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노아 > 한국 소설의 위기

[한국 소설의 위기] 베스트셀러 20위 중 한국 소설은 2권
[주간조선 2006-08-29 14:05]

대학생들 "소설 읽으면 고리타분" …출판사들은 신진 작가 외면
문예창작과 출신들, 소설가보다 시나리오 작가·카피라이터로 몰려

지난 8월 1일 서울 시청 부근의 한 빌딩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한 ‘청소년을 위한 무료 인문학 강좌’가 열렸다. 서강대학교 영문과의 장영희 교수가 ‘현대사회의 문학 읽기’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런데 고등학생, 대학생 등 100명 넘는 참석자 중 몇 명이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께서 소설 작품을 많이 읽으시라고 하셨는데요. 소설 읽는 게 우리가 사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건가요?” 장 교수는 “소설 같은 문학을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배울 수 있다”라며 설명해 나갔다.

한국 소설이 ‘먹고 사는 것’과 별 관련이 없어서 그런 건가? 요즘 서점에 가보면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한국 소설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교보문고가 집계한 2006년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20위권에 든 소설은 모두 7권이었다. 하지만 이 중 한국 소설은 공지영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3위)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11위) 두 권뿐이었다. 소설 부문 20위권만 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소설 20위권에 든 한국 소설은 공지영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1위)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3위) 외에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9위),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12위) 등 4권뿐이다. 2005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40위권 안에 든 국내 문학은 세 권뿐이었고 그 중 소설은 김별아의 ‘미실’(14위) 단 한 권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주변만 둘러봐도 ‘한국 소설의 위기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주부들은 자녀 교육을 위한 책 코너에, 대학생은 취업 준비를 위한 책 코너에만 몰린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진득하게 앉아서 읽어야 하는 두꺼운 소설책을 선뜻 집어드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생 사이에선 소설을 읽는다고 하면 “고리타분하다”는 말까지 듣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전체 소설시장이 무너진 것도 아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같은 외국 소설은 안 읽으면 대화에 못 끼어들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국내 인기작가의 유명 소설이 기껏 수만 부 팔려나간 데 비해 이들 외국 소설은 수십만에서 수백만 부씩 팔려나갔다. 역사를 논하고 보통 사람의 일상을 다룬 장편소설이 눈에 안 띌 뿐이지 가볍고 톡톡 튀는 문체의 에세이류나 처세술 책은 넘쳐난다.

사람들이 소설을 외면해서 소설책을 안 펴내는 것인가, 아니면 소설책이 별로 안 나오니까 사람들이 점점 더 소설을 안 읽는 건가? 소설가인 강경호 한국소설가협회 이사는 “소설의 위기가 소설가의 위기를 불러오고 소설가의 위기가 다시 소설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이라고 했다. 출판사들도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이름난 대형 작가가 아니면 신진 작가의 소설류를 취급하려 하지 않는 분위기다.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한국 소설 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튼튼했다. 현실은 고단하고 답답했지만 작가들은 허구의 대표 장르인 소설을 통해 역사 현실에 맞서고 저항했고, 사람들은 그런 소설을 읽으며 울고 웃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독자군이 형성돼 왔다. 예를 들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김홍신의 ‘인간 시장’을 안 읽으면 대화에 낄 수 없을 만큼 한국 소설이 우리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독자들과 호흡하던 때가 있었다. 중·고등학생도 좋아하는 소설가와 작품 이름을 줄줄 꿸 수 있을 만큼 소설 시장이 활성화됐고 또 시장을 이끌어가는 소설계의 대형 스타도 많았다.

하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문학의 힘은 영원하다”던 사람들조차 “출판시장에서 한국 소설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라며 안타까워한다. 작품성이나 대중성을 인정 받은 소설 작품을 놓고 영화사들이 영화화하는 판권 경쟁에 나서는 게 아니라 역으로 화제의 영화 작품을 소설로 만들겠다고 출판사들이 판권 경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수익성을 따져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선 ‘돈 되는 쪽’으로 몰리게 되고, 한국 소설은 점점 더 홀대 받는 형국이다. 번역 소설이 한국 소설 시장을 아예 집어 삼켜버렸다는 말까지 나온다. 정말 ‘한국 소설 공황시대’라도 온 것인가?

한국 소설의 위기 징후를 소설가나 시장 탓으로만 돌릴 일도 아니다. 시대가 바뀌었고 독자의 입맛이 우선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찾는 소설의 성격도 바뀌었고 소설을 대체할 다른 미디어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한 출판사 직원은 “요즘 한국 소설에 대해 ‘대작(大作)이 안 나온다’고들 비난하는 분도 있는데 시대가 대작을 정말 원하고 있는지부터 고민해볼 문제”라고 했다.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이남호 교수는 “요즘 사람들은 호흡이 긴 소설을 읽기 싫어하고 인터넷 서핑을 하듯이 조각조각 뛰어넘어가면서 읽는 편”이라고 했다. 한 잡지사의 출판 담당 기자는 “정작 나부터도 지친 마음을 달래준다거나 자신감을 북돋워주는 책을 집어들게 되지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의 책은 피하게 된다”고 했다. 소설이 서사와 담론을 통해 사회를 고민하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작고 가벼운 일상의 것을 속닥거리듯 말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말이다.

 

*****************

 

주변에 그런 사람들 있지 않나요? 

"난 소설책은 안 봐."

그때의 뉘앙스는, 난 소설 '따위'는 안 봐... 라는 식으로 들려 고까울 때가 있습니다.

뭐,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특별히 선호하는 장르가 누구나 있겠지만, 지나치게 편향적 독서는 안 좋은데, 소설과 같은 '픽션'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보여서 나름 안타깝기도 합니다.(아예 안 읽는 것보다는 물론 바람직하지만...;;;)

제 친구 녀석 하나는 주로 성공신화, 처세술, 자기계발서... 이런 쪽으로만 책을 보았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설책을 빌려달라고 하고, 또 자신도 책을 사다가 읽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된 건데??? 하고 물으니,

직장을 옮기면서 면접 시험을 보다가, 여성적인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남성적인 성향이야 이미 지닌 것이고, 여성적인(굳이 구분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감수성과의 조화가 필요함을 알았다고요.

뭐,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내가 빌려준 책 오래 됐는데 아직도 안 보더군요ㅡ.ㅡ;;;;

레벌루션 No.3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빌려줬는데....;;;;

p.s 때로 조선일보 기사를 옮겨올 수도 있다... 고 방금 생각함......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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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프랑스 - 정지용

"아아, 바로트씨! 굿 이브닝!"

"굿 이브닝!"

------ 사장님, 안녕하세요? ------

튤립 양은

오늘 밤도 사라사의 커튼 아래서

쉬고 있지요.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다.

손이 너무 희어 슬프다.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다.

대리석의 테이블에 스치는 뺨이 슬프다.

 

아아, 이국종 강아지여

발끝을 핥아주어라.

발끝을 핥아주어라.

- <긴다이후께(近代風景)> 192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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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이드 > 에센셜 알랭 드 보통
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의 팬이라면, 이 작은 책.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나는 보통의 전기 시리즈(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이것이 사랑일까) 가 좋아. 라거나, 나는 '여행의 기술' 과 같은 책이 좋아. 그것도 아니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과 같은 일상의 철학이야기가 좋아. 라고 할 수 있겠다. 혹은... 보통이면 무조건 좋아.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처럼 말이다. 
당신이 보통의 무엇을 좋아하던지 간에, 이 책을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뭐, 앞으로 더 나올 가망성은 없어보이지만;;) 이 시리즈를 잠깐 소개한다면, 펭귄 출판사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선집이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44414펭귄의 이 시리즈는 꽤나 작고 귀엽다! 보통이 70번째라서, 뭔가 의미가 있는지는 절대 모르겠지만, 왜냐, 앞의 69권의 작가들이 쟁쟁하다 못해, 문학사의 한 페이지들을 차지하고 계시는 분들이니 말이다.

원작의 제목은 on seeing and noticing 이다. 이 책의 번역 제목인 '동물원에 가기'는 여기 등장한 단편중 하나의 제목이다. 원작의 제목은 좀 더 맛깔스러운데, 
On the Pleasures of Sadness
On Going to the Airport
On Authenticity
On Work and Happiness
On Going to the Zoo
...

그래서, 제목이 On seeing and Noticing 이다.
보통의 책이 처음.이 아니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는데, ' 끊임없이 데자부.를 느낄께다. 맹세코, 처음엔 찾아보는 시도를 했음을 밝힌다. 맨 처음 리뷰 들어가면서, 어떤 스타일의 보통을 좋아하더라도, 이 책은 무조건 좋아할 것이다. 라고 했던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아홉편의 단편( 한장밖에 안 되는 짧은 메모(on single men독신남)도 있긴 하지만서도) 이 어디선가 보통이 썼던 얘기들이기 때문다. 아마, 당신이 이미 읽고, 밑줄 빡빡 쳐 놓았던 얘기들일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이 간혹자주 보는 인기작가의 글을 짜집기한 책.이라고 미리 오해는 하지 말기를. 절대절대 아니다. 왜? 라고 묻는다면, '펭귄70주년 기념선집' 이다. 라고 한마디로 답해주겠다. 모르긴 몰라도, 보통의  그 어떤 히트친 장편보다, 펭귄70주년의 70명의 작가 안에 선배 대작가들과 함께 들어간 것이 그에겐 영광일 것이다.

첫 단편 On the Pleasures of Sadness 슬픔이 주는 기쁨( 원서의 제목이 너무 달콤하지 않은가!) 는 호퍼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Edward Hopper belongs to the category of artists whose work is sad but does not make us sad - the painterly counterpart to Bach or Leonard Cohen.
들어가는 제목, 슬픈데 기쁜거.에서 덜 반했다면, 첫 문장에서 쓰러지지 않을 도리 없다.( 내가 호퍼 팬이라 좀 오버하는걸 용서하시길) 이후에 나오는 얘기들은, 호퍼로 들어가는 첫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외로움, 이다. 호퍼의 작품들을 들어가면서, 외로움의 미학을 펼쳐낸다. ' 오스카 와일드가 언젠가 말했다. 휘슬러가 그것을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란 없었다. 고. 물론, 안개가 있었다. 많이. 하지만, 휘슬러가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를 그리기 전에는 그걸 인식하기가 약간 어려웠을 뿐이다. 와일드가 휘슬러에 대해 말했듯이, 우리는 아마도 호퍼에 대해 말할 수 있을것이다. : 호퍼가 그것을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세상에는 훨씬 적은 주유소, 리틀 셰프(런던의 체인 레스토랑 이름. 본문에 등장한다) , 공항, 기차, 모텔이 있었을 것이다'

On Going to the Airport 에서는 공항에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첫 에세이, 에드워드 호퍼, 슬픔의 기쁨에 너무 톤이 맞춰져 버려서, 두번째 작품을 읽으면서도 그 달콤한 외로움을 떨치기 힘들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본 듯한 이야기이다. 슬프고, 지겨울때 공항보다 나은 장소를 찾기 힘들다. 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문장 중간중간에 이국적인 장소들이 튀어나온다. 벵갈, 아프간, 캐스피언해, 또 한참 읽다보면, 캐나다, 파키스탄, 코리아  (;; 무작위.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쥐리히, 파리, 아테네...
그 장소들의 이름은 공항에서 출발, 도착, 연착, 등이 쉴새없이 바뀌는 보드판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보통과 함께 공항에 가서, ( 꼭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할 필요는 없다) 챠르륵, 챠르륵 넘어가는 이국의 장소들을 보며, 보통의 공항에서 느끼는 소회.를 가만히 들어주면 된다.



 

세번째 에세이 'On Authenticity' 진정성
우리의 클로에.가 나온다. 1번부터 26번까지, 알랭 드 보통은 연애의 모범생처럼, 책을 읽는 연애열등생인 나에게 번호를 착착 매겨, 반하기 시작하는 것에서 그녀의 키스를 얻기까지. 를 특유의 유머를( 한쪽 입꼬리 씩 올라가게 하는) 구사하며, 120% 공감을 이끌어내는 예들을 척척 들이대며, 이래도 안 재밌을래? 하기 시작한다.

 이 단락부터는 드디어, 호퍼의 외로움과 싸함을 떨쳐버리고, 여유있게 알랭 드 보통이라는 걸출한 선장을 지닌 이야기의 배에 느긋하게 몸을 맡길 수 있다.


낄낄대고 웃다 보면, On Work and Happiness가 나온다. 결론이 대략 참담한 것이,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이라기 보다는 얄밉기 그지없었던 '불안'을 떠올리게 하는 단편이다.

번역서의 제목으로 따오기도 한 On Going to the Zoo는 짧지만, 지극히 알랭 드 보통 스러운 글인데, 세상 천지에, 동물원 브로셔를 독자로 하여금 이렇게 진지하고, 재미있는 소설 읽듯이 읽어내게 할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낙타 브로셔. ) 물론 동물원 브로셔.는 부분이다. 이 짧은 에세이에 보통은 알다시피, 철학, 생태학, 역사, 문학 등을 다 끄집어내니깐.

On Single men . 독신남. 한장짜리 짧은 메모는 그냥 스윽 읽고 넘어가기.

On the Charm of boring Place 따분한 장소의 매력. 은 그의 출신지이기도 한 쮜리히에 대한 이야기이고, On Writing ( and Trouts) 글쓰기(와 송어) 는 보통의 '글쓰기' 이야기이라기 보다는 다른 이들의( 버지니아 울프, 괴테, 프루스트) 글쓰기와 독자로서( 보통 자신을 포함한)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다. (근데, 송어는 왜???)

이 책을 읽으면서, 선택할 것은 단 하나. 전작들을 뒤적여, 어디서 나왔는지를 일일이 찾아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즐기며 읽을 것인가. 물론 이것은 하나도 안 중요하다. 그 선택을 마쳤으면, 심호흡 하고, 정신없이 쏟아지는 말의 향연에 빠져보시길.

워낙 다작이고, 여러 스타일인지라, 그 동안 보통의 책 중 '이거!' 하고 내밀만한 책이 없었는데, 아직 보통의 책을 단 한권도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 책을 내밀겠다. 이미 보통의 팬이라면, 역시 이 책을 내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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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시장 - 정연홍

키를 꽂으면 부르르 몸을 떤다

하품을 하며 일어나는 바퀴 달린 코뿔소

사내는 엑셀레이터를 깊이 밟는다

드문드문 불 켜진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그들의 실루엣

어둠속 고양이들이 청소부의 빗자루를 툭툭, 건드리는 사이

간밤의 오물자국들이 바퀴에 눌려 흩어진다

골목길이 급히 허리를 휠 때마다

조수석 여자가 자리를 고쳐 앉는다

뒤로 젖힌 그녀의 얼굴에

선잠이 머리칼처럼 흘러내린다

사내는 여자를 돌아보고 잠시 웃는다

저들이 살아왔던 길들도 저렇게 급커브였을까

수금되지 않던 수수수 단풍잎

밤이 되면 안방까지 점령하던 빚쟁이들,

이삿짐을 꾸리던 그날 밤도

골목길은 휘어져 있었다

 

새벽 야채시장, 밤새 달려왔을 초록의 잎들이

사내의 트럭으로 옮겨진다

아무렇게나 던져 넣어도 척척 자리를 잡고 정좌하는 배추들

부부도 세월에 차여 이리저리 떠돌면 저리 될까

하지만 그들도 이제는 트럭에 오를 때마다

때 묻은 자리에 편안히 앉을 수 있다

사는 것은 자리 하나 제대로 잡는 것

코뿔소가 푸푸거리며 야채시장을 돌아

도시를 향해 헤엄쳐 간다

- <시평> 2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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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국 (부제: 아내에게) - 최영철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에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그대 꼬드겨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그래도 그래도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 <시평> 2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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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6-08-2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들은 이렇듯 반성이라도 하면서 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