 산업화와 민주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고비고비를 헤쳐오며 한 평생 묵묵히, 그러나 치열하게 진보를 향해, 열린 세상을 위해, 한 길을 걸어온 각 분야 원로들의 회고담을 <한겨레> 창간 20돌 특집으로 연재한다.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그들의 얘기 속에서 삶의 지혜와 다음 세대의 길을 함께 찾아갈 것을 기대한다.
1988년 5월15일 영등포 오목교 근처 양평동, 바라크(막사) 사옥의 낡은 윤전기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한겨레신문>을 한 아름 안아들고 2층의 편집국으로 단숨에 뛰어 올라가 거기 모인 창간 축하 손님들에게 신문 한 부씩을 나누어 주던 그 순간은 종생 잊지 못한다. 그때 내 나이 52살, 직책은 편집인 겸 논설주간, 여생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그 순간은 내 삶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칠십 줄에 들어선 지금 그때 거기서의 감격을 되풀이 읊조리는 것은 아무래도 쑥쓰럽다.
36년생인 나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61년 봄 <조선일보> 견습기자로 출발하여 80년 7월 전두환 일당이 날조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과도 내각 명단에 이름이 들어 있다는 구실로 <한국일보> 논설위원직을 파면당하고 나서 햇수로 8년 동안 취업 불가 딱지가 붙은 ‘더러운’ 세월을 보냈다.
기실 직업인으로서의 기자는 일반적으로 큰일을 꾸미고 성취하는 인간형과는 거리가 멀다. 치밀한 계산, 확고한 결의 그리고 끈질긴 노력, 세 가지가 다 모자라는데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믿는다. 분단된 서독의 정치가 가운데서 좌우를 막론하고 식자층의 폭넓은 신뢰를 받았던 사민당(SPD) 출신의 총리 헬무트 슈미트의 ‘일꾼’(Macher)과는 생판 다른 것이 신문기자다. 아무튼 그런 내가 <한겨레>와 같은 아주 색다른 성격의 신문을 만들어 내는 어려운 일에 몰입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펜대를 굴리는 사람’, 더 솔직하게는 ‘다른 사람보다 글 잘 쓰는 능력자’쯤으로 자신을 설정하였던 게 사실이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차려 놓은 밥상을 앞에 놓고 음식 맛을 탓하는 나쁜 뜻의 서생 꼴이라면 어떨지 모르겠다.
편집 노선과 경영방식이 기존 신문과 전혀 다른 신문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6월 항쟁이라는 시대적 기운에 등을 떠밀린 결과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모든 기사에 “내라, 말라”, “제목의 크기는 1단, 2단” 하는 식으로 언론에 ‘보도지침’을 내려 사전 검열을 행하는 현실을 온 국민이 알아차린 이상 새로운 신문의 출현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단지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드느냐는 것만이 문제였다.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기존 신문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분노를 폭발시킨 대표적 사례다. 이 와중에서 ‘5·3인천사태’로 투옥 중이던 이부영(75년 <동아일보> 해직, 민통련 사무처장, 3선 국회의원)이 교도소 안에서 특종을 발굴한 기막힌 사연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취재 목적으로 거기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의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참지 못하는 것이 기자의 혼이다.
75년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언론인들, 그리고 80년 전두환 일당에 의하여 해직당한 언론인들이 주축이 되어 창설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장 송건호, 초대 사무처장 성유보, 약칭 ‘언협’, 현재 맹활약 중인 민언련의 전신)가 지하 기관지인 <말>을 통해 보도지침의 내용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로 인하여 언협 2대 사무처장 김태홍(80년 <합동통신> 해직, <한겨레> 이사·판매국장, 17대 국회 보건복지위원장)과 언협의 실행위원 신홍범(75년 <조선일보> 해직, <한겨레> 제2대 논설주간)이 구속되어 6월 항쟁 전후 2~3개월 동안 법정투쟁을 벌였다. 이는 필리핀에 이어 한국에서도 ‘민중의 힘’(피플 파워)이 나타날 것을 예견한 외국 기자들에게 서울에 와서 빼놓을 수 없는 취재 대상이었다. 그러니 만큼 새 신문을 만드는 짐을 해직기자들이 걸머지는 것은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시대의 소명이었다.
다음은 ‘언제’ ‘어떻게’인데 두 가지 다 신문을 만드는 데 드는 자금을 조성하는 일과 직결되는 것이므로 해직기자들은 이런저런 전망을 입에 담을 뿐 확실한 안을 내지 못했다. 그 때 존재감을 뚜렷이 나타낸 것이 정태기(1975년 <조선일보> 해직, <한겨레> 상무이사와 12대 대표이사)다. 국민모금과 컴퓨터 조판이라는 아이디어를 내고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창의와 추진력 덕분이다. 뛰어난 존재는 경탄과 동시에 시기의 표적이 되는 법이다.
정태기는 <조선> 해직 이후 생계의 방편으로 몇 갈래의 비즈니스 판을 돌았는데 그 마지막 기회가 조그마한 컴퓨터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밑천 삼아 납으로 된 활자를 집조(문선·조판)하는 과정을 없애고 컴퓨터로 대신하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한겨레> 창간을 통해 실천하는 데 성공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냐, 아니면 ‘도달’한 것이냐를 두고 역사가들 사이에 분분한 논의가 있다지만 어떤 용어를 쓰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87년 가을 납으로 된 활자를 쓰지 않고 신문을 만들기로 한 것은 최소한의 돈으로 새 신문을 만들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필요에 직면한 우리에게는 절호의 돌파구였다. 즉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임재경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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