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놈의 깔끄막 올라간다”
목포 온금동 계단골목
남인희 기자  
 
 


▲ 층층기암 유달산 자락을 깎아 새 둥지 같은 삶의 터전을 들어앉히고들 사는 목포 온금동
(溫錦洞). 꼬불꼬불 골목이 죄다 비탈길이다. 집과 집을 계단이 잇는다.
ⓒ 남인희 기자

꼬불꼬불 골목이 죄다 비탈길이다. 층층기암 유달산 자락을 깎아 새 둥지 같은 삶의 터전을 들어앉히고들 사는 목포 온금동(溫錦洞).  ‘따뜻할 온’자에  ‘비단 금’자를 썼다. ‘다순구미’라는 이름처럼 남향받이라 겨울에도 따순 햇볕 오래 머문다는 동네.
그 골목 어느 모퉁이를 돌아서다 빨간 화살표 하나를 만났다. 화살표의 방향은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뉘더러 이르는 표시일까. 저 길 따라가 무엇을 만나라는 말일까.
 
“물동우 이고 올라올라믄 오살나게 심들어”
땡볕 따가운 가을 오후. 휘어지고 꺾이는 좁은 골목, 쉼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른다.
서늘하게 그늘진 대문 앞에 황순자(80), 황복림(70) 할머니가 앉아 계신다. 이 골목에서 나고 자라 혼인하고, 여기서 낳은 자식들 혼인시키고 일래 그리 산다는 ‘온금동 붙박이’ 자매다.
두 분은 오늘 염색약 한 통을 헐어서 사이좋게 염색을 했다. 머리카락이 까맣게 염색될 때까지 이약이약 하는 중이다.

“보고자프믄 언제든지 쓰리빠 끄꼬(끌고) 나서기만 하믄 돼. 단추 다 뀌기도 전에 언니집이여. 뜨건 국냄비 들고 가믄 그대로 뜨거와.”
염색약 한 통도, 밥상에 오르는 반찬 한 가지도 나누고 사는 자매에겐 어린 시절 기억도 한가지다.

“옛날에는 여그가 전부 초가집이여. 짚도 못 이서서 줄줄 새는 집도 많앴어. 개발돼 갖고 쓰레또집 되고 양철집도 되고 인자는 양반 됐제.”
“옛날에는 이 질이 이라고 안 널롸. 흙바탕이고 담을 따라서 꼬랑이 흘러. 참말로 쫍았는디 쎄면으로 꼬랑 덮으고 어찌고 허고 난게 질이 요라고 널룹게 되야불었어.”


▲ 그 골목 어느 모퉁이를 돌아서다 만난 빨간 화살표. 화살표의
방향은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저 길 따라가 무엇을 만나라는
말일까.
ⓒ 남인희 기자


▲ 뱃고동소리 올라오는 골목. 이 계단에 얼마나 많은 땀과 한숨과
눈물이 얼룩져 있을까.
ⓒ 남인희 기자

그 꼬랑물이 유달산 줄기 타고 내려온 산물이었다. “거그다 빨래허고 살았어. 울 아들이 쉰 세 살 묵었는디 요 꼬랑에서 기저귀 빨아서 키웠어.”
“요 밑에가 바로 바다였어. 인자는 바다를 많이 쫄여(줄여) 불었제. 우리 클 때 짐칫거리 시칠라믄 거그 독밭으로 갔어. 거그가 갱번이여.”

“쩌 아래가 째보선창이여. 째보마니로 생겼다고. 바닷가라 바람이 여간 억세게 분디 가운데가 옴팍 들와 갖고 의지가 돼.” 
“바다를 찌고(끼고) 살아도 물이 귀했어. 묵을 물은 공동시암에서 질러왔제. 물동우 이고 깔끄막 올라올라믄 오살나게 심들어.”

목포는 물 사정이 안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개항 이후 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우물 파서 물을 얻는 것이 석유를 얻는 것만큼 어려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온금동에 우물 판 이의 공덕비가 있는 이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식수로 사용한 온금동 111번지의 큰샘은 1922년 주민들이 판 완벽한 ‘우물 정(井)’ 자 우물, 이 우물을 파는 데 돈을 희사한 정인호의 공을 “목마른 마을에 단비요, 그늘진 골짜기에 해가 돋는 것과 같다”고 칭송한 ‘불망비’가 온금동 24번지에 그대로 남아 있다.


▲ 계단 끝 뽁대기집. 눈 아래 바다가 반짝인다. 마루에 앉아서도 바다가 보인다. 높이 솟은 굴
뚝은 온금동 사람들의 밥벌이터였던 '조선내화' 공장
ⓒ 남인희 기자

“여가 뱃사람들이 많이 살았어”

등산이라도 하는 양 타박타박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선 뽁대기집. 눈 아래 바다가 반짝인다. 마루에 앉아서도 바다가 보인다.
“여그서 배 보고 있으믄 덜 심심해. 큰 놈도 지나가고 작은 놈도 지나가고.”
‘전망 좋은 집’의 최유녜(81) 할머니는 뱃사람과 혼인해서 3남3녀를 키웠다.

“여(여기)가 뱃사람들이 많이 살았어. 진도 조도 사람들이 배 타고 왔제. 완도 노화도에서도 오고. 신안 암태에서도 오고…. 맨 섬사람들이었어.”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선창가 산 몰랭이에 자리를 잡았다. 뱃고동 소리와 생선 냄새가 흘러다니는 동네. 녹슨 화덕에 폐선에서 가져온 삭은 나무토막들을 때서 끼니를 끓이는 고샅에서 머리통이 굵어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지그 아부지들은 배도 아니고 뭣도 아닌 것을 타고 노저어서 쩌어 칠산바다로 어디로 나가. 나가믄 한 사날 있다가도 오고 보름 만에도 오고…. 갈치 조그(조기) 오만 밸 것을 앵긴 대로 실어왔제. 못 잡아오믄 그 얼마는 겁나게 옹삭시럽게 살아. 부삭에다 물 떠나 놓고 항시 빌어. 많이 잡아오라고 빌잖애 지발 무사히 와서 방문 열고 들오씨요 허고 빌제.”

바람신에게 고사를 지내며 만선을 비는 풍장굿이 행해지던 마을이 온금동이었다.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아시다시피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하략)>

김선태 시인이 온금동 사람들의 삶을 담은 시 ‘조금새끼’.  아버지의 바다에 나가 아버지처럼 풍랑과 싸우던 이들이 이 골목에 발소리를 울리던 시절은 이제 희미해졌다.


▲ 비좁은 골목이지만 기어이 푸른 것들 보듬고 살아가는 온금동
사람들. 화단 없는 집집이 내놓은 화분에 온 동네 사람들이 눈호사
를 누린다.
ⓒ 남인희 기자

‘훈동이 공장’으로,  조선소 ‘깡깡이’로

뽁대기에 나란히 앉은 그 옆집엔 열 아홉 살에 신안군 암태도 도창리에서 시집온 허연임(69) 할머니가 산다.

“도시로 간다고, 인자 일 안한 디로 간다고 좋아했제. 이 꼴짝에 올라댕길 줄을 모르고. 나는 소원이 있어. 한 달을 살아도 평지에서 한번 살아보고 자와.”
섬 처녀가 뭍으로 시집을 와서 안 해 본 일이 없다. 온금동 각시들이 거개 그랬듯, 그이 역시도 조선내화 벽돌공장에서 벌이를 했다.

“쩌 아래 뵈는 굴뚝 시(세) 개가 공장이여. 쩌 공장이 온금동 사람들 많이 믹였어. 뭔 재주가 아니여도 글로 글로 댕겼어. (벽돌을) 찍어갖고 널어갖고 몰래(말려)갖고 인자 불에 들어가게끔 허는 것이여.”

선창가 조선소에 가서 ‘깡깡이’라는 것도 했다. “깡깡 배를 뚜든다고 깡깡이여. 녹을 떨고 씻고 뺑끼칠하고 팽야 그런 일이여.”


▲ “나는 소원이 있어. 한 달을 살아도 평지에서 한번 살아보고 자
와.” ‘가다 앙그고, 가다 앙그고 그라고 댕기는’ 계단길.
ⓒ 남인희 기자

잠 안자고 허덕여도 3남2녀 밥 먹이기가 그리 힘들었다. “우리 어른(남편)이 아프다고 누워 있은게 약사다가 댔어. 먼저 가십디다. 그 뒤로 시아바니 혼자 모시고 살았어. 인자 다 가셨소. 다른 것은 다 잊혀도 애기들 국민학교도 못 갈친 것이 짠해. 육성회비 이백원이 없었단 것이 시상에 말이 되까. 나 혼차 그 생각을 허고 또 허제.” 

날마다 밤배 고동 소리 들리면 물 들어오듯 서러워진다는 할머니.
“뭐이라도 있으믄 주고 자프고 나놔묵고 자픈 사람인디. 놈헌티 받고 산게 부끄럽제. 저 연탄도 복지관 사람들이 줄서서 날랐어. 여러니(여럿)가 계단으로 늘늘이 서서 한 장 한 장 얼매나 심들게 쟁여논 것이여. 아까와서 때겄소. 이 시상에 서러운 사람 많기도 많겄제. 나만 이랄라디야(이럴라든) 허고 맘을 주저앉히요.”

안간힘으로 펄떡이며 건너온 한 생애의 고단한 그늘 고여 있는 지붕 낮은 집들. 예서 내려다보는 바다엔 서러움 출렁인다.


▲ 김치가, 게장이, 뉘 집 꺼진 연탄 살려낼 탄불이, 황실이새끼 몇
마리가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계단. 계단을 타고 따순 인정들
이 오르내린다.
ⓒ 남인희 기자

“여가 좋아. 없는 사람 살기 좋아”

대문간에 용머리가 붙었다. “존 일이 생긴다고 할아부지가 해 노셨다요.”
‘용집’ 대문간은 계단에서 계단으로 이어지는 골목의 계단참. 온금동 할매들이 모여드는 야외 마실방이다.

“짐장독에서 묵은지 새로 헐믄 그것 한 양푼 내 오고, 기장(게장)이 벨라도 맛나믄 요것 잔 잡사봐 허고 한 보시기 담아 오고.”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는 따순 인정들이 모이는 곳. 김치가, 게장이, 뉘 집 꺼진 연탄 살려낼 탄불이, 황실이새끼 몇 마리가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계단.

이 계단골목의 할매들이 무서워하는 말은 재개발이다. 소위 ‘불량주거지’인 온금동은 재개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그간 온 나라의 주거환경개선사업의 ‘성과’가 보여준 것처럼 미관상 번듯한 동네로 탈바꿈된 마을에 돈 없는 원주민들은 더 이상 발붙이고 살아갈 수 없다. 이 골목의 작고 낮은 집들이 모두 헐리고 나면 물고기 등같이 시퍼렇던 목포의 역사 한 조각도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 것이다.


▲ “깔끄막이 고상이랑가. 그것이사 내 몸으로 댕기믄 되야. 없는
것이 고상이제. 자석들한테 떳떳허지 못헌 것이 고상이여.”
ⓒ 남인희 기자

저 모탱이 돌아가면 쉴 바탕이 돌아올까

계단으로 집과 집을 잇는 온금동. 한숨에는 다 못 올라가는 깔끄막.
“하래 두 번은 못나가. 가다 앙그고, 가다 앙그고 그라고 댕겨. ”
“죽을 때까지 수천 수만 계단 봅고 댕기겄제. 그 고상 죽어서야 민헐란가.”
“깔끄막이 고상이랑가. 그것이사 내 몸으로 댕기믄 되야. 없는 것이 고상이제. 자석들한테 떳떳허지 못헌 것이 고상이여.”

<올라가네 올라간다 이놈의 깔끄막 올라간다> 언제 걸어서 평지를 갈꼬 싶지만 저 모탱이 돌아가면 쉴 바탕이 돌아올까…. 그 한 조각 희망에 기대 하루하루 ‘이 놈의 깔끄막’같은 삶을 살아왔다.

“여그는 여간 존 친구들이 많애. 그란게 우리는 딴 디로 갈 맘이 안나.”
“그라제 여가 좋아. 없는 사람 살기 좋아. 전에 요 동네 누가 돈 많이 벌어서 차두차두 싸갖고 시내 아파트로 갔다요. 얼매 안 살고 도로 왔어. 대문들은 딱딱 닫혀 놓고 맛난 냄새만 핑기고 언제 봤냐 외면허고…. 그리는 못살겄습디다 허고 왔어.”

“비단방석이 핀허당가. 우리는 여그 쎄맨(시멘트)방석이 내 복이다 허고 살아.”
내내 가파르기만 한 생애에서도 앉은 자리를 꽃자리로 삼고 사는 사람들의 동네. 햇볕처럼 마음 따순 이들의 이야기를 그 계단에 앉아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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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출력  2008-10-21 22:22:56  
ⓒ 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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