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깅이 - 청소년을 위한 <지상에 숟가락 하나> 담쟁이 문고
현기영 지음, 박재동 그림 / 실천문학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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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청소년판으로 각색한 책으로, 실천문학사가 새로 시작한 '담쟁이문고'의 첫 권입니다. 미처 구해보기 전에 언론에서 이 책을 다룬 기사(중앙일보로 기억되는데..) 한 편을 보았습니다. 대략의 요지를 기억해보면 '<똥깅이>에는 4.3이 없다. 4.3 없이 어떻게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각색할 수 있는가?'였는데, 결국 <똥깅이>를 읽으면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안 읽을테니, 아이들이 4.3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이 책은 출판사의 상술에 의해 파생된 '변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헛갈리더군요. <똥깅이> 때문에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안 읽을테니, 아이들이 커서 4.3을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 안타까운 건지, 너나없이 '청소년출판'에 뛰어드는 현실에서 억지로 독자를 늘리려는 상술인 것 같아 안타까운 것인지...   

결국 책을 읽어보아야 판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마침 가까운 지인께서 넘겨주셔서 판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단숨에 읽었고, 지금은 제 아이가 읽고 있습니다) <똥깅이>는 매우 잘 빚어진 소설입니다. 청소년들에게는 아마도 할아버지뻘이 되는 저자께서 손주들에게 들려주시듯 맑은 언어로 말입니다. 이 성장의 배경에 '제주 4.3 민중항쟁'은 떼어낼 수 없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고,(제가 올린 같은 책 '밑줄긋기'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겠네요) 만약 읽고 쓴 기사라면 보는 관점이 달랐겠지만, 기자님의 우려는 기우일 뿐입니다.

교육현장 언저리에 있다보니, 선생님들 말씀을 많이 듣게 됩니다. 이미 출생 때부터 인터넷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읽기와 쓰기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고, 또한 (독서에 한정해보자면) 국내외 청소년문학을 골고루 섭취하자는 이야기도 많이 있지만,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우리 작가가 쓴 우리 이야기가 수입되는 종수에 비해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국내작가분들의 많은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겠네요. 

이 책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던 제주를 배경으로 부모님, 그리고 그보다 윗어른들이 살아오신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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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깅이 - 청소년을 위한 <지상에 숟가락 하나> 담쟁이 문고
현기영 지음, 박재동 그림 / 실천문학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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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구름처럼 모인 가운데 전시된 그(이덕구)의 주검은 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순교의 상징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46쪽

그게 동물적 본능인지는 몰라도, 그 시절 나는 상처를 핥는 버릇이 있었다. 워낙 돌이 많은 고장이라 나 같은 아이들은 천방지축 뛰어놀다가 길바닥의 돌부리에 채어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내 무르팍은 성한 날이 드물 지경이었다. 무르팍이 깨져 피가 나오면 혓바닥으로 핥고 나서 고운 흙가루를 뿌려 지혈시키곤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상처들은 대개 덧나지 않고 쉬이 아물었다.-84쪽

<어머니와 어머니>가 씌어진 것도 바로 그러한 사정에서였다. 그러니까 그 작품이 곧 내 경험의 고백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치욕이였으므로, 그 작품 속에 드러나지 않게 은폐되어 있었다. 작품의 분위기는 내 경험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야기 자체는 지어낸 픽션이었다. 그래서 주인공 소년은 나 자신도 아니고 승언이도 아닌, 그 둘이 합쳐진 것에다 다른 무엇이 더 보태어진 제3의 인물이 되었다. 픽션의 이름으로 난생처음 만들어본 그 인물에다 내가 지어준 이름은 준이었다. 속눈썹 긴, 슬픈 눈매의 소년.-186쪽

그렇게 아무 분수도 모르고 한 일이 그 후 내 인생을 좌우한 평생의 업이 될 줄이야. 승산 없는 싸움의 시작, 글쓰기 인생이란 아무리 애써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아닌가. 물론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의 고달픈 글쓰기 인생은 바로 그 작품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탈 행위가 없었다면 아예 그 작품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을 생각할 때, 무정한 아버지야말로 나를 이 길로 걸어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글쓰기는 그 작품에 앞서, 부재중의 아버지를 향한 7년 가까운 편지 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계속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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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매매 넉달 ‘나타샤의 지옥’



확대 사진 보기 [한겨레] “공장 취직”이란 말에 한국행

“성매매” 강요 마사지 업소로

브로커에 번돈 뜯기고 빚까지

신고하자 위장결혼 혐의 입건

“평생 흘린 눈물보다 지난 4개월 동안 한국에서 쏟은 눈물이 더 많아요.”

우즈베키스탄 여성 나타샤(29·가명)에게 한국은 ‘눈물의 땅’이다. 최근 서울 신설동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에서 만난 그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온 한국. 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지옥’이었다.

지난해 11월9일 그는 고려인 여성 김아무개씨와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휴대전화 조립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김씨의 말에, 17개월 된 딸을 고향 타슈켄트에 남겨둔 채였다. 하지만 입국하자마자 그가 간 곳은 서울의 한 휴게텔이었다. 김씨와 연결된 국내 브로커 조아무개씨는 “손님들을 마사지하고 성매매도 해야 한다”고 했다. 나타샤가 울면서 항변하자 김씨와 조씨 등은 그를 서울의 한 집창촌으로 끌고 간 뒤 “말을 듣지 않으면 이곳에 팔아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지난해 12월20일 나타샤는 누구인지도 모를 이들에 의해 경기 안산의 한 마사지 업소로 옮겨졌다. 그곳엔 몇몇 우즈베키스탄 여성들이 이미 ‘일’을 하고 있었다. 기회를 엿보던 그는 한국말을 잘하는 한 우즈베키스탄 여성에게 경찰에 신고해 줄 것을 부탁했고, 결국 같은달 30일 동료 6명과 함께 업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뿐이었다. 그가 업소에서 번 350여만원은 입국수속비란 명목으로 브로커가 모두 가져갔고, 그들은 여기에 더해 “한국 남성과 위장결혼 하는 데 들어간 돈이 1500만원”이라며 갚기를 독촉했다. ‘돈 벌어 고향에 되돌아가 미용실을 차리겠다’던 나타샤의 꿈을 앗아간 브로커들은 여성 1명당 500만원씩을 받기로 하고 이들을 업소 등에 공급해 온 ‘인신매매범’들이었다. 브로커들은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종적을 감추었다.

안산단원경찰서는 지난 1월 중순 나타샤를 공전자기록 등 불실기재 혐의로 입건했다. 한국 남성과 위장결혼을 해 공공문서를 거짓으로 기재했다는 것이다. 성매매는 ‘강요’에 따른 것이어서 혐의에 포함되지 않았다.

성매매 피해 여성을 돕는 두레방 관계자들은 나타샤의 입건이 적절하지 않다며, 지난 24일 안산단원경찰서를 항의 방문했다. 박수미 두레방 상담실장은 “나타샤가 성 착취의 목적의 인신매매범들에게 속아 유인된 게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며 “경찰은 유엔이 정한 ‘인권과 인신매매에 대한 권고 원칙’에 따라 이들을 입건하지 말아야 했다”고 요구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입국했다고 해도 인신매매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죄를 물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나타샤는 지금껏 귀향을 미루고 있다. 그는 “나 같은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기 위해 경찰이 브로커를 잡는 것을 두 눈으로 꼭 봐야겠다”고 했다.

안산/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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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11) 지리산 천왕봉~장터목

푸릇푸릇 반기는 산죽 걷다보면 하늘이 열린다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이 낮고 가까워졌다. 산은 그대로지만 사람들이 산허리까지 올라간 까닭이다.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中山里)는 말 그대로 지리산 허리춤에 자리한 마을로 천왕봉을 오르는 최단 코스가 나 있다.


 
▲ 제석봉 고사목 지대를 지나는 산꾼들. 1500m가 넘는 산줄기들이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장쾌함은 오직 지리산에서만 볼 수 있는 명풍경이다. 오른쪽 가장 높은 펑퍼짐한 봉우리가 반야봉이다.


작년 7월부터 중산리 탐방안내소에서 순두류 자연학습원까지 셔틀버스가 다니면서 천왕봉 산행이 좀 더 쉬워졌다. 당일 산행으로 지리산을 제대로 둘러보고 싶다면 중산리~천왕봉~장터목~백무동 코스에 도전해 보자. 이 길은 1915m의 천왕봉에서 장쾌한 조망을 만끽하고, 장터목까지 주능선을 걸으며 웅혼한 지리산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봄·가을 산불예방기간에도 출입이 자유로워 아무때나 산행할 수 있는 점도 매력이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그러운 민족의 영산


 
 

중산리에서 천왕봉의 중간 지점인 로타리대피소까지 가는 길은 두 가지다. 칼바위 코스와 순두류 코스. 상대적으로 길이 순한 순두류 코스를 이용하려면 중산리 탐방안내소 앞에서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하늘을 찌르는 낙엽송 지대를 10여분 지나 순두류 자연학습장 입구에서 내린다. 산행은 위령비 왼편으로 이어진 길을 따르면서 시작된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계곡으로 들어서면 푸릇푸릇한 산죽이 반갑고, 참나무와 박달나무에 생기가 돈다. 따스한 기운을 감지한 나무와 풀들은 새싹을 밀어올릴 준비로 분주하다.
봄의 생명력이 충만한 계곡을 1시간쯤 오르면 로타리대피소에 도착한다. 대피소 바로 위에 자리 잡은 법계사는 구례의 화엄사처럼 신라 진흥왕 9년(548)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졌다. 예전에는 찾는 사람이 뜸한 소박한 암자풍의 사찰이었는데, 최근에 다소 요란한 중창불사가 있어 호젓함은 사라졌다. 거대한 바위 위에 다소곳이 올라앉은 2.5m의 삼층석탑만 둘러보고 다시 등산로를 따른다.  


●천왕봉 오름길은 순두류 코스가 쉬워


법계사 입구에서 오른쪽 모퉁이를 돌면서 한동안 돌계단과 쇠줄 난간이 이어진다. 땀을 뚝뚝 흘리며 묵묵히 비탈을 오르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화들짝 놀라게 된다. 남녘의 산들이 해일처럼 밀려오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은 날은 멀리 삼천포의 남해가 찰랑찰랑 넘실거린다. 커다란 입석 바위인 개선문(凱旋門)을 지나면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모이는 천왕샘이 기다리고 있다. 한 잔 들이켜보니 마치 살얼음을 깨고 먹는 것처럼 차갑다. 약수에 힘을 얻어 악명 높은 급경사 돌계단을 단숨에 돌파하니 대망의 천왕봉이다.
1472년 점필재 김종직은 함양 관아를 떠나 이틀 만에 천왕봉에 올랐고, 정상에서 덕유산·계룡산·가야산 등 사방의 28개 봉우리를 조망한 기록이 있다. 높은 산을 오르는 일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을 때에 지리산에서 사방을 조망하고 많은 명산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김종직이 가르쳐준 대로 북쪽부터 사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 북쪽의 무주 덕유산, 동쪽의 대구 팔공산, 서쪽의 광주 무등산, 남쪽의 사천 와룡산 등을 알아보았다.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은 여러 산 중에서 제법 활처럼 우뚝 솟아 있다.”는 그의 말처럼 두 봉우리의 기상이 출중했다.  


●김종직의 천왕봉 조망법  


천왕봉에서 장쾌하게 뻗어내려간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이 길을 걷다 보면 웅장한 산세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백두산이 떠오른다.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지리산보다 두류산(頭流山)이란 말을 더 좋아했다. 천왕봉을 내려와 통천문을 통과하면서 제석봉 고사목 지대의 멋진 풍경을 상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고사목들이 거의 쓰러져 제석봉은 민둥산처럼 황량하고 초라해져 있었다. 4년 전만 해도 제법 고사목들이 늠름했건만….
장터목산장에서 라면을 끓여 허기를 채우고, 하산길에 들었다. 길은 제석봉의 옆구리를 타고 돌다가 반야봉을 바라보면서 지릉을 따른다. 산죽과 신갈나무가 우거진 호젓한 숲길은 시나브로 고도를 낮추면서 참샘과 하동바위를 지나 백무동에 이른다. 순두류 자연학습원~천왕봉(4.8㎞) 3시간30분가량, 천왕봉~장터목(1.7㎞) 1시간, 장터목~백무동(5.8㎞) 3시간쯤 걸린다. 지리산관리공단 중산리분소 055-972-7785.  


●가는 길과 맛집  


서울에서 중산리로 가려면 서울남부터미널(02-521-8550)에서 함양 원지행 버스를 탄다.
오전 6시~오후 9시까지 30분~1시간 간격. 소요시간 3시간10분, 요금 2만원. 원지터미널(055-973-0547)→중산리는 오전 6시50분~오후 9시40분까지 약 1시간 간격. 백무동→동서울터미널은 오전 7시20분, 8시50분 11시30분, 오후 1시30분, 2시50분, 4시, 6시 각각 운행한다.
중산리 탐방안내소 앞의 용궁산장(055-973-8646)은 단골 산꾼들이 많은 집으로 직접 담근 장으로 만든 우거지해장국(6000원)이 일품이다. 이곳에서만 나온다고 자랑하는 당귀김치도 별미다.
산악전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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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41) 경남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은 지리산 주능선 상의 세석과 장터목으로 길이 닿아 늘 등산객들로 분주하지만 옛날 옛적엔 천왕봉에서 기도를 올리려는 무당들로 붐볐던 곳이라고 한다. 백무동이란 이름도 ‘100명의 무당이 살았다’는 뜻의 ‘백무(百巫)’였다가 무관이었던 전주 이씨가 들어오면서 백무(白武)로 그 뜻이 바뀌었다.


 
▲ 사진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해바라기 곱게 핀 백무동 마을 풍경, 장터목펜션을 운영하는 이봉수씨, 장작으로밥을 짓는 아궁이.


지금은 22가구쯤 살고 있으며 3분의2가 민박과 식당을 겸한다. 그중 원주민은 절반도 안 되는데 “장사할 줄 몰랐다.”는 게 그 이유. 주로 머루, 오미자, 당귀 등을 채취하며 살았던 원주민들은 뒤늦게 민박 대열에 합류했다. 산행인구가 늘어난 건 1980년대 중후반부터였지만 자연보호구역으로 묶여 시설 확충을 하지 못하다가 김대중 정부 때 취락지구로 변경, 약 4년 전부터는 펜션단지로 조성되다시피 했다.  


마을이름 百巫→무관가문 白武로  


백무동의 대표적 등산로는 한신계곡과 하동바위 코스로 각각 나뉜다. 약 6.5㎞의 한신계곡은 첫나들이폭포, 가내소폭포, 한신폭포 등을 품고 있어 여름철 계곡산행 코스로 인기가 높다. 청류와 어우러진 가을 단풍도 멋스럽고 북사면 특유의 겨울 설경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석대피소를 앞둔 1㎞가 바위너덜로 이뤄진 급경사여서 오르는 데 곤욕을 치르곤 한다.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장터목대피소로 이어진 하동바위 코스는 길이 5.8㎞로 등산로 중간에 하동바위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남쪽의 중산리 코스와 더불어 천왕봉을 오르려는 등산객들로 사시사철 붐비는 길이다. 계곡은 거의 없이 무던한 능선길에 가깝다. 식수는 중간 지점의 참샘에서 보충할 수 있다. 몇 해 전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심야버스가 생기면서 새벽 산행을 즐기려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그 외 한신계곡의 가내소폭포 즈음 해서 장터목까지 오르는 한신지계곡이 있지만 현재는 비법정탐방로로 묶여 산행을 할 수 없다.
어느 코스든 주능선까지 오르려면 넉넉히 4시간은 잡아야 한다. 특히 요즘은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절정을 이루고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전주 이씨의 후손으로 6대째 백무동에 살고 있는 이봉수(52)씨는 어린 시절 동네 어른한테 전해들었던 호랑이에 관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디선가 ‘사르르’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긴 꼬리의 호랑이가 동네에 자주 나타났다. 아주 더울 땐 밤중에라도 계곡에 내려가 친구들과 물장구를 쳤는데, 어른들이 물동이를 시끄럽게 두들기며 내려와 아이들을 데려갔다. 그럴 때마다 길 위로 올라와 계곡을 내려다보니 바위 위에 호랑이가 앉아 있더라는 것. 아이들 노는 걸 구경했는지, 아니면 먹잇감으로 생각한 건지, 커다란 불덩이(안광)가 덩실 춤을 추다 산으로 올라가곤 했단다.  


펜션 편리함·초가집 흙냄새의 어울림


18년째 택시기사로 일하는 이봉수씨는 백무동 한쪽에 ‘장터목펜션’을 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신축 허가가 나지 않아 묵혀 뒀던 땅이다. 쥐 오줌이 얼룩진 옛 민박집에 비하면 요즘의 백무동은 그야말로 최신식이다. 먹고 자고 씻는 일이 편해져 하룻밤 묵어가기 좋다. 특히 이씨의 펜션에 주차를 하고, 그의 택시로 성삼재 이동, 주능선 종주를 마친 다음 다시 백무동으로 하산, 역시 이씨의 펜션에서 식사까지 한 후 차량 회수를 해가는 이들이 많아, 이씨도 산행객들도 편해진 게 사실이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펜션으로 바뀐 민박집이 좋은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굳이 불편을 감수하며 낡은 흙집을 찾는 이들도 있다. 초행이라면 찾기도 힘든 백무동 골목 안 ‘초가집’은 상호 그대로 60년된 초가집이다. 짚으로 얹은 지붕엔 아직도 굼벵이가 산다. 건강 때문에 내려왔지만 이제는 각처에서 찾아오는 산사람이 좋아 평생 머물기로 작정했다는 초가집 내외는 펜션보다 훨씬 저렴한 숙박료를 장점으로 꼽는다. 그러나 단골 산꾼들은 돈보다 ‘격의 없이 친근함’을 이 집의 최고로 친다.  


글 사진 황소영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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