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기자로서 ‘삼십이립’은 교우들 덕
세상을 바꾼 사람들 ⑤
 
 
한겨레  
 








 
공자 말씀 가운데서 가장 널리 회자하는 경구를 찾자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삼십이립’이다. 나이 서른에 이르러 비로소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서게 된다는 뜻이다. 신문기자의 삼십이립은 어떤 것일까. 이름 석 자 세상에 알려진 덕에 가까운 사람들 취직 부탁 해결해 주며 공술 얻어 마시는 것이라 하면 너무나 자학적인 이야기라 할 테지만 대체로 1960년대의 서른 살 기자는 그 비슷한 재미를 빼놓고는 크게 내놓을 것이 없었다. 한편 기자직을 거쳐 입신양명한 인사들의 서른 살은 그런 재미는 재미대로 즐기면서 유력층에 줄을 대는 대담성·저돌성을 발휘했다. 마안하지만 뻔뻔스러움이라 해야 알맞겠다.

그러나 스물여덟이나 스물아홉에 이르러 돌연히 삼십이립을 향해 몽우리를 짓는다고 하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다. 태어난 조건, 유년기의 가정환경, 각급 학교의 교육, 사회에 나와 부대끼는 가운데 몸에 밴 세계관과 인생관이 두루 기여한다고 보면 크게 그르지 않을 줄 안다. 인간의 생리 구조나 수명을 고려할 때 삼십이립이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알맞은 시기다. 하지만 사람 따라 스무살, 혹은 마흔에 신념을 세울 수도 있으며, 육십이립이라고 하여 나쁘게 말하거나 비웃는 것은 잘못이다. 이를테면 조심조심 교편생활을 하다가 65살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사회운동에 몸을 던진 분들이 지금 얼마나 귀중한 몫을 하고 있는가.

십년 전쯤 오연호(<오마이뉴스> 대표)가 <말> 취재부장을 하고 있을 적 기자 여럿과 함께 좋은 이야기를 듣자며 자리를 마련했다. 모임이 파하기 직전 오연호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자유언론과 민주화 운동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라는 거였다. 동기를 꼭 하나로 찍어서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장황한 답변을 늘어놓을 계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선배 기자의 순발력을 한번 시험해 보고자 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글쎄, 무어라 할까. 내게는 교우관계가 제일 큰 영향을 준 것 같은데” 하면서 거기 모였던 기자들이 모두 알 만한 이름을 두셋 댔더니 그들은 만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우관계라면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할까? 소꿉동무, 초등학교, 중·고교, 대학, 문청(문학청년) 시절 헤매고 다니던 명동, 신문기자 초년 …? 70줄에 와서는 애증과 은원 감정이 교차하긴 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에 사귄 친구들은 모두 소중하다. 오연호 일당에게 댄 이름은 리영희·남재희·백낙청 셋이었다. 셋 가운데서 가장 일찍 사귄 사람이 백낙청이고, 그보다 조금 뒤 두 사람을 60년대 초 조선일보사에서 만났다.



 

» 언론인 임재경
 
백낙청을 나에게 소개한 사람은 그와 서울 재동초등학교 적 동무 김상기다. 50년 전의 철학도 김상기는 우리 또래 가운데서 일본말로 된 책을 술술 읽을 수 있는 대단한 독서가였다. 뛰어난 친화력과 화술에다 근면·성실·청결한 몸가짐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학·석사 논문은 독일의 하이데거를 썼다. 지금 여기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려우나 정치와 사회를 보는 시각은 매우 진보적이었고 나는 그의 그런 면에 끌렸다.

나는 대학에서 영문과에 적을 두었으나 학업을 게을리한데다 프랑스 문학에 심취한 ‘데카당 문청’이었다면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책읽기보다는 서양 고전음악, 그리고 프랑스 영화와 샹송이 비할 데 없이 좋았다. 얼마 전에 읽은 라틴아메리카의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Vivir para contarla)를 보면서 학업을 팽개친 다음 신문에 잡문을 쓴답시고 카페를 전전하는 아들(마르케스)의 마음을 다잡고자 어머니가 애절하게 호소하는 장면에서 몹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20대 초에 데카당 문청 행각은 비슷했는지 몰라도 그는 불멸의 작품을 남겼으니 나와는 너무나 다르다.


언론인 임재경
그림 박재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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