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댁이 정자 옆에서 쉬고 있다.
다가간다.

"엄니 배추는 어때요?"
"자네 배추 보담은 낫제."

금년 배추가 아주 힘들다.
이틀 전까지도 구례의 한낮 기온은 섭씨 33도였다.
초반전에는 햇볕에 어린 모종들이 녹아버렸다. 한 번 더 옮겼지만 역시 힘들다.
가장 결정타는 가뭄이다. 여름부터 비는 부족했다.
마을마다 농수용 저수지가 없었다면 금년 농사는 끝장이었을 것이다.
매일 네댓 평의 사무실 앞 배추밭에 물을 주지만 하늘에서 내린 물과
사람이 주는 물은 차원이 다르다. 비가 너무 오지 않아 밤은 씨알이 작고
송이버섯은 보이질 않는다.
그 다음 문제는 개인적인 문젠데 벌레다.
배추밭에 농약을 하지 않으니 벌레 천국이 된 것은 뻔한 이치다.
그 아이들도 무농약이나 자연농법을 좋아한다.
허우대만 멀쩡한 나의 배추는 곳곳에 구멍이 송송하다.
조금 전에도 담배 피러 나가서 손으로 10여 마리를 잡아냈다.
가뭄과 햇볕에 기를 못 펴는 모종은 그렇다 하더라도
몸집을 키워가는 배추조차 내 입으로 들어가기 전에 속없는 배추가 될 판이다.

"엄니 아침에 약 하러 갈 때 나 배추밭에 약 좀 해주쇼."
"염병하고 자빠졌네. 작년에는 약했다고 난리더만……."
"긍께 딱 한번만 해달라니깐요."
"호랭이가 물가겠네. 아 약 안 함담서!"

월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그래도 한번 해 주시겠지.
그리고 하늘이시여, 제발 비 좀 내려주세요!

- 출처 : www.jiri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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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vs. 창비', 심재철의 완패
  법원, 배포금지 가처분신청 기각…중재위, '조정 불성립' 결정
 
  2008-09-18 오후 2:56:20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과 <창작과 비평> 간의 다툼에서 법원과 언론중재위가 잇따라 <창작과 비평>의 손을 들어줬다.
  
  심 의원이 <창작과 비평> 가을호(141호)에 실린 한 네티즌의 글을 문제 삼아 법원에 제출한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은 기각됐고, 언론중재위원회는 '조정 불성립'을 선언했다. (☞관련 기사 : 심재철, <창비>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
  
  법원 "공직자 활동 의혹 제기는 쉽게 추궁돼서는 안 된다"
  
  지난 16일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제11민사부(판사 이인규, 박찬우, 정성민)는 심 의원이 낸 가처분 신청에 대해 "공공적·사회적 의미를 가진 사안에 관한 표현의 경우에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돼야 한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법원은 "특히 공직자의 공직과 관련된 활동에 대해서는 국민이나 언론의 감시 기능이 필요하다"며 "그 점에 관한 의혹의 제기는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것이 아닌 한 쉽게 추궁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법원은 <창작과 비평> 측이 '권태로운 창'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네티즌의 글이 허위 사실이라는 점을 인식하고도 심 의원을 비방하기 위해 글을 게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또 현역 국회 의원인 심 의원이 이 기고문으로 인한 인격권 침해로 입을 손해에 대해 대체적인 구제 수단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가처분 신청 기각의 이유를 설명했다.
  
  창비 "정당하고 합리적 결정"
  
  언론중재위도 심 의원을 외면했다. 언론중재위는 지난 11일 심 의원이 낸 정정 보도 요청 및 5억 원의 손해 배상 청구에 대해 '조정 불성립' 결정을 내렸다. 심 의원의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이와 관련 <창작과 비평>을 내는 출판사 창비 측은 18일 보도자료를 통해 "정당하고 합리적인 결정"이라며 환영의 뜻을 피력했다.
  
  창비는 "이번 가처분 신청 등은 처음부터 심 의원이 무리하게 법적인 절차로 끌고 간 것인만큼 당연한 귀결"이라며 "언론과 출판 활동의 자유, 그리고 표현의 자유가 정치적 외압에 의해 침해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밝혔다.
  
  심재철 "법원 판결 유감…항소하겠다"
  
  한편 심재철 의원은 법원 판결에 대해 "이번 결정 내용은 논란이 된 기고문과 관련해 '사실관계에선 심 의원 측 주장이 맞더라도 굳이 기고문을 게재한 창비의 배포금지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본다"며 유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심 의원은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이번 사건은 '군부독재 시절의 언론탄압'과 동일시하는 창비 측의 소아병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사안이 아니며, 정치인이기에 앞서 한 개인이 막강한 언론권력에 의해 명예가 훼손된 데 대해 억울함을 풀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주장했다.

   
 
  여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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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9-1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씨는 튀고 싶은가봐요.ㅡ.ㅡ;;;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구판절판


마리암은 잘릴이 단호하고 즐겁게 선물 주던 방식을 떠올렸다. 그것은 고마움 외에는 아무 반응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쾌활함이었다. 나나가 잘릴의 선물에 대해서 한 말은 옳았다. 그것은 내키지 않아하는 속죄의 표시였고, 그녀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불성실하고 잘못된 몸짓이었다. 마리암은 라시드가 준 숄이 진정한 선물이라는 걸 알았다. "예쁘네요."-106쪽

마리암은 소파에 누워 무릎 사이에 손을 넣고 눈발이 날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나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고통 받고 있는 여자의 한숨이라고 했었다. 그 모든 한숨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작은 눈송이로 나뉘어 아래에 있는 사람들 위로 소리 없이 내리는 거라고 했었다. "그래서 눈은 우리 같은 여자들이 어떻게 고통당하는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거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걸 우리는 소리없이 견디잖니?"-125쪽

엄마는 곧 잠이 들었다. 라일라는 이중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엄마가 살려고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엄마가 살려는 이유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다. 그녀는 오빠들처럼, 엄마의 가슴에 흔적을 남기지 못할 존재였다. 엄마의 가슴은 창백한 해변 같았다. 부풀었다가 부서지고, 다시 부풀었다가 부서지는 슬픔의 물결에 자신의 발자국이 영원히 씻겨내리는 차가운 해변 같았다.-195쪽

"젊은 친구들, 저게 우리나라의 역사라네. 끝없이 반복되는 침략의 역사지. 마케도니아인들, 사산 왕조의 사람들, 아랍인들, 몽골인들. 이제는 소련인들이지. 하지만 우리는 저기에 있는 벽과 같다네. 부서지고, 쳐다봐야 아름다울 것도 없건만, 아직도 저렇게 서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요, 바다르(어르신)? 바비가 말했다. "맞습니다."-198쪽

그것(로켓탄)은 때로 그녀가 바비와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그것이 시작되면 그들의 고개가 순간적으로 들렸다. 그들은 포크를 공중에 들고 씹다 만 음식을 입에 담은 채 쌩- 하는 소리를 들었다. 라일라는 그들의 흐릿한 얼굴이 칠흑처럼 까만 창문유리에 비치는 걸 보았다. 벽에 비친 그들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쌩- 하는 소리. 다행스럽게도 다른 곳으로부터 들리는 폭발음, 적어도 이번에는 목숨을 건졌다는 걸 알고 내쉬는 안도의 숨. 그 사이,어딘가에서는 아우성과 질식할 듯한 연기 속에서 맨손으로 형제자매, 손자손녀의 남아 있는 시신을 파편 속에서 끌어내고 있을 터였다. -235쪽

같은 달인 6월의 어느 날이었다. 기티는 두 명의 동급생들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기티의 집에서 불과 세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로켓탄의 유탄이 그들을 덮쳤다. 나중에 라일라는 기티의 어머니 닐라가 기티가 죽은 곳으로 달려가서, 비명을 지르며 앞치마에 딸의 살점을 주워 담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그녀의 오른발이 2주 후에 어떤 집의 옥상에서 발견되었다. 아직도 나일론 양말에 자주색 운동화가 신겨 있었다고 했다. 기티가 죽은 다음 날, 라일라는 울고 있는 여자들 사이에 어리벙벙하여 앉아 있었다. 라일라가 알고, 가깝게 지내고 사랑했던 누군가가 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기티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라일라와 둘이서 수업시간에 은밀한 쪽지를 주고받던 기티였다. 손톱을 예쁘게 다듬고, 핀셋으로 턱에 난 털을 뽑던 기티였다. 그 기티가 죽은 것이었다. 죽었다. 산산조각이 나서, 마침내 라일라는 친구들 위해 울기 시작했다. 오빠의 장례식 때는 흘릴 수 없었던 모든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242쪽

"영화 속의 한 장면 같구나. 사람이 외딴 섬에 살며, 다섯 권의 책만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선택할 것인가. 그 기로에 처한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실제로 내가 그런 일을 겪을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빠, 나중에 책을 다시 모아야겠어요."
그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음. 내가 카불을 떠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 나는 여기에서 학교를 다녔고 첫 직장을 여기에서 잡았고 여기에서 아빠가 되었다. 내가 곧 다른 도시의 하늘 밑에서 잠을 잘 거라고 생각하니 낯설구나."
"저도 그래요."
"하루 종일, 카불에 관한 한 편의 시가 머리에 떠돌더구나. 사이브레타브리지라는 시인이 17세기에 썼던 시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다네.' 전에는 전체를 다 외웠었는데 지금은 두 줄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라일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울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에 팔을 둘렀다.
"아빠, 우리는 다시 돌아올 거예요. 전쟁이 끝나면요. 알라신의 뜻이라면, 우리는 카불에 다시 올 거예요. 두고 보세요."-258쪽

그때 거대한 소리가 났다.
그녀의 뒤에서 하얀 빛이 번쩍였다.
그녀의 발밑이 기울어졌다.
뭔가 뜨겁고 강력한 것이 뒤에서 그녀를 덮쳤다. 그것은 그녀에게서 샌들을 벗겨냈다. 그리고 그녀를 들어올렸다. 이제 그녀는 비틀거리고 돌아가며 공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이 보였다. 그 다음에 땅이 보이고 다시 하늘이 보이고 다시 땅이 보였다. 불이 붙은 커다란 나무조각이 날아갔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조가들도 날아갔다. 하나하나가 주위에서 날아가고 겹겹이 튀어오르고 햇볕을 받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작고 아름다운 무지개들...
라일라의 몸이 벽에 부딪쳤다. 그리고 땅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과 팔 위로 먼지와 작은 돌과 유리가 쏟아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건 근처에서 쿵 소리를 내며 뭔가가 떨어지는 모습이었다.-261쪽

라일라는 엄마가 어떻게 땅에 고꾸라졌으며, 어떻게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는지 기억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손끝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무릎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고 마음이 날아가도록 했다. 그녀는 그것이 아름답고 안전한 곳을 찾을 때가지 계속 날아가게 했다. 푸른 보리밭이 있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수천 개의 가시나무 씨가 공중에서 춤추고, 바비는 아카시아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타리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낮잠을 자고, 그녀는 시내에 발을 담그고, 햇볕에 하얘진 바위로 된 불상들의 눈길 밑에서 좋은 꿈을 꾸는 아름답고 안전한 곳을 찾을 때까지.-282쪽

이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다. 거리의 모퉁이마다 함정이 있고, 골목길마다 도깨비상자처럼 그녀를 덮칠 유령을 숨기고 있는 이 도시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그녀는 그 모험을 감행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떠나는 것이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게 되었다.
날마다 터져 나오는 구토.
커지는 가슴.
이 혼란의 와중에서 여하튼, 생리를 하지 않았다는 깨달음.
라일라는 수천 개의 막대기들에 매달린 비닐들이 살을 에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삭막한 들판의 난민 수용소를 상상해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곳에 있다고 상상해보았다. 그녀의 아이가 초췌한 관자놀이, 늘어진 턱, 얼룩덜룩하고 푸르스름한 피부를 하고 텐트 속에 있다고 상상해보았다. 그녀는 아이의 작은 몸이 낯선 사람들에 의해 씻겨 황갈색 수위에 싸여 독수리들의 실망한 눈길 밑에서, 바람에 노출된 땅에 파인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지금 달아날 수 있겠는가.
라일라는 자신의 삶을 스쳐간 끔찍한 숫자의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아마드와 누르는 죽었고, 하시나는 어디로 가고 없고, 기티는 죽었고, 엄마는 죽었고, 아빠도 죽었고...-293쪽

이제 타리크마저...
하지만 기적적으로 이전 삶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녀가 이토록 철저히 외로운 사람이 되기 이전과의 마지막 끈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몸에 아직도 살아 있는 타리크의 일부. 작은 팔이 솟고 반투명의 손이 자라는 그의 일부가 살아 있었다. 그가 라일라에게 남긴 것, 그리고 그녀의 옛 삶에서 남은 유일한 것을 어떻게 위태롭게 할 수 있겠는가?-294쪽

1978년과 1992년 사이에 여자들이 즐겼던 자유와 기회는 이제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다. 라일라는 아직도 바비가 공산주의 정권이 통치하던 때에 관해서 하던 말을 기억했다. "라일라, 지금은 아프간 여성으로서는 좋은 때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무자히딘이 1992년 4월에 권력을 잡으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명칭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으로 바뀌었다. 라바니가 정권을 잡으면서 대법원은 이제 강경파 율법학자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여자들에게 권한을 주었던 공산주의 시절의 법령을 폐지하고, 여자들에게 몸을 가리라고 명령하고 남자 친척 없이 여자들이 여행하는 걸 금지하고, 간통을 돌로 쳐 죽이는 엄격한 이슬람법에 기초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법을 실제로 집행하는 것은 드문 경우였지만 여하는 법은 법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싸우느라 그렇게 정신이 없지 않다면 우리들한테 그걸 더 강요할 거예요." 라일라는 마리암에게 이렇게 말했었다.-349쪽

"나는 여기에서 끝나.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어. 내가 어렸을 때 원했던 모든 걸 너는 이미 나한테 줬어. 너와 네 아이들이 나를 너무 행복하게 해줬어. 라일라, 괜찮아. 괜찮아. 슬퍼하지 마."(마리암)-489쪽

그녀는 앞에 있는 책상으로 돌아가면서, 전날 밤에 저녁을 먹으며 다시 즐겼던 이름 짓기 놀이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라일라가 타리크와 아이들에게 그 소식을 전해준 후로 계속되는 밤의 의식이 되었다. 그들은 돌아가며 자기들이 지은 이름에 대한 이유를 댄다. 타리크는 모하마드라는 이름이 좋다고 한다. 최근에 비디오로 <수퍼맨>을 본 잘마이는 왜 아프간 소년의 이름이 클라크일 수 없는지 궁금해한다. 아지자는 아만이라는 이름이 좋다고 열을 올린다. 라일라는 오마르라는 이름이 좋다.
하지만 이 놀이에서는 남자 아이의 이름만이 거론된다. 딸의 이름은 라일라가 이미 지어놓았기 때문이다.-5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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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어 팔리믄 가을 시작인디…”
해남 남창장
김창헌 기자  
 
 


▲ 바닷가에 자리한 남창장은 예로부터 어물전과 갯것전이 걸었다. 지금도 그 위세를 이어가고
있다.
ⓒ 김창헌 기자

이른 새벽 문절이를 장에 가져온 어부는 “가을 왔어” 한다. 수온이 차졌다.
가을 생선의 대표주자인 전어도 장에 나왔다.  “전어 팔리믄 가을 시작인디…” 하던 상인이 귀띔한다. “아직 기름이 덜 찼어. 맛이 서서히 들어갈 때제, 지금 사다 묵어도 아쉬울 것은 없어.”

남창장에는 숭어처럼 흔하게 돌아다니는 고기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숭어 찾기가 쉽지 않다. 영전리에서 온 한 어부만이 숭어를 몇 마리 가져왔다. “아직은 눈 다 떠 갖고 있는게 안 잽히제(잡히제). 그물 있는 것 확인하고 뛰어넘어버려.” 여름에 숭어는 눈이 가장 밝다. 가로막고 있는 그물이 환히 보인다. 그러다 가을 초가 되면 눈에 백태가 서서히 끼기 시작한다. 겨울에는 완전히 껴 ‘눈먼 숭어’가 된다. 겨울과 봄, 눈먼 숭어일 때 남창장은 ‘숭어장’이 된다. 시방, 어부에게 잡힌 숭어는 “정신 못 차린 놈들이제.”

여름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 때 숭어가 잡힌다. 바람이 불어 물이 흐려지면 숭어 시야도 좁아지는 것이다. “여름에는 바람 안 불믄 그물 넣어도 헛방이여.”


▲ 영전리에 사는 부부가 덤장으로 잡은 고등어 새끼, 민어, 줄서대.
ⓒ 김창헌 기자


▲ 살이 많아 간재미보다 찰지다는 ‘목떼기’.
ⓒ 김창헌 기자

“딱 열다섯 그릇 나온 게 두 그릇 냉가 묵어”

새벽 5시께 남창장(2·7일)에는 환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켜진다. 조용한 바닷가 남창장이 깨는 시각. 용달차가 몰리고 상인들 물건 내리는 소리로 요란해진다. 

장 안쪽 상인들이 그렇게 하루를 준비하는 동안, 장옥 가에서는 또 다른 소란이 인다. 급하게 거래가 이뤄진다. 서두르는 사람들은 어민들에게 물건을 받는 상인들. 어민들이 용달차로 경운기로 택시로 물건을 가져오면 앞다투어 챙겨든다. 자기 자리로 물건부터 끄집어온다. 대야에 바닷물 받아놓고 나서야 “몇 마리요?” 묻고, “어떻게 해줘야 쓰까” 하며 값을 흥정한다.

상인들과 어민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철 따라 달라지는 어물값, 상인들이나 어민들이나 늘 민감한 부분이어서 물건의 시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어민은 상인에게 “나한테 6천원에 받고 7천원이나 8천원에 팔아. 그라믄 장사할 만하겄고만” 한다. 고동을 ‘착실하게’ 까온 할머니는 “딱 열다섯 그릇 나온 게, 두 그릇 냉가(남겨) 묵고, 한 그릇은 자네 묵고 그려” 한다.

행정구역은 완도군에 속하지만 해남 북일면과 더 가까운 토도에서 온 할머니는, 반지락과 굴을 상인에게 넘겨주고 바쁘게 일을 본다. 채 물건 정리도 안 한 잡곡가게에 가 ‘깨 내놓아라’ 한다. ‘양말(양말장사) 어디로 간지 모르냐’고 물으며 맘이 다급하다.

토도는 ‘모세의 기적’이 하루 두 번 일어나는 섬. 바닷길이 열리면 섬에 들고, 나고 한다. 바삐 가야 바닷길 ‘문 닫기’ 전에 갈 수 있다. “퇴갱이섬이라 퇴갱이마냥 뛰어 댕겨야 해.” 토도는 섬 모양이 토끼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몰리기 시작한다. 북평 땅끝 영전리 사람들, 신흥마을 안평마을 사람들, 밤섬 남섬 사람들, 북일면 만수리 사람들, 완도 군외면 사람들…. 남창장 인근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한 짐씩 이고 들고 와 장바닥에 부려놓는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마을마다 자리가 있다.

상인들에게 남창장의 가장 편리한 점은 갱물(바닷물)이다. 통에 담아올 필요 없이, 다른 사람에게 빌리러 갈 필요 없이, 수도꼭지만 틀면 갱물이 쏟아진다. 바다가 바로 앞이라 이러한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 김창헌 기자


ⓒ 김창헌 기자
 
“낙자는 오래 산디, 문애는 금방 디져”

영전리에서 온 부부는 사람들을 모은다. 용달차에서 덤장으로 잡은 어물을 내리고, 또 내린다. “혼자 고기잡이 다 해불었네.” 숭어 방어 장대 줄서대 전어 병어 문어 꽃게. 생선 가게 하나를 다 차렸다. 어부는 “하루 쟁일(종일) 펐으믄 좋겄지만 이것이 마지막이고만” 하며 고기가 듬뿍 든 고기망을 내려놓는다. 이곳 사람들도 “뭣이여” 하며 관심을 보인다. “가라지 새끼여?” 등 푸른 고등어 새끼였다. “가라지는 (고기) 옆구리에 줄이 있어야 가라지제.” 고등어 새끼가 관심을 끄는 것은 해남 바다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는 물고기이기 때문. 그런데 떼로 잡혔다. “꿔(구워) 먹든 못할 것이고 멸(멸치) 식으로 묵은지에다 볶든, 지져 묵으면 맛 날 거여.”

문어가 많이 나왔다. 문어는 오도방정이다. 대야 안에 가만있지 않는다. 두 마리, 세 마리가 한꺼번에 바닥을 긴다. 북평 남성리에서 온 박가덕(69) 할머니는 꽃게 대야 속으로 들어간 문어를 냅둔다. “이놈이 이놈을 잡아묵을란가, 저놈이 저놈을 잡아묵을란가 해필 궁금해지네.”

광주에서 여행 온 관광객이 “광주까지 가져가도 살까요” 묻는다. 할머니 대답이 너무나 솔직해 관광객이 웃어 버렸다. “금방 디져(죽어).” 할머니는 핀잔에 가까운 말을 건넨다. “야가(문어가) 지 빈(변)하고 싶은 대로 막 빈해버리는 애여. 삘겋게 허옇게 얼룩달룩. 그렇게 예민한 애긴디, 광주까정 숨이 붙어 있겄어. 낙자는 오래 산디, 문애는 금방 디져.”

박가덕 할머니는 남창장은 ‘입 아픈 장’이라고 한다. 완도 들머리, 길가 바로 옆에 있는 장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든다. “요것 뭐냐고 묻고,  어찌게 묵냐고 묻고, 맛있냐고 묻고, 비린내는 안 나냐, 생으로는 묵는 거냐, 고치가리(고춧가루) 넣냐 안 넣냐 묻고. 일일이 답할라믄 한나절 연설을 해야 한단게.”

마지막 묻는 것은 “얼마예요?”. “내가 다 썰어주고(써는 방법을 알려주고) 요리까지 다 해줬는디 비싸다고, (요리를) 못 해묵겄다고 돌아서불믄 열 받치지.”

할머니에게 관광객은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들이다. 바다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문애(문어) 쫌만 작으믄 다 낙자(낙지)여. 납작한 것은 다 홍어고. 횟집에서 썰어놓은 것만 묵은게, 저것이 광어인지 돔인지 농어인지 알지를 못한단게. 낙자 들어간 지가 언젠디, 낙자도 없냐고 글고.”
그래도 남창장에서 한몫 팔아주는 사람들 역시 관광객들이다. “싱싱하다고 사가고, 신기하다고 사가고, 이렇게 큰놈 첨 봤다고 사가고, 자랑한다고 사가고, 애들 갖고 놀라고 기(게) 사가고. 많이 사가.”


▲ 할머니들의 커플티? “이뻐보인게 나도 샀제.”
ⓒ 김창헌 기자


▲ “니그들 뻘떡기 아냐? 이것이 돌 밑에서 잡는 건디….” 어물장사 할머니는 ‘바다 선생님’.
ⓒ 김창헌 기자

“음력 칠·팔월이여. 반지락 사가”

안평마을 윤남심(67) 할머니는 바지락을 파는데 “음력 칠·팔월이여. 사가” 한다. 지금이 바지락철, 산란 끝내고 살이 여물 때. 술꾼들도 시원한 바지락 국물을 찾을 때.
바지락 나온 양이 앞장보다 못한 것은 물때 때문이다. 물이 많이 나지 않았다. 바지락은 갯벌 깊숙한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사리 물때에 나오는 양이 많다. 그런 차이로 바지락 값이 달라지기도 한다.

물때 따라 바지락 살 여문 것도 차이가 난다. 그믐사리 때 바지락을 사는 게 좋다. “삼분의 일은 차이가 나. 그믐사리 반지락(바지락)은 꽉 차 있고 보름사리 반지락은 살이 확실히 흘렁흘렁해. 달 밝으니까, 달빛 보고 조개도 술 한잔 먹고 그런가 힘아리(힘)가 없어.”

윤남심 할머니가 파는 바지락은 갯벌에서 호미로 캐낸 ‘참반지락’. 그래서 할머니는 “백퍼센트 비싼 반지락이여. 막 파온 거여. 잘 보고 사네” 하며 판다. 물속에 잠겨 자라는 바지락은 ‘물반지락’. 참반지락보다 값이 싸고 조갯살도 덜 여물다. 물반지락은 배를 이용해 기계로 긁어 올린다. “참반지락이 물 들었다 나갔다, 햇빛 받음시롱, 사랑 받으믄서 큰 게, 알이 노오라니 깨끗하고 좋아.” 겉모양새로만 보면 물반지락은 노란 빛을 띠고 참반지락은 검은 빛이 섞여 있다.

강성심(71) 할머니가 “반지락보다 더 시원한 것”이라며 바지락 대야를 뒤져 꺼내 보여준 것은 검은 빛깔의 ‘대롱’이라는 조개. “반지락보다 더 깊이 들었어. 맛있는디 없어. 잘 안 나.”


▲ 할머니 좌판은 밥 위에 얹어 먹으면 좋은 두불콩과 위에 좋은 간지밥나무 껍질과 삶지 않아
잘 팔리지 않는 고구마대.
ⓒ 김창헌 기자


ⓒ 김창헌 기자

반지락만큼이나 남창장을 풍성하게 하고 있는 것이 소라와 비틀이. ‘비틀이’는 소라와 비슷하지만 몸통이 더 가늘고 꽁무니가 더 길게 빠졌다. 그 모양새가 예뻐 많이 찾을 것 같은데 사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죽 끓여 먹어도 맛있고, 날로 먹으면 고소한 맛이 그만인데 조금 위험하다. 알맹이에 있는 노란색의 골을 제거하고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거나 복통이 오기도 한다. “근게 관광객들한테 권하지를 못해. 골만 띠고  묵으믄 아무렇지도 않은디, 혹시나 아퍼불까봐. 오래된 놈 팔았다고 오해받기 쉽제.” 

게는 뻘떡기와 화랑기가 나왔다. 뻘떡기는 ‘뻘’에 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독기’라고도 하는데 뻘에 있는 독 밑에 살기 때문. 성질이 사나워 장갑 하나만 끼고 잡으면 손이 ‘아작난다’. 화랑기는 ‘떡기’라고도 하며 뻘 속에 산다.

낙지철 끝나고 오도리(보리새우)철. 남창장은 그 오도리를 구하러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이다. 지금이 막 시작되는 때여서 찾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번 장에는 한 마리도 올라온 게 없다. “앞장날 살짝 나왔다가 들어가 불었어. 연안에 ‘인자 오도리 잡으쇼’ 하고 맛보기 보여주고 다시 빠져불었어. 8월 말이나 돼야 올라올 것 같어.” 안평리에서 오도리잡이를 하는 고선애(62)씨 말이다.

해남은 숭어, 완도는 돔, 영암은 껄떡…
“이게 뭐예요?” 물어보는 사람이 많다. 어물 상인이 이름을 가르쳐 줘도 다들 얼른 못 알아듣는다. “목떼기?”

좁은 대야 속에서도 한 번씩 헤엄이 시원하다. 몸에 누런 빛의 반점이 여러 개 있어 더 예뻐 보이는 ‘목떼기’는 ‘목탁가오리’. 큰 강 하구의 뻘이나 모랫바닥에 살며 새우, 게 등을 주로 먹고산다.
맛은? “간재미보다 훨씬 찰져.”


▲ 갈치조림과 고등어조림에는 호박이 제격.
ⓒ 김창헌 기자

그러나 목떼기 먹으려면 상당한 공력이 필요하다. 간재미는 신문지로 쓱쓱 문질러 곱(겉에 있는 끈적끈적한 액체)만 없애고 썰어 먹으면 되지만 목떼기는 간재미보다 껍질이 훨씬 두껍다. 신문지로는 안 된다.

“주전자에 물을 팔팔 끓여갖고 일단 요놈에다 조금씩 부어. 그러면서 수세미로 문질러. 한 껍딱 벗겨노믄 쓸개 빼고 다 묵어. 버릴 게 없어. 회로 묵으믄 간재미보다 살이 많은게 씹는 맛이 더 나고. 살짝 말려갖고 찜을 하믄 그렇게 맛나고. 묵어봐야 이놈 예쁜 줄 알제.”
강진에 살며, 강진장 해남장 완도장 남창장 등을 돌며 생선 장사를 하는 김창주(60)씨는 그동안의 장사 경험으로 지역마다 생선 먹는 것도 다르다고 말한다.

“해남 여그는 숭어를 좋아라 한디 영암 사람들은 숭어 잘 안 묵어. 껄떡(농어)을 잘 묵제. 해남은 껄떡 잘 안 묵고. 해남에서 껄떡 한 마리에 천원에 내놓아도 안 사간디 영암에서는 이천원에 내놓아도 사가. 보성하고 벌교는 장대를 알아주고 여수는 민어에 환장하고. 완도 사람들이 제일 비싼 생선을 잘 묵제. ‘썩어도 돔’이라고 돔이 고기의 왕인디 완도에서 팔리제, 딴 데서는 안 팔려. 완도에서 돔 열 마리 팔믄 해남에서는 두 마리나 팔제. 완도 사람들은 잔치할 때 문어가 꼭 들어가네. 해남 사람들은 하는 사람 있고 안 하는 사람 있는디 완도에서는 문어 안 올리면 욕 얻어먹어. 그런 거 보믄 재밌어.”

다 바다의 영향 때문이다. 그 지역 바다에 나는 생선의 입맛에 길들여진다는 것. “영암은 수심이 얕으니까 껄떡이 많이 걸리고, 완도는 수심이 좋으니까 돔 같은 비싼 고기를 잘 먹제. 병어는 전라도에서는 대접받지만 경상도에서는 제상에도 안 올려. 전라도는 제사상에 올리는 탕으로 명태를 쓰는디 경상도는 오징어를 써. 바다에 매여 있는 거여.”

김창주씨가 알려주는 생선회 맛있게 먹는 방법 하나. “포 떠 갖고 얼음물에 1분 정도 담갔다가 묵으믄 훨씬 쫄깃쫄깃 해.”


▲ 살란 끝내고 살이 오른 문어. 방금, 막, 잡아왔다. 먹물을 쏟아낸다.
ⓒ 김창헌 기자

“어물이 하도 좋은게 금방 팔려불어서 ‘허망한 남창장’이여”

‘허망한 남창장’이라는 말이 있다. 박덕자(66)씨는 “옛날에는 남창장이 없다시피 했어. 한 시간 서고 끝나불었제. 그런게 허망한 남창장이라고 했제” 라고 한다.
다른 의견도 있다. 김영우(72) 할아버지는 “남창장 어물전이 좋잖여” 하며 말을 꺼낸다. “남창장 어물전 좋단 말 듣고 외지사람이 남창장을 찾아오는디, 어물이 하도 좋은게 금방 팔려불고 어물전이 일찍 끝나불어. 근게 고기 구경도 못하고 허탕치고 돌아가. 그래서 허망한 남창장이라고 한 거제.”

향토사학자 최종관(68)씨에 따르면 남창장은 1943년 무렵 이 지역 소방대원이었던 강철신 최석기씨 등이 주축이 돼 장이 세워졌다. 송지장 원동장 좌일장 등 주변의 장이 대부분 십리 밖이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었다. 80년대 전까지만 해도 장이 오전 10∼11시까지 반짝 서고 마는 장이어서 ‘허망한 남창장’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허망한’이라는 말 속에는 남창의 그 당시 상황이 담겨 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한강철교를 옮겨 조립한, 국내 최초의 연륙교량인 ‘완도교’. 완도를 코앞에 두고 있던 남창은 완도가 연륙이 되며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걷는다. 최종관씨는 “남창이 완도 관문 역할을 하며 완도 사람들이 거쳐가던 곳이었는데 연륙교가 나며 남창은 그냥 지나쳐 가버린 곳이 됐다”고 말한다.


ⓒ 김창헌 기자

넓적한 자연석이 선창 역할을 하던 남창포구도 상황이 달라졌다. 고등어 준치 은상어 삼치 갈치 고등어 등 고깃배들이 들어와 경매입찰을 하고 산간으로 올려 보냈던 포구. 완도교가 생기며 해산물은 더는 남창포구로 들오지 않았다. 완도항을 거쳐 완도교를 지나 13번 국도를 타고 전국으로 직송됐다.

남창과 완도 사이에 있는 섬이 달도. 완도교 완성에 앞서 일차적으로 완성된 남창과 달도 사이의 남창교 또한 남창의 쇠락을 부채질했다. 남창교의 건립방식이 물길이 흐르지 않는 둑 방식으로 만들어져 김과 톳 양식으로 번창했던 남창 바다가 죽었다.

“돛대 단 중선배들이 들어와서 파시를 열고 염장하는 집도 셋이나 됐었어. 목포 부산으로 가는 배가 여기 닿아 쌀을 부산으로 실어 날랐고 부산항에서 무역으로 들어온 물품이 남창에서 풀렸었어. 그런디 완도가 육지가 되면서 싹 사라져 불었어.”


ⓒ 김창헌 기자
관광객들 발길 이어져…해지도록 보는 ‘골장’

남창장은 80년대 이후 기세를 편다. 남창은 해남과 강진, 완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상업을 주업으로 삼아 성장하게 된다. 북평, 북일, 송지의 싱싱한 해산물이 남창장으로 모이며 어물전과 갯것전(조개, 파래, 개, 굴 등을 파는 가게)이 다른 장에 비해 크게 형성된다. 완도를 통해 제주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을 비롯한 관광객들이 들렀다 가는 명소가 된다.

최종관씨는 “남창 시내가 전부 장이었다. 장이 남창농협 앞에서 섰는데 상인들이 달도 앞까지 늘어서서 장사를 했다. 인근 바닷가 사람들도 고기와 조개를 장에 가져왔고, 찾는 사람도 갈수록 늘어났다.”

최씨는 장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이유 하나가 주민들의 시장을 살리려는 욕구였다고 한다. 복잡한 교통체증지역도 지역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단속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장을 유지하기로 한 것.

남창장은 싸전도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완도 본섬을 비롯한 청산도 추자도 등 섬 사람들이 장을 찾아 곡식을 사갔기 때문이다. 특히 청산도 추자도 사람들은 곡식과 지붕을 이을 짚, 고기, 공산물을 사가려고 바다에서 잡은 멸치를 남창장에 유통시켰다.
지금 남창장 분위기는 다른 오일장과 사뭇 다르다. 주민들이나 상인들이나 앞으로 더욱 번창해 나갈 것이라 믿고 있다.

거기에는 예전의 명성을 잇고 있는 어물전이 그대로 성시를 이루고 있고 무엇보다 4년 전 마을에서 나와 길가로 옮긴 새 장터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완도로 드는 단 하나의 길목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장이 갈수록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주말 매상이 확연히 다른 곳이 남창장이다.

어물상 김창주씨는 “남창장도 ‘골장’(해지도록 보는 장)이나 다름없다. 최근 완도를 비롯해 해남 관광객들이 늘며 완도장 강진장 해남장 못지않게 장 위세가 커졌다. 상인들도 손님 없는 날에도 오후 2시까지 자리를 지키기로 약속하는 등 어떤 장보다 장을 활성화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남창장 자체가 관광지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와서, 구경해 보시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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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8-09-24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도에서 가까운 곳이라 지나가다 여러 번 들렀던 곳이랍니다.
완도 오일장보다 훨씬 정겨운 맛이 있었어요.

유니버시 2009-02-03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글을 쓴 사람 인물도 이쁠거여

남창처자 2010-12-0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고향이 보이니까 정말좋네요.오늘 장날이라 엄마에게 매생이 굴 뻘떡기(돌게) 사서 보내라고 햇는데
30년전에 아침먹기전에 장본것들 들어다 집에두고.4교시 방과후엔 장이파장했는데 그때 국화풀빵 맛나씀니다
지금은 늦게까지 장이서데요.아~ 가고싶다.눈물이왜 나려고 하는지
낼은 매생이 국 맛나게 먹어야지





 

“오늘처럼 괴기 싸게 먹는 날 없을 것이요”
진도 오일시장
김창헌 기자  
 
 


▲ “아짐, 이 놈 어찌요.”
ⓒ 김창헌 기자

다시 만났다. 나보다 아줌마, 할머니가 먼저 알아본다.
“오메, 이 총각(?) 또 왔네.”
작년 이맘때, 십일시장(4·10일)에서 만났던 어물전 사람들이 이곳 오일시장(1·5일)에서도 좌판을 펴고 있다.

얼굴 마주하고 있자니 1년 전 ‘추억’이 흘러나온다. “간재미 맛나게 썰어 묵었제. 간재미 생각나서 또 왔는가.”
‘진도까지 와서 간재미 안 먹고 가면 서운하다’며 상추쌈 해서 입에 넣어주던 그 맛. 소주 한 잔, 달았다.

장 파하고 옛날처럼 ‘한 판’ 벌이기로 했다. 이번에는 간재미 대신 ‘낙지’. “별시럽게(별나게) 오늘 낙지가 많이 나왔구만. 낙지 조사불제.”

“별시럽게 낙지가 많이 나왔구만. 낙지 조사불제”
아침밥부터 먹는다.
딱, 아침 6시 정각이다. 시장 앞에 있는 식당 ‘까치주점’의 주인 정일심(58)씨가 “밥들 묵어라” 하고 고함을 친다. 몇몇 상인들도 식당으로 들어서며 “아, 싸게싸게(빨리빨리) 달라들어” “늙은 언니야 언능(얼른) 온나” 하며 불러들인다.

새벽 2시, 3시에 물건 꾸려 달려온 고단함. 대부분의 시장 상인들이 이 식당에서 아침 요기를 한다. 십여 년 전부터 이리 해왔다고 한다.
남자들은 방으로 들어가고 여자들은 탁자에 앉는다. 한 상인은 밥을 푸기 시작하고, 한 상인은 국을 나르고, 한 상인은 “내 밥 언능 갖과. 나는 배고파 죽겄는게 묵어야 쓰겄네” 하며 재촉을 하고.
3천 원짜리 백반이다. 제대로 얹어 놓은 고봉밥이다.


▲ 쟁반 하나를 다 차지하던 서대가 팔렸다. 싱싱해서, 펄떡펄떡거
려 봉지에 넣기가 쉽지 않다.
ⓒ 김창헌 기자


▲ 요 앞에도 사진작가가 담배 피는 모습을 찍어갔단다. ‘포즈’가
자연스럽다.
ⓒ 김창헌 기자

반찬으로 나온 ‘깡다리(강달이)조림’이 잠시 말썽이었다. “주인장이 내 깡다리를 안 사갔는디, 어찌게(어째게) 요것이 나왔네.” 한 어물상이 주인장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주인장 정일심씨는 “니야 깡다리로 하믄 이 맛이 나겄냐. 니야 깡다리로 하믄 나 욕 바가지로 얻어 묵어야” 하며 거한 입담으로 받아친다. 사람들 웃느라 밥숟가락을 뜨지 못한다.

그러나 요 앞 장날 나온 오징어국 재료는 불만(?)을 터트린 상인 것이었다.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다. 음식 재료 사는 것이 정해져 있다. 이 사람, 저 사람 돌아가며 팔아주는 것이 당연하다. “어쩌다 설거지도 해주고 하는 언니한테는 눈치 나지 않게 갈아주고 하제.” 
식당은 잔칫집이다. 내남없이 말들이 걸다. 주고받는 농이 수준급이다. 웃음소리가 간격을 잘 맞춰 터진다.

“할매들, 혈압약 장전!” 식사 끝나자 주인장이 하는 소리. “저것이 늙은 나를 보꾸네(볶네)” 하면서 나이  든 상인들 모두 커피에 혈압약을 삼킨다.  
아침밥 뜨면서 ‘아, 진도구나!’라고 생각했다. 배추장사가 용달차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어놨는데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진도아리랑〉이다.

배추장사는 “아침부터 힘 빠지게” 시장 상인들을 웃기기도 했다. 용달차 마이크로 ‘동네방송’을 했다. “아아, 알려 드립니다. 두부장시는 차를 얼른 와서 빼주시기 바랍니다. 두부장시 땜시(때문에) 배추장시가 물건을 하차하지 못하고 있사오니 냉큼 달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한 할머니는 말한다. “잡것들, 지랄들 한다. 하하하.”


▲ 딱, 아침 6시 정각이면 이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한다. 제대로 얹어 놓은 고봉밥, 깡다리조림에
금방 비워낸다.
ⓒ 김창헌 기자

“장어국 먹고 나면 다른 것은 맹물에 조약돌 삶은 맛”

본격적으로 장사 채비에 들어간다.
크나큰 서대 한 마리가 스뎅(스테인리스강) 쟁반 하나를 다 차지하고서 펄떡펄떡, 망에서 끄집어 낸 장어는 그 큰 대야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휘젓는 통에 주인장 애간장을 태운다. “12만원(1만2천원)짜리가 곱게 있어야제, 왜 그런다냐.” 손님들이 장어를 곧잘 찾을 때다. ‘숙주에 고사리 넣은 장어국 먹고 나면 다른 것은 맹물에 조약돌 삶은 국맛이 난다’는 말의 때가 시방이다.

아주 작은 것에도 장사 수단이 숨어 있다. 낙지가 담긴 대야에는 갱물(바닷물)을 많이 부으면 안 된다. 낙지가 작게 보인다. 대야 속 고기가 훤히 들여다보여야 팔리는 법, 생물 담긴 대야에 일어나는 물거품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다. ‘새우깡(과자)’이다.

“옛날에는 식용유 및(몇) 방울 떨치고, 명태 창시(창자) 빠트려 갖고 뻐끔(거품)을 없앴는디, 누가 알아냈는가, 요 새우깡 및 개믄 싹 없어져 불어. 요 과자를 기름으로 튀겨논게 그런갑써.”
아홉 시 다 돼서야 장에 손님이 들어선다. 진도의 다른 시장 상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오일시장 상인들도 모두 손님들을 ‘아짐’이라고 부른다. “아짐, 뭐 사러 일찍이 오셨소.” “어이 아짐, 깡다리가 좋아.” “아짐, 까시락장대(크기가 작은 장대) 싸게 가져갈라.”

맨 마지막에 앉아 있는 상인도 목소리를 높인다. 안까지는 채, 열 걸음도 되지 않는데, “안에까지 들어오쇼. 끝까지 와 봐, 아짐. 고기 싸게 줄게. 젤 안에서 본전만 할라네.”
가장 먼저 ‘머리에 돈 문지르고’(마수걸이를 하고 오늘의 운을 비는 행동) 주머니에 집어 넣은 사람은 반지락장사 김하자(59)씨. “아짐은 물건도 잘 보고 사람도 잘 보요. 나 벌포에서 왔소.” 갯바닥 좋은 벌포 반지락이라는 것.

단체 손님이다. 네 할머니 줄 맞춰 온다. 여기저기 ‘아짐’ 소리 터지고 “나도 마수 했어요.” “내가 3등이여” 하는 말들이 나온다.
줄박대, 쉬쉬박대, 질로(제일) 맛있는 참박대가 팔려나가고, 날 좋을 때 말리면 좋을 장대, 거칠조기가 척척 나간다. 하지만 지금 먹기 좋은 병어는 이상하게 인기가 없다.

김하자씨는 “진도읍장에서는 사람들이 사다 묵은디 시골은 ‘쓸라고(제사 지낼려고)’나 사는 괴기(고기)제, 해 묵는 괴기가 아녀.” 옆에서 듣고 있던 박정숙(82) 할머니는 “시엄씨 지사(제사) 모실라고 병어 굵은 놈 8마리를 말려논게, 그렇게 오지던마”라고 말한다.

의신면 송군리에서 뒤늦게 나온 전상규(53)·김말자(49)씨 부부가 어물전 판을 바꾼다. 이강망으로 잡은 고기를 용달차에 싣고 왔다. 오늘 아침에 물 본 것이다. 사람들이 몰린다. “박대가 잘잘하요” 하는 한 할머니 말에 전상규씨는 “아짐, 나도 다 굵은 놈이 (그물에) 들믄 얼매나 좋겄소” 하며 웃어넘긴다.

“(중매상인한테) 넘겨도 이렇게 싸게는 안 팔아봤네. 오늘처럼 괴기 싸게 묵는 날 없을 것이요.” 크디 큰 장대 2마리를 한 할머니가 “큰게 무섭네”하며 사가고, 한 할머니는 차배기(딱돔, 군평선이)를 “내가 미쳤는갑네, 이라고 사게”하며 “내 기운으로 못들” 정도로 많이 사간다.


▲ ‘내 아들’과 동갑이라며, 고생한다고, 사탕 한 봉지를 사서 내 손에 쥐어준 할머니.
ⓒ 김창헌 기자


▲ “가만있어. 사진 한나(하나) 찍고.”
ⓒ 김창헌 기자

“오징애 장담하고 있네”

“병어 입이 왜 작은 줄 알어.”
‘입맛 다실 놈’, 깡다리를 사러 온 이숙자(71) 할머니가 낸 문제다. 할머니의 그럴 듯한 설명에 어물전 상인들도 재밌어 한다.

“지지리도 못생긴 아구(아귀)가 그 큰 입을 벌리믄서 병어 보고 ‘나하고 결혼하자’ 그런게 이쁜 병어가 (입을 조무리며) ‘애해해해, 안 해야’ 그랬다요. 이쁜 모델보고 결혼하잔게, 연애하잔게…. 쟈(병어)는 귀생이고, 요런 것(아귀)이 결혼하잔게, 주딩이 모으믄서 파∼, 언짢아 하제.”

‘오징애 장담’이라는 것도 있다. 허풍이 심한 사람을 보고 ‘저것 오징애 장담하고 있네’ 하는 말을 한다. 갑오징어의 생김새와 습성 때문에 나온 말이다.
“쟈(갑오징어)가 이런 말을 해. 내가 바람이 불믄 ‘널(널빤지)’이 없냐, ‘닻줄’이 없냐, ‘버리’가 없냐, 대가리가 터지면 ‘된장’이 있고. 그런 말을 쟈가 한디, 바람 불믄, 파도 치믄 젤 먼저 밀려오는 게 오징애거든. 옛날에는 바람 씨게(세게) 불믄 오징애 주스러(주우러) 댕기고 그랬어.”

‘널’은 갑오징어 등면에 있는 납작한 뼈(갑, 甲). ‘닻줄’과 ‘버리’는 갑오징어 열 개의 다리 중에 유난히 긴 두 개의 다리(촉완(觸腕)). ‘된장’은 갑오징어 내장 속에 든 노란 영양분.
“그런 말도 있는디 이런 말도 있어” 하며 김춘아(70) 할머니는 또 다른 ‘오장애 장담’을 얘기한다.
“오징애가 그래, 나(갑오징어)는 죽으믄 널(관(棺), 납작한 뼈)이 있고 바람이 불믄 닻줄(긴 다리)이 있고 글씨(편지)를 쓸라믄 먹(먹물)이 있다.”

갑오징어의 먹물은 ‘싱싱함’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먹물을 흥건하게 쏟아내야 ‘막 잡아온 놈’이다. 그래서 상인들 사이에선 다른 상인들에게 먹물을 얻으러 다니는 일도 벌어진다.


▲ “앵길 사람은 다 앵겨.” 오일시 터주대감이다. 말 붙이지 않아도 손님이 온다. 여유가 있다.
ⓒ 김창헌 기자

“머슴아 기는 큰 발이 있고 가시나 기는 없고”

마늘이 많이 나왔다. 용달차로 채소를 파는 젊은 부부는 동종 업계 할머니들에게 요즘 마늘 양파 배추 시세 등 유통정보를 건네주기도 한다. 오늘 오일시장에 사람이 좀 보이는 것은 모내기 끝내고 잠시 숨 돌릴 때이기 때문. 옷전 상인도 “오서 옵쇼” 하며 목소리가 밝다.

대야에 화랑기(칠게)만 잡아와 파는 사람이 여럿 있다. 마늘장사 옆에, 염장미역 파는 할머니 옆에, 조선고구마줄기 파는 아줌마 옆에, 다른 상인들 틈에 끼어 장사를 한다. “큰어리굴기∼(큰어리굴에서 잡은 게)” 하며 바닷가를 내세우기도 한다.
“진도 사람들은 (화랑기를) 갈아 갖고 청양고추 넣고 젓 담아 묵고 이대로 양념해서 묵기도 하고 화랑기 하나는 잘 묵어.”

벽파리에서 온 손예자(69) 할머니. 한 아줌마가 화랑기 잡은 수고를 전하며 값을 묻는다. “이 놈을 잡을라믄 몇 구녁을 쑤셔야 한디, 많이도 잡았네. 나도 잡아봐서 알어. 이것도 잡을 줄 아는 사람이 잡제, 못 잡는 사람은 넘(남)의 집만 때려붓고 있어.” 

‘가시나 기(암게)’가 있고 ‘머슴아 기(수게)’가 있다. “가시나 기만 주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머슴아 기는 큰 발이 있고 가시나 기는 없고.” 가시나 기를 찾는 것은 머슴아기보다 훨씬 부드럽기 때문. 그러나 좀 뻣뻣한 ‘머슴아 기’를 주라는 사람도 있다. “머슴아 기는 밀가루 묻히든가, 마른가루(빵가루) 입혀갖고 기름에 튀겨 묵으믄 파삭파삭하니 맛있어.”
 

▲ 줄 맞춰 집으로. '빠마'는 누가 풀어주나?
ⓒ 김창헌 기자


▲ 장날, 우연한 만남이 많다. “소주 한잔 하러 가세.”
ⓒ 김창헌 기자

“옛날에는 괴기 주고 쌀로 바꿔갔제”

오일시장은 고군면에 서는 장이라서 ‘고군장’이라고도 하나 이곳 사람들은 ‘오일시’라고 부른다. ‘오일시’는 열흘에 한 번 끝자리가 5일인 날에 장이 선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 ‘오일시’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는 ‘닷새장’이라고 했다.
임회면에 서는 십일시장처럼 오일시장도 닷새마다 열리는 장이 아니다. 1·5일로 끝나는 날에 서는, 나흘과 엿새의 간격을 두고 선다.

문헌의 기록으로만 보면 오일시는 1830년 전후에 생겨난 장이다. 18세기 진도에는 읍내장과 임유장(임회장, 십일시장)이 가장 먼저 나타나고, 1830년에 편찬된 《임원경제지》에 읍내장(2일) 임유장(7일)과 함께 의신장(10일, 돈지장)과 고군장(5일, 오일시장)이 보인다.

열흘마다 열리던 장이 오일장으로 발전하며 오일시장을 비롯해 진도의 장들은 장 날짜의 혼돈을 겪는다. 오일시장이 정석대로라면 5·10일로 자리매김해야 하지만 읍내장이 2·7일로 발전하며 나머지 장들은 읍내 장날을 피해서 설 수밖에 없었다. 오일시장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컸던 십일시장이 4·10일로 정해지고 오일시는 1·5일로 정해진 것이다.

현재에 와서, 이런 오일시의 장날은 1·6일 장이 서는 돈지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치적으로 가까운 두 장의 장날이 겹치며 규모가 작은 돈지장은 6일에만 장이 서는 꼴이 되어버렸다. 의신면 향교리에 사는 박정숙(82) 할머니는 “1일(로 끝나는) 장날에는 장사꾼들이 오일시로 가버리니까 돈지장에는 (상인들이) 두 명이나 시(세) 명이나 앙거(앉아)있어”라고 말한다.

오일시의 옛 모습은 어땠을까? 군내면 상가리에 사는 양경휘(78) 할아버지는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장이 없었어. 소전 돼지전 닭전이 좀 섰지, 이런 잡화상들이 있었가니. 나 군대 갔다 오니까 여그에 장이 서고 있던마”라고 말한다.

문감단(75) 할머니도 “옛날에는 골목장도 안 됐어. 소전 있은께 술집이 좀 있었고 사거리에 점빵 있어 갖고 거기서 장사를 했제”라고 말한다.

양경휘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오일시장은 시장으로서 기능이 크지 않았다. 원포 벌포 모세미 등지에서 고기잡이가 성해 그쪽 아낙네들이 고기를 팔러 다렸으나 장에서는 거래되지 않았다. “개인 집으로 댕겼어. 판자 둥그렇게 엮어서 물 안 새게 솔껍질로 틈새 메워갖고, 그러게 통을 맨들어갖고 이고 다니믄서 폴았제. 대로 엮은 조락(종다래끼)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폴기도 하고. 그때는 괴기 주고 쌀로 바꿔갔제.”

일제 강점기에는 소금 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정시대에는 일본사람들이 ‘독재’를 했는게 철저히 단속을 했어. 아무나 사고 폴지를 못해. 근게 야매(몰래 사고 파는 것)로 소금을 얻었제. 고군 벽파리, 군내 한의리에 염막이 있었는게 밤에 지게 지고 그리 가서 사와. 산길로 오다가 순경 나타나믄 숨겨놓고, 걸리믄 잡혀가고.”


▲ “하하, 외통이다.” 장기판은 장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다.
ⓒ 김창헌 기자


▲ “집에 가믄 뭐해. 놀 때 놀고 노닥거릴 때 노닥거려야지.”
ⓒ 김창헌 기자

“곡식장시가 겁나게 많았제”

종합해 보면, 오일시장이 장으로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쯤으로 보인다. 오일시가 사람들을 불러들일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교통의 힘이 크다. 1929년 오늘날 국도 18호선의 기반이 되는 군내선(진도읍-오일시-녹진)과 군도가 교차하는 길목으로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편리했다. 

특히 1984년 진도대교가 세워지기 전에는 뭍에서 진도로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차량과 물자가 해남 삼지언과 진도 벽파항 뱃길을 이용했기 때문에, 바로 길목에 있는 오일시장 또한 번성할 수 있었다.

오일시리 박창준(80) 할아버지는 “아조(아주) 옛날에는 장이라고 해도 십여 집이나 살았는디, 장이 활성화된게 동네가 커졌어. 벽파항이 바로 요 앞이여. 거기서 도선이 댕긴디, 그리로 가는 차들이 동네 가운데로 댕겼는게 촌장이 촌장이 아니었제”라고 얘기한다.

이러한 교통의 여건은 우시장의 세(勢)에서도 나타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하루 나오는 소의 수가 20두 정도로 읍내장(30두) 다음으로 많았고 돼지 수는 250두 정도로 진도 안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오일시장의 가장 큰 거래물품은 쌀과 잡곡이었다. 예부터 ‘한 해 농사로 3년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는 진도, 곡물 생산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오일시리는 진도의 출입로인 벽파항의 어귀로 뭍과 섬의 거래가 이뤄질 수 있는 하나의 통로 역할을 했다.

고성리 곽향만(70) 할아버지는 “곡식장시가 겁나게 많았제. 되거리상인(되넘이상인, 물건을 사서 다른 곳으로 넘겨 파는 상인)이 스무 명이나 있었는게. 지방상인(되거리상인)들이 장에 나온 쌀 콩 팥 쑤쑤(수수) 조 같은 것 싹 걷어놓으믄 육지상인들이 차 가지고 와서 싹 실어 가”라고 말한다.


ⓒ 김창헌 기자


ⓒ 김창헌 기자

진도대교가 세워진 이후에도 오일시장은 진도의 통로 역할을 그대로 해내며 장세를 과시할 수 있었으나 2003년 고군면 둔전리와 진도읍을 잇는 터널이 생기면서, 주도로인 18호선의 국도가 우회하게 되고, 인구 감소와 진도읍과의 접근성이 좋아지며 점차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읍장인 진도장 다음으로 큰 십일시장과 그 장세를 당당히 겨루며 시끌벅적하게 오일장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곽향만 할아버지는 ‘고군’이라는 면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며 오일시장의 ‘힘’을 얘기한다. ‘고군면(古郡面)’은 ‘오래된 군’이라는 뜻이다. 백제시대 현재의 고군면 일대는 인진도군(因珍島郡)으로 진도에서 유일한 군이었다.

“고려 때 진도읍성이 여가 있었어. 여가 진도의 도읍지였제. 그 기운으로 장이 생기고 시방도 되고 있는 거제. 알고 보믄 우리 고군이 시방도 진도를 대표하고 있다고 봐야제. 진도 구기자가 우리 마을 고성리에서 퍼져 나가서 번창했고, 회동리 앞바다(신비의 바닷길)가 외지 사람들 다 불러들이잖애. 근디 늙은 사람은 죽고 젊은 사람은 없고, 갈수록 외로워진게 큰일은 큰일이여.”
장은 오전장이다. 점심때가 되기 전에 장꾼들은 짐을 싼다. 어물전도 대야 쟁반을 정리하느라 어수선하다.

‘한판 벌리자’고 아침에 나왔던 얘기처럼 낙지 다섯 마리 썰었다. 수박장사가 와서 ‘후식’이라며 수박 한 덩어리 갈랐다.
“인자 진도읍장에서 봐야 쓰겄구만. 거기도 잘 노는 사람 많애. 뭣을 썰든 갈라 묵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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