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구판절판


갯지렁이의 구멍은 밀물에 쉽게 쓸려버려서 갯지렁이는 끊임없이 흙을 뱉어내며 새 집을 지어야 한다. 갯지렁이의 이 기구한 무주택의 운명이 갯벌에 지속적으로 산소를 불어넣어, 갯벌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터전이 된다. 갯지렁이는 온몸의 마디를 뻘밭에 밀면서 헤치고 나간다. 갯지렁이는 죽음을 통과하듯이 온몸을 뒤틀면서 뻘 속을 헤치고 나간다. 갯지렁이가 기어간 뻘 위의 자국은 난해한 문자와도 같고, 고통스런 글쓰기의 흔적과도 같다.(중복문 있음...)-57쪽

차를 따서 불에 말리는 과정이 '덖음'이다. 차 맛은 이 '덖음' 과정에서 크게 달라진다. 찻잎에는 독성이 있다. 그래서 차나무 밭에는 벌레가 없고, 놓아먹이는 염소들도 차나무 밭에는 얼씬거리지 않는다. 덖음은 차의 독성을 제거하고, 잎 속의 차 맛을 물에 용해될 수 있는 상태로 끌어내고, 차를 보관 가능하게 건조하는 과정이다. 그날 딴 차는 하루를 넘기면 안 되고, 그날 안으로 덖음질을 마쳐야 한다.-99쪽

날똥이여,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월이여 청춘이여 조국이여, 모든 것은 결국 날똥이 되어 가락국수처럼 비실비실 새어나가는 것인가. 쉰 살 넘어서 누는 날똥은 눈물보다 서럽다.-118쪽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아무리 고층이라 하더라도 아파트는 기복을 포함한 입체가 아니다. 아파트는 평면의 누적일 뿐이다. 천장이고 방바닥이고 부엌 바닥이고 현관이고 간에 그저 동일한 평면을 연장한 민짜일 뿐이다.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공간의 의미를 모두 박탈당한 이 밋밋한 평면 위에 누워서 안동 하회 마을이나 예안면 낮은 산자락 아래의 오래된 살림집들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고 또 서글프다.-134쪽

소백산맥에 군사도로가 뚫린 지 518년 후에 의상은 이 고개를 멀리 바라보는 신라 최전방 격전지 들판에 부석사를 세웠다. 그 500년 동안 전란은 그칠 날이 없었다. 김부식의 수사법에 따르면, 의상의 시대인 7세기에 이 들판에서는 人馬의 피가 내를 이루어 창과 방패가 떠내려갔다. 피가 내를 이루던 살육의 시대에 의상은 가장 웅장한 평화의 체계에 도달했던 것인데, 그의 화엄 체계 속에서 당대의 살육이 어떻게 설명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의상과 원효, 그리고 퇴계와 정도전, 다산에 대한 김훈의 상상력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160쪽

진도 운림산방은 꿈과 현실이 포개져 있었던 그의 말년의 화실이다. 허소치는 50세 되던 1857년에 귀향해서 이 초가집을 짓고, 70세까지 여기서 그림을 그렸다.-187쪽

엄 노인은 사람이 죽어서 산으로 가는 이 마지막 사업을 '입산'이라고 말했다. 그의 '입산'이라는 말 속에서, 산은 삶이 다하는 자리에서 펼쳐지는 평화의 깊이로 느껴졌고, 그래서 위로받아야 할 쪽은 상여 속에 누워서 입산하는 죽은 자가 아니라 빈 상여를 메고 하산해야 하는 산 자들일 것이다.-213쪽

문경새재와 하늘재에는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다. 여기는 자전거의 낙원이고, 높은 고개들을 잇달아 넘어가는 자전거의 지옥이다..(중략)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영남대로는 서울-충주-상주-부산을 연결하는 조선 500년의 간선도로였다. 행정과 교역의 대부분이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이루어졌다.

(가봐야 할 곳 : 전북 임실군 운암면의 옥정호 마을)-218~219쪽

초이는 회장에 당선되었을 때 당선 소감에서 "1학년에서 6학년까지 모두 한데 어울려 잘 놀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초이는 지난 1년 동안 이 공약을 충실히 지켰다. 축구할 때도 1, 2학년을 빼버리지 않고 늘 함께 데리고 놀았다. 초이네 집은 닭을 기른다. 그래서 초이의 글에는 닭을 걱정하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아빠가 기르는 닭이 장난이 아니고, 우리 집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닭이라는 걸 초이는 알고 있다.-266~267쪽

조선 영조 연간의 지리학자 신경준(1712~1781)은 "하나의 근본으로부터 만 갈래로 나누이는 것이 산이요, 만 가지 갈래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물이다"라고 말했다. 신경준의 국토 인식은 조화론적인 것이었다. 다양성의 원리와 통합의 원리, 그 우뚝한 두 기둥 사이의 공간이 삶의 자리이며 역사의 근원지이다. 서울의 북한산과 서울의 한강이 그 두 개의 기둥이다.-27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