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에 천둥에 크니라고 애썼제”
고치실댁의 어느 가실날
남인희 기자  
 
 


▲ 구례 논곡마을 뽁대기집. 50년을 함께 살아온 임양래·이단엽 부부. 두 내외가 둔정둔정 산비
탈을 더터서 걷어온 밤이며 고추가 마당 한가득 널려 있다. “빵긋빵긋 이삐요 안.”
ⓒ 김태성 기자

옛날옛적에 아주 깊은 산골에, 그보다도 한 뼘 더 깊은 산골에….
꼭 그런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은 산비탈을 올라간다.
구례읍 논곡마을. “이날 평상(평생) 나고들어도 그 때마동 첩첩산산 깔딱 숨 넘어갈 만하면 나타난다”는 마을. 
‘우렁창시 매니로(우렁이 창자같이)’ 깊은 고샅, 다락같이 높은 집엔 옛날얘기처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산다.

“빵긋빵긋 이삐요 안”
간짓대에 걸쳐놓은 빨랫줄엔 손바닥만한 빨간 티셔츠 한 장이 말라가고 있다. 추석이 지났으니 필경 손주 녀석이 벗어두고 간 것일 게다.
“여러이 와서 버근버근하다가 싹 다 가불고 난게 한귀탱이가 말도 못허게 써운해.”
허전한 맘 채워주는 것은 평생 하고도 아직 다 못한 일이다.

“밤밭에 밤이 널쳐져도 못 주서서(주워서) 몰라지고, 꼬치는 꼬치밭에서 몰라지고.”
젊었을 때야 그만한 일이 무서웠을까, 청춘 가자 백발이 문밖이라더니 이제 일이 무서워진다는 할배 할매가 둔정둔정 산비탈을 더터서 걷어온 밤이며 고추가 마당 한가득 널려 있다.

“비바람에 천둥에 크니라고 애썼제. 빵긋빵긋 이삐요 안.”
뽀짝 윗집에서 태어나서 혼인한 뒤로 몇 걸음 아래 이 집으로 제금난 이래 평생을 그 한 자리에서 살아왔다는 임양래(75) 할아버지.

산도라지꽃같이 수줍던 열아홉 살에 저어기 곡성 고치실에서 가마 타고 섬진강을 건너와 ‘한아씨(할아버지)만 보라꼬 살아왔다’는 고치실댁 이단엽(69) 할머니.


▲ 꿀을 뜬다. 봉해 둔 벌통을 열고 할아버지는 연신 연기를 뿜어내고 할머니는 부채로 연기를
다북다북 밀어넣는다. “벌들한테 피신허라고. 아래로 니려가라고.”
ⓒ 김태성 기자

“보리야 보리야! 지발 존 일에 한 주먹이라도 빨리 여물거라!”

“우리 한아씨는 하래아직(하루아침)도 안 놀아.”
여섯 살부터 지게 지고 일만 하고 살았다는 할아버지.
“내 논은 없어. 당최 못 지서(지어)묵겄다고 내뿐(내버린) 놈의 논만 짓고 살았어. 논이라고 생긴 것이 소 한 마리 들어가믄 다뿍 차. 쟁기를 돌리도 못허게 생긴 다랑치여. 한 마지기를 맹글라믄 그 놈 서른 여섯 개나 보태야 포도시(겨우) 되까마까.”

말 그대로 삿갓 벗어서 덮으면 가려질 것 같은 ‘삿갓배미’ 같은 다랑치에, 손바닥에 피멍 들면서 일군 손바닥만한 밭에 한아씨는 괭이질하고 할매는 호맹이질하면서 기나긴 세월을 건너왔다.
섬진강을 발아래 두고 고동 한번을 못 잡으러 갔다.

“잡으러 갈 새가 없어. 놀 새가 없어. 몸서리 나게 일만 허고 살았어. 해 뜨믄 그저 일허고 어디 놀러갈 줄도 모르고 살아. 내 생애에 마을에서 단체관광으로 제주도에 가서 하랫밤 자 봤어. 우리는 그리 멍청허니 살아.” 

하지만 소출은 두 내외 땡볕 아래 엎드려서 흘린 땀보다도 늘 적었다. 3남2녀 자식들 끼니수 채우기가 힘겨웠다. 쑥 뜯고 송키 벗겨다 가마솥에 멀겋게 끓여대며 보릿고개 넘어갈 적에는 달밤에 보리밭에 가서 당아 안 여물고 있는 보리이삭한테 빌었다.

“보리야 보리야! 지발 존 일에 한 주먹이라도 빨리 여물거라!”
없는 살림에도 낯붉히지 않고 웃으면 복이 온다더라 하고 살았다. 이날 평생 욕이라고는 “ 호랭이 물어갈!” 밖에 모르는 할아버지. 구례읍장이 ‘법 없이도 살 냥반’이라고 인정을 했다는 한아씨가 할매한테는 그리도 이쁘다.

“우리 한아씨는 놈의 가심(가슴)을 손톱만치도 아프게 허들 못해. 요 우게(위에) 뽁대기가 우리 큰집인디 성한테고 성수한테고 열 번이믄 열 번, 백번이믄 백번 예예 허제 안헌단 소리를 안해 봐. 그런게 자기 몸땡이가 뿌수가져(부서져).”

부지런이 몸에 밴 할아버지. 삼동에 눈이 수북하니 온 날에도 양달 한 조각 찾아들어 장작이라도 패야 한다. 석삼년을 때도 다 못 때게 나무 장만을 해 두고, 헛간 벽에는 행여 큰바람 오면 벌통 받칠 작대기도 그득 준비해 두었다.


▲ “우리가 지그를 살린 것이 아니라 지그가 우리를 살려. 얼매나
귀엽제.”
ⓒ 김태성 기자


▲ “요것들이 기술이 좋아. 그 덕분에 우리가 묵고 써.”1년 한봉 농사의 추수.
ⓒ 김태성 기자

“지그가 우리를 살려. 얼매나 귀엽제”

오늘은 내외가 꿀을 뜨는 날.
봉해 둔 벌통을 열고 위에서 연기를 내뿜는다.
“이것이 벌 쫓아내는 연기통이여. 모른(마른) 쑥을 꼬실라서 담아 갖고 연기를 뿜어. 벌들한테 피신허라고. 아래로 니려가라고.”

할아버지는 연신 연기를 뿜어내고 할머니는 부채로 연기를 다북다북 밀어넣는다.
“아야 잔 내려가그라, 와!” 이것은 벌한테 하는 말.
“야물게 (벌을) 떨어야 해. 쭉지(날갯죽지)에 꿀이 묻어서 못 날아가고 죽어.” 이것은 구경꾼을 위한 설명.

“작년 요때 뜨고 인자 떠. 1년내 보듬고 있어야 좋은 것이여. 그라제, 이것이 추수여.”
깨끗한 산골에서 난다고 이름을 얻은 논곡꿀. 뺑뺑 돌려 빈집이어서 절 속 같은 이 마을 열 집 중에 네 집 빼고는 다 벌을 키운다. 고치실댁에서 한봉을 해 온 지는 한 20년. 그간 ‘벌침’을 많이도 맞았다.

“쏠 때 잠깐은 미와. 그 잠깐이여. 그나 아니나 요것들이 기술이 좋아. 그 덕분에 우리가 묵고 써. 전기세 내고 전화세 내고 약값 허고 손지들 용돈도 주고. 주믄 좋제.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더 좋제.”


▲ ‘우렁창시 매니로’ 깊은 고샅, 다락같이 높은 집. 없는 살림에도
낯붉히지 않고 웃으면 복이 온다더라 하고 살아온 고치실댁의 대문
간.
ⓒ 김태성 기자


▲ 숲을 스치는 갈바람 소리, 이따끔 산새소리 고요한 가실날. 고치
실댁에선 꿀을 뜬다.
ⓒ 김태성 기자

벌한테는 사뭇 정성이 들어간다. “덮어주고 빛도 개려주고 뭐이 달라든가(달려드는지) 지켜주고 집도 행기보(행주)로 따까주고 똥도 치와주고…. 나 귀찮다고 냅두믄 암것도 안되야. 영락 애기 키운 것 맹키여.”

공으로 얻는 것이 아니겠거늘, 할아버지 할머니는 장하고 고마운 벌한데 칭찬할 궁리를 더한다.
“저것들이 새복부터 일해. 항시 우리 앞에 인나(일어나). 우리가 지그를 살린 것이 아니라 지그가 우리를 살려. 얼매나 귀엽제.”

차곡차곡 올린 벌통에서 위로 세 통만 뜨고 아래로 세 통은 그대로 남겨 둔다.
“지그들 묵고 살 겨울 양석(양식)이여. 지그나 우리나 겨울에는 카만이 들앙거 있제.”
산골의 겨울은 춥다. 마시다 둔 자리끼가 윗목에서 살얼음으로 어는 골짜기다.


▲ 평생을 새벽이면 쪽진 머리에 비녀 찌르고 정안수부터 올렸다. 고치실댁의 정제(부엌).
ⓒ 김태성 기자

“존 놈은 짐생이 묵고 사람은 찌끄래기 차지여”

궁벽진 산중에선 먹을 것 없는 짐승도 한가지로 힘들다.
“만날 농사지어서 짐생(짐승)이 다 묵어. 존 놈은 짐생이 골라묵고 사람은 찌끄래기 차지여. 토깽이야 고라니야 노루야 너구리야 폿(팥) 무시 상치 연한 순은 순대로 묵고 열매는 열매대로 묵어. 강냉이 따 묵고 감자 파 묵고. 지그들은 당연해. 요전에는 멧되야지 니(네) 마리가 감자를 파묵고 있어. 기척이 나도 흘끗 돌아봄서 오셨는가 해. 짝대기를 던져서 버썩 소리가 난게는 그때야 코를 씩 불고 가. 그러고 살아.”

숲에 들 때 ‘야호’ 하는 소리가 짐승들한테 어서 피해라 그 말을 하는 것이라고, 산골의 뭇 생명과 함께 살아온 오래된 지혜를 이야기하는 할아버지. 
가진 것 없이 욕심 없이 지나온 삶. ‘내 복(福)이 요만헌갑다’ 하고 살아왔지만 자식들 생각 하면 마음이 무겁다.

“애기들이 똑 지그 아바이 탁했어. 부락부락 독허들 못허고 모다 용해(순해) 빠졌어. 꼴짝서 없이 살아서 많이 갈치들 못했드만 그늘에서 일허잖애 뙤약볕에서 노동으로 살아. 뜨건 빛이 나믄 내 속이 보타져. 어머이라고 허는 것이 참말로 부끄럽고 참말로 죄시러와.”

평생을 새벽이면 쪽진 머리에 비녀 찌르고 부뚜막에 정안수 올리는 일 빼놓지 않고 살아온 고치실댁. 발 디딘 자리마다 푸릇푸릇 일구며 살아온 고치실댁의 어느 가실(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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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출력  2008-10-14 11:43:05  
ⓒ 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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