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벽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김석희 옮김 / 마운틴북스 / 2008년 5월
품절


우오즈는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쭉 펴고 눈을 감았다. 여전히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우오즈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생각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새각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내일은 설날이다. 지금쯤 집에서는 설날을 맞이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부엌과 마당을 들락거리며 바삐 일하고 있을 어머니의 모습, 새해맞이 술을 마시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 꼬박 1년 동안 만나지 못한 두 동생. 그리고 회사, 하숙집...
그러나 우오즈는 겨울 산에 올라와 있는 동안은 언제나 그렇듯이, 되도록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려고 산에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오직 산에 오르기 위해 산을 찾아온 것이다.-117쪽

술에 취하면 언제나 뒤플라의 <만약 어느 날>을 낭독하곤 했어.

만약 어느 날 내가 산에서 죽게 되면
자일로 맺어진 오랜 친구인 자네에게
이 유언을 남겨두겠네.
우리 어머니를 만나서 전해주게.
내가 행복하게 죽어갔다고.
내 마음은 언제나 어머니 곁에 있었기에
조금도 괴롭지 않았다고.
아버지한테 말해주게. 나는 어엿한 사나이였다고.
아우한테 말해주게. 이제 바통을 넘긴다고.
아내한테 말해주게. 내가 아내 없이 산에서 살아왔듯이
내가 없어도 꿋꿋하게 살아가라고.
자식들한테 전해주게. 애탕송 계곡의 암벽에서
언젠가는 내 손톱자국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그리고 나의 벗 자네한테도 부탁이 있네.
내 피켈을 거두어주게.
이 피켈이 치욕스럽게 썩는 걸 바라지 않네.
등산로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없고 전망 좋은 비탈에 가져가서
오직 이 피켈만을 위하여 작은 돌무덤을 쌓고
그 위에 피켈을 꽂아주게.
빙하를 비추는 아침 햇살에 빛나고
산마루 너머의 핏빛 석양을 받을 수 있도록.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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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구판절판


김선배는 당신 스스로 로프를 끊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확실히 느낀다.
그 사고의 충격으로 산행을 하지 못했던 지난 십여 년간, 김선배의 추락을 직접 목격한 공포감 때문에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알 것 같은 게 아니라 확신이 든다. 나를 살리기 위해 로프를 끊고 있는 김선배의 손이 보이는 듯하다. 널 저승길까지 데려가진 않겠어. 소리쳐 말하는 김선배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208쪽

돌이켜보면, 내가 일상적인 삶을 택해 클라이머의 꿈을 접은 것도, 그 일상의 길에서 따뜻하고 성실하게 일구고 싶었던 가정생활, 사회생활에의 적응에 계속 실패해온 것도, 그 모든 연원은 김선배의 추락사다. 나는 김선배의 추락 이후 피나게 노력했지만 결국 아무것에도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판사판이다. 김선배를 넘어서지 않고는 앞으로의 삶도 그럴 게 뻔하다. 무슨 일을 해도 텅 빈 사막 같은 삶만이 계속될 터이다. 애당초 촐라체 북벽을 선택해 온 것도, 이 성공을 밑거름 삼아, 다음엔 혹독하기 이를 데 없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으로 김선배를 찾아 떠나고자 한 은밀한 소망 때문이 아니던가. 김선배를 넘어서야 비로소 살아 있는 것처럼 살 수 있다. 그것은 확실한 결론이다. 그런데 그 김형주 선배가 저기, 설연이 날리는 촐라체 위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214쪽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가리키는 '히미아(Himia)'와 보금자리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합성어로 '눈의 보금자리'라는 뜻이었다. 서쪽 끝의 낭가파르바트에서 동쪽 끝까지 장장 2500칼로미터나 뻗어 있는 히말라야는 8천 미터 이상 되는 고봉 14개를 비롯해 수많은 설봉들을 품고 있는 지구의 등뼈로서, 아직도 대부분 사람의 발걸음을 허용하지 않는 죽음의 지대, 혹은 불멸의 초월적 상징으로 드높이 솟아 있었다. 수천의 봉우리 하나하나가 그대로 다 하나하나의 별과도 같았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곳은 죽음의 지대이면서 죽음을 넘어선, 살아 있는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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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전에 읽은 책인데 기억에 깊이 남아있지는 않다. 하지만 다시 읽어본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 소설의 미덕은 아름다운 묘사만이 아니다. 아마도 가장 큰 매력은 청소년들의 심리와 감정을 자극적이지 않은 어조로 가슴 뭉클하게 그려낸다는 데 있을 것이다. 청소년기라는 독특한 시기를 판타지적 요소와 버무리는 게 이 작가의 특징이라던데... 이 소설 역시 그 기대감을 제대로 충족시켜준다.'

공감할 만한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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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세상을 탐하다 - 우리시대 책벌레 29인의 조용하지만 열렬한 책 이야기
장영희.정호승.성석제 외 지음, 전미숙 사진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7월
절판


(정은숙) 그렇다. 책 읽기는 즐겁다. 그런데 이 즐거움은 영상매체가 주는 즐거움과는 좀 다른 형태다. 만약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재미없다고? 그럼 치우고 다른 책을 읽기로 하자. 지금 재미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그렇다면 책을 펴라. 바로 그 책이 그대를 지겨움과 귀차니즘의 세계에서 재미와 건강한 노동에 대한 환기를 불러올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잡스런 상념들이 엄습해 온다고? 그렇다면 그 상념을 따라가도 좋다. 상념들 가운데도 건설적인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책 읽기를 풍부하게 할 수도 있다. 그 상념 끝에 우리는 우리 현실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직간접적으로 자신이 보지 않은 것은 잘 상상할 수 없다.-20쪽

(송경아) 처음 만나도 최근 개봉한 영화 한 편을 보고 같이 이야기할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처음 만난 사람과 이야기를 맞춰 보다가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까지 공유하게 되는 경우는 언감생심이다. 한때는 책 안 읽는 것이 창피스러운 일인 시절이 있었지만 요즘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는 순간은 여전히 풍요롭지만, 그 감격 그 느낌을 같이 나눌 친구를 찾다 보면 어느새 가난해진다.-56쪽

(허병두) 도서관은 그러한 책과 인간이 만들어낸 위대한 발명품이다. 도서관은 만들어지자마자 모든 책들을 폭발하듯 잉태하고 출산하며 인류를 거듭 창조해왔다. 동굴 벽면에서 시작하여 종이 지면 시대를 거쳐 이제 모니터 화면으로 도서관은 성장해왔다. 이제 다시 도서관은 인간의 뇌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인간과 우주와 책은 도서관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도서관은 단지 책이 모아져 있는 곳이 아니다. 도서관은 인간과 우주와 책을 부화하는 거대한 자궁이다.-66쪽

(김상욱) 이번주 강의 시간에도 나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마지막 장면에 왜 학생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책상에 올라갔을까? 도대체 책상에 올라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어떤 학생은 '책상에 올라간다는 것은 벌을 선다는 것을 뜻하니, 쫓겨나는 선생님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들을 벌주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함으로써 기존의 질서를 뒤집기 위해서였다'고도 했다. 물론 기대하던 답을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다른 눈으로 세상과 사물을 보기 위해서였다'고.-74쪽

(서정오) 소주 3병, 안주 1접시, 커피 2잔, 피자 1판, 화투 4목, 사설놀이공원 입장권 1장, 한물간 피시게임타이틀 1장... 이 물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얼추 1만 원 안팎으로 살 수 있는 것이고, 대개 책 한 권 값과 맞먹는다.
책 한 권 값과 맞먹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또 이런 것도 있다. 성인오락실에서 5분쯤 놀기, 찜질방 가서 찜질하고 주스 1잔 마시기, 손전화로 노래 20곡 다운받기, 지하상가에서 손톱 다듬기, 노래방에서 1시간 동안 노래 부르기... 그러고 보니 책 한 권 값은 그대로 싼 편이다.-97쪽

(도정일) 천사가 그리워하면서도 결코 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죽는 일, 곧 유한성의 경험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알고 자신의 죽음을 예기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유한성을 의식할 뿐 아니라 그 의식을 의식하는 자의식의 존재다. 의식이 의식과 대면하고 자의식이 동시에 자신을 성찰하고 객관화하는 사건은 인간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유한성의 존재이면서 또 인간은 유한성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기억과 상상을 용접한다. 과거와 미래를 접목시키는 동물계 유일의 시간 형식을 인간은 갖고 있다. -104쪽

인간의 뇌는 애초부터 책 읽으라고 설계된 것은 아니다. 문자가 등장한 역사는 6,000년, 지금 같은 종이 인쇄책의 역사는 600년에 불과하다. 자연 선택이 사냥과 채집 등 인간종의 생존에 필요한 다른 여러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설계한 뇌건축물의 부수적 파생효과 가운데 하나가 책을 쓰고 읽는 기능이다.
말하자면 그 능력은 덤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덤'이 참으로 중요하다. 책 없이도 인간은 기억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표현한다. 그러나 책과 책 읽기는 인간이 이 능력을 키우고 발전시키는데 중대한 차이를 낸다. 최근의 뇌과학적, 생물학적 연구조사들은 읽기 행위가 만들어내는 이런 '차이'의 존재와 크기를 거듭 확인시켜주고 있다. 책을 읽는 문화와 책을 읽지 않는 문화는 기억, 사유, 상상, 표현의 층위에서 상당히 다른 개인들을 만들어내고 상당한 질적 차이를 가진 사회적 주체들을 생산한다.-110쪽

(이병률)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읽은 책을 또 읽는 사람의 옆모습이다. 두 번도, 세 번도 읽을 수 있는 만큼 읽는 것. 그리고 그 책을 다 읽었으니 더는 읽지 않겠다며 멈추거나, 그치지 않는 사람. 책을 마치 소중한 사람처럼 아낄 줄 알며 다룰 줄 아는 사람. 자신은 비록 귀퉁이가 낡고 헐은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군가를 위해 수도 없이 그 책을 사서 건네주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무엇이 와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다. 그 뭔가로 뭉쳐져 이미 강해진 사람이다.-116쪽

(안찬수) 독서 삼매경이라는 말의 매력은 여전하다. 석 삼 자에 새벽 매 자를 쓰는 한자어 삼매라는 말이 흥미롭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인 사마디의 음역이라는 것인데, 마음을 오롯하게 모은 상태를 말한다. 그냥 한곳에 모은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비뚤어지는 것을 바로 잡고, 마음을 하나로 응결시키는 것이다.-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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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집쟁이들
박종인 글.사진 / 나무생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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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라, 사람들아. 금강산이 그리운 사람들아, 보아라. 누구나 가슴속에 그리움을 묻고 살지만, 그녀만큼 세상이 그리운 사람이 어디 있으랴. 어둠을 떨쳐내고 그녀가 노래를 한다. 이제 시작이다. 지금도 비록 여전히 곤궁하지만, 어둠은 가라.'

이소영님을 취재한 저자 박종인의 글이다.

이 글만큼 이 책을 제대로 설명하는 말을 나는 찾지 못했다.

혹여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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