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입시업체 웃고,학습지·출판업체 울고
2009-03-09 05:55:00


‘교육 콘텐츠에 따라 명암 엇갈렸다.’

교육업체들이 지난해 경기불황에도 불구하고 한 해 농사를 잘 지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외국어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업체와 온라인 입시업체들이 큰 성과를 달성했다. 반면 학습지업체와 출판업체들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명암이 엇갈렸다.

■온라인 입시교육업체 ‘함박웃음’

8일 교육업계와 금융감독원 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정상제이엘에스(정상JLS), 청담러닝 등 외국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업체들의 실적이 크게 향상됐다.

정상JLS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대비 367.28% 상승한 84억600만원을 기록했다. 매출액 역시 전년대비 76.18% 증가한 786억9700만원, 당기순이익은 336.32% 늘어난 54억9700만원을 올렸다. 청담러닝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146억원으로 전년대비 36% 증가했다. 매출액은 830억원으로 32% 늘었고 당기순이익은 107억원으로 65% 증가했다. 지난해 매출액이 예상치에 못 미쳤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올해 다양한 사업을 바탕으로 1000억원을 돌파한다는 계획이다.

이같이 외국어 콘텐츠 기반의 교육업체가 성과를 거둔 것은 정부가 지난해 영어교육 강화방안을 발표하면서 학부모와 학생들의 수요가 커진 것으로 분석된다.

온라인 입시교육업체들의 실적도 나쁘지 않았다. 비유와상징은 지난해 매출액이 765억1100만원으로 전년대비 16.2% 증가했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이 소폭 감소했지만 신규사업 진출, 브랜드이미지 제고 등에 투자한 비용이 오히려 더 큰 효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이 회사는 지난해 출판사업의 확고한 1위와 함께 중등 온라인 ‘수박씨닷컴’과 고등 온라인 ‘비상에듀’를 크게 성장시키고 있다.

메가스터디는 지난해 매출이 2023억1000만원으로 전년 대비 23.8%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15.7% 증가한 675억6000만원, 당기순이익은 9.5% 증가한 506억2000만원을 기록하며 온라인 입시교육 대표기업의 면모를 보여줬다. 회사 측은 올해 매출액 2450억원, 영업이익 845억원 달성을 예상했다.

SK커뮤니케이션즈의 온라인 입시교육서비스 이투스도 251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고등 입시시장의 2∼4위 업계의 면모를 보여줬다.

■전통의 학습지, 출판업체 ‘글쎄’

반면 학습지 기반의 업체와 출판업체들은 고전하는 모습이다.

특히 ‘눈높이’로 유명한 대교를 살펴보면 웅진씽크빅, 교원 등에 밀리는 형국이다. 대교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대비 27% 감소한 572억1000만원을 기록하며 벼랑 끝으로 밀리는 상황이다. 매출액 역시 전년에 비해 0.7% 줄어든 8410억9000만원, 당기순이익도 46.3% 감소한 258억2300만원으로 집계됐다.

업계 관계자는 “부동의 1위였던 대교가 학습지사업이 점차 추락하면서 이제는 교원에 밀리는 상황이 됐다”며 “사업의 다양화로 성장동력 발굴에 적극적이었지만 이마저도 부진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대교는 올해 매출액, 영업이익, 순이익 전망치를 모두 하향 조정한 상태다.

반면 웅진씽크빅은 지난해 매출액이 전년대비 66% 증가한 7846억원이었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각각 59.4%, 32.1% 늘어난 664억원, 286억원을 기록했다.

외국어 교재 출판업체 능률교육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대비 7.7% 감소한 43억6800만원에 그쳤다. 매출은 전년대비 16% 증가한 376억4600만원, 당기순이익은 83.1% 감소한 5억7800만원을 기록했다.

/why@fnnews.com 이재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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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즈앤노블 서점, 전자북 업체 인수
 
안희권기자 argon@inews24.com

 



 


대형 서점인 반즈앤노블이 e북 전문업체인 픽션와이즈를 인수하기로 했다고 뉴욕타임스가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반즈앤노블은 1천570만 달러에 픽션와이즈를 인수하고 e북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윌리암 반즈앤노블닷컴 사장은 "e북 시장은 앞으로 크게 성장할 만한 잠재력을 지닌 시장"이라며 "픽션와이즈의 인수를 계기로 e북 사업을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출판 업계는 e북이 전체 책 판매 비중에서 1% 밖에 차지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지난해 전체 책 판매 시장이 성장 둔화 또는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e북 시장은 3배 이상 성장했다. 출판 마케팅 전문 업체인 코덱스 그룹의 자료에 따르면, 작년 12월 중순부터 올 1월 중순까지 한 달간 판매된 서적 중에 e북이 차지하는 비중은 3%에 해당된다고 평가했다.

9년전에 스티브와 스캇 펜더그래스트가 설립한 픽션와이즈는 개별 브랜드를 채택한 e리더와 e북와이즈 등 2개 온라인 상점 사이트로 운영돼 왔다. 이들 사이트에서는 아이폰용 e북을 비롯해 PC와 스마트폰에서 구독할 수 있는 6만여 개의 다양한 책자를 판매하고 있다.

반즈앤노블은 픽션와이즈의 인수로 아이폰과 킨들용 e북을 판매하고 있는 아마존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됐다. 출판업계는 반즈앤노블의 e북 시장 진출을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이는 대형 서점업계의 e북 시장 진출로 관련 시장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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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 In]풍경 속에 녹아 있는 시인의 눈
 
시인 최하림
 

계간 시인세계
 
 
Zoom In 최하림 시인(기사제공: 계간 시인세계)
 
(김광일=조선일보 문화부장) 오후는 문학적이다. 햇살이 적당하게 힘을 잃어가는 시간이다. 역사상 어떤 악당도 이런 오후에는 선전포고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에너지가 많은 역동적인 것들조차 평화롭게 비껴 있을 것만 같은 그 시각쯤 최하림 시인을 찾아가니 그곳엔 시인이 다섯이나 살고 있었다.
 
최하림 시인은 물론이지만, 그의 부인도 시인이었고, 그가 키우고 있는 세 마리 포유류도 시인이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그는 언덕 위에 흰색 이층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지붕은 담홍색으로 이국적이었다.

그날은 조금 불안한 마음이었다. 꼭 그렇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김요일 시인과 필자는 부지런히 서울을 빠져 나갔다. 점심 때쯤 북한이 핵실험 실시를 발표한 날이라 도심은 뒤숭숭했다. 그런 날일수록 국가와 민족의 명운이 경각에 달리는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다는 중압감에서 탈출하는 방편의 하나로 산속에 묻힌 시인을 찾아가는 일이 제격이기는 했다.

최하림 시인이 서 있는 마당에 자동차가 들어서니 그가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지나고 보면 이 세상은 그 무엇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게 틀림없다. 그는 매우 천천히 걸었다. “건강은 이 정도겠죠”라고 담담히 말하다가, 그리고 김종해 시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회사 일을 깐깐하고 야무지게 할 거야.”

물론 ‘회사 일’이란 김종해 시인이 주간으로 있는 문학세계사 출판 일을 두고 한 말이다. 김종해 시인의 맏아들이자 같은 출판사에서 이사로 일을 하고 있는 김요일 시인과 옛이야기꽃이 피어올랐다. 최하림 시인도 한때 ‘날리는 출판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출판에 관계된 몇 마디가 인터뷰의 꼭지를 따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70년대는 머리가 돌아갔으나, 80년대 지나면서 못하겠습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추억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최 시인은 “속도가 들어오니까 못하겠더라”고 말했다.
 
기획을 세우면, 기획을 검토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취합하면서 그것을 다시 음미하고, 독자들에게 진정 도움이 될지를 되새기고, 원래 출판을 시작했을 때의 철학과 맞는지를 확인하고, 그렇게 해서 기다리던 원고가 들어오면 있는 힘을 다해 편집과 디자인을 진행하는 일들을 짧게는 6개월에서 길면 몇 년씩 진행하던, ‘에둘러 가는’ 출판이었다. 그런데 H출판사에서 선도했듯이 어제 기획으로 꺼낸 이야기가 불과 며칠 만에 책으로 나오는 판국이 전개되는 출판의 현기증을 최 시인은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대화는 다시 집 짓는 이야기로 돌아갔고, 문호리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최 시인은 집 짓는 데 설계비로 얼마가 들어갔고, 건축비로 얼마를 치렀으며, 대지가 몇 평이고 건평이 몇 평이라는 이야기까지 자세히 곁들였다. 그는 별로 자랑할 게 못 된다고 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결국은 자랑을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빼어난 경치는 시인에게는 안 좋습니다. 화가에게는 좋을지 몰라도요. 시인에게 풍경은 조금은 빈 곳이 있어야지요. 여기는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워요. 서종면(양평군)에 바치는 헌사지요.”

가만 두면 아마도 밤새도록 경치와 인근 친구들과 집에 대한 자랑으로 줄줄이 이어져갈 것 같았다. 그래서 이야기 허리를 끊고 준비해간 질문으로 돌입했다. 김요일 시인도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최하림 시인을 찾아가니 그곳엔 시인이 다섯이나 살고 있었다. 최하림 시인은 물론이지만, 그의 부인도 시인이었고, 그가 키우고 있는 세 마리 포유류도 시인이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그는 언덕 위에 흰색 이층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지붕은 담홍색으로 이국적이었다.최하림 시인이 서 있는 마당에 자동차가 들어서니 그가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지나고 보면 이 세상은 그 무엇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게 틀림없다. 그는 매우 천천히 걸었다. (김광일)   ⓒ계간 시인세계
 
     
소금배를 타고 어렵게 살아온 유·청년 시절

▶ 목포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산이 기울고 엄청 고생을 많이 하신 것으로 돼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던 분이셨습니까.

“농사도 하고 장사도 하고 그랬습니다. 아버지 말고 큰아버지께서는 광주학생운동을 하셨지요. 큰아버지는 중학교를 못 가셨지만 머리가 뛰어나셨어요. 큰아버지의 절친한 친구 중에 권수동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가 광주학생운동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독서회 회원이었지요. 두 분이 목포 서부지역 섬들을 조직했습니다. 나중에 그분은 집안이 사촌 육촌까지 싹쓸이하다시피 다 죽어 나갔는데, 우리 집은 아버지가 해방 후 3년 만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하시던 말씀이 ‘사상 하지 마라’는 당부였습니다. 나중에 권수동이란 분의 부인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광주학생운동의 지방조직이 여파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지요. 목포 인근의 섬들뿐만 아니라, 제주까지 뒤져보고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만 우리 어머니도 6·25가 일어나니 먹고 살 수가 없어서 무진 고생을 하셨습니다. 나도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공장 직공이 돼 있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공장 노동자가 되지 않고 여기까지 오려니 아주 힘들었지요.”



건강했던 80년대 초 시인의 모습.
ⓒ계간 시인세계
“젊은 시절, 목포와 광주 사이의 밤이면 캄캄할 뿐인 국도에 그 생생한 꿈을 묻어두었던 아름다운 청년 최하림”이라고 황현산 교수가 쓴 적이 있습니다.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신문배달 같은 고학으로 점철된 유청년 시절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의 고생은 어떤 내용입니까.

“신문 배달 같은 아르바이트지요. 여름 방학이면 목포에서 생산되는 소금배를 타고 전국 해안을 돌기도 했습니다. 6·25 뒤로는 목포가 소금 집산지였거든요. 광양만 소금이 목포 부근으로 옮아온 것입니다. 고향 간척지에 소금을 해서 소금 부자들도 생겨났습니다. LST 같은 해군 배를 이용해서 소금을 싣고 마산, 삼천포나 주문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소금 가마니를 부리면서 숫자를 세는 역할을 했지요. 지금 떠오르는 장면은, 소금 실은 배를 타고 가는데 낮에 고기들이 따라오더라고요.”

▶ 목포고 시절 교유했던 원동석, 김병곤, 김중식, 윤종석, 정일진 같은 분들이 있다는 기록이 있던데요, 지금 생각나시는 그 시절 친구들이 있습니까?

“미술평론도 하고 시, 소설을 썼던 친구들입니다. 고교 문예반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군대에 갔다 와서 그 시달렸던 경험 때문에 글을, 시를 못 쓰게 된 친구도 봤습니다. 친구 정일진의 집에는 문학 책이 참 많았습니다. 양철지붕 밑 다락방에 누워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같은 책들을 다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때 김요일 시인이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햇살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옥외 사진을 찍으면 근사할 것 같기도 했다. 마당에는 양몰이 개 콜리종인 세 살배기 올가, 그리고 마르티즈 계통의 잡종견인 다섯 살배기 똘똘이가 놀고 있었다. 눈빛들이 선했다. 최 시인은 특히 키가 작은 똘똘이 자랑이 대단했다.

“어디를 가든 따라옵니다. 내가 차를 타고 속력을 내서 그 녀석을 떨어뜨리면 그 다음 마을을 찾아다닙니다. 산보할 때면 꼭 앞장서서 다니지요. 산보를 안 나서면 거실 창가에 와서 짖습니다. 아침에는 마누라가 산보를 가고 나는 오후 3시쯤 나갑니다.”

《산문시대》 동인지와 김현



1964년 동인지 《산문시대》를 펴내고. 뒷줄 왼쪽부터 최하림, 김현. 앞줄 왼쪽부터 김치수, 이준재, 김승옥.   ⓒ계간 시인세계


 


 
▶ 시인 최하림의 1960년대를 말하면서 김현과 김승옥, 김치수, 곽광수, 염무웅, 강호무 같은 《산문시대》 동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 최하림에게 평론가 김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김현을 말하자면 동인지 《산문시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겠지요. 처음 《산문시대》는 김현, 김승옥, 김치수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하기로 했던 동인지였습니다. 타이프를 쳐서 내기로 했는데, 그 일을 할 여성까지 구해 놓았습니다. 김현 집이 부자였거든요. 그런데 내가 타이프로는 세상에 내밀기가 좀 그럴 것 같으니 전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인쇄로 찍자고 했지요. 그 출판사 이름이 가림출판사였습니다.
 
김현은 무슨 말인지 금세 알아듣고 동조했습니다. 김현은 참 독특한 능력을 가진 친구였습니다. 세계문학전집에 끼어 있는 명작들도 우리가 이틀 동안 읽어야 할 두꺼운 페이지를 3,4시간이면 다 읽어냈습니다. 밤새 술을 먹어도 새벽이면 일어나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생각과 몸이 똑같이 나갔던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발상 정도의 수준에서 얘기를 하고 있으면 그는 벌써 움직이면서 실행에 옮기고 있었으니까요. 김현은 글쓰기로서의 문학과 운동으로서의 문학을 함께 하면서 한국문학을 개신하자는 것이었지요. 문제는 김치수였습니다. 그는 학생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동인지를 인쇄하는 것은 상업성에 물드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빠져 나갔기 때문에 첫 동인지는 김현, 김승옥, 최하림, 이렇게 셋이서 했습니다.”

▶ 전주에 있었다던 가림출판사의 사장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전주에 갔더니 키가 자그마한 김종배 사장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 분 말씀이 ‘내가 인쇄를 공짜로 해줄 터이니 제본은 너희들끼리 해라’ 하시는 겁니다. 제본까지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산문시대》 4집까지를 공짜로 냈습니다.”

▶ 지방에 있는 출판사라 인쇄가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겠습니다.

“정반대입니다. 그때 전국적으로 서울에 있는 삼화당과 평화출판사의 활자가 제일 좋았는데, 새 활자가 나오니 그 출판사에서 쓰던 것을 전주에 있는 가림출판사에 주었던 겁니다. 그분들이 같은 전주분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가림출판사의 활자는 전국적인 수준으로 봤을 때도 어디에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한 번 낼 때마다 300~500부 정도 찍었던 것 같습니다. 책이 팔려 나가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광주에 학원서림이란 책방이 있었는데, 광주 가는 길에 우연히 들렀더니 20부씩 세 번 보낸 책값을 전부 지불해주더라고요.”

▶ 어떤 내용들이 실렸습니까.

“처음에는 소설을 6편 정도 실었습니다. 각광은 김승옥에게 돌아갔죠. 종로통에서 우연히 백철 선생을 만났는데, 승옥이를 불러서 ‘소설 굉장히 좋았다. 단지 경력 때문에 동인문학상에서 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술자리마다 김승옥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내가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던 1964년 시상식 자리에 가니 선우휘 선생이 임중빈 선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산문시대가 뭐냐?’고 묻자 임 선생이 ‘내가 얘기할 자리가 아니고 여기 최하림 씨가 있다’고 대답하더라고요. 그러자 선우 선생 말씀이 ‘만나는 사람마다 산문시대 얘기를 하더라’고 합디다.”

▶ 나머지 동인들은 언제 합류했습니까.

“김치수, 염무웅, 곽광수, 강호무는 2집 때부터, 그리고 서정인은 4집 때 합류했습니다.”

▶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는 시집을 보면, 「김현을 보내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별은 멀고/ 밤은 어둡고/ 얼굴은 붉었다”로 이어지는 시입니다. “양수리 물가에 너를 묻어두고/ 고속버스를 타고 캄캄한 길을 달려/ 광주로 일하러 갔다 바람이/ 소리치며 창밖으로 달리고 반고비/ 나그네길이라고 했던 네 책표지가/ 유리창에 나타났다 사라졌다”고 돼 있습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셨습니까.

“김현은 대학 때부터 달랐습니다. 다방에 들어오는 모습조차 달랐습니다. 톱밥을 때는 난로 옆에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얘기하고 있었는데 김현이 끼어들었어요. 그러다가 이야기가 『비극의 탄생』으로 넘어갔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따라오지 못하는 측면이 있길래 그 다방을 나와서 옆에 있는 다른 다방으로 갔지요.
 
우리는 한창 문학에 취해 있었습니다. 발레리를 말하고, 베게트를 토론했지요. 그날부터 만나고 또 만나고 며칠 동안 서로를 끌고 다니다 헤어졌는데 어느날 서울에서 김현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함께 동인지를 하자구요. 그래서 동인을 시작한 겁니다.
 
김현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후반기 15년 정도는 소원한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김현은 계속해서 문학의 중심에 머물러 있었고, 나는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90년대 말까지는 프로다운 시인은 못됐던 셈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훨씬 화급한 문제였습니다. 사실 시를 본격적으로 다시 쓴 것은 광주에서 직장(《전남일보》 논설고문직) 그만두고 충북 영동으로 이사한 후로 오늘까지입니다.
 
김현이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만도 했지요. 공개적으로 나를 비난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김현이 내 맘에서 떠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그의 꿈을 여러 번 꾸었습니다. 김병익에게 그 꿈 이야기를 했더니 김현의 꿈을 꾸었다는 사람이 더러 있더라고 하더군요. 김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저 평범한 시골 문사로 그쳤을지 모릅니다. 이후의 내 문학은 김현의 추동력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 해도 됩니다.”

나에게 ‘창비적’ 요소가 많았던 것은 사실

▶ 그런데 광주에 있다가 왜 충북 영동으로 이사를 가셨습니까.

“광주에 함께 살자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5·18 이후 많이 거칠어져서, 나는 앞으로 시를 쓴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냥 조용히 숨어 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 가는 것이 내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를 조금씩 쓰게 됐고, 청탁 오면 용돈 벌려고 또 시를 쓰고 하게 됐지요.”

▶ 평론가 김치수는 말했습니다. 두 번째 시집 『작은 마을에서』의 해설을 통해서입니다.
 
“최하림은 우리 시단을 주도해왔던 두 경향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순수와 참여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시의 완성이라는 목표에 연결시키려 했다.”고 말입니다.
 
최하림 시인은 우리 시대의 다난한 역사의 현장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지만, ‘논의의 중심’에 들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시의 중심’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황현산 선생도 다시 인용했더군요. 최 선생님께서 이 말에 동의한다면, 이 경우 논의의 중심과 시의 중심은 어떻게 다른 겁니까.

“논의의 중심은 생각 안 해 봤는데, 시의 중심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와 현실은 ‘창비적’ 요소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발레리로부터 시작했지만 발레리적인 것이 내 목소리일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 나는 발레리의 「젊은 빠르크」와 「해변의 묘지」 등을 읽다가 한계를 느끼고 발레리의 초기시인 「구시첩」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희’라든지 ‘내면’ 같은 이미지를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말’이라는 명제에 처음 부딪친 것입니다. 우리 말은 우리 현실과 우리 문화와 우리 역사를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나의 시는 가난한 내 현실의 목소리로 말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발레리의 역반응으로 눈을 뜬 셈입니다. 시가 어려워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내가 쓰던 것들을 지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내 개신 작업과 더불어 우리 역사를 굉장히 열심히 읽었습니다. 역사책이라면 죄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창비>에서 첫시집을 냈습니다. 「60년대 시인의식」과 「시와 정신」을 발표한 뒤, 어느날 백낙청 씨가 내게 말하더군요.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됐다구요. 내가 <창비>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창비와 내 거리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런 작업이 내 ‘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논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 그러면서도 최하림 시인의 작품에는 또 다른 요소, 그러니까 좀더 근대적 서정으로 진전해 들어가는 요소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창비에서 시집을 내고 70년대 말까지는 동행을 했던 셈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내 시세계가 살아 있었던 거죠. 김규동 시인이 한번은 내게 와서 ‘최형 시에는 모더니티한 면이 많다. 그 점이 좋다’고 말씀하십디다.”

▶ 90년대 후반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라는 시집을 보면 「시를 태우며」라는 시가 나옵니다.
 
“밀면 돌멩이가 되어/ 가는 불빛에도 흔들릴/ 석불로나 돌아가 웃을까/ 동서로 떠돌며 노래부를까// 나는 시 써서 시인이고 싶었건만/ 오늘은 느티나무 아래 시들을 모아/ 불태우네 점점이 날아가는 새들과/ 아직 체온이 남은 기억들 그리고/ 지평선에 떠도는 그림자들…”이라고 돼 있습니다.
 
또 뒷표지에 적은 글에는 “나는 사라지는 내 시의 그림자들을 꿈결인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만쯤에서 나는 내 시의 로프줄을 끊어버리고 싶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때 심정은 마치 문학적 잠적이나 소멸 혹은 절필을 결심하려는 듯한 심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심중 자체를 시의 소재로 삼는 방식으로 가늘디가는 시 정신의 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내부 외부 풍경을 다시 좀 떠올려 주시지요.

풍경이라는 것에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통로가 있어

“충북으로 갈 때 시 쓴다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시로부터 떠난다,고 생각했고, 발레리를 떠나서 ‘현실’로 건너가는 과정에는, 그 ‘현실’과 마주서야 한다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긴장이 점점 흐려져 갔습니다. (최 시인은 1991년 고혈압으로 쓰러졌었다)
 
내게 아무런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 나다운 생각들, 그러니까 역사가 발전하는가, 역사도 후퇴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런 생각들이 다 날아가 버리더라고요. 실제로 너무 피곤하고, 이름도 없이 숨어 살고 싶었습니다. 머리카락도 내밀기 싫었지요. 절절한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보니 시를 쓰고 싶다, 는 염원이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유리창 너머 풍경을 보았습니다. 풍경은 살아 있었습니다.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풍경은 배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배후는 시간으로 말하자면 과거 같은 것이고, 고향 같은 것이고, 그림자 같은 것이고, 여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 마음도 몸도 풍경 속으로 나아갔습니다. 가면 갈수록 풍경의 진폭은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 평론가 김수이는 최 선생님의 최근 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를 읽고 나서 「겨울 언어의 시, 시간과 사유의 평행/대립 구조」라는 글을 썼습니다. 결론은 이 시집을 보면 사유의 고정점이 이동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담백한 풍경화를 그려내는 듯하지만, 그곳에는 세계를 차지하려는 시인 자신과, 또는 그 세계 속에 함몰되려는 시인 자신이 충돌하면서 일종의 고정점이 생기고, 그 고정점이 이동하고 있는 현상이 읽혀진다는 것입니다. 극도로 각성된 정신을 가지고 수릉리와 서후리의 풍경을 무심하게 담아내는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치밀하게 의도한 것입니까.

“풍경이 폭을 늘려간다는 것은 사유를 늘려간다는 것입니다. 충북 영동에 살 때 유리창을 열면 금강 건너 산들이 보였습니다. 하루 풍경을 내내 보고 있는데,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이라는 것이 서로 움직이고, 서로 작용하고, ‘그러함’으로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앞산 너머로 아침해가 떠오르면 햇빛은 나무 이파리를 타고 내려와 바람과 그늘을 끌어옵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풍경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시간의 작용을 받아들입니다. 움직이는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도, 생각이 점점 날아가 버리고 빈 몸이 되어 보고 있는 슬픈 시선이지요. 비극적 시선에 이른 것이지요. 빈다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슬픈 것 아닙니까. 빈 공空이라는 한자는 차갑다는, 식었다는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가을 깊어 나무 이파리들이 거느리던 풍경의 배후가 훤히 보일 때는 나는 그 배후에서 내가 끌고 온 검은 그림자와 내 고향을 봅니다. 나와 풍경이 하나로 겹쳐집니다. 시간의 ‘이동’이라는 것이 내 시에서 중요한 면을 갖게 되는 과정입니다. 풍경에 시간이 개입되면서 긴장을 띠게 된 것입니다. 동양의 시들은 ‘찰나’를 굉장히 중시하는 면이 있습니다. 나도 그러합니다.”

시는 내게 기도입니다

▶ 최 시인께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역사 동화를 많이 쓰고 계십니다. 그토록 역사에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사 동화라기보다는 민화 동화입니다. 출판을 하면서 보면 어느 나라든 전래 동화는 뛰어난 시인들이 씁니다. 그림 동화, 안델센 동화도 시인이 새로 썼습니다. 새로 쓸 때는 재창작을 하는 면이 많습니다. 일본에서도 폴란드에서도 그런 일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줄거리만 갖고 계속 반복해서 새로 쓰는 겁니다.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그 수준의 감성으로 끌어올려야만 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위해 그러한 작업이 있어야 합니다.”

▶ 지금까지 이사 다닌 행적을 조금 말씀해 주십시오. 서울, 광주, 호탄리, 양수리 등등요.

“서울에서 살다가 1988년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전남일보》 창간에 간여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충북 영동의 호탄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거기서 4년을 살고, 2001년에 이곳 양수리로 온 겁니다.”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멀어져 간다, 라는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멀어져 가면 안 됩니까. 시는 꼭 사랑해야만 합니까. 시를 미워하면 안 됩니까.

“시라고 하는 것이 진정성의 회복이니 그 작업이 멀어져 간다고 할 때, 세상이 탁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 시는 왜 쓰십니까.

“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예요. 우리 잘 살게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는…….”

▶ 최 선생님께서는 어느 인터뷰(《연합신문》, 2005년 6월 9일자)에선가 “시란 삶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잖습니까(김요일).

“(슬쩍 당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듯했다.) 아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어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나의 아이들보다 중요치 않다는 뜻으로 얘기했겠지요. 혹은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였겠죠.”

▶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옛날 어렸을 때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외에는 별로 되고 싶은 게 없습니다. 요즘에는 간간이 건축가나 식물학자가 되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식물학자가 더 적성에 좋겠네요. 나라는 인간이 워낙 식물적인 인간이잖습니까.
 
집에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런데 정원 일을 할 때는 엄청 부지런합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그랬습니다. 1학년 때 아버지에게서 받은 노트 한 묶음과 연필 한 다스를 꽃하고 바꿔 와 화단을 꾸몄던 적이 있습니다.”

▶ 오늘 아침에 북한의 핵실험이 공식 발표됐습니다. 시인으로서 북한 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한반도의 주민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시하고 가장 먼 곳에 있는 물건이 아마 핵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민족의 재앙이겠죠. 그런 큰 문제에 대해서는 개개인이 반응하기보다는, 상황 진행 속도에 따라 깊이 생각해야 되겠지요.”

풍경 속에 녹아 있는 시인의 눈

▶ 정치와 시, 혹은 민족과 시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에는 그 문제를 함께 생각했습니다. 현실의 장에서는 특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라는 것은 정치적 상상력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국경선이 시에는 없는 것이지요. 시의 본질적인 상상력은 그 국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 팔의 근력이 떨어지고,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맑은 기운이 떨어져 나가기 전에 반드시 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있으십니까.

“없어요. 근력이 소진되는 만큼 내 생각도 소진되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죠. 죽는 연습이 이루어져야 하니까.”

▶ 하루 일과를 말씀해 주십시오. 일주일 단위로 해도 좋고요.



2005년, 마당에서 키우는 개 올가와 함께.    ⓒ계간 시인세계
“아침 6시 정도에 일어납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거실 창을 바라봅니다. 문호리는 안개가 참 많아요. 풍경이 안개 속에 담겨 있습니다. 새 소리도 듣고, 7시 반쯤 아내가 개를 데리고 산보 갑니다. 아내와 개들의 뒷모습을 봅니다. 8시쯤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마당으로 나갑니다. 새 소리를 듣습니다. 개들을 데리고 아내가 돌아오면 차를 한 잔 마시고, 아침 먹고 2층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그리고 책을, 음, 지금은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책을 보는 편인데, 책을 좀 봅니다. 다시 내려와 마당을 돌아다니면 한낮이 갑니다. 저녁 어스름이 올 때면 불을 안 켭니다. 불을 안 켜면 눈이 피로하지가 않습니다. 그 시간에는 우리가 보든 안 보든 불덩어리 같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갑니다.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어려서는 엄청 고생했는데…… 말년에 이런 풍경이 내게 오다니…… 너무 좋습니다…… 내 침실에는 눈썹 같은 긴 창이 있는데 밤이면 달을 보고 별을 봅니다. 하느님이 너 고생 많이 했으니 말년에 좋은 풍경을 보고 살아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새는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없습니다.”

▶ 이렇게 좋은 집을 지으셨으니 이걸로 끝입니까.

“내가 5년만 젊으면 이런 집을 하나 더 짓고 싶습니다. 이곳 풍경만큼 좋은 곳이 있으면 하나 더 짓고 싶습니다.”



양평군 서호면에 자리잡은 최하림 시인의 집. ⓒ계간 시인세계

▶ 가족들은 어떻게 되십니까.

“딸 둘에 아들 하나 있어요. 큰딸 승구는 음악 관계 회사에 다니고, 둘째딸 승린이는 웹사이트 관련 회사에 다닙니다. 둘 다 서울 살아요. 그리고 큰사위는 작곡하는 사람이고, 둘째사위는 ‘적절한 부자’입니다. 아들 승집이는 제일모직 다닙니다. 그 밑에 세 살배기 손녀 최명서가 있습니다. 마누라는 장숙희입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지요.”

▶ 결국은 건강을 돌보는 것이 삶을 근본적으로 영위하는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말입니다.

“나는 내 붉은 얼굴을 보면서 죽고 싶습니다.”

주섬주섬 펜 뚜껑을 닫고, 노트를 접고, 저고리를 집어들었다. “저, 선생님, 어디 근처에 밥 맛있는 집으로 가서 소주나 한잔 하시지요.”라고 청을 넣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는 이미 졌다. 부인에게 같이 가시자고 권했으나 한사코 집에 남겠다고 했다. 바로 이웃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들어올 예정인 새집이 완공 단계에 있었다. 부인을 남겨 놓고 우리는 인근에 있는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녁 자리에서 최 시인은 눈매와 목소리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한 20년은 젊어진 듯 활기찼다. 그는 술병을 쥔 사람이 겁이 날 정도로 경쾌하게 잔을 비웠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의 산골짜기에 묻힌 최하림 시인은 점차 다른 경계를 설정하고 사는 듯했다.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과 다른 체온과 다른 눈과 다른 귀와 다른 입을 달고, 이 세상을 매섭게 응시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얼마나 큰 일들을 꿈꾸고 있길래 “요즘 아무 일도 안 하고 살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김요일 시인과 옆자리의 동승자(필자)는 최하림 시인의 그 꿈들을 염탐하는 데 실패한 스파이들처럼 괜히 쓰잘데기 없는 정치 이야기나 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김광일   서울대 불어교육과 졸업.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 논설위원, 문화부장 역임. 현재 편집국 부국장. 저서 『우리가 만난 작가들』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간지럽고 싶다, 한없이』『시보다 매혹적인 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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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사람들 - 하종강이 만난 진짜 노동자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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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끝낼 즈음 그(송영수)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하 선백나 나나 모두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고 보는데, 하 선배는 그 일을 20년 넘도록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이유가 뭐요?"
나는 조금 생각해 보고 진지하게 답했다.
"세계관이 아직 바뀌지 않았거든."
그는 픽 웃으며 "그런 것 때문이었다면 나는 벌써 포기했을 거예요."라고 말하더니, 잠시 시간을 두고 답했다.
"나는... 이를테면 하 선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어요. 그거 아세요? 나 때문에 고문당했던 사람들, 나 때문에 징역 산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인연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 나를 붙드는 기라. 그동안 내가 만났던 노동자들의 얼굴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자꾸 붙드는 기라."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끝내 눈물지었다.-66쪽

<인간의 시간>을 보노라면 노동자 육경원 씨가 투쟁 과정에서 악화된 암으로 숨진 뒤, 동료들이 그를 떠나보내는 영결식-노제-장례 장면이 차례로 나오는데, 화면이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떨리는 대목이 있다. 촬영을 나갈 때마다 "결코 울지 않겠다."라고 다짐하고, 실제로 거의 울지 않는 태준식 감독이지만 그날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는 울음을 참느라고 온몸을 떨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그때 카메라를 잡은 손이 떨렸던 이유를 "세상을 오래 살아온 어른들의 내공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의 표출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품을 보는 이 역시 그 장면에서 울음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72쪽

"저(공무원노조 3기 사무처장 김정수 씨)는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선택했어요. 그 생각이 제 삶을 이끌어 갑니다."-82쪽

"청소년 문제는 결국 '청소년이 당하는 문제'예요."
홍 신부(인천 교구 가톨릭청소년회 전담 홍현웅 신부)의 말이 가슴을 때렸다.-93쪽

'더도 덜도 말고, 남상헌님만큼만 살면 좋겠다. 나도 저 나이쯤 되었을 때, 저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비 내리는 거리에서 그런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걸었다.-138쪽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회 위원장인 문익환 목사님은 지금까지 전태일문학상 행사가 다섯 번이나 열리는 동안 한 번도 직접 상을 주지 못하셨습니다. 그때마다 감옥에 갇히셨거나 수배된 상태였습니다. 얼마 전 문익환 목사님이 석방되셔서, 이제야 문익환 목사님이 전태일문학상을 직접 주실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문익환 목사님이 단 며칠만 더 살아 계셨어도...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상을 직접 주실 수 있었을텐데.."(1994년, 이소선 여사)-151쪽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60명쯤이 모여서 이틀 밤을 얘기로 샜어요. 그런데 해고 경험이 열 번도 넘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기숙사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통' 해고자라고 알려지면 바로 해고되고, 기숙사에서 이불 보따리 들고 나와서 그 밤에 갈 데가 없었다는 거예요.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인데 그 짐을 들고 밤길을 헤맸다는 거예요. 나(배옥병)는 감옥에 있으면서 오히려 더 편했던 거예요..."
이야기를 하다가 듣다가... 우리는 또 울었다.-236쪽

"지금 자기가 속한 곳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계속 유지해 나가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그렇게 생활 속의 운동을 일상화시키는 것이 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밑거름이라 생각해요."
배옥병 씨를 만나고 나오면서 '지금 내 생활 속에서 일상화된 운동은 무엇일까?' 곰곰 생각했다.-239쪽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회원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김진원 (부안농민회)회장이 "논은 어떻디여?" 하고 물으니 "아까 가 봤을 때 막 넘치고 있었으니까, 지금쯤 다 물에 찼을 거요."라고 답하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농사일은 이래서 슬퍼..."라고 중얼거리며 피곤에 지친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농민회 사무실을 떠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그 회원의 얼굴이 눈에 선한데,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는 살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로 가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세요. 잠시 생활의 여유를 느껴 보세요. 사랑은 비를 타고 온다고 했던가요."
듣고 있다가 입에서 저절로 욕이 나온다. 에라 이...-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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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본인, 일본의 힘 - 선우정기자의 일본 리포트
선우정 지음 / 루비박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진단에 대한 책들이 많이 쏟아지고 있다. 그 한 켠에 조용히 일본을 분석하는 이 책을 주목해본다. 

일간지 현지특파원으로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취재기록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일간지에서 볼 수 있는 짧고 간결한 문체가 아니라 상당한 깊이를 가진 글이다. 10년 이상 진행된 불황을 뚫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정치와 경제가 올바로 조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불협화음 속에서도 '인간 중심'의 경영철학 내지는 기업정신이 산업기반에서 굳건히 자리매김했기 때문이었다는 논리는 되새겨볼 만한 대목이다. 또한 '노인국가'를 비롯한 이들의 향후진로 내지는 사회적 과제는 한국의 상황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공기업 신입직원 임금감축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임금을 삭제하되 고용은 늘리지 않는 방식으로  화답하는 대기업들의 기업경영이 잠시잠깐 언론의 '도마'에 오르고는 곧 잊혀져버릴 것 같은 우려를 버릴 수 없는 지금에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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