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악몽의 정권’서 벗들은 떠났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5-5
 
 
한겨레  
 








 

» 1964년 6월3일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한일회담 반대 시위대를 진압했다. 당시 시위에 앞장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6·3세대’는 이후 유신독재 타도 투쟁의 전면에 서게 된다.
 

외근 기자로서 제법 발이 넓어지면서 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친구들을 돕는 일에 곧잘 나섰다. 별 볼일 없던 문청이 성공한 직업인으로 변신하였으니 어깨가 으쓱해진 것은 당연하다. 한번은 광화문 부근 어느 술집에서 대학 다닐 때 스승인 송욱(시인·서울대 영문과 교수·작고)과 동석한 그의 친구 한만년(일조각 사장·작고)을 마주쳤다.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은 완연하데 생뚱맞은 질문을 이따금 해대는 나를 송욱은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던 터다. 이러던 그가 한만년에게 “임재경은 우리나라 경제기자 중에서 이거야”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세워 보이는 게 아닌가. 한때 이 나라 최고의 지성으로 자처했고 까다로운 성깔로 유명한 송욱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너무나 좋았다. 이런 데 입맛을 들이면 대저 멀쩡한 사람도 결국은 속물이 되고 마는 법이다.

하지만 만만찮은 게 세상사다. 내가 신문에 발을 들인 지 4~5년 뒤부터 무서운 박정희 권력에 맞서 데모를 하다 유치장에 드나들던 패들이 수습기자 시험을 거쳐 속속 언론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터놓고 말해 선배들에게는 하나도 꿀릴 것이 없다고 자부했으나 나보다 아래 나이의 그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단순하게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해묵은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몸에 지니고 있는 행동력이 나에겐 결여되었다는 자의식에 짓눌렸던 것이다. 그들보다 더 능숙하게 기사를 쓴다는 게 무엇이 대단한가, 영어나 프랑스어를 몇 마디 더 아는 것이 과연 잘난 것인가, 그들은 박봉에 시달리는데 나는 용돈에 군색함을 모르고 원하기만 하면 하루거리로 기생집에 드나들 수 있지 않은가 …. 그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한-일 협정 반대데모(통칭 63사태) 세대 가운데서 <조선일보> 입사순으로 꼽자면 박범진(조선일보 해직기자·15대 국회의원), 김학준(서울대 교수·현 동아일보 회장), 송진혁(중앙일보 정치부장·논설주간), 백기범(조선일보 해직기자·문화일보 편집국장), 그리고 <한겨레>의 창간 멤버인 신홍범과 정태기가 곧 그들이다. 60년대에는 서로 어울릴 기회가 없었지만 훗날 자유언론의 깃발을 높이 든 동아일보 해직기자의 상징적 두 인물, 이부영과 성유보가 바로 63세대에 속한다.



 

» 임재경/언론인
 
박정희의 3선 개헌 전후하여 리영희는 중앙정보부의 압력 때문에 외신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찬밥 신세를 지다 조선일보를 아예 그만두었다. 남재희는 총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전국의 민심을 밑바닥에서 훑어보는 연속 기획물을 만들다 공화당의 미움을 사 정치부장직에서 논설위원으로 밀려나갔다. 얼마 뒤 그는 하버드대 ‘니먼 펠로십’을 따서 미국으로 떠났는데, 그 다음 해에는 백낙청이 박사학위 논문 제출차 하버드로 갔다. 오랜 친구 김상기는 한참 전 <청맥>에서 일한 사실이 동티가 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호되게 당한 뒤 미국 뉴욕주의 버펄로대로 유학을 떠났다.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지식인에게 재갈 물리는 효과를 노린 이른바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 사건’이 발표되었다. 언론계·학계·예술계가 공포의 악몽에 시달린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데 이 사건에는 대학과 문청 시절 가까이 지내던 친구 여럿이 연루되었던 것이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의 그들은 대체로 낭만적 기질의 자유주의자들인데 어떤 연유로 평양을 왕래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프랑스 영화와 샹송에 나를 흠뻑 빠지게 만든 데카당의 ‘본당 마귀’ 이기양(조선일보 유럽통신원·독일 튀빙겐대학 철학박사)이 프라하에 세계 여자농구대회 취재차 들어갔다가 행방불명이 된 것 역시 이 무렵이다.

가까운 친구들이 외국에 나간 것이 나의 프랑스행을 촉진했지만 내심 68년 학생혁명이 휩쓴 구미 여러 나라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1971년 1월) 환송 술자리에서 남재희는 “다른 것은 다 제쳐 놓고 ‘조합’(신디케이트)에서 몸을 뺀 용기는 대단해”라 했다. 나는 이 말이 싫지 않았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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