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파리서 포도주도 못마신 촌놈
세상을 바꾼 사람들 6-1
 
 
한겨레  
 








 

» 파리 몽파르나스 거리에 있는 카페 르 로통드의 최근 모습. 레닌과 트로츠키가 자주 드나들어 유명한 이 카페는 필자가 기숙했던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5분 거리에 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프랑스와 파리에 관해 글을 쓰거나 책을 내는 것은 승률이 아주 낮은 도박이다. 혁명가 마르크스와 레닌, 문인 하인리히 하이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미술가 피카소와 이응노 ….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압제와 불의에 시달리는 전세계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숨막히는 자신의 현실로부터 뛰쳐나오려 파리로 파리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거기서 짓무르고 있는 부르조아 문명에 환멸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이런 앞사람들의 체험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 변혁과 문학·예술 창작을 꿈꾸는 사람들 발길이 끊임없이 파리로 이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중국 사회주의 운동의 제1세대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도 1920년 5·4운동 직후 파리로 갔으니까.

프랑스의 정치, 사회, 문화와 파리지앵의 일상을 다룬 책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세계를 통틀어 줄잡아 수천 가지에 이를 것이다. 또 이즈음의 홈리스 즉, 최하층민의 처참한 하루하루를 그린 기록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읽은 것 가운데는 소설 <1984>로 문명을 드날린 조지 오웰의 책 <다운 앤 아웃 오브 파리스 앤 런던>(1933)이 단연 압권이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것 중에서는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의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빼놓을 수 없는데, 둘 다 외국인으로서 파리에서 노동하며 먹고살았기 때문에 생산할 수 있었던 기록문학이다. 몇 해씩 아니 10년 이상 파리에 머문 한국의 수많은 프랑스 유학생들이 이런 책을 쓰지 못하는 것은 일상생활과 노동이 유리되었던 까닭이라 생각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처럼 돈 없는 파리는 글자 그대로 지옥이다. 37년 전의 나의 파리를 말하면서 무슨 돈으로 거기를 가 지낼 수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도 그런 연유다.

프랑스 외무성이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이전 식민지, 특히 그 가운데서 프랑스어를 제1외국어로 하는 나라를 친불(親佛)로 잡아 두려는 직업훈련 및 장학 프로그램이 한국까지 넓혀져 나도 거기 응모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어-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이 장학금의 주 선발 대상이었고, 그런 이유로 한국외국어대학에 가서 어학 능력 테스트를 받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프랑스 대사관에 가서 프랑스어로 인터뷰를 해야 했다. 그런데 한달 장학금은 고작 900프랑(당시 환율로 약 180달러)!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학생들만이 굶주리지 않고 견딜 정도에 불과했다. 파리에서 천장 밑 방이나마 빌리려면 턱없이 모자라는 판이라 김성곤이 설립한 ‘성곡언론재단’에 지원금을 신청하여 월 350달러씩을 받았다. 합계 530달러, ‘날라리’들에게는 샹젤리제 고급 음식점에 가면 하루 저녁 술값으로도 모자라는 액수지만 유학생들에게는 꽤 넉넉한 생활비였다.



 

» 임재경/언론인
 
외무성 초청기관을 방문한 첫날, 프랑스어 교습기관인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기숙사에서 3개월을 보내고 싶다고 한즉 경력 10년의 기자가 프랑스어 학습에 열의를 지녔다고 보았는지 담당 여직원은 매우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한국의 1월 기후는 어떤가를 물었다. ‘여기(파리)보다 훨씬 춥고 거리는 빙판’이라 했더니 방한용 피복이 필요할 것이라며 액면 500프랑의 국고 수표를 떼어주는 거였다. 어? 이 프랑스 여성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건가 하며 은행에 가서 현금으로 바꾸었다. 며칠 뒤 한국 유학생을 만나 피복비 500프랑 이야기를 꺼냈더니 아프리카에서 오는 장학생이 많아 피복비는 말만하면 500프랑 한도로 다 주게 돼 있다는 설명이다.

라스파이유 거리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몽파르나스 거리의 카페, ‘로통드’와 ‘돔’이 걸어서 5분 거리다. 그러나 친불 데카당이었던 나는 정작 파리에 와서 지척에 둔 그곳에서 포도주 한 잔 마셔보지 못하는 촌놈이 되고 말았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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