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려도 괜찮아 토토의 그림책
마키타 신지 지음, 하세가와 토모코 그림, 유문조 옮김 / 토토북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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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발표 시간 할때 선생님이 나를 발표시켰는데 처음엔 떨렸지만 중간엔 자신감이 생겨서 발표를했는데 틀려도 우리반은 않웃고 않놀리고 박수가 짝짝짝 나는너무좋않는데 내가 않자마자 우리반은 모~~~두 자심감 쟁이 "틀려도 괜찬아" "틀려도 괜찬아"선생님은깜짝놀라 모두 모두 발표시켜주고 집에가서 친구들과 나는 가족에게 자랑걸 됀다^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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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노아 > 문학, 사랑을 차버리다… 젊은 작가들 脫러브스토리 흐름 뚜렷

문학, 사랑을 차버리다… 젊은 작가들 脫러브스토리 흐름 뚜렷
[동아일보 2006-09-15 04:35]    

[동아일보]

다음 주 출간되는 박민규(38) 씨의 장편소설 ‘핑퐁’은 부조리한 세상을 뒤엎으려는 왕따 중학생들의 얘기다. 이 작품에서는 이른바 소설의 흥행코드로 여겨졌던 ‘러브 스토리’를 찾아볼 수 없다. 남녀 간에 엮이는 관계란 ‘원조교제’하는 소녀 얘기가 전부다.

이제 문학 속의 사랑은 끝난 것일까. 문단의 화제가 되는 젊은 작가들은 더는 사랑이 전부인 소설을 쓰지 않는다. 2000년대 문학에서 사랑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지 않는다.

○ “문학이 연애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대가 왔다”

1990년대는 멜로의 시대였다. 신경숙 씨의 출세작 ‘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을 사랑하게 된 여자의 눈물과 한숨을, 은희경 씨의 장편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순정적인 사랑이 배신당할까 두려워 방어막을 쳐놓는 여자의 심리를 그렸다. 본격소설뿐 아니라 김하인의 ‘국화꽃 향기’ 같은 베스트셀러 대중소설도 대부분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 얘기 위주였다.

평론가 김미현 씨는 “드디어 문학이 연애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대가 왔다”고 선언한다. 치열한 사회의식으로 충만했던 1980년대에 이어 90년대 소설에서도 다양한 사회 문제가 다뤄지긴 했지만 모두 사랑과 연애를 통해 얘기됐던 데 반해, 최근 문학의 소재는 사랑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 등장하지 않거나, 있어도 중요한 사안이 아닌 게 요즘 소설의 흐름이라는 것.

“요즘 작가들은 사랑 말고도 절실하게 할 말이 많은 것 같다”고 평론가 이광호 씨는 말한다. 실제로 박민규 씨는 최신작 ‘핑퐁’뿐 아니라 ‘카스테라’ ‘지구영웅전설’ 등의 작품을 통해 만화적인 캐릭터를 등장시켜 현실을 비트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문단의 신예 김애란(26) 씨의 첫 작품집 ‘달려라, 아비’는 아버지 없는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 시대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편혜영(34) 씨의 작품집 ‘아오이 가든’은 구더기, 역병, 송장 같은 엽기적인 이미지를 통해 구역질나는 사회를 상징화했다.

현실과 가족, 사회 등 젊은 작가들의 관심사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에서 연애하는 남녀는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연애는 밥 먹고 이 닦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로 무심하게 묘사된다.

○ 사람 아닌 것을 사랑하다

연애의 실종과 맞물려 새롭게 등장한 소설 경향은 사람 아닌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 순도 높고 집착에 가까운 사랑은 그대로지만 대상이 바뀌었다. 김중혁(36) 씨는 첫 소설집 ‘펭귄뉴스’에서 자전거, 라디오, 지도 등 오래된 사물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사랑을 보여 준다. 박주영(35) 씨는 ‘백수생활백서’에서 하루 한 권의 책을 비타민처럼 복용하는 여성의 책에 대한 집요한 사랑을 묘사한다. 모두 인간이 아닌 ‘대상’에 대한 사랑이다.

문학의 영원한 주제로 알려진 사랑과 연애가 왜 이제는 작가들의 관심사가 되지 않을까. 김중혁 씨는 “타인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애가 커진, 개인화한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 소설 속에 스며들기도 했겠고, 연애로 담아내기에는 사회가 낭만적이지 않은 것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가 까발려진 2000년대에 순정적인 연애는 문학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기획 기피 대상’일 것”이라고 김 씨는 덧붙였다.

평론가 김미현 씨는 “작가들의 관심이 다양해지기도 했겠지만, 1990년대에 중요했던 감정의 영역이 소멸되면서 사랑은 환상조차 되지 못하는 현실이 소설에 투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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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박민규씨 새소설 나온다는 소리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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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 도종환

노래방에 갇혀 노래를 부르면서

정작 노래를 잃어버렸다

텅 빈 하늘을 향해 서서

목이 터져라 부르던 노래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면

걸음을 뗄 때마다 저절로 나오던 노래

물가에 앉으면 가슴이 먼저 젖어 흘러나오던

그런 노래를 잃어버렸다

노래의 마음인 노랫말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노래의 몸인 소리가 우리 몸을 흔들던 그런 노래들

어떤 날은 노래가 깃발이 되어

우리를 끌고 가고

어떤 날은 수천 수만의 사람을

한 방향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게 하던 노래

혼자서 돌아오는 밤길 낮은 소리로 읊조리는

내 노래에 내 볼이 젖던 노래

그런 노래들을 잊어버렸다

혼자 부르고 또 불러서

온전히 내 노래가 되던 노래

노래 한 곡이 술 한 잔을 마시게 하고

노래만으로도 온 밤을 깨어 있게 하던

그런 노래들이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중심도 방향도 놓친 뒤부터

바람도 물소리도 멀리한 뒤부터

 

- <슬픔의 뿌리>, 실천문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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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9-16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의 공원에서 빙 둘러앉아 한 명씩 호명하여 노래 부르던 날들이 그립군요.
시구처럼, 노래방이 생기면서 노래를 잃었다는 생각이.....

달빛푸른고개 2006-09-18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수로 헤아려보니 노래방을 자주 갔던 기간이 약 3~4년인 것 같고, 그로부터 또 멀어진 시간도 그 정도 되나 봅니다. 반주 없이도 부르던 노래가 심금을 울리는 장면도 있었고... 그런 기억을 더 만들어가야 할 듯...
 
거대한 뿌리
김중미 지음 / 검둥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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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얀 전쟁>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월남전에 참전한 병사들이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장에서, 그것도 가치분별도 없는 '용병 기능'을 수행하면서 겪었던 '인간성 상실'을 견디지 못한 병사들이 귀국 후에도 결국 가치혼란으로 인한 자기분열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정신분열 증상을 보이고 있던 병사가 귀국하여, 전사한 동료의 여동생(기지촌 여성)과 함께 철길을 걷던 장소는 70년대 초반의 기지촌 '동두천'이었을 것이다.

작가 김중미는 기치촌으로서의 '동두천'의 의미를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여길 떠날 기회가 있었고, 얼마든지 여길 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더라고. 너랑 너희 엄마, 해자가 여기 동두천에서 질기고 독하게 사는 동안, 윤희 언니가 미국에서 눈물겹게 사는 동안 나도 그렇게 아프면서 살았어. 왜냐하면 동두천은 현실이거든. 이 땅 어디를 가도 지워버릴 수 없는,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189쪽)

이러한 '기억'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안고 있는 주인공 개인의 소회가 아니다. 작가는 결국 지금 여기의 시각에서  '동두천'의 의미를 독자에게 묻는 것이다.

2000년 국방백서에 의하면 주한미군은 전국 93개 기지에 공여면적 74,467,441평이다. 주둔 인원은 육군 28,100명을 포함하여 37,000명이다. 독일과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주둔군이다.(현재 미국에 의해 전쟁중인 '전시 이라크'를 제외한 수치. 홍성태, [생각하는 한국인을 위한 반미교과서], 당대.2003에서 인용)

파주 13, 의정부 10, 서울 9. 대구 7, 부산 7, 동두천 6, 평택 4 군데의 기지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리고 대추리의 옥탑에 올라 사슬을 묶고 있는 노신부님과 사막 한 가운데 높은 담에 둘러쌓여 주둔하고 있는 자이툰의 오늘도 있다.

정부의 방만한 정책과 기업의 횡포 속에서 신음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상과 유년의 기억이 서린 기지촌에 대한 회상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혼혈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고발하는 이상으로 우리 현대사  이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아닐런지. 말미에 인용한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를 통해...

방송매체를 통해 '책을 읽자'는 캠페인이 유행할 즈음, 맨 첫번째 책의 소재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 언론매체들을 인천시 M동으로 몰려들게 했었다. 당시 작가는 그러한 호기심이 그 동네를 '가난의 상징'으로 굳히게 할 것을 우려해 그들의 출입을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그 뒤의 작품들, <종이밥> <내 동생 아영이> 등을 통해 이 사회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에 대해 항상 질문하고 있는 작가의 '진실함'을 다시금 확인한 책이었다. 

한때의 동두천 기억을 돌이켜보기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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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1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책 궁금하네요. 김중미 작가 좋아요^^

달빛푸른고개 2006-09-15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유년기억이 오롯이 담겨있는 책이더군요.

로드무비 2006-09-16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수영 시집 리뷴가 하고 읽어보니.....
보관함에 넣습니다.

달빛푸른고개 2006-09-16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제목의 시집이 있지요. 이 작품의 내용에서도 그 시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원희룡 “왜 한나라당?…한국 바뀌려면 한나라당 바꿔야”
[한겨레 인턴21] 도전인터뷰-원희룡 의원
뻐꾸기 둥지 ‘한나라’ 위로 날아간 386
한겨레
» 손님들의 낙서로 가득한 신림동의 호프방에서 인턴기자들이 원 의원의 연애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윤종규 인턴기자 poiua@naver.com
[관련기사]
“사회주의 나라들이 하나 둘 무너졌습니다. 운동권 내부의 혼란도 컸어요. 나 역시 정리하기 힘든 이념적인 방황을 거쳤습니다. 현실 사회주의를 준거로 삼고 살아왔는데 그 이론 틀은 틀렸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8월24일 붉은 노을이 질 무렵, 마포의 돼지갈비집 ‘최대포’에서 만난 원희룡(42) 한나라당 의원은 ‘운동권’에서 ‘제도권’으로 변신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 답변으론 학생운동을 하다 보수적인 한나라당을 선택했는지 설명이 안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한나라당이었나?’

사회주의 몰락에 이념적 혼란 겪은 뒤 제도 정치권으로
“왜 한나라당이냐고? 한국 바뀌려면 한나라당 바꿔야”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며 알게 된 김부겸 선배한테 이끌려 2000년부터 정치를 하게 됐죠. 그때만 해도 김 의원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는데 ‘한나라당이 힘들겠지만 10년 안에는 답이 나올 것’이라 해서,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어려운 답’이 한나라당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한나라당에서의 역할은 무엇인지로 질문이 이어졌다. “한나라당에서의 역할이 더 개혁적일 수 있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당을 변화시키자는 취지로 한나라당 개혁파가 생긴 거에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고나 할까요.”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얘기가 20여년 전인 그의 80년대 대학생활로 거슬러 올라갔다. 82학번인 원 의원은 1학년 1학기 때까지는 이른바 ‘도서관파’였다고 했다. 대학 입학과 함께 고향인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력고사 전국 수석 원희룡’을 ‘운동권 학생 원희룡’으로 변모시킨 결정적인 이유’라고 강조했다.




“학업과 직접적인 저항 중에 어느 길이 현실에 올바르게 참여하는 것인지 고민하면서 1학기를 보냈어요. 유인물에서 광주항쟁을 알게 됐고, 이념서클을 제 발로 찾아가 이른바 본격적인 운동권 학생이 됐습니다. 80년대는 이념과 저항의 시대였기 때문에 386세대라는 공감대와 강렬한 연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강풀의 <26년>을 봤는지 물어보았다. <26년>은 현재 인터넷 포털 <미디어 다음>에 연재 중인 만화로, 광주항쟁 희생자 자녀들이 모여 학살의 책임자를 단죄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단숨에 읽었다는 원 의원은 “한때 테러리스트가 되려 했다”고 말했다. “나도 전두환을 처단하려고 테러리스트가 되려 한 적이 있었죠. 그러나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26년>이라는 만화는 공감하지만 학살범에게 총살로 보복하는 것은 승리의 역사가 아닙니다.”

» 마포 공덕동에 있는 최대포집에서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운동권 학생에서 보수정당의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윤종규 인턴기자 poiua@naver.com
휴학과 정학, 구로공단에서의 야학, 인천 공장에서의 위장 취업 등등…. 그는 20대를 ‘골수 운동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었다가 신분이 들통 나는 바람에 학교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89년에 졸업한 그는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해 93년에 합격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저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과 가치관을 가지고 대안을 내세울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고시 공부를 결심했지요. 예전에는 개량주의라고 비판했던 점진적인 개혁의 길을 찾고,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모두 인정하는 통합적인 가치를 세우기 위한 고민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최대포에서 호프집으로, 다시 원 의원의 대학 시절 추억이 배인 신림동의 소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원 의원의 부인도 합류했다.

원 의원은 8년 연애 끝에 93년 결혼했다. “친구들과 연인 동반으로 지리산 종주를 했을 때 제가 중간에 실신했어요. 이 사람이 제가 깨어날 때까지 무릎 꿇고 기도를 했대요. 함께 종주했던 다른 커플들이 모두 싸웠다고 해요. ‘자기는 내가 쓰러지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따지면서요.” 그는 부인의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묵묵히 끄덕이기만 했다. 연애담에 대한 대질 심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80년대 대학으로 돌아가면 더 치열하게 더 열심히 싸울 것 같습니다. 80년대는 민주화가 최고의 과제였기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를 완전히 퇴장시키기 위해 더 철저히 싸우지 않을까요?”

‘지금의 대학으로 돌아간다면’이라고 되물었다. “전혀 다르게 살 것 같아요. 나는 놀기 좋아하고 호기심 많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매킨지를 넘을 수 있는 경영 컨설팅 그룹을 만든다든가 펀드매니저를 하고 싶어요.”

20여년을 넘나들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맑시즘의 기본 법칙은 버렸으나 맑시즘의 휴머니즘과 같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이용주 인턴기자(서울대 정치학과 4) 강은지 인턴기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4) minamjij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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