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비시선 241
이상국 지음 / 창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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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다. 네번째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1998)를 읽다가 느꼈던 감상이 새로웠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새로움'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의 고향은 설악산 아래 양양이다. 그는 거기서 태어나서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번도 근처를 벗어나 살지 않았다고 한다.'(김윤태, <어느 농사꾼..> 해설에서)

단지 그뿐일까? 그보다는 시인의 시선과 사유가 현실에 깊이 착근해있기에 가능한 표현들, 즉 단순한 일상의 삶에서 길어올리는 시어들이 주는 생생함이었던 것 같다. 지나친 '사유의 확장'으로 인해 부유하는 詩語들에 의해 익숙해지거나 뜻도 모르고 주억거리는 유희에서 벗어나게 했던 기억이었다.

여전하다. 대관령, 한계령, 미시령(이제 터널로 다닌단다. 그래서 용대리 민박집 아주머니의 장나들이도 원통을 향하지 않고, 속초에 있는 이마트로 가신단다) 건너의 영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국립공원과 대형 콘도와 몇몇 해수욕장을 연상시키는 시선에 그치지 않고, 불에 타버린 산림과 어두운 골목길의 절망과, 어부들의 수고로움에까지 가닿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분량이 작은 시집 한 권을 읽는다는 것으로, 그 안에 담긴 뜻의 어느 만큼을 과연 이해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든다. 또한 흔히들 시집 말미에 '시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해설이 있는데, 때로는 그 해설이 시 읽기를 방해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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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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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지렁이의 구멍은 밀물에 쉽게 쓸려버려서 갯지렁이는 끊임없이 흙을 뱉어내며 새 집을 지어야 한다. 갯지렁이의 이 기구한 무주택의 운명이 갯벌에 지속적으로 산소를 불어넣어, 갯벌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터전이 된다. 갯지렁이는 온몸의 마디를 뻘밭에 밀면서 헤치고 나간다. 갯지렁이는 죽음을 통과하듯이 온몸을 뒤틀면서 뻘 속을 헤치고 나간다. 갯지렁이가 기어간 뻘 위의 자국은 난해한 문자와도 같고, 고통스런 글쓰기의 흔적과도 같다.(중복문 있음...)-57쪽

차를 따서 불에 말리는 과정이 '덖음'이다. 차 맛은 이 '덖음' 과정에서 크게 달라진다. 찻잎에는 독성이 있다. 그래서 차나무 밭에는 벌레가 없고, 놓아먹이는 염소들도 차나무 밭에는 얼씬거리지 않는다. 덖음은 차의 독성을 제거하고, 잎 속의 차 맛을 물에 용해될 수 있는 상태로 끌어내고, 차를 보관 가능하게 건조하는 과정이다. 그날 딴 차는 하루를 넘기면 안 되고, 그날 안으로 덖음질을 마쳐야 한다.-99쪽

날똥이여,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월이여 청춘이여 조국이여, 모든 것은 결국 날똥이 되어 가락국수처럼 비실비실 새어나가는 것인가. 쉰 살 넘어서 누는 날똥은 눈물보다 서럽다.-118쪽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아무리 고층이라 하더라도 아파트는 기복을 포함한 입체가 아니다. 아파트는 평면의 누적일 뿐이다. 천장이고 방바닥이고 부엌 바닥이고 현관이고 간에 그저 동일한 평면을 연장한 민짜일 뿐이다.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공간의 의미를 모두 박탈당한 이 밋밋한 평면 위에 누워서 안동 하회 마을이나 예안면 낮은 산자락 아래의 오래된 살림집들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고 또 서글프다.-134쪽

소백산맥에 군사도로가 뚫린 지 518년 후에 의상은 이 고개를 멀리 바라보는 신라 최전방 격전지 들판에 부석사를 세웠다. 그 500년 동안 전란은 그칠 날이 없었다. 김부식의 수사법에 따르면, 의상의 시대인 7세기에 이 들판에서는 人馬의 피가 내를 이루어 창과 방패가 떠내려갔다. 피가 내를 이루던 살육의 시대에 의상은 가장 웅장한 평화의 체계에 도달했던 것인데, 그의 화엄 체계 속에서 당대의 살육이 어떻게 설명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의상과 원효, 그리고 퇴계와 정도전, 다산에 대한 김훈의 상상력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160쪽

진도 운림산방은 꿈과 현실이 포개져 있었던 그의 말년의 화실이다. 허소치는 50세 되던 1857년에 귀향해서 이 초가집을 짓고, 70세까지 여기서 그림을 그렸다.-187쪽

엄 노인은 사람이 죽어서 산으로 가는 이 마지막 사업을 '입산'이라고 말했다. 그의 '입산'이라는 말 속에서, 산은 삶이 다하는 자리에서 펼쳐지는 평화의 깊이로 느껴졌고, 그래서 위로받아야 할 쪽은 상여 속에 누워서 입산하는 죽은 자가 아니라 빈 상여를 메고 하산해야 하는 산 자들일 것이다.-213쪽

문경새재와 하늘재에는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다. 여기는 자전거의 낙원이고, 높은 고개들을 잇달아 넘어가는 자전거의 지옥이다..(중략)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영남대로는 서울-충주-상주-부산을 연결하는 조선 500년의 간선도로였다. 행정과 교역의 대부분이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이루어졌다.

(가봐야 할 곳 : 전북 임실군 운암면의 옥정호 마을)-218~219쪽

초이는 회장에 당선되었을 때 당선 소감에서 "1학년에서 6학년까지 모두 한데 어울려 잘 놀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초이는 지난 1년 동안 이 공약을 충실히 지켰다. 축구할 때도 1, 2학년을 빼버리지 않고 늘 함께 데리고 놀았다. 초이네 집은 닭을 기른다. 그래서 초이의 글에는 닭을 걱정하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아빠가 기르는 닭이 장난이 아니고, 우리 집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닭이라는 걸 초이는 알고 있다.-266~267쪽

조선 영조 연간의 지리학자 신경준(1712~1781)은 "하나의 근본으로부터 만 갈래로 나누이는 것이 산이요, 만 가지 갈래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물이다"라고 말했다. 신경준의 국토 인식은 조화론적인 것이었다. 다양성의 원리와 통합의 원리, 그 우뚝한 두 기둥 사이의 공간이 삶의 자리이며 역사의 근원지이다. 서울의 북한산과 서울의 한강이 그 두 개의 기둥이다.-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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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산새들의 목욕... "어, 시원하다!"
텍스트만보기   이종혁(zhlee) 기자   
▲ 장맛비가 잠시 그친 구봉산 자락의 바위틈에 물이 고여 있습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 이종혁

장맛비가 잠시 그친 날 구봉산에 올랐습니다. 날도 덥고 뜨거운 산행길, 우연히 시선이 머문 그곳에선 산새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몸을 숨기고, 인기척이 없을 때는 왔다 갔다 하며 물놀이를 즐깁니다. 멀리서 숨죽이며 바라보았습니다. 욕심을 내서 더 가까이 가니 멀리 달아나 버리더군요. 물놀이를 방해해서 미안했습니다.

▲ 조그만 산새들이 틈에 고인 물에서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 이종혁

▲ 한 녀석이 발을 먼저 담궈 봅니다. 음, 이 정도면 시원한 걸.
ⓒ 이종혁

▲ 잠시 물에 들어가 후다닥 몸을 털고는 숨고, 또 잠시 후에 나와서 목욕을 합니다.
ⓒ 이종혁

▲ 한 마리가 하고 나오면 다른 녀석이 기다렸다가 들어가기도 하고
ⓒ 이종혁

▲ 세 마리가 한꺼번에 들어가서 몸을 흔들며 더위를 식힙니다.
ⓒ 이종혁

▲ 휘익~ 첨벙! 파다닥! 더울 때는 사람에게도, 산새에게도 물놀이가 최고인 것 같네요.
ⓒ 이종혁

▲ 아~ 시원하다.
ⓒ 이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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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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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에 환자가 필담을 요청했다. 나는 유언을 남기시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가족들을 중환자실 내로 모두 불렀다. 그런데 인공호흡기가 달린 채 환자가 팔을 움직여 겨우 힘들게 쓴 글자는 '시신기증'이라는 네 글자였다.-25쪽

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래 수없이 많은 아이들의 죽음을 보아왔다. 태어나자마자 선천성 기형으로 인한 수술을 받다가 혹은 일반인들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끔찍한 질병의 희생자가 되어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져버린 그 많은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나는 때로는 관성으로 둔감해지고, 때로는 상처를 받으면서 그렇게 점차 단련이 되어왔다. 마치 전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져가는 죽음에 무뎌져가는 병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가끔 응급실에서 이미 생명이 떠난 환자를 맞이하면서 혹은 방금 숨을 거둔 환자들 뒤로 하고 돌아서서 손을 씻으면서, 내 심장 속에 어느덧 그렇게 길들여진 차가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문득 깨달을 때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타인의 죽음을 생각하고 돌아보기를 반복하곤 했다.-60쪽

"선생님, 나 이 안에 그냥 있게 해주면 안 되겠소? 여기는 하루에 10분씩밖에 면회가 안 된다는데, 나 정말 귀찮게 안 하고 가만히 있을 테니, 나 그냥 할아버지 옆에 있으면 안 되겠소?"-122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병환자의 정상적인 2세인-인용자) 미감아들의 이런 생활을 알게 되면 "아무리 그래도 천륜이 있지, 어떻게 부모를 버리고 모른 척하고 살 수가 있나." 하며 그들에게 또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부모를 버리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누구이던가? 바로 우리가, 우리의 편견이, 우리의 질시가 그들이 부모를 버리게 하고 그들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은 것이 아닌가.-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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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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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업으로서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직업 가운데 하나가 의사이다. 그런데 전문직업 가운데서도 의사 직종이 타 직업군과 비교한 일반적인 특성은 무엇일까. 가까이서 지켜본 바로는 상하규율이 매우 엄격하다는 점, 상황에 대한 판단이 신속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 술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이다. 특히나 환자의 특성상 정형외과 등 외과 관련된 전공자들은 그러한 특성에 가장 맞춤한 편이다. 그들의 일상을 상상해보면 쉽게 짐작이 되리라 생각한다.

오래전, 군생활 당시에 지휘관이 한 이야기, '의사는 평생 환자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자신은 대한민국의 피끓는 건강한 청춘들과 생활하니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주장을 펴서 '아, 말 되는군.' 하고 생각한 기억이 있다. 물론 군인과 군대의 '정직한' 위상은 갈수록 바뀌고 있지만...

'하여간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평생 동안 경험하는 희로애락의 양은 일반인들의 백 배, 천 배, 아니 만 배쯤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런 것들에 너무 둔감해지거나 민감해지면, 스스로 의사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란 그러한 감정들에 적당히 느슨해지다가도 가끔은 다시 팽팽하게 조이고 당겨야 하는데 사실 나는 그것에 실패한 사람이다.'(238쪽)

이 책은 안에 실린 많은 '환자'들의 이야기에 가슴 울컥하는 감동을 자주 접하게 되는 책이다. 생사의 경계를 넘다들기도 하고, 일상 속에 닥친 불행을 감수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숨'과 그를 극복하는 사람들의 '감동'이 가득하다.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 '직면한 어려움을 대처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돌이켜 다시한번 새겨볼 구절 하나.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본인의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까지 참 힘든 시간을 보내게된다. 그래서 병원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삶에 있어서 건강이 최고의 재산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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