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텃세 조선일보’서 빛난 이단아들
세상을 바꾼 사람들 5-3
 
 
한겨레  
 








 

» 임재경/언론인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텃세라는 것이 있고 텃세가 심하기로 말하면 농촌의 자연부락이 단연 으뜸이다. 외지 도시인이 초록색 꿈을 안고 고향이 아닌 농촌에 갔다가 한두 해 만에 논밭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되돌아서는 이유가 텃세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먹물로 사는 신문이 텃세가 심한 곳이라면 곧이 믿어줄까? 신문사 가운데도 오래된 신문이 텃세가 심한 편인데 이를테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한국일보>보다 훨씬 심했다. 창간 20년이 지난 <한겨레>에 텃세가 없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사오십 년 전과는 달리 이즈음의 신문사 텃세는 수습기자 제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도 곰곰이 짚어 보았다. 앞에서 말한 기자단만이 아니라 신문사 내부의 텃세는 언론 신디케이트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신문사 텃세 이야기는 1960년대의 조선일보 시절을 더듬으며 나의 기자 성장에 보탬을 준 리영희와 남재희의 처지를 말하려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신문사의 텃세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오랜 노예적 근성과 무관치 않다. 주인의 눈밖에만 나지 않으면 밥과 잠자리는 일단 확보되고 숨을 거둔 뒤에는 땅에 묻어주는 ‘은혜’를 주인으로부터 입는다고 믿는 것이 중세와 고대의 노예다. 신문사의 피고용자들을 전근대적 노예 신분과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치지만 고참들은 외딴곳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거나 사주(社主)를 비난하다가도 기사를 쓰거나 편집방향을 정하는 일에서는 관행-즉 사주의 이해관계를 최우선 지표로 삼는 의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신출내기 기자가 이런 언행 불일치를 따지고 들면 그들은 “이 사람아! 기자는 지사(志士)가 아니란 말이야. 우리는 월급쟁이일 뿐이야!”라고 즉각 자조적인 응답을 내뱉었다. 그럼으로 리영희와 남재희처럼 능력이 돋보여 다른 매체에서 발탁된 기자는 토박이들로부터 질시와 모함을 받는 것은 정한 이치다. 리-남 두 기자는 조선일보 편집국 주류의 기성 질서를 흔든 이단아였다.

65년 초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된 김경환(<한국일보> 편집국장, 신문연구원 원장, 1988년 작고)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내세울 학력이 없는데다 취재부서의 데스크를 거치지 않은 순수 편집기자 출신이고, 더구나 나이가 상대적으로 젊은 편이었다. 이런 그가 정치부장에 남재희, 외신부장에 리영희를 앉힌 것은 변화를 바라지 않는 쪽에서 텃세 부리기에 꼭 알맞은 조건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김경환·남재희·리영희가 신문을 만들 때가 해방 뒤 조선일보의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곱 살 위 리영희와 세 살 위 남재희의 어떤 면에 나는 끌렸던 것일까.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히지 않았으니 불가에서 말하는 전생의 인연이랄밖에 없다. 둘 다 술을 좋아했지만 문청의 술타령 스타일과는 전혀 달랐고, 독서 경향 역시 나와는 판이하다. 사회정의에 민감한 체질, 앞서 가는 시대감각, 그리고 뛰어난 필력이 둘의 공통점이다. 그들이 영어를 잘했다는 것이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겠다.

실토하거니와 조선일보 수습기자 3기인 나는 ‘비주류’로 분류되는 리영희-남재희와 친히 지내면서도 한 발은 ‘주류’ 쪽에 담그고 있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기사를 써제끼는 기자를 신문사의 주인은 우선 알아주는 법이다. 한국일보 사주이자 부총리인 장기영을 난처하게 하는 기사를 나는 수없이 썼는데 한번은 화가 치민 부총리가 기자회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방우영 사장(현 회장)은 67년 내가 불광동의 열 평짜리 국민주택을 마련할 때 6개월치 봉급을 선불해주는 파격적 호의를 베풀었다.

최석채(조선일보 편집국장·주필, 문화방송 회장, 작고)는 나를 몹시 귀여워하여 4~5년차 기자인 내게 경제 해설을 써 보내면 자기가 손을 보아 사설로 싣겠다고 했다. 또 같은 무렵 선우휘(소설가, 조선일보 편집국장·주필, 작고), 남재희, 손세일(조선일보 기획위원, 동아일보 논설위원, 평민당 원내 총무), 나 넷이 죽이 맞아 자주 술판을 벌였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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