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밥 숟가락 놓자 밖에서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마을 할머니들이 차를 부탁하신다.
어두운 밤길을 달려 읍내로 나간다.

"하이고 머슬 쪼까 발라야쓰것는디…
낯빤덕이 찢어져불란디."

이곳에 잠자리를 마련한지 3년이 되어가는데
여전히 언어 소통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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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가서 책 세 봉지(!)를 샀다.
점원이 한 권은 덤으로 준다고 셈하지 않았다.
그동안 꼭 사보고 싶었던 책을 구할 수 있었는데, 덤까지 준다니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청어람미디어에서 심혈을 기울인 책 <현산어보를 찾아서>(전5권) 네 권을 구했으니,
그 출판사 매출에도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헌책방이니까...

돌아와 꺼내놓고 한권 한권 다시 들춰보는데,
선수들은 다 안다. 누군가 읽은 책인지, 아닌지를...
두어 권을 빼놓고는
전부 다 새 책이다.
책 외장에 다소 먼지가 뭍은 것을 헌책이라 하는가.
뭍은 먼지야 털고 닦아내면 되는데...
그리고 어쩌면 독자 누군가의 손때 묻은 정취가 그리워
헌책방을 찾기도 하는데...
헌책방의 책들도 대부분이 새책이라는 사실에
한순간 먹먹해지기도 한다.

왜 사놓고 보지도 않는가? 라고 생각하다가
어디 서점 하나가 땡처리했나 하고 생각도 하다가...



친구 어머님 영전에 향불 사르러 단양으로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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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10-31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향에 가면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순례하겠다고 벼르다가 고작 한 군데 허둥지둥 들러오곤 합니다.
퀘퀘한 냄새가 처음에는 반갑지 않지만 한 두 시간 투자하면 절판도서나 품절도서를 횡재하죠.
가슴팍에 책 봉지를 품고 희색을 띄며 돌아오셨을 그림을 제 멋대로 상상합니다.

달빛푸른고개 2008-11-03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다리라면 혹 동인천역에서 약간 떨어진 부근의 책방골목을 말씀하시는지요. 지나가며 그 풍경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헌책방골목의 그 풍경은 아마도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겠지요. 평화시장 근처도 30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듯이..
 

바닷가 아홉 계단의 추억
완도 정도리 구계등
김창헌 기자  
 
 


ⓒ 김창헌 기자

어딘가 삐그덕 여닫는 문이 있을 것 같다. ‘구계등’이라는 한 세상으로 드는 통로가.
완도 정도리 구계등을 찾을 때마다 굳이 길을 조금 돌아서 뒤편 숲길로 드는 이유다. 어둑신한 숲을 걸어들어가노라면 보인다. 숲의 나뭇가지들이 만든 둥근 문.
그 문을 나서면, 환하다. 하늘, 바다, 떠 있는 배, 갈매기, 바람, 갯돌, 솨르르… 솨르르… 갯돌 구르는 소리.

물 속으로 ‘아홉 계단’을 이뤘다. 그래서 구계등(九階燈)이다. 바닷속 깊은 데까지 둥근 갯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바윗돌과 파도가 1만여 년 동안 나눈 사랑
갯돌처럼 둥그렇게 앉아 바다를 본다. 다르르르, 데그르르. 몽돌 구르는 소리가 그래, 그래, 그래… 마음을 다 받아준다.
등 맞대고 어깨 맞댄 갯돌들. 얼마나 부대끼며 살고 나면 저렇게 모나지 않게 둥그러질까. 얼마만큼 파도에 휩쓸려야 저런 한 세상을 이룰 수 있을까.

이 갯돌밭이 생긴 것은 1만여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100미터 이상 내려갔던 바닷물이 올라왔다. 이때 함께 밀려 올라온 바위들이 태풍과 해일에 깨지고 파도에 구르고 굴러 지금처럼 둥근 갯돌이 된 것. 구계등 갯돌은 바위돌과 파도가 1만여 년 동안 나눈 사랑인 셈.
활 모양의 해안선, 파도의 세기가 달라 동쪽 바닷가엔 수박 만한 갯돌이, 서쪽 바닷가엔  주먹 만한 갯돌이 만들어졌다.

구계등 갯돌은 한순간 사라지기도 한다. 둥근 갯돌들이 모두 바다 속으로 떠밀리고 모래밭이 되기도 한다. 2004년 태풍 ‘매미’ 때도 그랬다. 모래해안이 넓게 펼쳐졌다. 갯돌 소리가 사라졌다. 그러나 파도는 또 순식간에 구계등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10여 일 만에 갯돌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 둥근 갯돌들의 세상, 눈보다 귀가 먼저 열린다. 갯돌이 물 속으로 ‘아홉 계단’을 이뤘다 한다.
ⓒ 김창헌 기자

갯돌밭은 ‘하늘이 내린 건조장’

낭장망으로 멸치를 잡는 어부 박영준(43)씨는 갯돌이 바닷속으로 ‘저만치’ 있다고 바다를 가리킨다. 갯돌밭에서 5미터 가량. 그 너머로는 뻘층. “어렸을 때 헤엄치고 놀았슨게 알제. 물이 깊어.”
정도리 아이들에겐 통과의례 같은 것이 있었다. “배로 노 저어 가서 선배들이 저만치에서 빠뜨려 불어. 그러믄 갯돌밭까지 이 악물고 헤엄쳐 오는 거지. 그렇게 한번 하고 나믄 바다가 내 마당이 되제.”

정도리 사람들에게 갯돌밭은 ‘하늘이 내린 건조장’. 새래기(소멸)를 4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잡는데, 이만한 건조장이 없다. 바람 좋고 햇볕 좋고 공기 잘 통하는 갯돌밭에선 푹푹 삶은 멸치가 금방 바싹 마른다. 상품 가치가 훨씬 좋다. 먼지 같은 것 날릴 일 없어 깨끗한 멸치를 얻을 수 있다.
멸치뿐만 아니다. 톳 미역 다시마 파래 청각 등 정도리 사람들은 무엇이든 다 이곳으로 가져와 넌다. 고추 마늘 고구마 등 농작물도 이곳에 말린다. 푸릇하거나 빨간 것들이 널려 있고 고기잡이 그물이 길게 늘어져 있는 풍경, 구계등은 온갖 색으로 어우러져 생기 가득한 바닷가다.

구계등 바다는 가멸다. 수하식 전복, 미역, 다시마, 톳이 자라고 있다. 박씨의 말에 따르면 “수십억 원 어치가 바다에 있다”.

“구계등 물빛은 가을 겨울이 좋다”고 박씨는 말한다. 가을 겨울로 갈수록 물빛이 더 시퍼래진다. “여름물은 못 묵어도 늦가을 겨울물은 아무 물이나 묵어도 된다고 안 그려. 바다도 그려. 봄 여름 바다는 뜬물이고 가을 겨울에는 까랑진(갈아앉은) 물이고. 이것저것 까랑지고 맑은 물만 있는게 시퍼렇제.”

정도리 구계등엔 홀로 선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너른 팔 벌려 구계등의 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정도리 아이들의 착한 심성이 이 나무를 키워냈다. “나 어렸을 때는 참말로 작았어. 저것이 당(당숲)에서 씨가 날아와 자연적으로 난 것인디, 우리 클 때는 내 허리나 닿을까 할 정도였어. 누가 뽑아 불어도 아무 소리 안 했을 것인디, 암도 손을 안대. 지금 생각하믄 그 개구쟁이 시절에 한 놈이라도 지나감시롱 잡아댕겨 불었을 것 같은디…. 저것이 사랑받을 운명을 타고났나 봐.”   


▲ 정도리 사람들에게 갯돌밭은 ‘하늘이 내린 건조장’. 고추가 ‘붉게’ 널려 있는 구계등.
ⓒ 김창헌 기자

“날 궂어질라믄 바다가 조용해도 짝지가 울어”

돌이 샘처럼 고여 있다 하여 ‘정돌리’라 불렸던 정도리. 정도리 사람들에게 구계등은 요목조목 재미진 맛이 있는 곳.
배현숙(55)씨는 전에 구계등이 지금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때, 정도리가 온통 마을 사람들 차지였던 때를 얘기한다.

“날 캄캄해지믄 낮에는 앉지도 못하게 뜨거웠던 짝돌(갯돌)이 누워 있기 마치맞게 식어, 모구(모기)도 없고 별은 많고. 옥수수 감자 땅콩 까먹음시롱 별똥별 떨어지는 거 시고(세고), 청산도 등대불 깜박깜박 거리는 것도 시고. 한번씩 바람 무데기(무더기)로 불믄 그리 시원해. 애들이 돌장난 하믄 되게 뭐라고 허제. 돌들이 모다 둥글둥글한게 어디로 튈지 모르거든.”

구계등은 김치 담그는 장소이기도 했다. “여름에 바닷물에 열무잎 씻어서 김치 담고, 가을배추 씻어서 담고. 김장할 때 절간해야 하잖애. 우리는 그런 것 안했어. 바닷물에 씻으믄 간한 거랑 똑같은게, 물이 깨끗한게 그렇게 해묵었제.”

정도리 아이들의 학교 소풍 장소는 대개 구계등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구계등, 중학교 와서도 구계등. 애기들이 딴 디 좀 가자고 했제.”


▲ 구계등에 가면 둥근 갯돌에, 갯돌모양으로 앉아 바다를 본다. 그 시간이 하염없다.
ⓒ 김창헌 기자

정도리 사람들은 구계등을 ‘짝지’ ‘짝개’라 부른다. ‘구계짝지’라고도 하고, 사람들이 구경하러 온다고  ‘구경짝지’라고도 한다. 할머니 당숲 앞에 있는 바닷가라서 ‘당앞’이라고도 한다.
정도리에는 두 개의 짝지가 있다. ‘큰짝지’와 ‘작은짝지’. 큰짝지는 구계등이고 작은짝지는 구계등 바로 왼쪽, 동백숲 아래 있다. 바둑알 만한 갯돌이 파도와 노는 아담한 곳. 작은짝지로 내려가는 너른 바위도 좋다. 바다가 시원하게 안긴다.

“짝지가 울어. 구르륵 구르륵, 데르륵 데르륵, 드글드글 마을 떠나가게 울어. 그라믄 비가 와”
큰비가 오거나 큰바람이 불려고 하면 갯돌 구르는 소리가 달라진다. 마을 사람들 다 들리도록 운다. 사람들은 ‘짝지가 운다’ ‘당앞에가 운다’고 말한다. 일기예보가 없었던 시절 짝지 울음소리가 기상통보관이었다.

배경열 할아버지는 “날 궂어질라믄 바다가 조용허고 바람이 없어도 짝지가 울어. 방에 앙거서 그 소리 듣고 바다에 안 나가제. 짝지가 울면 틀림없이 큰 놀이 일어나고 그려.” 

구계등에선 일 년에 몇 번쯤 제주도가 보인다. “좋은 구경이제. 한라산 봉우리가 아가씨 머리마냥 봬. 거가 맑다는 거여. 여기 날씨가 별라 안 좋아도 거기가 맑으믄 보이거든. 날씨 좋은게 고기도 잡고 밀감도 따겄구나, 그런 생각하믄 좋제.”

그 쪽에 무지개가 뜰 때도 있다. “바다 위로 무지개 뜨믄 신기하니 예뻐. 근디 거기는 비 내리고 있다는 거여. 고기잡이도 못하고 애타겄구나, 그런 생각 든게 그때는 마음이 쪼까 안 좋제.”


ⓒ 김창헌 기자

“어떤 돌은 자갈자갈, 어떤 돌은 사갈사갈”

정도리 구계등처럼 많은 사람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바닷가가 얼마나 있을까.
구계등에는 다도해국립공원 사람들이 꾸민 ‘시인의 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시집도 읽고 아름다운 풍경사진도 보고 구계등 생태 공부도 할 수 있는 곳.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글을 모은 책자도 있고 추억을 남기는 종이도 마련돼 있다. 아홉 계단을 이룬 갯돌처럼 종이 한 장 한 장 위에 추억이 쌓여 있다. 사연마다 살갑다.

2007년 진희씨와 철민씨가 남긴 사연. “우리 서로를 알게 된 지 벌써 12년, 서로를 사랑하게 된 지 벌써 3년. 처음 이곳에서 사랑을 싹 틔웠는데 다시 오니 새롭네. 이곳은 자기 고향이라서 그런지 올 때마다 푸근해. 이곳에서 처음 사랑을 느꼈을 때처럼 항상 변치 말고 사랑하고 서로를 아끼자.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사랑해… ♡”.

2008년 봄에 이곳을 다녀간 한 사람은 “너 생각나 여기에 왔어. 여기에 오니까 네가 더 생각나…”라고 글을 남겼다. 한 남자는 정양 시인의 시 〈토막말〉의 한 구절을 인용해 종이 가득 큼지막하게 썼다. 시 속의 ‘정순’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바꿨다. “재연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구계등 갯돌 구르는 소리를 말로 어떻게 표현할까. 광주 운암초등학교 곽태익군은 “조그만 갯돌은 또르르르 귀엽게. 조금 큰 갯돌은 데구르르르 뭉툭하게. 더 큰 갯돌은 툭툭툭 이상하게. 큰 갯돌은 툭 쿵쿵툭쿵쿵 무섭게”. 고은혜 어린이는 ‘자갈자갈’ ‘사갈사갈’이라고 들었다. “돌마을에서는 돌들이 바다와 만나 기쁘다고 소리친다. 어떤 돌은 자갈자갈, 어떤 돌은 사갈사갈.”

강선우 학생은 구계등에 와서 예쁜 이야기 하나를 만들었다. “울퉁불퉁 못생긴 돌이 둥글둥글 예쁜 돌에게 ‘너는 예뻐서 좋겠다’ 그러자, 예쁜 돌이 못생긴 돌에게 ‘괜찮아 너도 예뻐질거야’. 많은 시간이 흘러 못생긴 돌이 예쁜 돌이 되었네. 못생긴 돌 다시는 예쁜 돌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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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출력  2008-10-17 09:59:41  
ⓒ 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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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8-10-3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선우 학생은 구계등에 와서 예쁜 이야기 하나를 만들었다. “울퉁불퉁 못생긴 돌이 둥글둥글 예쁜 돌에게 ‘너는 예뻐서 좋겠다’ 그러자, 예쁜 돌이 못생긴 돌에게 ‘괜찮아 너도 예뻐질거야’. 많은 시간이 흘러 못생긴 돌이 예쁜 돌이 되었네. 못생긴 돌 다시는 예쁜 돌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네.”
이 글에 나오는 강선우가 제 딸이랍니다. 정도리 갔을 때 남겨놓고 온 글이 이렇게 실렸더라구요.
저도 잡지 받아보고는 깜짝 놀랐답니다.

달빛푸른고개 2008-10-3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로 세상은 참 좁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에 올린 이 글에 님께서 이렇들 글을 남겨주시니... 아이에게도 '예쁜 추억'이 되겠군요.
 


 
“비바람에 천둥에 크니라고 애썼제”
고치실댁의 어느 가실날
남인희 기자  
 
 


▲ 구례 논곡마을 뽁대기집. 50년을 함께 살아온 임양래·이단엽 부부. 두 내외가 둔정둔정 산비
탈을 더터서 걷어온 밤이며 고추가 마당 한가득 널려 있다. “빵긋빵긋 이삐요 안.”
ⓒ 김태성 기자

옛날옛적에 아주 깊은 산골에, 그보다도 한 뼘 더 깊은 산골에….
꼭 그런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은 산비탈을 올라간다.
구례읍 논곡마을. “이날 평상(평생) 나고들어도 그 때마동 첩첩산산 깔딱 숨 넘어갈 만하면 나타난다”는 마을. 
‘우렁창시 매니로(우렁이 창자같이)’ 깊은 고샅, 다락같이 높은 집엔 옛날얘기처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산다.

“빵긋빵긋 이삐요 안”
간짓대에 걸쳐놓은 빨랫줄엔 손바닥만한 빨간 티셔츠 한 장이 말라가고 있다. 추석이 지났으니 필경 손주 녀석이 벗어두고 간 것일 게다.
“여러이 와서 버근버근하다가 싹 다 가불고 난게 한귀탱이가 말도 못허게 써운해.”
허전한 맘 채워주는 것은 평생 하고도 아직 다 못한 일이다.

“밤밭에 밤이 널쳐져도 못 주서서(주워서) 몰라지고, 꼬치는 꼬치밭에서 몰라지고.”
젊었을 때야 그만한 일이 무서웠을까, 청춘 가자 백발이 문밖이라더니 이제 일이 무서워진다는 할배 할매가 둔정둔정 산비탈을 더터서 걷어온 밤이며 고추가 마당 한가득 널려 있다.

“비바람에 천둥에 크니라고 애썼제. 빵긋빵긋 이삐요 안.”
뽀짝 윗집에서 태어나서 혼인한 뒤로 몇 걸음 아래 이 집으로 제금난 이래 평생을 그 한 자리에서 살아왔다는 임양래(75) 할아버지.

산도라지꽃같이 수줍던 열아홉 살에 저어기 곡성 고치실에서 가마 타고 섬진강을 건너와 ‘한아씨(할아버지)만 보라꼬 살아왔다’는 고치실댁 이단엽(69) 할머니.


▲ 꿀을 뜬다. 봉해 둔 벌통을 열고 할아버지는 연신 연기를 뿜어내고 할머니는 부채로 연기를
다북다북 밀어넣는다. “벌들한테 피신허라고. 아래로 니려가라고.”
ⓒ 김태성 기자

“보리야 보리야! 지발 존 일에 한 주먹이라도 빨리 여물거라!”

“우리 한아씨는 하래아직(하루아침)도 안 놀아.”
여섯 살부터 지게 지고 일만 하고 살았다는 할아버지.
“내 논은 없어. 당최 못 지서(지어)묵겄다고 내뿐(내버린) 놈의 논만 짓고 살았어. 논이라고 생긴 것이 소 한 마리 들어가믄 다뿍 차. 쟁기를 돌리도 못허게 생긴 다랑치여. 한 마지기를 맹글라믄 그 놈 서른 여섯 개나 보태야 포도시(겨우) 되까마까.”

말 그대로 삿갓 벗어서 덮으면 가려질 것 같은 ‘삿갓배미’ 같은 다랑치에, 손바닥에 피멍 들면서 일군 손바닥만한 밭에 한아씨는 괭이질하고 할매는 호맹이질하면서 기나긴 세월을 건너왔다.
섬진강을 발아래 두고 고동 한번을 못 잡으러 갔다.

“잡으러 갈 새가 없어. 놀 새가 없어. 몸서리 나게 일만 허고 살았어. 해 뜨믄 그저 일허고 어디 놀러갈 줄도 모르고 살아. 내 생애에 마을에서 단체관광으로 제주도에 가서 하랫밤 자 봤어. 우리는 그리 멍청허니 살아.” 

하지만 소출은 두 내외 땡볕 아래 엎드려서 흘린 땀보다도 늘 적었다. 3남2녀 자식들 끼니수 채우기가 힘겨웠다. 쑥 뜯고 송키 벗겨다 가마솥에 멀겋게 끓여대며 보릿고개 넘어갈 적에는 달밤에 보리밭에 가서 당아 안 여물고 있는 보리이삭한테 빌었다.

“보리야 보리야! 지발 존 일에 한 주먹이라도 빨리 여물거라!”
없는 살림에도 낯붉히지 않고 웃으면 복이 온다더라 하고 살았다. 이날 평생 욕이라고는 “ 호랭이 물어갈!” 밖에 모르는 할아버지. 구례읍장이 ‘법 없이도 살 냥반’이라고 인정을 했다는 한아씨가 할매한테는 그리도 이쁘다.

“우리 한아씨는 놈의 가심(가슴)을 손톱만치도 아프게 허들 못해. 요 우게(위에) 뽁대기가 우리 큰집인디 성한테고 성수한테고 열 번이믄 열 번, 백번이믄 백번 예예 허제 안헌단 소리를 안해 봐. 그런게 자기 몸땡이가 뿌수가져(부서져).”

부지런이 몸에 밴 할아버지. 삼동에 눈이 수북하니 온 날에도 양달 한 조각 찾아들어 장작이라도 패야 한다. 석삼년을 때도 다 못 때게 나무 장만을 해 두고, 헛간 벽에는 행여 큰바람 오면 벌통 받칠 작대기도 그득 준비해 두었다.


▲ “우리가 지그를 살린 것이 아니라 지그가 우리를 살려. 얼매나
귀엽제.”
ⓒ 김태성 기자


▲ “요것들이 기술이 좋아. 그 덕분에 우리가 묵고 써.”1년 한봉 농사의 추수.
ⓒ 김태성 기자

“지그가 우리를 살려. 얼매나 귀엽제”

오늘은 내외가 꿀을 뜨는 날.
봉해 둔 벌통을 열고 위에서 연기를 내뿜는다.
“이것이 벌 쫓아내는 연기통이여. 모른(마른) 쑥을 꼬실라서 담아 갖고 연기를 뿜어. 벌들한테 피신허라고. 아래로 니려가라고.”

할아버지는 연신 연기를 뿜어내고 할머니는 부채로 연기를 다북다북 밀어넣는다.
“아야 잔 내려가그라, 와!” 이것은 벌한테 하는 말.
“야물게 (벌을) 떨어야 해. 쭉지(날갯죽지)에 꿀이 묻어서 못 날아가고 죽어.” 이것은 구경꾼을 위한 설명.

“작년 요때 뜨고 인자 떠. 1년내 보듬고 있어야 좋은 것이여. 그라제, 이것이 추수여.”
깨끗한 산골에서 난다고 이름을 얻은 논곡꿀. 뺑뺑 돌려 빈집이어서 절 속 같은 이 마을 열 집 중에 네 집 빼고는 다 벌을 키운다. 고치실댁에서 한봉을 해 온 지는 한 20년. 그간 ‘벌침’을 많이도 맞았다.

“쏠 때 잠깐은 미와. 그 잠깐이여. 그나 아니나 요것들이 기술이 좋아. 그 덕분에 우리가 묵고 써. 전기세 내고 전화세 내고 약값 허고 손지들 용돈도 주고. 주믄 좋제.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더 좋제.”


▲ ‘우렁창시 매니로’ 깊은 고샅, 다락같이 높은 집. 없는 살림에도
낯붉히지 않고 웃으면 복이 온다더라 하고 살아온 고치실댁의 대문
간.
ⓒ 김태성 기자


▲ 숲을 스치는 갈바람 소리, 이따끔 산새소리 고요한 가실날. 고치
실댁에선 꿀을 뜬다.
ⓒ 김태성 기자

벌한테는 사뭇 정성이 들어간다. “덮어주고 빛도 개려주고 뭐이 달라든가(달려드는지) 지켜주고 집도 행기보(행주)로 따까주고 똥도 치와주고…. 나 귀찮다고 냅두믄 암것도 안되야. 영락 애기 키운 것 맹키여.”

공으로 얻는 것이 아니겠거늘, 할아버지 할머니는 장하고 고마운 벌한데 칭찬할 궁리를 더한다.
“저것들이 새복부터 일해. 항시 우리 앞에 인나(일어나). 우리가 지그를 살린 것이 아니라 지그가 우리를 살려. 얼매나 귀엽제.”

차곡차곡 올린 벌통에서 위로 세 통만 뜨고 아래로 세 통은 그대로 남겨 둔다.
“지그들 묵고 살 겨울 양석(양식)이여. 지그나 우리나 겨울에는 카만이 들앙거 있제.”
산골의 겨울은 춥다. 마시다 둔 자리끼가 윗목에서 살얼음으로 어는 골짜기다.


▲ 평생을 새벽이면 쪽진 머리에 비녀 찌르고 정안수부터 올렸다. 고치실댁의 정제(부엌).
ⓒ 김태성 기자

“존 놈은 짐생이 묵고 사람은 찌끄래기 차지여”

궁벽진 산중에선 먹을 것 없는 짐승도 한가지로 힘들다.
“만날 농사지어서 짐생(짐승)이 다 묵어. 존 놈은 짐생이 골라묵고 사람은 찌끄래기 차지여. 토깽이야 고라니야 노루야 너구리야 폿(팥) 무시 상치 연한 순은 순대로 묵고 열매는 열매대로 묵어. 강냉이 따 묵고 감자 파 묵고. 지그들은 당연해. 요전에는 멧되야지 니(네) 마리가 감자를 파묵고 있어. 기척이 나도 흘끗 돌아봄서 오셨는가 해. 짝대기를 던져서 버썩 소리가 난게는 그때야 코를 씩 불고 가. 그러고 살아.”

숲에 들 때 ‘야호’ 하는 소리가 짐승들한테 어서 피해라 그 말을 하는 것이라고, 산골의 뭇 생명과 함께 살아온 오래된 지혜를 이야기하는 할아버지. 
가진 것 없이 욕심 없이 지나온 삶. ‘내 복(福)이 요만헌갑다’ 하고 살아왔지만 자식들 생각 하면 마음이 무겁다.

“애기들이 똑 지그 아바이 탁했어. 부락부락 독허들 못허고 모다 용해(순해) 빠졌어. 꼴짝서 없이 살아서 많이 갈치들 못했드만 그늘에서 일허잖애 뙤약볕에서 노동으로 살아. 뜨건 빛이 나믄 내 속이 보타져. 어머이라고 허는 것이 참말로 부끄럽고 참말로 죄시러와.”

평생을 새벽이면 쪽진 머리에 비녀 찌르고 부뚜막에 정안수 올리는 일 빼놓지 않고 살아온 고치실댁. 발 디딘 자리마다 푸릇푸릇 일구며 살아온 고치실댁의 어느 가실(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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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출력  2008-10-14 11: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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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깔끄막 올라간다”
목포 온금동 계단골목
남인희 기자  
 
 


▲ 층층기암 유달산 자락을 깎아 새 둥지 같은 삶의 터전을 들어앉히고들 사는 목포 온금동
(溫錦洞). 꼬불꼬불 골목이 죄다 비탈길이다. 집과 집을 계단이 잇는다.
ⓒ 남인희 기자

꼬불꼬불 골목이 죄다 비탈길이다. 층층기암 유달산 자락을 깎아 새 둥지 같은 삶의 터전을 들어앉히고들 사는 목포 온금동(溫錦洞).  ‘따뜻할 온’자에  ‘비단 금’자를 썼다. ‘다순구미’라는 이름처럼 남향받이라 겨울에도 따순 햇볕 오래 머문다는 동네.
그 골목 어느 모퉁이를 돌아서다 빨간 화살표 하나를 만났다. 화살표의 방향은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뉘더러 이르는 표시일까. 저 길 따라가 무엇을 만나라는 말일까.
 
“물동우 이고 올라올라믄 오살나게 심들어”
땡볕 따가운 가을 오후. 휘어지고 꺾이는 좁은 골목, 쉼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른다.
서늘하게 그늘진 대문 앞에 황순자(80), 황복림(70) 할머니가 앉아 계신다. 이 골목에서 나고 자라 혼인하고, 여기서 낳은 자식들 혼인시키고 일래 그리 산다는 ‘온금동 붙박이’ 자매다.
두 분은 오늘 염색약 한 통을 헐어서 사이좋게 염색을 했다. 머리카락이 까맣게 염색될 때까지 이약이약 하는 중이다.

“보고자프믄 언제든지 쓰리빠 끄꼬(끌고) 나서기만 하믄 돼. 단추 다 뀌기도 전에 언니집이여. 뜨건 국냄비 들고 가믄 그대로 뜨거와.”
염색약 한 통도, 밥상에 오르는 반찬 한 가지도 나누고 사는 자매에겐 어린 시절 기억도 한가지다.

“옛날에는 여그가 전부 초가집이여. 짚도 못 이서서 줄줄 새는 집도 많앴어. 개발돼 갖고 쓰레또집 되고 양철집도 되고 인자는 양반 됐제.”
“옛날에는 이 질이 이라고 안 널롸. 흙바탕이고 담을 따라서 꼬랑이 흘러. 참말로 쫍았는디 쎄면으로 꼬랑 덮으고 어찌고 허고 난게 질이 요라고 널룹게 되야불었어.”


▲ 그 골목 어느 모퉁이를 돌아서다 만난 빨간 화살표. 화살표의
방향은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저 길 따라가 무엇을 만나라는
말일까.
ⓒ 남인희 기자


▲ 뱃고동소리 올라오는 골목. 이 계단에 얼마나 많은 땀과 한숨과
눈물이 얼룩져 있을까.
ⓒ 남인희 기자

그 꼬랑물이 유달산 줄기 타고 내려온 산물이었다. “거그다 빨래허고 살았어. 울 아들이 쉰 세 살 묵었는디 요 꼬랑에서 기저귀 빨아서 키웠어.”
“요 밑에가 바로 바다였어. 인자는 바다를 많이 쫄여(줄여) 불었제. 우리 클 때 짐칫거리 시칠라믄 거그 독밭으로 갔어. 거그가 갱번이여.”

“쩌 아래가 째보선창이여. 째보마니로 생겼다고. 바닷가라 바람이 여간 억세게 분디 가운데가 옴팍 들와 갖고 의지가 돼.” 
“바다를 찌고(끼고) 살아도 물이 귀했어. 묵을 물은 공동시암에서 질러왔제. 물동우 이고 깔끄막 올라올라믄 오살나게 심들어.”

목포는 물 사정이 안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개항 이후 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우물 파서 물을 얻는 것이 석유를 얻는 것만큼 어려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온금동에 우물 판 이의 공덕비가 있는 이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식수로 사용한 온금동 111번지의 큰샘은 1922년 주민들이 판 완벽한 ‘우물 정(井)’ 자 우물, 이 우물을 파는 데 돈을 희사한 정인호의 공을 “목마른 마을에 단비요, 그늘진 골짜기에 해가 돋는 것과 같다”고 칭송한 ‘불망비’가 온금동 24번지에 그대로 남아 있다.


▲ 계단 끝 뽁대기집. 눈 아래 바다가 반짝인다. 마루에 앉아서도 바다가 보인다. 높이 솟은 굴
뚝은 온금동 사람들의 밥벌이터였던 '조선내화' 공장
ⓒ 남인희 기자

“여가 뱃사람들이 많이 살았어”

등산이라도 하는 양 타박타박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선 뽁대기집. 눈 아래 바다가 반짝인다. 마루에 앉아서도 바다가 보인다.
“여그서 배 보고 있으믄 덜 심심해. 큰 놈도 지나가고 작은 놈도 지나가고.”
‘전망 좋은 집’의 최유녜(81) 할머니는 뱃사람과 혼인해서 3남3녀를 키웠다.

“여(여기)가 뱃사람들이 많이 살았어. 진도 조도 사람들이 배 타고 왔제. 완도 노화도에서도 오고. 신안 암태에서도 오고…. 맨 섬사람들이었어.”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선창가 산 몰랭이에 자리를 잡았다. 뱃고동 소리와 생선 냄새가 흘러다니는 동네. 녹슨 화덕에 폐선에서 가져온 삭은 나무토막들을 때서 끼니를 끓이는 고샅에서 머리통이 굵어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지그 아부지들은 배도 아니고 뭣도 아닌 것을 타고 노저어서 쩌어 칠산바다로 어디로 나가. 나가믄 한 사날 있다가도 오고 보름 만에도 오고…. 갈치 조그(조기) 오만 밸 것을 앵긴 대로 실어왔제. 못 잡아오믄 그 얼마는 겁나게 옹삭시럽게 살아. 부삭에다 물 떠나 놓고 항시 빌어. 많이 잡아오라고 빌잖애 지발 무사히 와서 방문 열고 들오씨요 허고 빌제.”

바람신에게 고사를 지내며 만선을 비는 풍장굿이 행해지던 마을이 온금동이었다.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아시다시피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하략)>

김선태 시인이 온금동 사람들의 삶을 담은 시 ‘조금새끼’.  아버지의 바다에 나가 아버지처럼 풍랑과 싸우던 이들이 이 골목에 발소리를 울리던 시절은 이제 희미해졌다.


▲ 비좁은 골목이지만 기어이 푸른 것들 보듬고 살아가는 온금동
사람들. 화단 없는 집집이 내놓은 화분에 온 동네 사람들이 눈호사
를 누린다.
ⓒ 남인희 기자

‘훈동이 공장’으로,  조선소 ‘깡깡이’로

뽁대기에 나란히 앉은 그 옆집엔 열 아홉 살에 신안군 암태도 도창리에서 시집온 허연임(69) 할머니가 산다.

“도시로 간다고, 인자 일 안한 디로 간다고 좋아했제. 이 꼴짝에 올라댕길 줄을 모르고. 나는 소원이 있어. 한 달을 살아도 평지에서 한번 살아보고 자와.”
섬 처녀가 뭍으로 시집을 와서 안 해 본 일이 없다. 온금동 각시들이 거개 그랬듯, 그이 역시도 조선내화 벽돌공장에서 벌이를 했다.

“쩌 아래 뵈는 굴뚝 시(세) 개가 공장이여. 쩌 공장이 온금동 사람들 많이 믹였어. 뭔 재주가 아니여도 글로 글로 댕겼어. (벽돌을) 찍어갖고 널어갖고 몰래(말려)갖고 인자 불에 들어가게끔 허는 것이여.”

선창가 조선소에 가서 ‘깡깡이’라는 것도 했다. “깡깡 배를 뚜든다고 깡깡이여. 녹을 떨고 씻고 뺑끼칠하고 팽야 그런 일이여.”


▲ “나는 소원이 있어. 한 달을 살아도 평지에서 한번 살아보고 자
와.” ‘가다 앙그고, 가다 앙그고 그라고 댕기는’ 계단길.
ⓒ 남인희 기자

잠 안자고 허덕여도 3남2녀 밥 먹이기가 그리 힘들었다. “우리 어른(남편)이 아프다고 누워 있은게 약사다가 댔어. 먼저 가십디다. 그 뒤로 시아바니 혼자 모시고 살았어. 인자 다 가셨소. 다른 것은 다 잊혀도 애기들 국민학교도 못 갈친 것이 짠해. 육성회비 이백원이 없었단 것이 시상에 말이 되까. 나 혼차 그 생각을 허고 또 허제.” 

날마다 밤배 고동 소리 들리면 물 들어오듯 서러워진다는 할머니.
“뭐이라도 있으믄 주고 자프고 나놔묵고 자픈 사람인디. 놈헌티 받고 산게 부끄럽제. 저 연탄도 복지관 사람들이 줄서서 날랐어. 여러니(여럿)가 계단으로 늘늘이 서서 한 장 한 장 얼매나 심들게 쟁여논 것이여. 아까와서 때겄소. 이 시상에 서러운 사람 많기도 많겄제. 나만 이랄라디야(이럴라든) 허고 맘을 주저앉히요.”

안간힘으로 펄떡이며 건너온 한 생애의 고단한 그늘 고여 있는 지붕 낮은 집들. 예서 내려다보는 바다엔 서러움 출렁인다.


▲ 김치가, 게장이, 뉘 집 꺼진 연탄 살려낼 탄불이, 황실이새끼 몇
마리가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계단. 계단을 타고 따순 인정들
이 오르내린다.
ⓒ 남인희 기자

“여가 좋아. 없는 사람 살기 좋아”

대문간에 용머리가 붙었다. “존 일이 생긴다고 할아부지가 해 노셨다요.”
‘용집’ 대문간은 계단에서 계단으로 이어지는 골목의 계단참. 온금동 할매들이 모여드는 야외 마실방이다.

“짐장독에서 묵은지 새로 헐믄 그것 한 양푼 내 오고, 기장(게장)이 벨라도 맛나믄 요것 잔 잡사봐 허고 한 보시기 담아 오고.”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는 따순 인정들이 모이는 곳. 김치가, 게장이, 뉘 집 꺼진 연탄 살려낼 탄불이, 황실이새끼 몇 마리가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계단.

이 계단골목의 할매들이 무서워하는 말은 재개발이다. 소위 ‘불량주거지’인 온금동은 재개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그간 온 나라의 주거환경개선사업의 ‘성과’가 보여준 것처럼 미관상 번듯한 동네로 탈바꿈된 마을에 돈 없는 원주민들은 더 이상 발붙이고 살아갈 수 없다. 이 골목의 작고 낮은 집들이 모두 헐리고 나면 물고기 등같이 시퍼렇던 목포의 역사 한 조각도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 것이다.


▲ “깔끄막이 고상이랑가. 그것이사 내 몸으로 댕기믄 되야. 없는
것이 고상이제. 자석들한테 떳떳허지 못헌 것이 고상이여.”
ⓒ 남인희 기자

저 모탱이 돌아가면 쉴 바탕이 돌아올까

계단으로 집과 집을 잇는 온금동. 한숨에는 다 못 올라가는 깔끄막.
“하래 두 번은 못나가. 가다 앙그고, 가다 앙그고 그라고 댕겨. ”
“죽을 때까지 수천 수만 계단 봅고 댕기겄제. 그 고상 죽어서야 민헐란가.”
“깔끄막이 고상이랑가. 그것이사 내 몸으로 댕기믄 되야. 없는 것이 고상이제. 자석들한테 떳떳허지 못헌 것이 고상이여.”

<올라가네 올라간다 이놈의 깔끄막 올라간다> 언제 걸어서 평지를 갈꼬 싶지만 저 모탱이 돌아가면 쉴 바탕이 돌아올까…. 그 한 조각 희망에 기대 하루하루 ‘이 놈의 깔끄막’같은 삶을 살아왔다.

“여그는 여간 존 친구들이 많애. 그란게 우리는 딴 디로 갈 맘이 안나.”
“그라제 여가 좋아. 없는 사람 살기 좋아. 전에 요 동네 누가 돈 많이 벌어서 차두차두 싸갖고 시내 아파트로 갔다요. 얼매 안 살고 도로 왔어. 대문들은 딱딱 닫혀 놓고 맛난 냄새만 핑기고 언제 봤냐 외면허고…. 그리는 못살겄습디다 허고 왔어.”

“비단방석이 핀허당가. 우리는 여그 쎄맨(시멘트)방석이 내 복이다 허고 살아.”
내내 가파르기만 한 생애에서도 앉은 자리를 꽃자리로 삼고 사는 사람들의 동네. 햇볕처럼 마음 따순 이들의 이야기를 그 계단에 앉아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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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출력  2008-10-21 22:22:56  
ⓒ 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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