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구판절판


김선배는 당신 스스로 로프를 끊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확실히 느낀다.
그 사고의 충격으로 산행을 하지 못했던 지난 십여 년간, 김선배의 추락을 직접 목격한 공포감 때문에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알 것 같은 게 아니라 확신이 든다. 나를 살리기 위해 로프를 끊고 있는 김선배의 손이 보이는 듯하다. 널 저승길까지 데려가진 않겠어. 소리쳐 말하는 김선배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208쪽

돌이켜보면, 내가 일상적인 삶을 택해 클라이머의 꿈을 접은 것도, 그 일상의 길에서 따뜻하고 성실하게 일구고 싶었던 가정생활, 사회생활에의 적응에 계속 실패해온 것도, 그 모든 연원은 김선배의 추락사다. 나는 김선배의 추락 이후 피나게 노력했지만 결국 아무것에도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판사판이다. 김선배를 넘어서지 않고는 앞으로의 삶도 그럴 게 뻔하다. 무슨 일을 해도 텅 빈 사막 같은 삶만이 계속될 터이다. 애당초 촐라체 북벽을 선택해 온 것도, 이 성공을 밑거름 삼아, 다음엔 혹독하기 이를 데 없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으로 김선배를 찾아 떠나고자 한 은밀한 소망 때문이 아니던가. 김선배를 넘어서야 비로소 살아 있는 것처럼 살 수 있다. 그것은 확실한 결론이다. 그런데 그 김형주 선배가 저기, 설연이 날리는 촐라체 위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214쪽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가리키는 '히미아(Himia)'와 보금자리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합성어로 '눈의 보금자리'라는 뜻이었다. 서쪽 끝의 낭가파르바트에서 동쪽 끝까지 장장 2500칼로미터나 뻗어 있는 히말라야는 8천 미터 이상 되는 고봉 14개를 비롯해 수많은 설봉들을 품고 있는 지구의 등뼈로서, 아직도 대부분 사람의 발걸음을 허용하지 않는 죽음의 지대, 혹은 불멸의 초월적 상징으로 드높이 솟아 있었다. 수천의 봉우리 하나하나가 그대로 다 하나하나의 별과도 같았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곳은 죽음의 지대이면서 죽음을 넘어선, 살아 있는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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