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파리서 포도주도 못마신 촌놈
세상을 바꾼 사람들 6-1
 
 
한겨레  
 








 

» 파리 몽파르나스 거리에 있는 카페 르 로통드의 최근 모습. 레닌과 트로츠키가 자주 드나들어 유명한 이 카페는 필자가 기숙했던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5분 거리에 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프랑스와 파리에 관해 글을 쓰거나 책을 내는 것은 승률이 아주 낮은 도박이다. 혁명가 마르크스와 레닌, 문인 하인리히 하이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미술가 피카소와 이응노 ….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압제와 불의에 시달리는 전세계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숨막히는 자신의 현실로부터 뛰쳐나오려 파리로 파리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거기서 짓무르고 있는 부르조아 문명에 환멸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이런 앞사람들의 체험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 변혁과 문학·예술 창작을 꿈꾸는 사람들 발길이 끊임없이 파리로 이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중국 사회주의 운동의 제1세대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도 1920년 5·4운동 직후 파리로 갔으니까.

프랑스의 정치, 사회, 문화와 파리지앵의 일상을 다룬 책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세계를 통틀어 줄잡아 수천 가지에 이를 것이다. 또 이즈음의 홈리스 즉, 최하층민의 처참한 하루하루를 그린 기록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읽은 것 가운데는 소설 <1984>로 문명을 드날린 조지 오웰의 책 <다운 앤 아웃 오브 파리스 앤 런던>(1933)이 단연 압권이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것 중에서는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의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빼놓을 수 없는데, 둘 다 외국인으로서 파리에서 노동하며 먹고살았기 때문에 생산할 수 있었던 기록문학이다. 몇 해씩 아니 10년 이상 파리에 머문 한국의 수많은 프랑스 유학생들이 이런 책을 쓰지 못하는 것은 일상생활과 노동이 유리되었던 까닭이라 생각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처럼 돈 없는 파리는 글자 그대로 지옥이다. 37년 전의 나의 파리를 말하면서 무슨 돈으로 거기를 가 지낼 수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도 그런 연유다.

프랑스 외무성이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이전 식민지, 특히 그 가운데서 프랑스어를 제1외국어로 하는 나라를 친불(親佛)로 잡아 두려는 직업훈련 및 장학 프로그램이 한국까지 넓혀져 나도 거기 응모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어-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이 장학금의 주 선발 대상이었고, 그런 이유로 한국외국어대학에 가서 어학 능력 테스트를 받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프랑스 대사관에 가서 프랑스어로 인터뷰를 해야 했다. 그런데 한달 장학금은 고작 900프랑(당시 환율로 약 180달러)!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학생들만이 굶주리지 않고 견딜 정도에 불과했다. 파리에서 천장 밑 방이나마 빌리려면 턱없이 모자라는 판이라 김성곤이 설립한 ‘성곡언론재단’에 지원금을 신청하여 월 350달러씩을 받았다. 합계 530달러, ‘날라리’들에게는 샹젤리제 고급 음식점에 가면 하루 저녁 술값으로도 모자라는 액수지만 유학생들에게는 꽤 넉넉한 생활비였다.



 

» 임재경/언론인
 
외무성 초청기관을 방문한 첫날, 프랑스어 교습기관인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기숙사에서 3개월을 보내고 싶다고 한즉 경력 10년의 기자가 프랑스어 학습에 열의를 지녔다고 보았는지 담당 여직원은 매우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한국의 1월 기후는 어떤가를 물었다. ‘여기(파리)보다 훨씬 춥고 거리는 빙판’이라 했더니 방한용 피복이 필요할 것이라며 액면 500프랑의 국고 수표를 떼어주는 거였다. 어? 이 프랑스 여성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건가 하며 은행에 가서 현금으로 바꾸었다. 며칠 뒤 한국 유학생을 만나 피복비 500프랑 이야기를 꺼냈더니 아프리카에서 오는 장학생이 많아 피복비는 말만하면 500프랑 한도로 다 주게 돼 있다는 설명이다.

라스파이유 거리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몽파르나스 거리의 카페, ‘로통드’와 ‘돔’이 걸어서 5분 거리다. 그러나 친불 데카당이었던 나는 정작 파리에 와서 지척에 둔 그곳에서 포도주 한 잔 마셔보지 못하는 촌놈이 되고 말았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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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악몽의 정권’서 벗들은 떠났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5-5
 
 
한겨레  
 








 

» 1964년 6월3일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한일회담 반대 시위대를 진압했다. 당시 시위에 앞장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6·3세대’는 이후 유신독재 타도 투쟁의 전면에 서게 된다.
 

외근 기자로서 제법 발이 넓어지면서 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친구들을 돕는 일에 곧잘 나섰다. 별 볼일 없던 문청이 성공한 직업인으로 변신하였으니 어깨가 으쓱해진 것은 당연하다. 한번은 광화문 부근 어느 술집에서 대학 다닐 때 스승인 송욱(시인·서울대 영문과 교수·작고)과 동석한 그의 친구 한만년(일조각 사장·작고)을 마주쳤다.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은 완연하데 생뚱맞은 질문을 이따금 해대는 나를 송욱은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던 터다. 이러던 그가 한만년에게 “임재경은 우리나라 경제기자 중에서 이거야”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세워 보이는 게 아닌가. 한때 이 나라 최고의 지성으로 자처했고 까다로운 성깔로 유명한 송욱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너무나 좋았다. 이런 데 입맛을 들이면 대저 멀쩡한 사람도 결국은 속물이 되고 마는 법이다.

하지만 만만찮은 게 세상사다. 내가 신문에 발을 들인 지 4~5년 뒤부터 무서운 박정희 권력에 맞서 데모를 하다 유치장에 드나들던 패들이 수습기자 시험을 거쳐 속속 언론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터놓고 말해 선배들에게는 하나도 꿀릴 것이 없다고 자부했으나 나보다 아래 나이의 그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단순하게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해묵은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몸에 지니고 있는 행동력이 나에겐 결여되었다는 자의식에 짓눌렸던 것이다. 그들보다 더 능숙하게 기사를 쓴다는 게 무엇이 대단한가, 영어나 프랑스어를 몇 마디 더 아는 것이 과연 잘난 것인가, 그들은 박봉에 시달리는데 나는 용돈에 군색함을 모르고 원하기만 하면 하루거리로 기생집에 드나들 수 있지 않은가 …. 그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한-일 협정 반대데모(통칭 63사태) 세대 가운데서 <조선일보> 입사순으로 꼽자면 박범진(조선일보 해직기자·15대 국회의원), 김학준(서울대 교수·현 동아일보 회장), 송진혁(중앙일보 정치부장·논설주간), 백기범(조선일보 해직기자·문화일보 편집국장), 그리고 <한겨레>의 창간 멤버인 신홍범과 정태기가 곧 그들이다. 60년대에는 서로 어울릴 기회가 없었지만 훗날 자유언론의 깃발을 높이 든 동아일보 해직기자의 상징적 두 인물, 이부영과 성유보가 바로 63세대에 속한다.



 

» 임재경/언론인
 
박정희의 3선 개헌 전후하여 리영희는 중앙정보부의 압력 때문에 외신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찬밥 신세를 지다 조선일보를 아예 그만두었다. 남재희는 총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전국의 민심을 밑바닥에서 훑어보는 연속 기획물을 만들다 공화당의 미움을 사 정치부장직에서 논설위원으로 밀려나갔다. 얼마 뒤 그는 하버드대 ‘니먼 펠로십’을 따서 미국으로 떠났는데, 그 다음 해에는 백낙청이 박사학위 논문 제출차 하버드로 갔다. 오랜 친구 김상기는 한참 전 <청맥>에서 일한 사실이 동티가 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호되게 당한 뒤 미국 뉴욕주의 버펄로대로 유학을 떠났다.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지식인에게 재갈 물리는 효과를 노린 이른바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 사건’이 발표되었다. 언론계·학계·예술계가 공포의 악몽에 시달린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데 이 사건에는 대학과 문청 시절 가까이 지내던 친구 여럿이 연루되었던 것이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의 그들은 대체로 낭만적 기질의 자유주의자들인데 어떤 연유로 평양을 왕래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프랑스 영화와 샹송에 나를 흠뻑 빠지게 만든 데카당의 ‘본당 마귀’ 이기양(조선일보 유럽통신원·독일 튀빙겐대학 철학박사)이 프라하에 세계 여자농구대회 취재차 들어갔다가 행방불명이 된 것 역시 이 무렵이다.

가까운 친구들이 외국에 나간 것이 나의 프랑스행을 촉진했지만 내심 68년 학생혁명이 휩쓴 구미 여러 나라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1971년 1월) 환송 술자리에서 남재희는 “다른 것은 다 제쳐 놓고 ‘조합’(신디케이트)에서 몸을 뺀 용기는 대단해”라 했다. 나는 이 말이 싫지 않았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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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텃세 조선일보’서 빛난 이단아들
세상을 바꾼 사람들 5-3
 
 
한겨레  
 








 

» 임재경/언론인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텃세라는 것이 있고 텃세가 심하기로 말하면 농촌의 자연부락이 단연 으뜸이다. 외지 도시인이 초록색 꿈을 안고 고향이 아닌 농촌에 갔다가 한두 해 만에 논밭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되돌아서는 이유가 텃세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먹물로 사는 신문이 텃세가 심한 곳이라면 곧이 믿어줄까? 신문사 가운데도 오래된 신문이 텃세가 심한 편인데 이를테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한국일보>보다 훨씬 심했다. 창간 20년이 지난 <한겨레>에 텃세가 없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사오십 년 전과는 달리 이즈음의 신문사 텃세는 수습기자 제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도 곰곰이 짚어 보았다. 앞에서 말한 기자단만이 아니라 신문사 내부의 텃세는 언론 신디케이트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신문사 텃세 이야기는 1960년대의 조선일보 시절을 더듬으며 나의 기자 성장에 보탬을 준 리영희와 남재희의 처지를 말하려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신문사의 텃세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오랜 노예적 근성과 무관치 않다. 주인의 눈밖에만 나지 않으면 밥과 잠자리는 일단 확보되고 숨을 거둔 뒤에는 땅에 묻어주는 ‘은혜’를 주인으로부터 입는다고 믿는 것이 중세와 고대의 노예다. 신문사의 피고용자들을 전근대적 노예 신분과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치지만 고참들은 외딴곳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거나 사주(社主)를 비난하다가도 기사를 쓰거나 편집방향을 정하는 일에서는 관행-즉 사주의 이해관계를 최우선 지표로 삼는 의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신출내기 기자가 이런 언행 불일치를 따지고 들면 그들은 “이 사람아! 기자는 지사(志士)가 아니란 말이야. 우리는 월급쟁이일 뿐이야!”라고 즉각 자조적인 응답을 내뱉었다. 그럼으로 리영희와 남재희처럼 능력이 돋보여 다른 매체에서 발탁된 기자는 토박이들로부터 질시와 모함을 받는 것은 정한 이치다. 리-남 두 기자는 조선일보 편집국 주류의 기성 질서를 흔든 이단아였다.

65년 초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된 김경환(<한국일보> 편집국장, 신문연구원 원장, 1988년 작고)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내세울 학력이 없는데다 취재부서의 데스크를 거치지 않은 순수 편집기자 출신이고, 더구나 나이가 상대적으로 젊은 편이었다. 이런 그가 정치부장에 남재희, 외신부장에 리영희를 앉힌 것은 변화를 바라지 않는 쪽에서 텃세 부리기에 꼭 알맞은 조건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김경환·남재희·리영희가 신문을 만들 때가 해방 뒤 조선일보의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곱 살 위 리영희와 세 살 위 남재희의 어떤 면에 나는 끌렸던 것일까.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히지 않았으니 불가에서 말하는 전생의 인연이랄밖에 없다. 둘 다 술을 좋아했지만 문청의 술타령 스타일과는 전혀 달랐고, 독서 경향 역시 나와는 판이하다. 사회정의에 민감한 체질, 앞서 가는 시대감각, 그리고 뛰어난 필력이 둘의 공통점이다. 그들이 영어를 잘했다는 것이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겠다.

실토하거니와 조선일보 수습기자 3기인 나는 ‘비주류’로 분류되는 리영희-남재희와 친히 지내면서도 한 발은 ‘주류’ 쪽에 담그고 있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기사를 써제끼는 기자를 신문사의 주인은 우선 알아주는 법이다. 한국일보 사주이자 부총리인 장기영을 난처하게 하는 기사를 나는 수없이 썼는데 한번은 화가 치민 부총리가 기자회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방우영 사장(현 회장)은 67년 내가 불광동의 열 평짜리 국민주택을 마련할 때 6개월치 봉급을 선불해주는 파격적 호의를 베풀었다.

최석채(조선일보 편집국장·주필, 문화방송 회장, 작고)는 나를 몹시 귀여워하여 4~5년차 기자인 내게 경제 해설을 써 보내면 자기가 손을 보아 사설로 싣겠다고 했다. 또 같은 무렵 선우휘(소설가, 조선일보 편집국장·주필, 작고), 남재희, 손세일(조선일보 기획위원, 동아일보 논설위원, 평민당 원내 총무), 나 넷이 죽이 맞아 자주 술판을 벌였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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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기자로서 ‘삼십이립’은 교우들 덕
세상을 바꾼 사람들 ⑤
 
 
한겨레  
 








 
공자 말씀 가운데서 가장 널리 회자하는 경구를 찾자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삼십이립’이다. 나이 서른에 이르러 비로소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서게 된다는 뜻이다. 신문기자의 삼십이립은 어떤 것일까. 이름 석 자 세상에 알려진 덕에 가까운 사람들 취직 부탁 해결해 주며 공술 얻어 마시는 것이라 하면 너무나 자학적인 이야기라 할 테지만 대체로 1960년대의 서른 살 기자는 그 비슷한 재미를 빼놓고는 크게 내놓을 것이 없었다. 한편 기자직을 거쳐 입신양명한 인사들의 서른 살은 그런 재미는 재미대로 즐기면서 유력층에 줄을 대는 대담성·저돌성을 발휘했다. 마안하지만 뻔뻔스러움이라 해야 알맞겠다.

그러나 스물여덟이나 스물아홉에 이르러 돌연히 삼십이립을 향해 몽우리를 짓는다고 하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다. 태어난 조건, 유년기의 가정환경, 각급 학교의 교육, 사회에 나와 부대끼는 가운데 몸에 밴 세계관과 인생관이 두루 기여한다고 보면 크게 그르지 않을 줄 안다. 인간의 생리 구조나 수명을 고려할 때 삼십이립이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알맞은 시기다. 하지만 사람 따라 스무살, 혹은 마흔에 신념을 세울 수도 있으며, 육십이립이라고 하여 나쁘게 말하거나 비웃는 것은 잘못이다. 이를테면 조심조심 교편생활을 하다가 65살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사회운동에 몸을 던진 분들이 지금 얼마나 귀중한 몫을 하고 있는가.

십년 전쯤 오연호(<오마이뉴스> 대표)가 <말> 취재부장을 하고 있을 적 기자 여럿과 함께 좋은 이야기를 듣자며 자리를 마련했다. 모임이 파하기 직전 오연호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자유언론과 민주화 운동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라는 거였다. 동기를 꼭 하나로 찍어서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장황한 답변을 늘어놓을 계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선배 기자의 순발력을 한번 시험해 보고자 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글쎄, 무어라 할까. 내게는 교우관계가 제일 큰 영향을 준 것 같은데” 하면서 거기 모였던 기자들이 모두 알 만한 이름을 두셋 댔더니 그들은 만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우관계라면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할까? 소꿉동무, 초등학교, 중·고교, 대학, 문청(문학청년) 시절 헤매고 다니던 명동, 신문기자 초년 …? 70줄에 와서는 애증과 은원 감정이 교차하긴 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에 사귄 친구들은 모두 소중하다. 오연호 일당에게 댄 이름은 리영희·남재희·백낙청 셋이었다. 셋 가운데서 가장 일찍 사귄 사람이 백낙청이고, 그보다 조금 뒤 두 사람을 60년대 초 조선일보사에서 만났다.



 

» 언론인 임재경
 
백낙청을 나에게 소개한 사람은 그와 서울 재동초등학교 적 동무 김상기다. 50년 전의 철학도 김상기는 우리 또래 가운데서 일본말로 된 책을 술술 읽을 수 있는 대단한 독서가였다. 뛰어난 친화력과 화술에다 근면·성실·청결한 몸가짐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학·석사 논문은 독일의 하이데거를 썼다. 지금 여기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려우나 정치와 사회를 보는 시각은 매우 진보적이었고 나는 그의 그런 면에 끌렸다.

나는 대학에서 영문과에 적을 두었으나 학업을 게을리한데다 프랑스 문학에 심취한 ‘데카당 문청’이었다면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책읽기보다는 서양 고전음악, 그리고 프랑스 영화와 샹송이 비할 데 없이 좋았다. 얼마 전에 읽은 라틴아메리카의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Vivir para contarla)를 보면서 학업을 팽개친 다음 신문에 잡문을 쓴답시고 카페를 전전하는 아들(마르케스)의 마음을 다잡고자 어머니가 애절하게 호소하는 장면에서 몹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20대 초에 데카당 문청 행각은 비슷했는지 몰라도 그는 불멸의 작품을 남겼으니 나와는 너무나 다르다.


언론인 임재경
그림 박재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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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비판기사’ 맞바꾼 67년 삼성광고
세상을 바꾼 사람들 ④-3
 
 
한겨레  
 








 

» 1967년 2월7일자 조선일보 1면에 게재된 제일제당 광고.
 
이튿날 아침 정작 악 소리를 지른 것은 그들(한국비료 화입식에 참석했던 기자들, 내외 귀빈, 삼성 관계자)이 아니라 나였다. 작심을 하고 쓴 기사가 실리지 않았던 거였다. 지면 사정 때문에 다음날로 밀린 모양이구나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기사를 깔아뭉갠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 그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부자리에 앉은 채 신문을 폈다. 어느 면에도 내가 보낸 기사는 없었다. 신문을 팽개치는 순간 마지막 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삼성 계열인 제일제당의 기업 이미지 전면광고였다. 기사가 통째로 빠지고 다른 신문에 나지 않는 전면광고가 실린 이상 더 할 말이 있을까.

신문사 편집국에 와서 내가 책상 앞에 앉은 한참 뒤까지 경제부 데스크는 나에게 눈길을 던지지 않았다. 그의 입장이 심히 난처하다는 것은 알고도 남음이 있지만 끝내 그는 입을 다물었다. 경제부에 배치되고 나서 기사와 광고 수주의 충돌로 인하여 크고 작은 불만이 쌓였으나 이번은 다르다. 삼성의 한국비료 헌납 백지화 움직임을 세상에 알리는 내 기사를 삼성이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것이 최대의 의문이었다. 편집국 간부 가운데 누가? 경제부의 어느 기자가? 아니면 편집부, 심지어 교정부의 누가? 기사를 보낸 날 저녁 시간, 기사의 흐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차례로 뇌리를 스쳤다. 기사 내용을 삼성에 제보했다면 이것은 광고 수주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저열하고 파렴치한 스파이 행위에 해당하는 짓이다. 삼성의 정보망 촉수가 광범위하게 뻗어 있음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야간에 다른 신문사의 편집과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날 오후 신문사의 고위 간부가 내 어깨를 아무 말 없이 도닥였다. 노고를 치하한다는 몸짓으로 느꼈다.

3선 개헌을 앞두고 중앙정보부 요원이 편집국에 무시로 드나들긴 했으나 경제기사에는 개입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렇다면 유독 나의 취재 활동에 정보부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뜻인데 중앙정보부는 무슨 수로 내 기사 내용을 알았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의문은 정말 우연치 않게,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89년 봄, <한겨레> 창간 초기 영국대사관이 주최한 가든파티에서 비록 부분적이나마 풀렸다. 40대 말 50대 초의 말쑥한 차림을 한 신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기업하는 사람이거나 외국 근무를 오래 한 사람처럼 보였다. “임재경 선생이시죠? 제가 20년 전에 저지른 잘못을 사과할 것이 있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그는 지금 남자 기성복 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60년대 중반 한국비료 건설 업무로 경제기획원을 드나들던 실무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놀라운 것은 한국비료 화입식 준비를 맡았던 그가 동래 온천장 호텔에서는 교환실에 배치되어 기자들의 송고 내용을 일일이 파악한 뒤 서울의 삼성 본부에 알리는 일을 했다는 거였다. 교환양들을 매수하여 도청했다는 이야기인데 그와 삼성 내부의 몇 사람만 아는 범죄 사실을 비록 20년이 흘렀지만 뒤늦게나마 고백하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명함을 나누고 나서 “20년 전의 일인데, 사과는 무슨 사과입니까” 하며 시간 나는 대로 만나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말을 남기고 그와 헤어졌다.



 

» 언론인 임재경
 
하지만 20년 전 그때 기사 내용을 파악한 삼성의 누가 <조선일보> 누구에게 연락하여 어떤 흥정을 한 끝에 기사를 싣지 않는 대가로 광고를 싣기로 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20년 전 한국비료 직원이며 현직 기성복 회사 경영자, 코드 네임 ‘용기 있는 사나이’와는 얼마 뒤 점심을 나누었다. 피차 회사 초창기의 어려움을 실토하는 수인사를 나누고 나서 난생처음 느끼는 괴로운 청탁의 말을 꺼냈다. “어려우시겠지만 <한겨레>에 광고를 줄 수 있겠습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쾌락했다. 그는 5단 통광고를 우리에게 주었다. 여기서 용기 있는 사나이의 실명을 적지 못하는 것은 삼성이 그에게 앙심을 발동하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언론인 임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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